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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탕중 푸팅의 나무들이 혼란을 일으킬 만큼 똑같아 보였다. 시간을 들여 자세히 관찰한 후에야 온대 지역 숲과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온대 지역의 숲은 전체적인 풍경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 반면, 열대 우림은무한히 변화한다. 

북반구의 숲은 나무들이 모여 있거나 아니면 같은 종들이 줄지어 서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열대 우림에서는 여러 종이 광대한지역에 흩어져 있어, 같은 종의 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에 미국과 브라질의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팀이 브라질 해안가의 열대 우림 1만 평방 미터를 조사한 일이 있었다. 그 작은 지역에서 이들은 놀랍게도 서로 다른 4백 50종의 나무를 발견했으며, 그중 13종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같은 크기의 온대 지역 숲에서라면 모두 10종의 나무가 발견 되었겠지만. - P137

열대에서는 모든 것이 작다. 나무나 덩굴 그리고 착생 식물을 제외한 열대 우림의 많은 것들이 소형 모형처럼 보인다. 

말레이시아산(産)곰은 겨우 45킬로그램이며, 이 근처에는 없지만 자바산 호랑이는 시베리아산 동족만큼 우람하지는 않다. 탕중푸팅에서 한번 본 일이 있는 수마트라산 코뿔소는 사바나 지대에서 사는 아프리카산 사촌보다 왜소했다. 야생 고무나무에서 고무액을 채취하는 금빛 피부의 멜라유인들조차 날씬한데다키는 1.5미터를 넘을까 말까 하다.

열대 우림은 거대한 악어와 어마어마한 코끼리가 아니라, 수많은 개미,풍뎅이, 진딧물, 수도 없이 많은 곤충과 거미, 다양한 무척추 동물, 그리고틀림없이 제 모습을 위장하고 있을 수도 없이 많은 양서류, 파충류, 박쥐들의 세계이다.

과학자와 동물 학자들은 한때 이 세계에 2백만에서 3백만여 종의 동물이 살고 있다고 추정한 바 있다. 

하지만 아마존 지역의 열대 우림에서 행해진 최근의 연구는 이러한 숫자가 지구상에서 사는 수많은 종을 사실상엄청나게 과소 평가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 P138

오랑우탄을 연구하려면 먼저 이들을 찾아야 했다. 

몸집이 크고 보통은조용한 오랑우탄은 상대적으로 느리고 외로운 동물이다. 이들은 침팬지처럼 큰 무리를 이루어 소란스럽게 몰려다니지도, 고릴라처럼 대가족 단위로 움직이지도 않는다.따라서 오랑우탄 한 마리를 보았다고 해서 근처에 다른 오랑우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30미터 정도의 높이에 있는, 열대 우림이 만들어 내는밀림의 울창한 차양부에서 돌아다니는 오랑우탄은 숨바꼭질의 명수이다.금방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처음에는 붉은 털로 뒤덮인, 몸집이 크고 육중하며 
90~1백4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오랑우탄 수컷이 수관부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감쪽같이모습을 감출 수 있다는 게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빛이 없는 그늘 속에서는 오랑우탄의 성긴 털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음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랑우탄의 검은 피부뿐이다. 오랑우탄의 털은 햇살을 받고 있을 때에만 마치 불에 타는 듯 환한 빛을 낸다.

높은 나무 위 울창한 잎들 사이에 숨은 오랑우탄은 형체 없는 검은 그림자가 된다. - P148

나는 오랑우탄이 비가 오면 머리 위를 무언가로 가리는 ‘우산‘을 자주이용함을 나중에야 알게되었다. 침팬지나 고릴라에게서는 이런 광경을거의 볼 수 없다. 커다란 잎사귀 두 개로 우산을 만들 줄 모르기 때문에,
흠뻑 젖은 채 불쌍한 표정으로 빗속에 웅크리고 있는 침팬지들의 사진을본 기억이 생생하다.

카라는 나에게 ‘도구를 사용한다‘는 오랑우탄의 또 다른 특성을 보여주었다. 다른 동물도 비가 오면 안식처를 찾기는 한다. 하지만 오랑우탄은직접 비를 피할 것을 만든다. 나는 침팬지처럼 흠뻑 젖은 채 아래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지만. - P182

아직 태어나지 않은 프리실라의 새끼는 점차 증가하는 소닉 붐의 반향속에서 성장하게 될 것이었다. 둥근 톱과 전기 톱, 그리고 불도저 같은, 인류가 자연을 지배하고 파괴하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오랑우탄의 순결한 열대 낙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랑우탄과 밀림의 다른 친구들에게 있어, 인류의 과학 발달과 경제지구촌의 승리를 뜻하는 이 소닉 붐은 실로 원자 폭탄 같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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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두말할 나위 없이 최상의실력을 갖춘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이다. 그런데도 단원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기만 하다. 리허설이 아무리 잦아도, 그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이들에게는 전혀 문제가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오케스트라에게 모범 귀감이 되는 존재이다.드레스덴의 음악가들은 아주 친절하고 진솔하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혹시 영리한 오케스트라 홍보 담당자가 쓴 글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이 글을 남긴 사람은 지휘자 조지 셈이다. 
게다가 이는 과도한 칭찬의 남발이 아니라 진솔한 마음의 기록이다. - P74

한데 동독 시절이라니?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대단했다. 

바그너는 이미 1848년에 

"이 궁정카펠레는 독일에서 가장 귀중하고 완벽한 앙상블이다"라고 인정하지 않았던가. 

런던의 빅 파이브 오케스트라들도, 베를린 필하모닉도,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도, 체코 필하모닉도 존재하지 않던그 시절에 드레스덴 카펠레는 이미 주목을 받고 있었다. 

설립된 지는 벌써 300년이나 지났는데, 한참 뒤늦게야 바그너가 이 앙상블에 주목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궁정카펠레가 가장오래되고 전통이 깊은 교향악단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바그너가 드레스덴에서 카펠마이스터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한 플루트 주자가 슈타츠카펠레의 출생증명서라고 할 수 있는 ‘칸토라이 규약서‘를발견해낸 것이다. 

작센 공국의 선제후 모리츠가 1548년 9월 22일에 서명한 문서였다. - P75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가 새로운 수장이 되었다. 그는 1817년부터 드레스덴 궁정 극장을 독일 오페라의 출생지로 거듭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독일 오페라의 선구자인 베버는 그렇다고 <마탄의 사수>, <오베론>, <오이뤄안테> 같은 작품의 작곡에만 매진하지는 않았다. 카펠레를 재정비하고 부지런히 연습도 시키면서 18세기 오케스트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지휘봉을 처음 사용한 사람도 그였고, 역할과 기능에 맞게 오페라극장에서 오케스트라를 재배치하기도 했다. 

베버는 뛰어난 무대 감각의소유자였다. 오페라를 직접 감독하고 무대를 꾸미면서 음악과 드라마의조화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도 그 진가를 인정받는드레스덴 카펠레의 낭만적인 음향이 만들어졌다. - P77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극장은 1945년 2월 13일 밤에서 14일 새벽 사이에 연합군의 폭격 세례를 받아 잿더미가 되었다. 극장이 문을 닫은 지7개월 만의 일이다. 그리고 그해 4월에 바트엘스터와 바트브람바흐의 군인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위로하는 음악회가 열린다. 

쿠르트 슈트리글러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이름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였다. 

작센공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작센 슈타츠카펠레대신에 이렇게 부르기로 한 것이다. 

얼마 뒤에 미군이 드레스덴으로 진군해 들어왔고, 슈타츠카펠레는 새로운 청중을 얻게 된다. - P84

1993년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창단 250주년을 맞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독일 우체국은 특별우표까지 발행했다. 그 가치에 비길 만한 의미심장한 작품인 베토벤 9번 교향곡이 게반트하우스에서 울려 퍼졌다. 시노폴리가 이끄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아바도의 베를린 필하모닉, 첼리비다케가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 등 많은 객원 오케스트라들이축하 공연을 위해 라이프치히를 방문했고,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축사를 맡았다.

1765~68년에 이 로코코와 계몽의 중심지, ‘작은 파리‘에 머물며 법학을 공부하던 괴테도 분명히 이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세 마리 백조‘ 라는 숙박업소의 홀에서 상인들이 조직한큰 음악회 GroBes Concert‘ 가 열렸다. 물론 그때의 앙상블은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P95

1835년, 새로운 카펠마이스터가 등장했다. 

26세의 젊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였다. 

이때부터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빛나는 시대가열리기 시작한다. 멘델스존은 피아노, 오르간, 비올라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빼어난 가수에 절대음감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 큰 야심을 품은대단한 노력가였다. 3개월 동안 아홉 번이나 피아니스트로 직접 무대에오르기까지 했다. 멘델스존은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음악회"를 이끌어낸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단조 미사의 세 악장을 발굴하여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또 1839년에는 처음으로 슈베르트의 C장조 교향곡을소개했다. 그렇다고 멘델스존이 동시대의 음악을 소홀히 여긴 것은 아니었다. 슈만의 교향곡을 3개나 초연했고, 자신의 <스코틀랜드 교향곡>바이올린 협주곡(악장인 페르디난트 다비드가 바이올린 솔로를 맡았다)도 지휘했다.

더욱이 멘델스존은 처음부터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다. 

오케스트라에서쳄발로를 치워버렸고, 
음악감독과 악장으로 분리된 지휘 체계를 하나로통일
그리고 지휘할 때 손에 지휘봉을 들었다. 

이미 베를린에서는카펠마이스터 라이하르트가 지휘봉을 들었고, 드레스덴에서는 베버가1817년부터 지휘봉을 사용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멘델스존이 이끄는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높아져갔고, 시의회는 1840년에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시 오케스트라‘로 선포한다. - P99

세계 경제가 공황에 빠져들면서 음악회 방문자의 수도 대폭 줄어든다.급기야 1930년에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존속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닥쳐온다. 발터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기만을 고대했다. 

그러나 1933년 독일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획일화 정책이 시작되었고, 이는 음악 생활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갑자기 음악회의 행정 업무가 마비 상태에 이르고 만다. 라이프치히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를 비롯하여 작곡가까지 모든 음악가들의 혈통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항의와 반발이 빗발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발터 역시 나치 돌격대의 위협으로 음악회를 취소해야 했다. 리허설을 위해 연주회장으로 갔는데 문이 잠겨 있기도 했다. 끝내 작센 주 내무부 장관의 지시로 그 시즌의 18번째 음악회가 취소되고 만다. 

발터의 유대혈통이 문제였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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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 오케스트라는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거나 춤추도록 무대 앞에 약간 낮게 만들어진 반원형의 공간을 지칭했다.

이 책보다 40년 늦게 출간된 루소의 음악사전 (1754) 에 오면, 그 정의는 달라진다.

이 단어 (오케스트라)는 음악 영역으로 피고들어 지금은 모든 심포니 주자들을 아우르는 말로 쓰인다. 좋은 오케스트라 혹은 나쁜 오케스트라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이는 연주의 좋고 나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루소는 오케스트라를 다양한 악기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앙상블로 이해하고 있다. 이 프랑스식 개념은독일로 전해졌고, 1770년경 뮌헨의 궁정악단은 ‘선제후의 오케스트라‘라고 불렸다. - P18

음악 애호가들은 종종 연주 소리만 듣고도 어떤 오케스트라인지 구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한편 정작 가장 정확한 답변을 줄수 있을지도 모르는 지휘자들은 이 질문을 그냥 무시해버린다. 

"하나의오케스트라가 어떤 특정한 음향을 보유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냥 상상일 뿐이죠.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지휘자에 따라 달라지거든요." 

음향 숭배자로 알려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말이다. 

그리고 영국인 지휘자 네빌 마리너는 오히려 특정한 음향이 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음반을 듣고 어느 것이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의 음향인지 가려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전솔직히 그게 칭찬의 표현인지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 어떤 음악을 연주하든 다 똑같게 들린다는 말이니까요." 

그래도 사람들은 은근슬쩍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세 가지 스타일로 구분하곤 한다. 

첫째는 낭만적이고시적이며 정열적인 ‘독일식‘ 음향이다. 푸르트벵글러나 틸레만으로 대표되는 스타일로 현악기, 그중에서도 특히 저음 현악기의 활의 움직임이크고 굵어 음향이 어두운 것이 특징이다. 

둘째는 토스카니니나 무티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로만식‘ 음향으로 가볍고 화려하며 밝은 관악기의음색이 두드러진다. 

셋째는 관악기 소리가 우세한 끈적끈적하고 인상적
‘러시아식‘ 음향이다. 이러한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지휘자는 므라빈스키나 비슈코프이다. - P32

"오케스트라는 유연해야 한다. 프랑스 음향이든 러시아 음향이든 아니면 빈 음향이든, 그 어떤 것도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될 수 있다." 

주빈 메타가 자서전에 남긴 말이다.  - P33

오케스트라의 사회적 지위가 달라진 것은 앙상블 자체의 변화라기보다는 경제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의 오케스트라는 더 이상 소수 상류층의 노리개가 아니다. 제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한 앙상블이라도 사적인 운영은 가능하지 않다. 어느 누구도 그 어마어마한 비용을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보통 국가, 도(주) 혹은 시가 직접 운영하거나 아니면 후원한다. 경제 위기가 닥쳐오면, 행정당국은 맨 먼저 오케스트라의 존재 여부를 검토하곤 한다. 축소나 병합을 고려하거나 어떤 경우에는 해체를 결정하기도 한다. 음악가들은 예산과 청중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야 한다.  - P39

전문 연주자 학위를 취득해야 나중에 악장이나 수석 연주자가 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학위를 따고 나면, 연주자들은 오케스트라의 공석을찾기 위해 쉴 새 없이 잡지나 신문, 인터넷을 뒤진다. 보통 50~100군데에 지원하는데, 그나마 운이 좋아야 오디션에 응할 기회라도 얻을 수 있다. 

오디션에서 상임지휘자와 수석 연주자, 단원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으면, 대략 1년간의 수습 기간을 따낼 수 있다. 이기간에 수습 단원은 능력, 끈기, 음악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성품까지 인정받아야 정식 단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특히 인간성은 최종 결정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 P47

하지만 오케스트라 음악가들이 받는 보수를 일반적인 교육 수준을 근거로 내세우며 정당하지 않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최상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이지만 항상 권위에 휘둘리고 복종해야만 하는 처지에있다. 과연 다른 직업 분야에도 이런 처지의 엘리트들이 존재할까? 

조그마한 실수에도 바로 응징이 뒤따르고, 조금만 늦게 와도 벌금을 물어야한다(리허설 시간은 정말 비싸다!). 

게다가 오케스트라 음악가들의 근무 환경은 정말 형편없는 수준이다. 

대체 어느 누가 이런 나쁜 조명 아래에서 일근무하고 싶어 하겠는가?(오케스트라 음악가의 23퍼센트 정도가 눈의 통증을 호소한다)

후덥지근하고 질식할 것 같은 좁은 공간에 갇혀 불편한 자세로 기꺼이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노동력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또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할 마음을 가질 엘리트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군다나 노동 시간도 불규칙하다. 남들이 다 노는 주말에도 쉴 수 없고, 가족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는 일도 거의 드물다. 때로는 연주 여행 때문에 장시간 집을 떠나 있어야 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관악기 주자 같은 경우는 식이요법도 철저히 지켜야 하며 시끄러운 소음마저도 견뎌내야 한다. - P51

여성 음악가는 남성 음악가보다 조금이라도 월등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 지금은 많은 오케스트라들이 여성 단원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여성연주자가 핵심적인 지위에 오르려면 남성 음악가보다 훨씬 뛰어나다는사실을 입증해야만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성 단원의 채용 문제를놓고 오케스트라 내부에서 저항과 항변이 들곤 했다. 신체적인 나약함이나 연주 여행에서의 숙박 문제를 이유로 여성 음악가들의 영입은 번번이 거부당했다. 게다가 여성 단원이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오랫동안 공석이 생기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 P54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또 하나 있다. 
불평등한 보수 체계이다. 

오케스트라 내에서 여성과 남성 단원이 받는 보수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그뿐이 아니다. 

보통 오케스트라의 임금 체계는 4등급으로 나뉘는데, 

악장, 첼로 수석, 비올라 수석은 별도의 직무 수당을 포함하여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나머지 수석 연주자들은 그 아래 등급의 보수를 받고, 각 악기의 부수석들과 나머지 단원들이 차례로 그 뒤를 따른다. 

하지만 지휘자가 받는 보수에 비하면 연주자들의 보수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부당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음악가가 기껏 땀 흘려 가꾸어놓은 것을 "그저 조정만 하는 것" 같은데도, 그가 하루 저녁에 버는 액수가 연주자의 한 달 월급의 10배가 되는 경우 적지 않으니 말이다. - P55

게오르크 숄티가 음악가의 거만한 태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지휘자는 오랫동안 신체럼 군림하며 연주자의 운명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어왔다는 점이다. 조지셀이나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처럼, 리허설 시간에 연주자를 내쫓거나심지어 오케스트라에서 완전히 제명해버리는 독재자들도 있다. 

그들에비하면, 발을 굴러대고 고함을 질러대는 토스카니니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번은 그가 끓어오르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지휘봉을 던져 한 음악가의눈을 다치게 한 적이 있었다.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그는 고소를 당했는데, 토리노 법원은 천재를 보통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며 그가 저지른 범죄를 "예술가의 성스러운 광란"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최소한의 벌금형조차 부과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황제 토스카니니‘ 로 군림하고, 그 어떤 법률적인 제재도 그를 함부로 옭아매지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휘자의 위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오늘날의 지휘자는스스로를 오케스트라의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오케스트라에게자신의 견해를 강요하지 않으며 오케스트라가 내뿜는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전문적인 고음악 앙상블이나 현대음악 연주 단체일수록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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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온갖 종류의 작곡가들이 끊임없이 피아니스트들에게 연주할 음악을 공급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온 시공간적인 광활함에도 불구하고 그 창작가들은 대개 다음의 고작 몇 가지 범주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흥분가the Combustibles, 
연금술사the Alchemists, 
리듬주의자the Rhythmitizers, 
선율주의자the Melodists라는 
네 범주이다. - P111

음악가들은 피아노로 자신의 음악적 의도를 선달하기 위해의 자유자재함도 활용하지만, 앞서 묘사한 소리의 전체 모양새 중 어느 부분을 특히 더 활용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리듬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면 타악적인 초성을 강조한다. 나른한 멜로디를 연주할 때는 길고 여유로운 이중모음을 강조한다. 

거센 타건이 일으키는 포효와 부드러운 타건이 자아내는속삭임으로는 감정의 동요를 표현할 수 있다. 

음들은 특별한 결합을 통해상호작용하여 대기에 독특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매혹적으로 울려 퍼진다. 

모차르트 선율의 서정적인 천진난만함, 
오스카 피터슨의 건반 위 질주가보여주는 리듬의 격변, 베토벤의 분노가 실린 폭발적인 굉음, 
빌 에번스 발라드가 피어 올리는 아련한 안개 피아노가 이를 모두 완벽하게 표현해낼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P117

고대의 우주론자는 피아노 소리의 네 가지 구성 요소들
(첫 파열음,노래하는 이중모음, 어른거리는 음의 파장, 강약의 변화)과 엠페도클레스가 기원전 5세기 세상 만물의 근본으로 본 흙, 물, 공기, 불이라는 4원소 사이의 관계에 주목했을 수 있다. 이 4원소는 음악의 세계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도 알맞은 상징물이다. - P119

그의 삶은 그의 예술만큼이나 복잡하고 버거웠다 파란만장했던 외골수 분투, 세속적인 유머, 사무치는 외로움, 치솟는 분노, 그리고 영적인 승리, 베토벤의 음악 또한 파리의 <타블레 드 폴림니Tablettes de Polymnie〉지 1810년리뷰가 말하듯이 

"때로는 독수리처럼 웅장하게 비상했다가 때로는 자갈투성이 좁은 길을 엉금엉금 기어갔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는 영혼을 달콤한 멜랑콜리로 채운 다음 한 덩어리 잔인한 화음들로 그것을 산산이 부순다.
그는 비둘기와 악어를 함께 품고 있는 것만 같다." - P124

리스트는 지적인 탐험가였고 영적인 탐구자였다. 
그의 음악적실험은 뒤에 올 모든 중요한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P144

드뷔시의 음악은 날것 그대로의, 가슴 뛰게 하는, 바그네리안적인 열정을 담는그릇이 절대 아니었다. 

햇살에 일렁이는 작은 폭포수와 소용돌이치는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이뤄진 소리로 그린 추상화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금술이라는 개념이 중요했다. 

드뷔시는 멜로디만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영혼과 삶의 수시로 바뀌는 상태들을 표현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 이상적인 표현 방법을 얻기 위해서 그는 여러 음을 섞어 황홀하고 낭랑한 결합체로 만든 다음 자신의 상상의 바다에 띄웠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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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잘츠부르크 성장기에 피아노는 거의 존재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피아노를 처음으로 만져본 것은 1774-75년 겨울 뮌헨방문 때일 것으로 추측된다. 

1777년에야 그는 아버지에게 요한 안드레아스슈타인이 제작한 피아노를 사달라고 간청한다. 아버지의 답은 "슈타인 씨의피아노포르테가 그렇게 좋다니 반갑지만, 그만큼 비싼 게 틀림없지"였다. 그러나 그해 말에 이르자, 피아노를 들여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모차르트의 어머니는 곧 만하임에서 편지를 썼다. 

"잘츠부르크에서와는 전혀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는데도 모든 사람이 볼프강을 높이 평가해요. 여기는어딜 가나 피아노포르테가 있기 때문이죠. 볼프강은 아주 비범한 솜씨로 이악기를 연주해서 사람들마다 이런 연주는 들어본 일이 없다고 해요." 

모차르트가 이 악기의 능력을 간파하자마자 그 감미롭고 표현력 있는 소리는 모차르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 P53

런던에는 빈보다 더 일찍 대중 공연 문화가 자리 잡았다.

 브루어 스9트리트의 힉퍼드 룸이나 스프링 가든스의 그레이트 룸 (이 두 곳은 1764년돌아다니며 연주를 하던 어린 모차르트에게 무대를 제공해주었다)에서부터도시 이곳저곳에 있는 선술집에 이르기까지, 대중 공연장은 모차르트가 예약제 연주회를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번창했다. 

그때로서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꿈꾸넌 또 한 사람의 유망주에게 이런 연주회상들은 검증 무대였다. 

그의 이름은 무치오 클레멘티 Muzio Clementi로, 아직 학생일 때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생애 말년에 클레멘티는 실제로 ‘피아노포르테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으며 모차르트의 명성을 뛰어넘게 된다. - P59

그러나 실용성은 이 악기의 대성공을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18세기 말엽의 피아노 열풍은 실은 정치사회적 격동과 관련되어 있다. 혁명이 미국과 프랑스를 집어삼켰고 다른 거의 모든 지역에서도 극적인 변혁이 이뤄졌다. 혼란을 통과한 시대는 엄청나게 많은 중산층을 쏟아냈고유례없이 많은 사람들이 양질의 삶에 필요한 도구들을 열망했다 피아노 수요의 폭증은 중산층의 시대가 열렸다는 신호탄이었다. - P68

비록 대중의 사고 방식에 피아노를 여자와 관련짓는 고정관념이 너무 깊긴 했지만 말이다. 

실제로, 런던에서 베토벤의 소나타를 최초로 완주한 찰스 할레[1819-1895]가 1840 년대의 영국 방문 때 신사들에게 악기를 연주했던 사람이 있냐는 질문을 던지자 모두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직업 음악인의 영역에서는 대개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일례로, 엘리자베스 스털링은 1856년에 옥스퍼드대학의 음악작곡 시험을 통과했지만 대학이 학위 수여를 거절했다. - P78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청중론

청중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사회적인 청중이다. 
그들은 연주자가 유명하고자기들이 그 현장에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온다. 최악의 경우다. 그들은 처음부터끝까지 졸아서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둘째, 전문가 청중이다. 
그들은실수를 발견하려고 오로지 한 음 한 음에 귀를 세운다. 음악은 듣지 않는다. 나의장인인 지휘자 토스카니니Toscanini는 실수 하나 했다고 감옥에 갈 일은 없다고말하곤 했다. 

셋째, 최고의 청중이다. 그들은 내 연주를 듣고 싶어서 오고, 나를신뢰하고, 최고의 연주를 듣고 싶어 한다. 때로 나는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지못하지만 그들은 다음에도 내 연주에 올 것이다. 그들은 그날 내가 운이 안좋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청중의 태도를 보면 그들이 어떤 부류인지 알 수 있다. 박수갈채가 전부는아니다. 

연주의 성공은 침묵이 말해준다. 

청중이 음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고지나치게 기침을 하지 않고, 움직이거나 프로그램을 부스럭거리지 않는다면그들은 집중해 있는 것이다. 

연주자의 집중은 청중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은 살짝최면당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음악을 듣는다. 음표 하나하나 빠르게 치는지 느리게치는지를 살피는 게 아니다. 그런 건 부차적이다. 그런 건 뭔가 아는 것처럼 보여야하는 평론가들 몫이다. 예술성은 지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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