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는 두말할 나위 없이 최상의실력을 갖춘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이다. 그런데도 단원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기만 하다. 리허설이 아무리 잦아도, 그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이들에게는 전혀 문제가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오케스트라에게 모범 귀감이 되는 존재이다.드레스덴의 음악가들은 아주 친절하고 진솔하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혹시 영리한 오케스트라 홍보 담당자가 쓴 글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이 글을 남긴 사람은 지휘자 조지 셈이다. 
게다가 이는 과도한 칭찬의 남발이 아니라 진솔한 마음의 기록이다. - P74

한데 동독 시절이라니?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대단했다. 

바그너는 이미 1848년에 

"이 궁정카펠레는 독일에서 가장 귀중하고 완벽한 앙상블이다"라고 인정하지 않았던가. 

런던의 빅 파이브 오케스트라들도, 베를린 필하모닉도,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도, 체코 필하모닉도 존재하지 않던그 시절에 드레스덴 카펠레는 이미 주목을 받고 있었다. 

설립된 지는 벌써 300년이나 지났는데, 한참 뒤늦게야 바그너가 이 앙상블에 주목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궁정카펠레가 가장오래되고 전통이 깊은 교향악단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바그너가 드레스덴에서 카펠마이스터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한 플루트 주자가 슈타츠카펠레의 출생증명서라고 할 수 있는 ‘칸토라이 규약서‘를발견해낸 것이다. 

작센 공국의 선제후 모리츠가 1548년 9월 22일에 서명한 문서였다. - P75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가 새로운 수장이 되었다. 그는 1817년부터 드레스덴 궁정 극장을 독일 오페라의 출생지로 거듭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독일 오페라의 선구자인 베버는 그렇다고 <마탄의 사수>, <오베론>, <오이뤄안테> 같은 작품의 작곡에만 매진하지는 않았다. 카펠레를 재정비하고 부지런히 연습도 시키면서 18세기 오케스트라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지휘봉을 처음 사용한 사람도 그였고, 역할과 기능에 맞게 오페라극장에서 오케스트라를 재배치하기도 했다. 

베버는 뛰어난 무대 감각의소유자였다. 오페라를 직접 감독하고 무대를 꾸미면서 음악과 드라마의조화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도 그 진가를 인정받는드레스덴 카펠레의 낭만적인 음향이 만들어졌다. - P77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극장은 1945년 2월 13일 밤에서 14일 새벽 사이에 연합군의 폭격 세례를 받아 잿더미가 되었다. 극장이 문을 닫은 지7개월 만의 일이다. 그리고 그해 4월에 바트엘스터와 바트브람바흐의 군인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위로하는 음악회가 열린다. 

쿠르트 슈트리글러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이름은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였다. 

작센공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작센 슈타츠카펠레대신에 이렇게 부르기로 한 것이다. 

얼마 뒤에 미군이 드레스덴으로 진군해 들어왔고, 슈타츠카펠레는 새로운 청중을 얻게 된다. - P84

1993년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창단 250주년을 맞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독일 우체국은 특별우표까지 발행했다. 그 가치에 비길 만한 의미심장한 작품인 베토벤 9번 교향곡이 게반트하우스에서 울려 퍼졌다. 시노폴리가 이끄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아바도의 베를린 필하모닉, 첼리비다케가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 등 많은 객원 오케스트라들이축하 공연을 위해 라이프치히를 방문했고,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축사를 맡았다.

1765~68년에 이 로코코와 계몽의 중심지, ‘작은 파리‘에 머물며 법학을 공부하던 괴테도 분명히 이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세 마리 백조‘ 라는 숙박업소의 홀에서 상인들이 조직한큰 음악회 GroBes Concert‘ 가 열렸다. 물론 그때의 앙상블은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P95

1835년, 새로운 카펠마이스터가 등장했다. 

26세의 젊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였다. 

이때부터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빛나는 시대가열리기 시작한다. 멘델스존은 피아노, 오르간, 비올라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빼어난 가수에 절대음감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 큰 야심을 품은대단한 노력가였다. 3개월 동안 아홉 번이나 피아니스트로 직접 무대에오르기까지 했다. 멘델스존은 "역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음악회"를 이끌어낸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단조 미사의 세 악장을 발굴하여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또 1839년에는 처음으로 슈베르트의 C장조 교향곡을소개했다. 그렇다고 멘델스존이 동시대의 음악을 소홀히 여긴 것은 아니었다. 슈만의 교향곡을 3개나 초연했고, 자신의 <스코틀랜드 교향곡>바이올린 협주곡(악장인 페르디난트 다비드가 바이올린 솔로를 맡았다)도 지휘했다.

더욱이 멘델스존은 처음부터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다. 

오케스트라에서쳄발로를 치워버렸고, 
음악감독과 악장으로 분리된 지휘 체계를 하나로통일
그리고 지휘할 때 손에 지휘봉을 들었다. 

이미 베를린에서는카펠마이스터 라이하르트가 지휘봉을 들었고, 드레스덴에서는 베버가1817년부터 지휘봉을 사용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멘델스존이 이끄는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높아져갔고, 시의회는 1840년에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시 오케스트라‘로 선포한다. - P99

세계 경제가 공황에 빠져들면서 음악회 방문자의 수도 대폭 줄어든다.급기야 1930년에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존속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닥쳐온다. 발터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기만을 고대했다. 

그러나 1933년 독일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획일화 정책이 시작되었고, 이는 음악 생활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갑자기 음악회의 행정 업무가 마비 상태에 이르고 만다. 라이프치히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를 비롯하여 작곡가까지 모든 음악가들의 혈통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항의와 반발이 빗발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발터 역시 나치 돌격대의 위협으로 음악회를 취소해야 했다. 리허설을 위해 연주회장으로 갔는데 문이 잠겨 있기도 했다. 끝내 작센 주 내무부 장관의 지시로 그 시즌의 18번째 음악회가 취소되고 만다. 

발터의 유대혈통이 문제였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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