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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생리학 ㅣ 인간 생리학
앙리 모니에 지음, 김지현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6월
평점 :
발터 벤야민이 “자기 자신을 관찰할 줄 아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속물”이라는 말과 함께 생리학의 거장이라 지칭했다는 앙리 모니에가 쓴 부르주아에 대한 이야기다.

글은 부르주아를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부르주아는 처한 입장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지만, 보다 고유한 의미에서 정의내리자면 3000~4000리브르 가량의 연금이나 정기 수입이 있고 빚이 없으며 넉넉하게 먹고살면서 원만하게 제 인생의 강을 원만하게 따라 내려가는 남자다(여성은 부르주아즈라는 명칭으로 저자는 따로 서술한다). 이 대목에서 잠깐, 몇 년 전에 모 언론에서 중산층의 기준에 대해 나열한 기사가 생각났다. 자산 규모, 직업, 수입, 보유 차량 등이 순차적으로 적혀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산층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3000~4000리브르의 가치를 현재 기준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넉넉하게'라는 대목에서 쓴웃음이 나고 만다.
사는 것이 '넉넉'하다보니 부르주아는 모든 신문을 읽어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국가가 어느 체제이건 관계없이 자신들의 행복의 요건을 잘 찾아낸다. 그들은 폭동과 소요를 싫어하고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시국이 닥치면 방관자 역할을 자처한다. 그리고 본인이 살만하니 일요일까지 하등 쓸데없는 일로 새벽부터 일어나 하인들을 괴롭힌다.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 부르주아들은 자식들에게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며 기계적인 인간으로 양육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자식들이 흥미로운 인생을 살기에는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
앙리 모니에는 부르주아의 허영과 허위, 자만심, 그리고 무지에 가까운 언어적.예술적 소양을 꼬집으며 그들을 우습게 여긴다. 초상화에 열광하는 부르주아의 모습을 들어 그들의 허영과 자기과시를 꼬집고, 더불어 예술을 사고파는 상품 정도로 치부하며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를 직업이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가정 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갖고 폄하하면서 예술가들의 후원가를 자처하는 부르주아의 무례함을 지적한다.
은퇴를 준비하는 부르주아들은 노년의 평온한 생활을 위해 귀농을 선택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귀농은 도시 생활의 연장이다. 시골의 간소함과 거리가 멀고 마치 도시를 하나 건설할 듯한 채비를 갖추고 내려와 불편함 없는 삶을 유지하고자 한다. 노동을 해 본 경험이 없으니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고, 시골에서조차 감투에 연연하며 허영심을 놓지 못하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시골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정리를 하는데, 이것조차도 남들에게 줏대 없고 경솔한 사람을 비춰질 것을 우려해 적당한 기간까지 버티다가 헐값에 집을 팔아치운다. 욕심과 허영심으로 가득 찬 부르주아에게 전원생활의 따스함은 존재하기 어렵다.
이백 프랑의 분담금 혹은 재산세를 내면 누구든 배심원단이 될 수 있다. 부르주아로 채워진 배심원단에 대해 저자는 단순 절도 등 경범죄를 저지를 자들은 5년 감옥형을 선고하는 반면, 살인 등 정작 엄중하게 다뤄야할 범죄에 대해서는 정상 참작을 들어 관용을 베푸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역설과 풍자를 곁들여 비판한다. 즉 단순 경범죄인들을 겁주는 즐거움을, 흉악 범죄자들에게는 박애주의적 사상을 내세워 자기들의 허위와 허영심을 채우기 위함과 덧붙여 중형을 선고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풍자를 넘어 비아냥으로 들릴 정도다.
극장에서 나타나는 두 부류의 부르주아를 읽고 얼마나 웃었던지. 제 흥에 겨워 끊임없이 장단을 맞추며 아는 체를 하는 부류와 세상에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불평 불만을 쏟아내는 다른 한 부류. 그런데 이러한 관객은 부르주아가 아니더라도 아주 많을 뿐만 아니라 요즘에도 극장이나 공연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나도 수없이 경험한 바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우스운 것은 브루주아들이 공짜표를 얻기 위하 배우들과 친분을 트고자 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들을 험담하는 부르주아의 이중성이다. 그나마 극장은 낫다. 부르주아 군인은 군대 부역조차 친분을 쌓는 사교장으로 여기고, 소소한 저녁 초대에도 과시를 위한 허례허식을 일삼는다.
그런데 사실 부르주아를 지칭하는 대상은 본래 이런 모습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 중에서 실질적 활동의 주체로 산업을 비롯한 문화, 예술 등을 아우르는 지식인이자 개혁과 혁명에 앞장선 진보의 주체였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을 지나 가장 유력한 사회적 계급으로 자리하면서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층이 되었다. 따라서 이 책에 등장하는 부르주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부르주아'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오히려 '부르주아'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혁명과 진보와는 다르게 안주하며 제 밥그릇 챙기기 바쁘고, 연대와 조화와 공존보다는 탐욕과 허위와 과시를 중요하게 여긴다. 앙리 모니에는 이러한 실태를 빈정거림에 가까운 풍자로 일갈한다.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왜곡된 부르주아의 형태가 더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복권과 비트코인처럼 한탕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성실하게 노동하는 가치는 폄하되고, 인류가 지켜야하는 가치들은 돈 앞에서 점점 사라져가며, 내면의 성찰보다는 자기 과시를 통한 타인의 인정에서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욕망이 크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앙리 모니에가 교육 부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주입하는 가치관이다. 시키는 대로, 주입시킨 대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앙리 모니에가 비판했던 그 시대보다 더 암울해질지도 모르겠다(사실 지금도 그다지 밝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읽으면서 저자의 재치와 역설에 키득거렸지만 웃고 말 일이 아니다.
재밌고 따끔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