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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로 산다는 것 - 워킹푸어의 시대, 우리가 짓고 싶은 세계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평점 :
소련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공부한 후 노르웨이에서 정착한 한국 국적일 가진 학자 박노자가 바라본 대한민국의 현실을 함께 들여다본다.
한국에서 부재한 보편적 2인칭 대명사를 들어 급級의 사회를 지적한다. 2인칭 대명사는 기득권층과 하층민을 극단적으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급'이 구분되면 관계의 친소와 말의 높낮이를 맞추고, 이를 처세의 기본 기술로 익혀 살아간다. 심지어 죽음에도 급이 있다. 가난한 독거 노인의 죽음, 비정규직 노동자의 산재 사망, 3D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 등 '급'이 없는 이들의 죽음에는 애도는 고사하고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각종 갑질에 질려 모국을 떠나는 이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직적 서열을 완화할 수 있는 길은 권력의 분산과 정책적 평준화다. 서열의 세습과 신분 피라미드를 당연시 여겨서는 안되며 대학 평준화, 의료 공공화, 재분배 시스템을 통한 재산 격차의 억제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악의 독약은 권력이다. 권력은 타자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고 이를 타자에게 합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권력'이라는 단어 안에도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 권력을 아예 없앨수는 없더라도 권력을 최소화하고 분산시켜 견제해야 한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모든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대다수다. 인공지능 시대를 논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학벌로 서열을 정하는 극단적 학벌위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 개인 각자가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나라에서 자식의 학벌을 위해 경제력을 쏟아붓고, 이것이 부담스러우면 아이를 낳지 않는다. 출산율을 높이고 싶다면, 출산 및 양육지원금보다 사회 구성원의 일생이 오로지 성적과 취업만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인프라를 만드는 것, 여성 노동을 포함한 모든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 사회 의식이 우선해야할 일이다.
종종 '자국민'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자국민이란 제 나라 백성, 즉 해당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다른 민족보다 해외 국적을 취득하고 해당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해외 이민자에 더 호의적이다. 민족적 정서를 기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넘어선 순혈주의를 우려하는 것이며, 정작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둘러보면 좋겠다.
극우 언론들은 사회적 '질시'에 기대어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한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메커니즘에는 무한하고 영구적인 '경쟁'을 기반한다. 여기에는 '공정'이 사라진 평가만을 인정한다. 수 년간 같은 자리에서 저임금 착취를 당하며 업무를 배우고 경력을 쌓아도 '시험 절차'에 따르지 않으면 '부정의'가 된다. 청소년기에 아무런 경험도 없이 잔인한 무한 경쟁 속에 던져져 오로지 시험으로 평가만 받아온 세대의 질시와 절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발표는 있어도 토론은 없는 교실과 강의실에서 연대의 개념도, 경험도 없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남을 끌어내리는 것 뿐이다. 같은 사회 안에서 공존해야 하는 구성원끼리도 이럴진대, 하물며 난민이나 기후 문제에 있어서 협력이 가능하겠는가.
30대 이하, 경제적 계급이 중하층인 남성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 분노는 초과 경쟁 사회에서 자신들을 '인간 병기'로 만든 신자유주의가 아닌 여가부에 돈을 들이는 좌파 정권과 페미니즘을 향하고 있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절대악'에 해당한다. 한국 남성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경제력을 바탕으로하는 '가족' 부양자'다. 그런데 현재 30대 이하 세대는 남성의 정체성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어 그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고립이라는 상황을 악화시켰다면 이를 상대로 투쟁하고 이에 저항하는 정당을 지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오히려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다. 이는 '남성'이라는 특권의 상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회가 여성의 모든 노동에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양성평등은 불가능했다. 저자는 국가와 자본에게 새로운 병역 대상자와 노동자들이 필요하다면 육아 노동을 둘러싼 조건부터 본질적으로 달라져야함을 말한다.
저자가 정의하는 '괜찮은 사회'란 사회적 적응을 거부하는 기인들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관용의 사회다. 관습이나 혹은 법으로 정해져 있는 않은 사회적 잣대에 맞춰 살지 않아도 최소한의 먹고 사는 일에 불편함이 없으며 정서적으로 고립되지 않는 사회를 의미한다.
저자는 한국 교육과 교육조차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현실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의 역할은 더이상 '키움'이 아니다. 학교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고 미래의 노동자를 육성하는 공간이 되었다. 단선적 신분 상승에 입각한 성적위주의 '공부'에 모든 것을 쏟는 대한민국의 공부 세태를 짚으며 오로지 입시를 위해 모든 욕구를 배제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낭비이며 사회적 낭비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성공 신화를 다루는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로로 자리매김한지는 오래다. 오로지 경제적 성공을 목표로 무한 경쟁의 굴레에 거침없이 제 몸을 던져넣는 세상에서 배려, 연대는 멸종 위기 단어가 됐다. 인생 목표가 '부자'인 사회, 이대로 괜찮을까?
대학이 취업의 관문이 된 사회에서 이르면 초등학교부터 입시 위주의 공부를 해오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정해진 현주소에서 대안적 인생이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온 가족이 수능이라는 시험에 인생을 걸 듯 한다. 자본주의가 유입되고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대학은 대놓고 산학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대학은 더 이상 지성의 전당도 아니고 학문을 연구하는 곳도 아니다. 개성과 재능에 상관없이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선택하고, 대학 입학 후 전공이 무색하게 곧바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보직과 상관없이 대졸 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업무 능력과는 별개로 학력으로 보수를 책정하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자는 '공'의 영역이지만 사유화된 한국의 대학들의 평준화가 시급함을 말한다. 한국처럼 학벌이 모든 사회생활의 중심 즉 사회적 존재의 중심이 되는 사회는 드물다. 학벌 피라미드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교육 정상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12년 입시 지옥을 타파하자면 학벌 위계 질서 자체에 대한 철저한 파괴가 필요하다. 교육 혁명이 절실하다.

2019년말에 시작되어 2020년 현재까지 현재진행중인 코로나19사태는 각 나라와 사회 전반에 가려져 있던 진실을 드러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공통적으로 각 국가마다 사회적 격차에 의한 피해 정도는 상당히 컸다. 코로나19 사태로 중산층 이상의 구성원들은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였지만, 중소기업 노동자, 불안 노동자, 자영업자 등과 소수자에 해당하는 이민족 외국인들은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를 통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음이 드러났다. 저자는 이제 전 지구적 차원에서 평등, 생태, 지속성을 지향하는 협동적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과 그에 수반된 긱 이코노미는 안정성도 없고 시민사회에의 소속도 불가능한 완전한 타자가 되어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는 새로운 형태의 가난과 개개인의 고독이 만연해졌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장기적인 관계 맺기가 불가능해진 시대가 도래하면서 보장되고 안정감있는 삶이 전무해졌다는 점에서 무산자라고 지칭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전 시대가 착취로 대변된다면, 21세기 현대 사회는 고립과 소외가 사회적 문제이자 개인의 고통이다. 관계와 연대가 사라진 경쟁만이 남은 세상에서 불안과 가난, 외로움의 무게를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남았다. 페미니즘, 외국인 노동자 혐오, 이슬라모포비아 등은 강한 혐오와 소외, 고립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이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수가 공유하는 집단에 들기 위해 '타자 혐오'는 더 강력해진다. 연대을 잃은 자리에 혐오가 들어서는 것이다.
과잉 생산과 과소 소비는 수면 시간 이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식민화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손에서 놓지 않고 이용하는 모든 콘텐츠와 네크워크는 자본의 이윤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생활이란 개념이 사라진지는 오래고, 사색과 사유는 갈 곳을 잃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경제적 측면에서 작동하는 세계는 소설에서 보아왔던 디스토피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는 '혁명'을 외친다. 이 혁명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시작하는 혁명이다. '나의 생각이 무엇이냐'라고 자문함으로써 우리는 혁명가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