어린 시절부터 에드거에게는 노래에 감정을 실을 뿐 아니라 감정에 노래를 싣는 습관이 있었다. 

캐서린은 그 사실을 그가 처음으로 그녀 집을 
방문한 직후에 써보냈던 편지에서 알았다. 

편지에서 에드거는 자신의 감정을 
"하이든 소타나 50번 D장조의 「알레그로 콘 브리오」와 같다."라고 표현했다. - P65

부디 내 걱정은 마. 
사실 떠나올땐 두려웠어..
잠자리에 누울 때면 
내가 왜 그곳에 갈까 자문하기도 해. 
그 답은 아직도모르겠어. 
런던에서 당신이 했던 말을 기억해. 
그 일이 숭고한 일이라던 말말이야. 
나라에 대한 나의 의무라고 했지. 
하지만 그건 아냐 
젊은 시절에 육군에 입대한 적이 없거든. 
그리고 외교엔 아무런 흥미도 없어. 
이 일을 국가가 아니라 
피아노에 대한 의무라고 한다면 
당신이 화낼 거라는 거 알아. 

그래도 캐럴이 올바른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들어 
내가 음악을 통해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의무일 거야. 
내가 결정을 내린 동기는 
분명 캐럴에 대한 신뢰와 
그와 함께 사명을 공유한다는 느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무기를 가져가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는 곳에 
음악을 가져가려는 
그의 바람에 동참한다는 느낌 때문일 거야. - P74

에드거 드레이크
피아노 조율사
에라르 전문
프랭클린뮤즈가 14번지, 런던 - P85

"게다가 내 귀를 멀게 한 건 그 노래가 아니었다고 생각하오. 그처럼 아름다운 것을 들은 뒤로 내 귀는 청각 작용을 멈춰 버렸던 것 같소. 다시는 그런 완벽한 소리를 들을 수 없으리라는 걸 귀는 알았던것이오. 피아노를 조율하는 사람에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일지 모르겠소만." - P100

에라르가 새로 도입한 기술은 
피아노 구조에 대변혁을 일으켰어요. 
나폴레옹이 에라르 피아노로 연주했고, 
에라르는 하이든에게 에라르 피아노를 선물했으며, 
베토벤은 7년 동안 에라르 피아노로 연주했다고 합니다.

제가 드리는 이 정보가 선생님의 부하들에게,
지금 대영제국의 변방에 놓인 
그 훌륭한 악기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폭을 넓히는 데 
유용하게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창조물은 존경과 사랑을 받아 마땅하지요. 
미술작품이 미술관에서 지켜져야 하듯이, 
에라르 피아노는 보살핌을 받아야합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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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이슈는 모두 문화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해석의 문제이다.

첫번째 경우 
셰르파는 상상되거나 만들어진다는 의미에서
‘구성‘된다.

즉 셰르파는 자신의 현실과는 거의 무관한 사히브의 이미지로 구성된다. 

두번째 경우 
셰르파는 이미지에 의해서, 
또한 이미지 뒤의 권력에 의해서 
사실상 사히브의 욕망에 일치하도록
‘만들어지고‘ 형성된다는의미에서 ‘해석‘된다. 
- P77

셰르파들은 명랑 쾌활하고 선량하다는 생각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됐다. 

지난 장에서 보았듯이 셰르파의 명랑함을 어린아이 같다고 간주하는 인종차별적 담론에 가까운 형태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극도의 악조건에서도 명랑함과 선량함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 솔직히 감탄했다. 

이를테면, 높은 고도에서 등반하느라 힘든 하루를 보낸 후또는 잠을 거의 못 자고 새벽에 일어났을 때 자신들은 녹초가 돼 있는데 셰르파들은 기분 좋게 웃고 농담하고 노래 부르는 광경을 보고 사히브들은 놀랐다. - P80

이런 자기희생과 영웅적인 행동들의 기저에는 셰르파의 충성심이라는 좀 더 일반적인 패턴이 있다. 

등반가들은 원정대 전체에 대해 그리고 사히브 개개인에 대해 금세 충성심을 보이는 셰르파의 성향을 일관되게 언급해왔다. 

초기 원정대에 보다 흔했던 사히브의 가부장주의에 걸맞은 효도 비슷한 헌신에서부터, 최근 들어 더 흔해진 동등하고 참된 우정 비슷한 충성심까지 그 방식은 다양했다.  - P82

이런 사실은 다시 뭔가를 말해준다. 

30킬로그램 내외의 짐을 등에지고 
몇 시간씩 산길을 걸을 수 있고 
산을 오를 수 있었던 체력이 ‘강한‘ 셰르파들은 
분명히 그 사회의 대인 출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반드시‘소인‘ 출신인 것도 아니었지만)

이는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그들은 짐을 많이 운반해봤고 
또한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매우 강했거나, 
아니면 매우 강하지는 않았지만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등골이 휘도록 일했다. 
어떤 경우든 돈이나 물질적 복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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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크고 작은 사업에 종사했지만, 
그저 ‘쿨리‘, 
즉 육체노동자로 공사판에서 일한 이들도 있었다. 

처음부터 셰르파들 대다수는 계절적으로 이주했지만 충분히 오래 머물러서 1901년 최초의 인구조사를 실시했을 무렵에는 다르질링 지역에 3,450 명의 셰르파가 있었다.

조사 연구, 탐사, 박물학자 원정, 그리고 초기 등반 원정에서 포터 일은 건설 노동과 비슷했다. 모두 ‘쿨리‘의 일이었고 셰르파는 그 지역에 있는 다른 소수민족과 함께 이일에 나섰다. 

다르질링은 지정학적으로는 인도였지만 
히말라야 산맥 내에 위치했다. 
다르질링 북쪽으로는 칸첸중가(해발 8,598 미터)가 장엄하게 솟아 있었는데 도보로 며칠 거리에 불과했다. 

다르질링은 상거래의 중심지여서 다양한 산악 부족이 많이 모여들었다. 

산악 부족에는 티베트 사람, 시킴 사람, 부탄 사람, 
네팔 동부 중간 구릉 지역의 라이족과 림부족, 그
리고 셰르파족 시람들이 있었다. - P43

사히브
1.인종 : 초기는 백인, 현재 다양
2.국가 : 국가적 이슈가 등반에 큰 영향
3.젠더 : 초기 전부 남자, 1970년대부 여성 등장
4.계급 : 대다수는 교육수준이 높은 부유한 중상류층 - P47

근대성이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이고 무신경하고 시끄럽긴 하지만, 또한 부드럽고 일상적이고 지루하기도 하다. 

이런 무딘 현대 사회에서 자아는 의미를, 강렬함을,
목적을, 정직성을 상실한다. 

그런데 등반은 어렵고 위험하고 도전적이다. 

등반은 자아를 더 예리하고, 더 강하고,
더 솔직하고, 더 생생하게 만든다. 

1960년대에 한 인도 등반가는 
근대성은 우리의 결점을 감출 수 있게 해주지만 
등반은 결점을 모조리 인정하게 만든다고 역설했다. - P52

이런 낭만주의적 에토스의 또 다른 측면은 
자연의 미화, 

즉 자아가그 한계를 알고 초월할 수 있는 극한 조건을 제공하는 자연이라는 상을 가져왔다. 

따라서 영허즈번드는 최초의 에베레스트산 원정을 후원하는 왕립지리학회를 옹호할 때, 

"그 산에 대한 인간 투쟁의 서사시"에 대해, 
그 산의 위력에 대항해 
인간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에 대해, 
그 산의 미지의 힘에 저항해 
인간의 능력을 최대치까지 시험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 - P55

한 차원에서 영혼을 파괴하는 근대성에 대항하는 
교양 있는 중상류계급의 구성원으로 
사히브를 보는 게 적절하다면, 

다른 차원에서는 1970년대까지 사히브가 
대부분 남성들로, 체력과 용맹과 용기, 권위와 리더십과 (한도 내의)공격성, 사회적 하류계급과 약자에 대한 ‘가부장적‘ 책임감 등 서구 남성성의 특정 가치와 이상에 매우 민감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는 근대성의 어떤 차원에는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특정 차원은 일관되게 지지해온 사히브의 면모이다. 

이런 모습에 문화 간, 국가 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논의의 주체이자 객체로서 사히브라는 일반 범주를 계속 사용하기에는 충분히 타당하다.

사히브 문화의 남성적인 측면 대부분은 등반 원정을 군사 원정으로 보는 틀로 구현되었다. 

이는 초기 원정에서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사고방식이다. 

히말라야는 오직 군사 작전을 통해서 정복될 수 있다고 일찌감치 정해졌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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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책을 쌓아두고 살아갈 수 없어
매주 1권씩 일년에 52권의 책을 구입 하기로 했다.
그리고 연말에 베스트 10을 선정하고
나머지 책들은 떠나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이런 마음으로 책을 구매하다보면
한 권 고를 때마다 정성을 다하게 된다.
또 고민들이 행복이 된다.

그런데 배송 받은 새 책이 냉대를 받았는지
험한 상처를 입고 오니 몇 배로 속상하다.

책을 주문할 때는

고르는 기쁨,
기다리는 설레임,
받은 후의 뿌듯함,
책장에 꽂힌 책의 아름다움까지
몇 단 콤보로 이루어진 복잡한 감정을 일으킨다.

읽지 못한 책에게까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
나의 소확행.
이것이 새 책을 고이 모셔오는 이유다.

냉대 받은 내게 온 책 <화석맨>으로
이런 콤보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배송 후기에 ˝이런 내 맘을 아느냐!˝ 툴툴거렸다.

나까지 상처 입은 <화석맨>을 땡처리 할 수 없다!
정성을 다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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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산맥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들이 있다. 

지구상에는8,000미터가 넘는 산이 14개뿐인데, 
그 모든 산이 히말라야에 있으며
네팔에만 그중 8개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 에베레스트로,
8,848미터이다. 

8,000미터가 넘는 고봉을 오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일인지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높은 고도에서는 공기 중에 산소가 거의 없어서 
지극히 사소한 일을 해내는 데도 그 어려움이 엄청나게 커진다. 

1938년에 에릭 십턴은 "에베레스트 위쪽을 오르는 등반가는 꿈속에서 등반하는 아픈 사람과 같다"고 일기에 썼다. - P19

‘셰르파‘란 
에베레스트산과 히말라야의 몇몇 최고봉 
주변에 사는 민족 집단의 구성원으로, 
1910년 이래 줄곧 히말라야 등반 원정대들의 
등반을 지원해온 소수민족이었다. 

그들은 보통 국제산악인들의 조용한 파트너로서 
물품을 운반하고 루트를 개설하고 로프를 고정하고 
요리를 하고 캠프를 설치하는 일을 했으며, 
때로는 등반가의 목숨도 구하고 
때로는 그 와중에 죽기도 했다. - P12

세르파는 일단 네팔 북동쪽에베레스트 대산과 주변의 산과 계곡에 사는 소수민족이다. 

그들의 조상은 16세기에 티베트 동부에서 이주했으며 
민족적으로 티베트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세기 후반에 일부 셰르파 남자들은 크고 작은 사업과 임금 노동의 형태로 영국인들에게서 경제적 기회를 얻고자 (대부분 계절에 따라) 인도의 다르질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셰르파족은 다른 소수 민족들과 함께 다르질링 지역의 도로건설 사업의 ‘쿨리coolie‘ 일(막노동-옮긴이)에, 
주변 산들의 탐사 및 측량 프로젝트에, 
그리고 원정 등반이 별개의 활동이 되자
등반 원정대에 지원했다.

셰르파들은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셰르파족이 특히 산 탐험과 등반 관련 지원 작업에
매우 적합하다는 사실을 등반가들은 1907년에
이미 주목하고 있었다. - P22

1852년 인도의 대삼각측량국은 
히말라야에 있는 별 매력 없어 보이는
봉우리 하나를 삼각측량했다가 
그 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임을 발견했다. 

그들은 1820년대부터 1840년대까지 측량국장이자 
이후 아대륙과 그 너머 모든 측정의 기반이 된 
인도자오선 측정의 책임자였던 
조지 에베레스트 경을 기려, 
그 산을 에베레스트라고 이름 지었다. 

(셰르파와 티베트인들은 그 산을 초모룽마로,
네팔인들은 사가르마타로 부르는데, 
이 이름들은 20세기를 거치면서 공적 담론에서 
점점 더 많이 쓰이게 된다. 
하지만 나는 주로 서구 원정대에 대한 서구의 이야기들을 논할 것이며, 이들 원정대에서는 최근까지 그 산을 늘 에베레스트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영어식 이름을 사용하겠다.) - P38

히말라야에서 영국인의 활동은 늘 경제적, 정치적, 과학적, 동양학자적 그리고 ‘스포츠‘ 관심사들이 독특하게 조합된 형태였는데, 이는 전반적으로 지배자들의 특징이었다(다른 시공간에서는 다른 조합이지만).

히말라야에서 지리학자는 평화롭게 고도를 측정했고, 
박물학자는 식물을 연구했으며, 
잡다한 관찰자들은 민족지적 관찰을 수행했다. 
다들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한편 동양학자는 동양의 종교,
특히 불교를 서양의 영적 개선이라는 이
름으로 연구했으며, 
등반가들은 과학과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산을 탐험하고 등반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영국의 경제적, 정치적 관심은 1904년, 이제는 침략으로 널리 알려진 티베트에 대한 영허즈번드Younghusband의 참담한 ‘외교적 임무‘를 통해 맹렬히 발산됐다. - P41

영국인들은 이 지역을 잠식해 들어오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티베트인들과 외교협정을 맺기를 희망했다.

(...)

‘임무‘는 외교적 성과 면에서는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협약이 체결됐지만 달라이라마가 협약 당사자가 아니라서 정당성이 없었던 것이다. 

침략이 발발하자 달라이라마는 중국으로 피신해 영국인들을 막아달라고 중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는 20세기 중반에 나타났다.
1959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했던 것이다. 

영국의 침략으로 달라이라마가 어쩔 수 없이 지원을 요청하기 전에는 근본적으로 소멸되어 있었던 옛날의 종주권이 빌미가 되었다. 

중국은 현재까지 티베트를 점령하고 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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