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 (리커버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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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 그의 통찰을 다시 느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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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100쇄 기념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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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먼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의 날카로운 풍자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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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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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원과 은철의 관점으로 진행하는 소설은 1970년대 삼악동 삼벌레고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삼벌레고개는 등고선에 따라 계급을 나타내듯 살림살이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데, 원과 은철은 그중에서도 계급의 중간에 위치한 중턱의 우물집에서 산다. 어느 봄날, 은철의 우물집 바깥채에 원의 네 식구가 세입자로 들어오고 원과 은철은 단짝이 되어 스파이 놀이를 하며 동네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전쟁 이후 5.16쿠데타를 거쳐 인혁당 사건과 국가비상사태 선언이라는 정치적 상황, 중동 특수라는 경제적 붐이 일어나면서 세상은 흑과 백의 논리로만 정의되었고, 이에 따라 이념과 가진자와 못 가진 자로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구분되었다.


일곱 살 은철과 원에게 있어서 딱지를 뺏어간 형 금철과 10원을 꿔간 후 갚지 않는 언니 영은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두 아이는 자기들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들 역시 똑같이 나이를 먹기 때문에 손위 형제와의 나이차를 좁히지 못한다는 것이 억울하다. 형제들의 나이의 차를 줄일 수 없는 것처럼 아랫동네와 중간동네, 윗동네의 격차는 줄어들지 못한다.

작은 동네 안에서도 온갖 인간군상은 다 드러난다. 이사온 첫날부터 부동산 계약서에 거침없이 서명하는 새댁 효경은 뭔가 배운 티가 나는 사람으로 동네 여자들의 질투를 일으킨다. 보험외판원 성계희로부터 정보를 얻어 점을 봐주는 보살 임말숙, 수학자라고는 하지만 직업이 불분명한 고성한, 구멍가게를 하는 통장 박가네, 그들의 집에서 일하며 정보원(?) 역할을 톡톡히 하는 가정부들, 남편이 사우디 노동자로 근무하면서 보내는 돈으로 신세 편하게 살고 있어 동네 사람의 부러움을 받고 있는 사우디댁, 간첩인지 대학생인지 종잡을 수가 없는 청년, 안덕규의 집을 수시로 찾아오는 수상한 사람들. 그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언제나 그랬듯 이웃으로 계모임을 이어가고, 소소한 반찬을 나누고, 뜬소문을 수다거리로 삼아 살아갔을 것이다.


어느날 금철의 객기어린 장난으로 은철의 무릎이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순분이 믄득 떠올린 것은 사실 확인없이 안덕규의 누나를 놓고 동네 여자들과 험담을 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부끄러움에 대한 각성이다. 그리고 안덕규는 자신의 외모를 바꾸기 위해 혀로 잇몸을 문질렀던 영과 화가 난다고 밥그릇을 뒤엎은 원에게 부끄러운 짓에 대한 엄격한 벌을 내린다. 우리가 짚어야할 부끄러움은 과연 무엇일까?


간첩의 누명을 쓰고 끌려간 덕규는 아이들의 이름처럼 결국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시신을 통해 남편이 극단의 고통으로 자살까지 시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효경은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켜 딸들과 단절한다. 여기에서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순분과 효경의 연대다. '간첩과 그 가족이 살고' 있으며 '장애아'가 사는 우물집은 이제 스스럼없이 드나들어도 되는, 계모임의 계주가 사는 이웃이 아닌 불편한 존재로 전락한다. 은철이 걷는 연습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사람은 원이고, 엄마 대신 살림을 도맡은 영의 곁에서 말없이 위로가 되어 준 사람은 금철이다. 또한 효경이 잠깐 정신이 돌아왔을 때 도움을 요청한사람은 순분이다. 이 연대가 덕규의 죽음과 은철, 원의 장애를 막지는 못했다하더라도, 우리가 연대를 해 나가야하는 까닭은 효경이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줄 수있기 때문일 것이다.


토우란 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상을 일컫는다. 폭력적 강요와 억압, 인권을 상실한 시대에 인간성을 지킬 수 없었던,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이 토우로 살아야했던 그 시대, 우리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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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로 산다는 것 - 워킹푸어의 시대, 우리가 짓고 싶은 세계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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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공부한 후 노르웨이에서 정착한 한국 국적일 가진 학자 박노자가 바라본 대한민국의 현실을 함께 들여다본다. 
 
한국에서 부재한 보편적 2인칭 대명사를 들어 급級의 사회를 지적한다. 2인칭 대명사는 기득권층과 하층민을 극단적으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급'이 구분되면 관계의 친소와 말의 높낮이를 맞추고, 이를 처세의 기본 기술로 익혀 살아간다. 심지어 죽음에도 급이 있다. 가난한 독거 노인의 죽음, 비정규직 노동자의 산재 사망, 3D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 등 '급'이 없는 이들의 죽음에는 애도는 고사하고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각종 갑질에 질려 모국을 떠나는 이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직적 서열을 완화할 수 있는 길은 권력의 분산과 정책적 평준화다. 서열의 세습과 신분 피라미드를 당연시 여겨서는 안되며 대학 평준화, 의료 공공화, 재분배 시스템을 통한 재산 격차의 억제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악의 독약은 권력이다. 권력은 타자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고 이를 타자에게 합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권력'이라는 단어 안에도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 권력을 아예 없앨수는 없더라도 권력을 최소화하고 분산시켜 견제해야 한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모든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대다수다. 인공지능 시대를 논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학벌로 서열을 정하는 극단적 학벌위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 개인 각자가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나라에서 자식의 학벌을 위해 경제력을 쏟아붓고, 이것이 부담스러우면 아이를 낳지 않는다. 출산율을 높이고 싶다면, 출산 및 양육지원금보다 사회 구성원의 일생이 오로지 성적과 취업만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인프라를 만드는 것, 여성 노동을 포함한 모든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 사회 의식이 우선해야할 일이다. 
 
종종 '자국민'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자국민이란 제 나라 백성, 즉 해당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다른 민족보다 해외 국적을 취득하고 해당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해외 이민자에 더 호의적이다. 민족적 정서를 기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넘어선 순혈주의를 우려하는 것이며, 정작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둘러보면 좋겠다. 
 
극우 언론들은 사회적 '질시'에 기대어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한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메커니즘에는 무한하고 영구적인 '경쟁'을 기반한다. 여기에는 '공정'이 사라진 평가만을 인정한다. 수 년간 같은 자리에서 저임금 착취를 당하며 업무를 배우고 경력을 쌓아도 '시험 절차'에 따르지 않으면 '부정의'가 된다. 청소년기에 아무런 경험도 없이 잔인한 무한 경쟁 속에 던져져 오로지 시험으로 평가만 받아온 세대의 질시와 절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발표는 있어도 토론은 없는 교실과 강의실에서 연대의 개념도, 경험도 없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남을 끌어내리는 것 뿐이다. 같은 사회 안에서 공존해야 하는 구성원끼리도 이럴진대, 하물며 난민이나 기후 문제에 있어서 협력이 가능하겠는가. 
 
30대 이하, 경제적 계급이 중하층인 남성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 분노는 초과 경쟁 사회에서 자신들을 '인간 병기'로 만든 신자유주의가 아닌 여가부에 돈을 들이는 좌파 정권과 페미니즘을 향하고 있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절대악'에 해당한다. 한국 남성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경제력을 바탕으로하는 '가족' 부양자'다. 그런데 현재 30대 이하 세대는 남성의 정체성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어 그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고립이라는 상황을 악화시켰다면 이를 상대로 투쟁하고 이에 저항하는 정당을 지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오히려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다. 이는 '남성'이라는 특권의 상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회가 여성의 모든 노동에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양성평등은 불가능했다. 저자는 국가와 자본에게 새로운 병역 대상자와 노동자들이 필요하다면 육아 노동을 둘러싼 조건부터 본질적으로 달라져야함을 말한다. 
 
저자가 정의하는 '괜찮은 사회'란 사회적 적응을 거부하는 기인들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관용의 사회다. 관습이나 혹은 법으로 정해져 있는 않은 사회적 잣대에 맞춰 살지 않아도 최소한의 먹고 사는 일에 불편함이 없으며 정서적으로 고립되지 않는 사회를 의미한다. 
 

저자는 한국 교육과 교육조차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현실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의 역할은 더이상 '키움'이 아니다. 학교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고 미래의 노동자를 육성하는 공간이 되었다. 단선적 신분 상승에 입각한 성적위주의 '공부'에 모든 것을 쏟는 대한민국의 공부 세태를 짚으며 오로지 입시를 위해 모든 욕구를 배제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낭비이며 사회적 낭비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성공 신화를 다루는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로로 자리매김한지는 오래다. 오로지 경제적 성공을 목표로 무한 경쟁의 굴레에 거침없이 제 몸을 던져넣는 세상에서 배려, 연대는 멸종 위기 단어가 됐다. 인생 목표가 '부자'인 사회, 이대로 괜찮을까? 
 
대학이 취업의 관문이 된 사회에서 이르면 초등학교부터 입시 위주의 공부를 해오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정해진 현주소에서 대안적 인생이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온 가족이 수능이라는 시험에 인생을 걸 듯 한다. 자본주의가 유입되고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대학은 대놓고 산학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대학은 더 이상 지성의 전당도 아니고 학문을 연구하는 곳도 아니다. 개성과 재능에 상관없이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선택하고, 대학 입학 후 전공이 무색하게 곧바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보직과 상관없이 대졸 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업무 능력과는 별개로 학력으로 보수를 책정하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자는 '공'의 영역이지만 사유화된 한국의 대학들의 평준화가 시급함을 말한다. 한국처럼 학벌이 모든 사회생활의 중심 즉 사회적 존재의 중심이 되는 사회는 드물다. 학벌 피라미드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교육 정상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12년 입시 지옥을 타파하자면 학벌 위계 질서 자체에 대한 철저한 파괴가 필요하다. 교육 혁명이 절실하다. 








2019년말에 시작되어 2020년 현재까지 현재진행중인 코로나19사태는 각 나라와 사회 전반에 가려져 있던 진실을 드러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공통적으로 각 국가마다 사회적 격차에 의한 피해 정도는 상당히 컸다. 코로나19 사태로 중산층 이상의 구성원들은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였지만, 중소기업 노동자, 불안 노동자, 자영업자 등과 소수자에 해당하는 이민족 외국인들은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를 통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음이 드러났다. 저자는 이제 전 지구적 차원에서 평등, 생태, 지속성을 지향하는 협동적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과 그에 수반된 긱 이코노미는 안정성도 없고 시민사회에의 소속도 불가능한 완전한 타자가 되어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는 새로운 형태의 가난과 개개인의 고독이 만연해졌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장기적인 관계 맺기가 불가능해진 시대가 도래하면서 보장되고 안정감있는 삶이 전무해졌다는 점에서 무산자라고 지칭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전 시대가 착취로 대변된다면, 21세기 현대 사회는 고립과 소외가 사회적 문제이자 개인의 고통이다. 관계와 연대가 사라진 경쟁만이 남은 세상에서 불안과 가난, 외로움의 무게를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남았다. 페미니즘, 외국인 노동자 혐오, 이슬라모포비아 등은 강한 혐오와 소외, 고립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이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수가 공유하는 집단에 들기 위해 '타자 혐오'는 더 강력해진다. 연대을 잃은 자리에 혐오가 들어서는 것이다. 
 
과잉 생산과 과소 소비는 수면 시간 이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식민화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손에서 놓지 않고 이용하는 모든 콘텐츠와 네크워크는 자본의 이윤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생활이란 개념이 사라진지는 오래고, 사색과 사유는 갈 곳을 잃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경제적 측면에서 작동하는 세계는 소설에서 보아왔던 디스토피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는 '혁명'을 외친다. 이 혁명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시작하는 혁명이다. '나의 생각이 무엇이냐'라고 자문함으로써 우리는 혁명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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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일기 ㅣ 카프카 전집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유선 외 옮김 / 솔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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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부터 1923년까지 카프카의 일기를 완역한 책으로써 이십대 중반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카프카가 직접 남긴 기록들을 읽을 수 있다. 총 열두 권과 여행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만 1909년의 기록은 일기보다는 습작이 대부분이다) 그의 긴 습작과 낙서처럼 써놓은 짧은 문장들, 그리고 일상에서 느꼈던 소소한 감정부터 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스스로 느끼는 문학적 한계 등 카프카의 깊은 고민과 사색들이 전해진다.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카프카는 프라하 독일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스물네 살에 직장생활을 시작해 일반 보험회사를 거쳐 14년간 근로자 사고 보험국에서 근무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자수성가한 가부장적 아버지가 카프카에게 갖는 기대로 인해 그는 단호하게 문학만을 고집할 수 없었고, 병색이 짙어진 1922년 전까지 직장생활과 갈수록 쇠락해가는 아버지의 사업까지 신경쓰며 글쓰기를 병행했다. 그의 일기를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글만 쓰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작품에 만족하기 어려웠던 카프카는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자신의 재능에 의심을 품으며 허약한 신체에도 불고하고 선뜻 직장 생활을 그만두지 못한다. 어쩌면 가업을 잇고 강한 아들을 기대하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방패 삼아 작가로서의 실패를 더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글쓰기를 위해 파혼까지 한 것을 보면 카프카가 문학을 대하는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카프카는 결혼을 함으로써 확장되는 관계와 그로인해 글쓰기에 받을 영향, 그리고 가장이 되면 직장을 영원히 그만둘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한편으로는 완전한 고립에 대한 두려움과 아내를 통해 가족과의 관계를 개선해 보고 싶은 마음이 혼재하면서 깊은 내적 갈등을 겪지만 결국 그는 글쓰기에 무게를 두어 두 번이나 파혼을 결정한다. 이렇듯 문학과 글쓰기는 카프카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였다. 
 
당시 제국의 제3도시에 해당했던 프라하는 독일어를 사용했는데, 주류사회에서 사용하는 독일어가 아닌 소수언어로써 독일어를 사용했다. 카프카는 서부 유대인으로서 유럽에 동화된 즉 자신들을 '유대인'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유럽의 제국 시민으로 인식한 유대인 집단에서 성장했다. 이후 시오니스트인 막스 브로트와 교류하면서 민족성에 대해 각성하면서 그에 따라오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그의 작품에서 꾸준하게 비쳐진다. 어린시절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서를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온전한 유럽인으로도, 유대인으로도 소속감을 가지지 못했던 카프카는 핍박받는 유대 민족에서 가족 구성원과 직장 구성원으로서 아웃사이더 입장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에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을 쓰는 카프카와 보험국에서 근무하는 법률 자문인 카프카, 유대인 카프카와 유럽인 카프카. 지금이라면 고민할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군소 전쟁과 1차대전을 배경으로 남성성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유약하고 예민하며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핍박받는 민족성까지 깨달으면서 느꼈을 혼란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빴던만큼 카프카는 가족 안에서 안정을 느끼지 못했음을 일기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글쓰기에 대해서 가족 내 누구에게도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약한 체력으로 신체적 한계를 느끼는 것도 부족해 정서적 지지도 받지 못했던 카프카의 고독과 외로움이 크게 다가온다. 어쩌면 카프카가 시오니스트 막스에게 영향을 받고, 민족적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던 이유는 가족 내에서 안정된 관계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린시절부터 긍정적 관계에 대한 경험의 부재와 두려움으로 대상화된 아버지 상이 그에게 몇 번의 파혼을 감행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굳이 일기가 아니더라도 카프카의 작품에는 유독 아버지들이 많이 등장하고 그들은 주인공에게 결정적, 그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는 <변신> <선고> 등 수많은 작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반면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하는 이들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일기에는 친구 막스를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표현을 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눈에 띈다. 개인적인 짐작이지만 카프카와는 다르게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막스에게서 질투와 더불어 대리만족을 느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카프카가 보험국 법률자문으로 일하면서 주로 상대하는 이들은 하층민이었다. 열악한 조건과 차별 속에서 인격적 모욕을 견뎌내며 도덕적 가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경에서 일하지만 빈부 격차는 좁혀지지 않는다. 다른 의미에서 소수자였던 카프카는 이들에게 깊이 이입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일기에서는 보통의 20대가 느꼈을 젊음의 활기도 적게나마 느껴진다. 친구와 여행을 하고, 음악을 즐기고, 이성에게 호기심을 가진 그의 글에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고뇌를 잠시나마 내려놓는 모습은 독자인 나조차도 안도하게 한다. 신뢰했던 펠리체 바우어와 두 번의 파혼, 율리에 보리첵과 약혼 후 1년 만에 또 파혼, 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빠져든 열여덟 소녀와의 사랑, 기혼녀 밀레나와의 교감, 그리고 도라 디아만트와의 짧은 동거. 자신의 일기를 막스가 아닌 밀레나에게 넘기고, 도라 디아만트에게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모든 작품을 불태우라고 한 카프카. 
 
일기를 읽다보면 그의 작품 세계가 이토록 난해한 까닭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913년 5월 24일의 일기에는 아버지 앞에서 <화부>를 낭독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전의 내용들을 떠올려보면 아버지가 카프카의 작품 낭독을 들었다는 것과 아버지를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그 앞에서 자신의 작품을 낭독했다는 사실은 의외다. 어쩌면 카프카는 직장을 그만두고 글쓰기에 몰입하고 싶었던 것 이상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아버지는 아들이 사업보다는 문학에 더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 못마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1년 내내 옆에 끼고 읽어야 할 책을 보름만에 읽어 스스로 아쉽다. 한동안은 책장에들어가지 못하고 책상 한 켠에 자리해 수시로 들춰볼 것 같다. 그의 깊은 고뇌와 사색과 더불어 이번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을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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