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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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편견에서 그들이 이뤄낸 유대가 어떤 형태로 서로에게 구원이 되었을지 기대를 안고 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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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ㅣ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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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소묘가 뛰어난 젊은 여성 예술가가 있다. 여인이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여인은 그 논평을 곧 잊었는데, 이틀 후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렸다. 그때부터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녀에게 재능은 있으나 깊이가 없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한다. 이제 본인 스스로조차 자신의 작품에는 깊이가 없다고 단정한 여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중독, 절망과 좌절에 빠져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녀의 선택을 두고 초기작부터 그녀의 분열 증세가 나타났다고 평하며 비로소 열정과 깊이에 대한 극찬을 한다. 결국 여인은 작품이 아닌 그녀의 삶으로 깊이를 증명한 셈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많은 부분을 타인의 평가에 의존한다.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의 한마디가 자기의 의견인 양 보태고 더해져 여론이 되어 누군가를 휘둘거나 자신이 휘둘리기도 한다. 여인의 죽음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장인 뮈사르의 유언]
제네바에서 태어난 장자크 뮈사르는 일찍이 굼세공사에게 도제 수업을 받으면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20여년 동안 실력과 이력을 쌓아가며 궁중 보석 세공사로 임명되기까지 자수성가했다. 고위층과의 교분을 위해 학문, 문학, 예술과 라틴어까지 깊은 지식을 습득한 그는 쉰다섯 살에 은퇴해 파리를 떠나 파시 근교에서 저택을 짓고 한가로운 생활을 하던 중 정원을 관리하다가 조개 암석을 발견한다. 광범위하게 땅을 파나가면서 뮈사르는 지구가 조개 성분으로 뒤덮혀 있으며 지구가 조개화 되어 간다는 결론을 내린다. 


62.
모든 생명을 속박하고 모든 것의 종말을 가져오는 힘, 자신이 전능하고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표시로 조개화를 강요하고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최고의 의지는 거대한 원형 조개에서 나온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유연하고 열린 사고보다는 딱딱하게 석화되어 가는 조개처럼 규정과 틀에 갇힌 세상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싶다. 




[문학의 건망증]
쥐스킨트의 문학과 독서가 삶에 미치는 영향의 단상을 써내려간 짧은 에세이.
우리는 망각이라는 선물이 덕분에 읽은 책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소감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는 독서를 하는 과정 안에서 스스로 인지하지 못할 만큼 서서히 변화를 겪는다. 그 순간의 체험이 쌓여 삶을 변화시킬거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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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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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니 그동안 그녀의 작품 세계를 기반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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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소
아이바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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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경시청 수사 1과에서 미해결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다가와 신이치는 과장 미야타 지로의 지시로 2년 전 나카노 역 앞 선술집 강도 살인 사건을 맡게 된다. 술집 '구라타야'에서 검은색 복면과 옷으로 뒤덮어 외모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범인이 휘두르는 회칼에 의해 두 명이 살해된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당시 31세 수의사 아카마 유야와 산업폐기물 처리업자 45세 니시노 마모루. 확인된 내용과 단서라고는 외국인에 의한 강도 살인, 현장 부근의 골목에서 대량의 피가 묻은 복면을 발견했으나 지문 검출은 실패, 도쿄에서 다발했던 외국인 절도단으로 상정하고 수사를 개시했지만 미제 사건으로 남아 다가와 신이치의 손에 떨어졌다. 


형사 이케모토와 사건 현장인 술집 '구라타야'로 다시 가서 사건 당시를 재현한 다가와는 우연찮게 선술집 '스낵엔젤'의 마담 나쓰요를 통해서 범인의 도주 경로와 공범이 있었음을 찾아낸다. 그런데 이 사건 수상하다. 우발적 강도 살해 사건이라고 여겼었는데 의도가 다분한 계획적 살인 사건 냄새가 난다. 그럼에도 2년 전 당시에는 기본적인 탐문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수사 지휘관은 현 경시청 이사관 야지마, 수사 미비를 거론하기에도 성가신 상황이다. 더구나 재수사를 지시한 미야타 과장과 야지마 이사관의 관계는 껄끄럽고, 조직도상 야지마는 다가와의 직속상관이다. 그러나 사건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고 목격자가 나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다가와는 피해자의 신변 조사를 시작한다. 


범인을 기다렸다 태우고 도주한 차량 조회와 피해자 니시마의 본가를 탐문한 결과, 차량 소유주는 롯폰기의 고급 클럽 마담인 아베 사나에로 확인됐고 그녀는 당시 소유했던 차량을 처분했다고 했지만 조사한 바 폐차처리 되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것. 그리고 니시마의 어머니로부터 얻은 수확은 니시마가 죽기 전날 전화로 자주 먹었던 '곱창조림'을 더이상 사먹지 말라는 당부와 장례식장에 찾아온 육가공 업체의 대표 핫타의 명함이다. 육가공 식품 업체의 대표가 산업폐기물 처리업자와 무슨 연관이 있어서 장례식장을 방문한 것일까?  


다가와는 또다른 피해자 아카마의 본가와 그가 독립해서 기거했던 센다이의 주변을 탐색한 결과 아카마가 죽은 후 집에 빈집털이범이 그의 업무용 노트북 두 대를 훔쳐갔고, 그의 연인으로부터 보관하고 있던 아카마의 수첩을 받는다. 또한 니시마와 아카마의 사건과 관련된 현장에 의문의 남성이 배회했던 사실이 밝혀진다. 그리고 아카마가 업무상 자주 드나들었던 축산농장주인 마스부치의 태도도 미심쩍다.



한편 인터넷 미디어 <비즈투데이>기자 쓰루타는 옥스마트를 표적 취재하는 중이다. 옥스마트는 전형적인 박리다매 구조이기 때문에 초대형 쇼핑 센터를 짓고 유명 임대 매장을 유치하여 임대료 그리고 매상에 상응하는 로열티와 마진으로 수익을 거두는 영업 전락을 쓰고 있다. 집중적인 물량 공세로 치킨 게임을 거듭하며 경쟁 업체를 처내는 방식은 가차없다. 이로인한 피해는 점주들이 고스란히 안게 된다. 이에 관련한 기사를 업로드 하고 얼마 후 사무실로 옥스마트가 미야기 현에 대규모 쇼핑센터를 건설하는 데에 있어 미트박스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온다. 쓰루타는 그와 관련한 자료를 받기 위해 제보자를 만나는데 그는 전 미트박스의 공장 생산관리과장 고마쓰 다카시다.  


고마스 다카시의 제보에 의하면 미트박스는 노폐우의 저질육과 탈지대두를 원료로 한 대체육, 내장, 혈액에 각종 식품첨가물과 약품을 섞어 가공식품을 제조하는 회사다. 첨가물은 기본적으로 관련 기관의 기준을 통과한 것을 쓰고 동물 실험을 거쳐 발암이나 독성 시험에 이상은 없었지만, 여러 종류의 첨가물을 대량으로 혼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은 확인되지 않았고, 정부에서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다. 고객들은 자신들이 먹는 음식이 걸레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다가와가 옥스마트와 미트박스를 조사하기 시작한 후 사건이 점점 구체화되어지자 경찰 내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에 옥스마트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다가와는 쓰루타의 기사를 접하게 된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불려나와 살해된 두 사람, 아카마와 니시마의 접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단서들, '역수', '곱창조림', '고급여관', 아카마의 수첩에 적힌 암호같은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비틀거리는 소>는 식품 위조와 대형 유통산업에 의한 폐해를 굵직한 소재로한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이다.  


대형 유통회사인 옥스마트는 '독점 금지법', '부당염가판매 규제',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부동산 투기, 언론과 정치인 매수, 조직폭력배를 동원한 협박 등 규제와 법을 교묘하게 위반하고 온갖 비리를 저지르며 문어발식 자회사(계열사) 늘리기와 저가경쟁으로 수익을 창출한다. 대형 소핑센타와 프렌차이즈들이 대거 입점하여 지역 상권의 소상인들을 몰락시키면서 생계의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는 단순히 상권의 문제만이 아니다.  


대형 쇼핑센타가 건설 예정인 지역의 자방자치단체는 상하수도 및 도로 등 인프라에 선투자한다. 쇼핑센타가 오픈해 막대한 물량으로 저가 경쟁에 돌입하면 주변 상점은 줄줄이 문을 닫으며 초토화된다. 프렌차이즈 중심의 소비 구조, 주차장과 인접 도로로 인한 인간 중심보다는 자동차 중심의 지역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러다가 높은 마진율을 감당 못하는 입점주들이 매장에서 철수하고 결과적으로 기대한 이익이 창출되지 않으면 쇼핑센타는 폐점한다. 폐허가 된 거대한 쇼핑센타는 매각이 어려워 방치 상태가 되고 지역 상권이 사라진 상황에서 쇼핑 난민이 생겨나는 웃지 못할 사회현상이 발생한다. 여기에는 시청자와 구독자를 상품으로 수익을 내는 대형 언론사도 한 몫한다.


당장 우리 동네를 살펴봐도 수많은 상가에서 동네 상점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빵집, 아이스크림, 떡볶이 전문점, 분식집, 치킨 집 등 온통 프렌차이즈 간판으로 도배되어 있다. 소비자에게는 원하는 상품을 선택할 기회가 없다. 기업이 내놓은 맛과 기호에 소비자가 맞춰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지역을 여행할 때 언젠가 한 번은 와본 것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그러한 기분은 해가 바뀔수록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시골이 아니라면 어느 도시나 같은 프렌차이즈, 대형 쇼핑몰이 장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관광객 유치를 의식한 테마 도시를 제외하면 그 지역만의 독특한 향기와 자연스러운 분위기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소설에서 표현하는 미트박스의 음식은 과연 사람이 먹을 수 있기는 할까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수시로 구매하는 햄을 비롯한 육가공 식품의 포장재에 표기된 내용을 살펴보면 정확이 어느 부위를 사용하는지에 대한 표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함유율이 얼마나 되는지도 표기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소설에서 고마쓰는 미트박스에서 제조하는 상품을 식품이 아닌 공업품이라고 단정한다. 말끔하게 다듬어 진공포장 상태로 며칠동안 보관해도 상하지 않는 채소들과 우리가 아무 의심없이 먹고 있는 간편식들은 과연 안전할까? 


소설을 읽다보면 시중 마트에 쏟아져 나오는 간편식들과 반조리식을 납품받아 영업을 하는 프렌차이즈 식당들의 음식들을 더이상 먹을 수없을 것 같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소비를 할 것이다. 예전에 모 패스트푸드 음식이 심각한 논란이 되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꾸준히 영업을 하고 있듯 말이다. 질낮은 가공식품이 마치 트렌드인 양,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라는 말을 외치며. 물론 대형 마트의 폭탄 세일과 값이 싸고 편리한 반조리 식품들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폭탄 세일에 사들인 물품을 온전히 제대로 소화하고 있는지, 음식을 조리하고 맛을 보는 감각적인 기쁨을 놓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동네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이 소비문화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지를 한번 돌아봐야 할 때다.


식빵맛이 최고인 작은 빵집, 로스터 마스터 아저씨가 볶아주는 커피 원두 가게(지나다니면서 한 잔씩 얻어 마시기도 했던), 조금 비싸지만 신선함에서는 따라가지 못할 과일 가게 등 단골 가게들이 몇 해 전부터 순차적으로 문을 닫았고, 현재 남은 단골이라고는 정육점 뿐이다. 종종 동네를 걷다가 새로 생긴 옷가게나 도너츠 가게(여기는 꽈배기가 일품이다), 통닭 집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장사가 될까?'라고 혼자 물음표를 찍는다. 주변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마트와 프렌차이즈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부디 그들이 건승하기를 기원한다.  


소설의 결말은 그렇게 따뜻하지 않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독자는 더 씁쓸해진다.  



"대형 쇼핑몰에 갈 때면 마음이 풍족해진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어. 실상은 대기업에 좋을 대로 돈을 뜯기고, 연출된 환상에 사로잡혀 있던 건데도 말이야. 이 상점가처럼제 분수에 맞게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게 제일 아닐까?"





♤ 도서를 출판사에서 지원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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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바스 ㅣ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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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국립오케스트라 단원인 서른다섯 살의 콘트라바스 연주자다. 그는 누군가를 향해 음악을 들려주면서 콘트라바스의 선율이 들리냐고 묻는다. 글쎄... 덩치만큼이나 묵직한 저음을 자랑하는 바스의 선율을 첼로와 구별해낼 수 있는 청중이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다. 남자는 오케스트라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악기는 바스라고 자신한다. 바스야말로 음악의 골격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남들이야 뭐라하건 본인 생각이다. 
 
7.
콘트라바스가 없는 오케스트라는 상상할 수 없어요. 바스가 반드시 끼어 있어야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죠. 사실 제1바이올린이나 관악기는 없어도 됩니다. 북이나 트럼펫이 없어도 되고요. 이런 건 다 없어도 됩니다. 하지만 바스는 없으면 안됩니다.  
 
이 남자, 활을 긋고 피치카토로 연주하면서 현마다 음을 들려주며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하고 시시때때로 음율을, 소리를 들었냐고 재차 확인한다. 그런데 홀짝홀짝 마신 맥주 탓일까, 이제는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콘트라바스의 주체할 수 없는 부피와 무게, 그에 따른 연주자의 체력 소모, 길고 큰 활로 인한 연주 기법의 불편함, 습기와 온도에 유달리 약한 특성, 이 덩치를 끌고 다니면 여자와 데이트하기도 힘들다는 것까지 구구절절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실 바스와 궁합을 맞는 악기나 성악가를 찾기는 쉽지 않고 정작 해보고 싶은 것은 실내악인데, 실내악에서 바스는 객원으로 가능할 뿐 상시 연주자는 필요하지 않다. 오케스트라 내에서도 바스 연주자는 연습할 필요가 없다, 아니 그들이 열심히 연습하는지조차 관심도 없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스는 맨바닥과도 같은 존재다. 그래도 꼬박꼬박 월급은 나오고 특별한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해고될 일도 없다. 그야말로 철밥통이다. 하지만 존재감없이 월급을 받으며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괴감은 남자의 고뇌를 깊게 한다. 남자는 자기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면 바스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뿐 재능이 있었다면 아마도 바이올린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70.
어쨌든 저는 절대로 잘리지 않습니다. 내키는 대로 연주하건 말건 잘리지 않습니다. 부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그게 바로 위험 요소입니다. 
 
남자는 사라라는 성악가를 짝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존재조차 잘 모른다. 메조소프라노인 사라의 노래에 반주를 해주는 상상만으로도 기쁜데, 실제로 바스는 음 영역대가 맞지 않아 그것도 어렵다. 남자는 결심한다. 자신의 존재를 과감하게 알리기 위해 큰무대에서 "사라!"를 외치며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하고 멋지게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겠다고. 그런데 할 수 있을까? 






 
 


마치 한 편의 1인극을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책을 읽었다. 이 남자의 허세에 헛웃음이 나기도 하고, 툴툴거리며 내뱉는 불평들이 귀엽기까지 했으며, 소심함에 마음이 짠하기도 했다. 다들 알다시피 오케스트라에서 현악기를 대표하는 악기는 바이올린이다. 퍼스트 바이올린 수석이 오케스트라 단원을 대표할 만큼 바이올린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콘트라바스는 모든 공연에 연주되지 않는다. 그러나 화자의 말처럼 바스가 갖는 무게감은 남다르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만 할 수는 없다. 세컨드 바이올린이 멜로디의 선율에 아름다운 화음을 넣어주고 비올라와 연결 고리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크고 작은 고리들이 연결되어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무엇이든 경중은 있을 수 있지만 그에 대한 가치는 다르지 않음을, 그래서 타인의 삶을 경시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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