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미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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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미래주의가 지향하는 산업화와 그에 따른 속도를 사랑했다. 예를들면 피사체보다 피사체가 내는 유무형의 속도를 담아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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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발라는 두 딸의 이름을 '프로펠라'와 '라이트'라고 지을만큼 속도와 현대문명에 환장했고, 발라의 제자 보초니는 움직임과 속도를 조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알렉산터 콜더는 키네틱 아트를 통해 속도를 보여줬다. 그런데 그들이 찬양한 현대문명과 속도는 전쟁으로 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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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자코모 발라의 <목줄을 한 개의 역동성>은 요즘으로 치자면 만화의 한 장면 같고 <속도를 내는 자동차>는 자동차를 알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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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인류에게 경종을 울렸지만, 현대 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은 나라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때 광고에서 나왔던 '빠름 빠름 빠름'이 유행어처럼 사용되었고, 지금까지도 현대사회는 속도전이다. 내일이 어떠할지 꿈꾸는 공간이 오늘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꿈을 만들어가는 이는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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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간호 보조로 일하고 있는 마슬로바를 찾아간 네흘류도프는 그녀의 표정과 태도에서 어딘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마슬로바는 네흘류도프가 건넨 빠노보의 사진을 보면서 행복했던 추억에 잠겼다가 그의 배신에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덩달아 고달프고 피폐했던 매춘부 생활까지 떠올리면서 네흘류도프를 향한 분노가 치솟았고, 그동안 삶의 회한에 흐느낀다. 오래 전 약속을 어겼던 그를 이번에는 믿어도 될까? 다시 농락당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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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흘류도프는 네 가지 용무때문에 뻬쩨르부르그로 향한다. 고등 법원에 마슬로바의 상소장을 제출하고, 청원 위원회에 페도시야 비류꼬바의 사건을 소청하며, 해당 기관에 슈스또바의 석방을 요청하는 동시에 요새 감옥에 갇힌 아들을 어머니가 면회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 그리고 종교적인 이유로 구속되어 가족들과 헤어져 까쁘까스로 추방되게 생긴 어느 종파 교도들에 대한 문제가  그의 용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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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흘류도프는 약자들을 위해 나섰지만 사사건건 모순된 현실에 고통스럽다. 생각이 많아지면 사는 게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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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의 섬 ㅣ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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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과속으로 객기를 부리다가 100여미터 고가도로 아래로 곤두박질 친다. 폐기물 더미에 고립된 메이틀랜드.
 


이 소설의 특이점은 주인공이 고립되어 있지만 그는 손에 잡힐듯 한 타인의 존재를 늘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통섬과 고속도로의 거리는 불과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그 거리가 수직이라는게 문제일 뿐. 심지어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는 남자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남자는 차를 멈춰 세울 수 없고, 그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를 부랑자로 단정하며 자진해서 교통섬에 머문다고 여긴다.  










미치도록 탈출하고 싶은 그의 앞에 교통섬을 주거지로 삼으며 살고 있는 두 남녀가 나타난다. 두 사람은 거동이 불편한 메이틀랜드보다 우위를 점한 듯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도권은 메이틀랜드에게 넘어간다. 서커스단에서 사고를 당해 뇌를 다쳐 지능이 낮아진 프록터를 폭력적으로 학대하고, 아픈 가정사를 안고 있는 제인의 상처를 이용하는 메이틀랜드의 광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도가 심해진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문명인이 극단의 상황에 처하면서 가식없이 드러나는 인간의 추악함과 잔인함은 누구에게라도 나타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프록터와 제인은 교통섬과 문명으로 대변하는 도시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프록터는 교통섬을 떠나는 것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 메이틀랜드 역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교통섬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등장인물의 행보는 무엇을 의미할까? 메이틀랜드는 인간 관계를 통해서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부정적이고 악한 성향이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고립되어 온전히 혼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 메이틀랜드의 마지막 결정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경제 성장과 기계 발달, 부의 축적이 성공의 잣대가 된 현대 사회에서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각박한 현대 사회와 그로인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는 타인과의 관계와 개인의 외로움 등을 지적한다. 소설에서 최하층 빈민과 소외계층을 상징하는 프록터와 제인, 그리고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리는 메이틀랜드. 그들은 다른 사람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들의 내적 결핍은 정도의 차이일 뿐 마찬가지임을 나타낸다.  
 
 




메이틀랜드가 고립된 교통섬은 고가도로 아래에 위치해 기계 발달로 문명화된 도시의 잔재들이 폐기물이 되어 정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1974년에 쓰여진 이 소설은 콘크리트 더미와 철 폐기물에 의한 환경 파괴를 일갈하고 있다. 그러나 밸러드의 쓴소리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구는 쓰레기에 잠식될 처지에 놓여있다.


물질만능주의, 부의 축적, 가속화되는 기계화, 인간의 고립과 상실감, 지구 환경 파괴.



50여년간의 시대 간격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게서 괴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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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보헤미안의 삶으로 대표되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화풍의 '파리파' 중 한 사람인 모딜리아니. 
 
내가 아는 화가 중 안타깝기로 손에 꼽는 화가다. 삶의 과정이 어떠했든 간에 그의 마지막, 아니 그의 아내 잔을 떠올릴 때마다 늘 울컥하게 된다. 


빈 동공이 삶에 대한 무언의 궁정에 대한 표현이라고 했는데, 정작 그의 삶은 긍정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일까? 



잔을 만나 인생의 행복감을 느낀 것은 7년, 잔은 고작 스물두 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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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에서 이기지 못하면 마슬로바를 따라 시베리아까지 따라 가기로 한 네흘류도프는 돈이 필요한 처지가 되자 토지 문제를 이전처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에 손해를 보더라도 그 문제를 개선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는 직접 토지를 경작하는 형태로 송금을 받는 대신 헐값으로 농민들에게 임대하여 지주로부터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한다. 자신의 영지를 둘러보기 위해 꾸즈민스꼬예 마을에 도착해 장부를 검토한 네흘류도프는 농민들이 심각하게 착취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이 사실을 예전에도 익히 알고 있었으나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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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마슬로바와 처음 만났던 빠노보 마을에 도착한 네흘류도프는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마주한다. 가난에 찌든 그들의 처참한 삶은 네흘류도프가 상상도 못할 만큼 참혹했다. 돈만 제 때 들어오면 영지가 어떻게 관리되는지 관심없는 지주와 농민들을 지주보다 더 잔인하게 약탈하는 관리인은 흡사 강도와 다르지 않다. 네흘류도프는 두 마을을 둘러보면서 농민이 가난하게 사는 근본적인 원인은 토지를 빼앗기는 데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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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흘류도프의 말에 간계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농민들은 귀족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동안 얼마나 혹사를 당하고 속아왔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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