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관 1 - 2부 ㅣ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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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본격적인 술라가 등판했다. 처세술이 능한 그의 행보에 작가의 어떤 상상력이 덧붙여졌을지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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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생리학 ㅣ 인간 생리학
앙리 모니에 지음, 김지현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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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이 “자기 자신을 관찰할 줄 아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속물”이라는 말과 함께 생리학의 거장이라 지칭했다는 앙리 모니에가 쓴 부르주아에 대한 이야기다.







글은 부르주아를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부르주아는 처한 입장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지만, 보다 고유한 의미에서 정의내리자면 3000~4000리브르 가량의 연금이나 정기 수입이 있고 빚이 없으며 넉넉하게 먹고살면서 원만하게 제 인생의 강을 원만하게 따라 내려가는 남자다(여성은 부르주아즈라는 명칭으로 저자는 따로 서술한다). 이 대목에서 잠깐, 몇 년 전에 모 언론에서 중산층의 기준에 대해 나열한 기사가 생각났다. 자산 규모, 직업, 수입, 보유 차량 등이 순차적으로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산층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3000~4000리브르의 가치를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넉넉하게'라는 대목에서 쓴웃음이 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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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넉넉'하다보니 부르주아는 모든 신문을 읽어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국가가 어느 체제이건 관계없이 자신들의 행복의 요건을 잘 찾아낸다. 그들은 폭동과 소요를 싫어하고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시국이 닥치면 방관자 역할을 자처한다. 그리고 본인이 살만하니 일요일까지 하등 쓸데없는 일로 새벽부터 일어나 하인들을 괴롭힌다.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 부르주아들은 자식들에게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며 기계적인 인간으로 양육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자식들이 흥미로운 인생을 살기에는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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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모니에는 부르주아의 허영과 허위, 자만심, 그리고 무지에 가까운 언어적.예술적 소양을 꼬집으며 그들을 우습게 여긴다. 초상화에 열광하는 부르주아의 모습을 들어 그들의 허영과 자기과시를 꼬집고, 더불어 예술을 사고파는 상품 정도로 치부하며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직업이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가정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갖고 폄하하면서 예술가들의 후원가를 자처하는 부르주아의 무례함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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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준비하는 부르주아들은 노년의 평온한 생활을 위해 귀농을 선택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귀농은 도시 생활의 연장이다. 시골의 간소함과 거리가 멀고 마치 도시를 하나 건설할 듯한 채비를 갖추고 내려와 불편함 없는 삶을 유지하고자 한다. 노동을 해 본 경험이 없으니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고, 시골에서조차 감투에 연연하며 허영심을 놓지 못하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시골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정리를 하는데, 이것조차도 남들에게 줏대 없고 경솔한 사람을 비춰질 것을 우려해 적당한 기간까지 버티다가 헐값에 집을 팔아치운다. 욕심과 허영심으로 가득 찬 부르주아에게 전원생활의 따스함은 존재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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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프랑의 분담금 혹은 재산세를 내면 누구든 배심원단이 될 수 있다. 부르주아로 채워진 배심원단에 대해 저자는 단순 절도 등 경범죄를 저지를 자들은 5년 감옥형을 선고하는 반면, 살인 등 정작 엄중하게 다뤄야할 범죄에 대해서는 정상 참작을 들어 관용을 베푸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역설과 풍자를 곁들여 비판한다. 즉 단순 경범죄인들을 겁주는 즐거움을, 흉악 범죄자들에게는 박애주의적 사상을 내세워 자기들의 허위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함과 덧붙여 중형을 선고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풍자를 넘어 비아냥으로 들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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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나타나는 두 부류의 부르주아를 읽고 얼마나 웃었던지. 제 흥에 겨워 끊임없이 장단을 맞추며 아는 체를 하는 부류와 세상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불평 불만을 쏟아내는 다른 한 부류. 그런데 이러한 관객은 부르주아가 아니더라도 아주 많을 뿐만 아니라 요즘에도 극장이나 공연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나도 수없이 경험한 바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우스운 것은 브루주아들이 공짜표를 얻기 위하 배우들과 친분을 트고자 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들을 험담하는 부르주아의 이중성이다. 그나마 극장은 낫다. 부르주아 군인은 군대 부역조차 친분을 쌓는 사교장으로 여기고, 소소한 저녁 초대에도 과시를 위한 허례허식을 일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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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부르주아를 지칭하는 대상은 본래 이런 모습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 중에서 실질적 활동의 주체로 산업을 비롯한 문화, 예술 등을 아우르는 지식인이자 개혁과 혁명에 앞장선 진보의 주체였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을 지나 가장 유력한 사회적 계급으로 자리하면서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층이 되었다. 따라서 이 책에 등장하는 부르주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부르주아'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부르주아'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혁명과 진보와는 다르게 안주하며 제 밥그릇 챙기기 바쁘고, 연대와 조화와 공존보다는 탐욕과 허위와 과시를 중요하게 여긴다. 앙리 모니에는 이러한 실태를 빈정거림에 가까운 풍자로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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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왜곡된 부르주아의 형태가 더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복권과 비트코인처럼 한탕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성실하게 노동하는 가치는 폄하되고, 인류가 지켜야하는 가치들은 돈 앞에서 점점 사라져가며, 내면의 성찰보다는 자기 과시를 통한 타인의 인정에서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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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우려되는 것은 앙리 모니에가 교육 부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주입하는 가치관이다. 시키는 대로, 주입시킨 대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앙리 모니에가 비판했던 그 시대보다 더 암울해질지도 모르겠다(사실 지금도 그다지 밝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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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저자의 재치와 역설에 키득거렸지만 웃고 말 일이 아니다.

재밌고 따끔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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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고독의 순간들 ㅣ 더 갤러리 101 2
이진숙 지음 / 돌베개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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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자주 방문하다보면 혼자 관람하기도 하고 시간이 맞아 도슨트 해설을 들으며 감상할 때도 있다. 각각 나름의 장단점이 있는데 혼자 관람하면 고즈넉하게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해설을 들으면서 감상하는 장점은 무엇보다 작가와 작가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까지 들을 수 있어 작품 혹은 문화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은 라파엘전파부터 추상미술까지 작품과 작가, 사조 등 서른네 개의 꼭지로 나누어 도슨트가 해설하듯 구체적이고 쉽게 이야기를 풀어놨다. 장프랑수아 밀레, 귀스타브 쿠르베, 클로드 모네, 일리야 레핀,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수잔 발라동,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에드바르 뭉크,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케테 콜비츠, 피트 몬드리안 등을 비롯해 지면에 언급되는 화가들의 면면을 보면 이 책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고독, 쾌락, 고통, 불안, 사랑, 슬픔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감정들에 대해 썼다.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를 거쳐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인 현재에 이르러 예술 시장도 예외없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과시하는 돈의 힘에 좌우된다. 모더니즘의 시작을 통해 어느 분야든 새로움이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전통 혹은 관습이라는 틀을 깨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벗어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과 여성 혹은 여성 화가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예술가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인종, 연령, 성별 등 각각의 카테고리로 묶어 동일시해 개개인의 개별성을 무시하고 고정관념의 틀에 갇힌 우리의 모습을 이 책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문제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고 답을 찾고자 노력해야하는 자세는 늘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알폰스 무하 편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상업 예술가로 유명해진 그가 민족주의자이자 코스모폴리타니스트의 길을 걷게 된 그의 인생을 접하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이 떠올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하와 반대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 작품과 인생을 별개로 놓아야 한다는 주장은 적절할까라는 생각도 다시 해보는 시간이었다. 
 



저자의 입체주의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장은 입체주의에서 활성화하는 것은 '보는 사람'이라는 것인데, 피사체가 아닌 보는 (그리는)사람이 가만히 앉아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좀 어렵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납득되는 말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자신이 바라본 시각의 움직임을 그린 것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시점을 복수화하는 것이 입체주의의 본령이라는 것.  
 



이 책의 표지는 말레비치의 <나쁜 예감>이다. 저자는 책의 표지로 왜 이 작품을 선택했을까? <나쁜 예감>에 대한 저자의 작품 설명을 읽어보면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획일적인 기준을 내세워 생각과 감정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개인의 행복과 선택은 사라진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그림처럼 개인의 얼굴이 지워져 익명의 존재로 남게 되는 사회에 대한 우려는 아닐까? 
 
  




모딜리아니, 수잔 발라동은 평소에도 좋아하는 화가였고, 이 책을 통해 좀더 깊게 와닿았던 이는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남아있을 화가는 케테 콜비츠다. 그녀의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을 워낙 좋아했지만, 저자의 해설을 덧붙인 여운은 정말 오래 남을 것이다. 독일인 화가로서, 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로서 반전주의자였던 그녀. 더하여 김향안 님이 쓴 문구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사람의 70대는 인간으로서 완성되어가는 시간이다. 여기에는 남녀도 빈부도 없다. 하나의 인간이 존재하다 소멸되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ㅡ




 
사실 그림은 여타 다른 문헌에서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몇몇 화가들의 작품을 제외하면 크게 차별성이 없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저자의 깊은 사색이다. 화가와 그림을 대하는 저자의 사유는 단순한 미술을 넘어 우리네 삶의 전반에 걸쳐 있다. 그래서 나는 저자의 '들어가는 글'이 무척 좋았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 예술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인간적인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해준다는 것, 고전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이라는 것, 그래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앞으로 미술관에서 그림을 관람하게 되면 저자가 쓴 문장들과 몬드리안의 바람이 새록새록 생각날 것 같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조화를 향한 발걸음은 계속 될 것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안에서도 우리의 삶은 가치가 있음을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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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피트 몬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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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들에게 몬드리안 그림을 보여주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이 "저도 이렇게 그릴 수 있어요." 다. 아마 이 말은 내가 아는 초등생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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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부터 1912년에 걸쳐 완성된 <나무> 시리즈는 몬드리안의 예술적 진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사물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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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예술 이념을 신조형주의라고 칭한 몬드리안에게 색채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빨강은 인간의 육체는, 노랑은 이성을, 파랑은 영혼을 상징했다. 인간의 조화와 통일을 갈구했던 몬드리안이 지향하는 것은 이분법적 대립이 균형을 이루는 조화였다.



1929년 이후 대공황으로 세계가 지옥이 됐다. 몬드리안은 미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서 미국추상화협회를 만들고, 잭슨 폴락을 발탁하는 등 미국미술에 공헌했다.



몬드리안의 바람은 아직도 요원하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한 조화를 향한 발걸음은 계속 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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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하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3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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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농노제는 1861년에 폐지됐으나 농토를 전혀 혹은 조금 밖에 소유하지 못한 대부분의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얽매인 상태에 처해 있어 현실적으로 노예나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농노제 시절보다 더 살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톨스토이는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이며 잔혹한 토지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동시에 토지를 잃고 수입도 절반으로 줄어듦에따라 농민들에게 토지를 양도하고 농장 경영을 포기하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결심이 확고한 것인지,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지, 과시용은 아닌지 고민하는 네흘류도프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이어서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중보다 싼 가격에 토지를 임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 못하는 농민들의 모습과 꾸즈민스꼬예보다 더 열악한 빠노보의 참상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정도의 차이일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리고 과도한 노동을 착취 당하면서도 여전히 굶주리는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인구 증가에 의한 도시집중화와 그로인해 싼값에 팔리는 노동력을 꼬집으며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의 삶과 가난한 민중의 삶은 장소만 다를 뿐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조물주가 하는 것이고 자신은 양심에 따라 조물주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평온에 이르는 길이라는 네흘류도프의 생각은 톨스토이를 그대로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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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독자를 내내 불편하게 하는 부분 중 하나는 청탁이다. 네흘류도프는 청탁을 넣어 마슬로바를 병원 간호 보조로 옮겨주고, 마슬로바로부터 부탁받은 죄수들의 요구를 인맥을 통해 해결하며, 유배 호송 도중 원칙에 반하는 면회를 한다. 일곱 달 동안이나 독방에 갇힌 여자의 무죄를 입증해도 변화가 없다가 청탁 한 번에 석방되는 행태는 당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억압과 착취에 고통받는 민중을 안타까워하며 부와 권력을 독식하는 기득권층의 부패와 부조리를 지적하지만 정작 네흘류도프 본인도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이용하여 특정 대상을 차별하고 있다. 물론 그가 자신의 위치를 선의에 입각해 사용했지만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을 목적으로 한다면 모든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딜레마가 여지없이 따라오는 부분이고, 이는 네흘류도프, 즉 톨스토이 자신의 모순된 점을 반추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여하튼 나는 톨스토이 본인이 귀족으로서 갖는 한계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의 이모부와 매형을 비롯한 몇몇 인물을 들어 겉으로는 위엄이 넘치지만 뒤에서는 아첨을 일삼고, 유사시에는 어느 편에라도 설 수 있는 처세술과 신념이라고는 자신의 부와 명예를 지키는 것 뿐인 사회 기득권층을 꼬집는다. 사회와 종교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만 자신의 신분이 누리는 혜택을 포기할 수 없어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셀레닌의 방관자적 입장, 비행과 착취를 상위 계층과 비교하면서 자신은 상대적으로 약소하다며 정당성을 주장하는 변호사, 탄원서를 넣기도 전에 네흘류도프의 신분을 감안해 죄수의 유배를 취소시키겠다는 또뽀로프 등을 통해 만연해 있는 비리와 부정부패, 무능함과 부당함,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넘어서지 못하는 당시 지성인들을 묘사하고 있다. 
 


네흘류도프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끊임없이 제기되는 모순에 혼란스럽다. 박해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박해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야 하고, 법은 도둑질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공장주는 노동자, 지주는 농민을 수탈하며 합법적으로 도둑질을 일삼는다. 정작 몸을 쓰고 일을 하는 사람들은 참혹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그들을 착복할 뿐 일을 하지 않는 부르주아와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그칠 줄을 모른다. 더욱 분개할만한 사실은 민중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금을 이용해 민중을 억압한다는 것. 약탈, 살인, 쾌락 등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과 활개를 치고 다니며 죄수들을 재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똑같다. 
 


네흘류도프는 매형 이그나찌 니끼포로비치와의 대화를 통해 현재 법원과 재판은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고 지주 계급에 유리한 현행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행정적 무기일 뿐이며 다만 현재 상태의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도보 이송 도중 일사병으로 사망한 죄수들은, 무더위에 기차역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일상적인 명령서에 서명한 소장, 죄수들의 몸상태를 검진한 교도소 의사,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명령을 이행한 호송 장교 등 직접적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들에 의해 모두 살해된 것이라고 일갈하면서, 인간에게 계급이 정해져 있으며 존중받지 않아도 괜찮은 인간이 있다는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조직 안에서 직무와 의무가 인간애를 앞섰으며 사랑과 동정을 상실한 인간은 더없이 두려운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집단 혹은 소수 지배 계층의 이익을 위해 개인(소외 계층)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저녁 만찬의 장면과 마찬가지로 호송 열차에서, 물건 취급을 받으며 호송되는 죄수와 삼등칸을 이용하는 소시민과 여행을 목적으로 일등칸을 이용하는 귀족의 모습은 또다시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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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중반 이후에는 좀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정치범 시몬손은 대학을 중퇴하고 인민주의자가 되어 교사 신분으로 농촌에 뛰어들어 학생들과 농민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전파했고, 허위라고 판단한 것은 부정했다. 항상 스스로의 이성을 믿고 이성에 따라 결정했으며, 한번 결정한 일은 실행에 옮겼다. 상류 계급 출신으로 민중 운동에 투신하다가 동료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유배형에 처해진 마리야 빠블로브나는 봉사에 헌신하는 인물로서 마슬로바가 동경하는 대상이다. 유배에 동행하는 네흘류도프를 여행자라고 빈정거리는 정치범 노보드보로프, 농민 계명 운동에 투신해 소비조합과 생산조합을 만들었다가 체포당한 나바또프, 귀족의 청탁에 의해 편의와 혜택을 보는 마슬로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곤드라찌예프 등 노동의 현장에서 혁명을 꿈꾸는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다. 네흘류도프는 이들과 대화하고 관찰하면서 자신이 추구해야할 방향을 짚어간다.  
 


네흘류도프가 호송 대열에 합류한 것은 마슬로바와 결혼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마슬로바가 그의 청혼을 계속 거부하는 와중에 연적이 등장하다. 평소 마리야와 시몬손은 종족 번식이나 성욕은 저급한 것이고 생명체에 대한 봉사가 인간의 고급 기능이라고 여겼다. 마슬로바는, 네흘류도프가 자신에게 청혼한 것은 관용과 지난날의 과오에 의한 의무감이고 시몬손은 자신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두 남자 모두 사랑보다는 자신의 신념때문에 그녀와 결혼하려는 것이 전해진다. 시몬손은 네흘류도프에게 마슬로바의 처지를 개선시키고 싶어서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를 구원하는 것이 의무이므로 그녀가 행복하지는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두 남자는 왜 자신의 신념을 마슬로바를 통해 이루려는가.  



ㅡ



 
네흘류도프는 석 달 동안 교도소를 드나들고 유배당한 죄수 호송에 동행함으로써 죄수들이 처한 상황을 직시한다. 자연스럽고 도덕적인 인간 생활의 모든 조건으로부터 소외 단절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그들은 비위생적인 환경에 의해 질병과 무자비한 구타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무고하게 혹은 경범죄를 저지르고 흉악범들과 뒤섞여 오히려 더 부정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정부와 교도관으로부터 자신들은 온갖 유형의 잔인한 폭행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세뇌되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석방되면 사회에 더욱 악영향을 끼친다. 또한 보통 사람들까지 폭행당하고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죄수들의 처우를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보통의 사람들까지 정부의 비정한 방침에 세뇌당하는 꼴이다. 네흘류도프는 교도소가 마치 정부가 민중을 타락과 죄악으로 몰아넣기 위해 고안해 낸 시설과 제도같다고 생각한다. 즉 제도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만한 인물들을 무조건 격리.제거시키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이 부조리하고 모순덩어리인 세상을 뿌리뽑기 위해 인간이 해야할 것은 '용서'라는 해답을 찾아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죄짓지 않은 사람이 없고 따라서 남에게 벌을 주거나 남을 교화할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 무엇보다 사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사람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합법적인 죄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가 찾아낸 해답의 근거는 복음서, 신앙에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고통받는 죄수들을 향해 귀는 닫은 채로 복음서의 말씀만 읊어대는 영국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네흘류도프는 게으르고 허영에 찬 귀족들이 아닌 신성한 노동의 힘으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세계야말로 진정한 상류사회라고 생각하면서 조합을 만드는 조건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준다. 톨스토이의 생각대로 농사를 짓는 이들이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땅이 재물의 가치를 갖는 순간부터 땅은 더이상 땅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는 신앙을 기반으로 애초에 땅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음을 주장하지만, 이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나는 네흘류도프의 생각이 철학적이고 이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쉔보트나 변호사의 말에 일정부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네흘류도프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선택(시베리아행 결심, 토지와 재산 포기)이 과연 잘한 일인지 의심하고, 그러한 의심에 대한 자책을 반복한다. 이는 톨스토이가 과거 확신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것이고, 사회 상위 계층의 이해와 참여, 그리고 제도적 확립의 어려움에서 오는 고민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적어도 이 소설에서 톨스토이의 공정성은 계급에 국한되어 있다는 느낌이 크다. 
네흘류도프가 정치범들 중에서 가장 호감을 느끼는 여자 죄수가 에밀리야 란쩨바인 이유는 최악의 조건에서 여성다운 살림 능력과 매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몬손은 사상의 활력에서 행동이 나오고 그것으로 행동을 결정하는 남성적인 성격의 인간이고 노보드보로프는 감정에서 비롯된 목표를 실현하거나 감정이 부추긴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상의 활력을 이용하는 여성적 성격의 소유자라고 썼다. 그리고 마슬로바와의 결혼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가 의무이자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주도권(남성, 귀족, 지주)을 쥐고 있는 권력자의 이기적인 횡포로 느껴진다.  
 


시대성의 한계를 감안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지만, 민중의 해방을 주장했던 톨스토이가 현대사회를 지켜봤다면, 그는 잔존하는 민족, 인종, 성 차별에 대해서도 인지했을지 궁금해진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가 결혼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마슬로바와 시몬손의 결혼도 단정할 수 없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 두 사람 모두 호된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깨우침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서른 남짓의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어떤 선택을 할지 독자는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그야말로 두 주인공에게도, 독자에게도 열린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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