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줄리아 보이드 지음, 이종인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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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191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유럽에서는 실질적으로 끝난)인 1944년까지 재3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진술과 기록을 토대로 당시 독일의 모습을 복원하듯 서술했다. 정치인과 학자를 비롯해 문화 예술 등 각계의 저명인사와 평범한 여행자들과 유학생까지 다양한 시선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찰과 견해들이 담겨있다. 







 
먼저 독일이 적극적으로 관광 산업에 나선 배경을 살펴보자면, 1차대전 당시 전투가 대체로 독일 국경 밖에서 치러진 덕분에 종전 이후에도 독일의 자연은 크게 훼손된 곳 없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몇 달 되지 않아 미국 관광객을 겨냥한 관광 홍보책을 발간하고 대대적으로 관광객 유치에 나선다. 이 홍보 책자는 전쟁 전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미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잠시 잊혀졌던 독일의 예술.문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쾌활한 프로파간다가 전쟁을 직접 겪어 가난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인 사람들에게는 기가 찰 노릇이었겠지만, 무엇도 본 적이 없는 미국 젊은이들에게는 오히려 전쟁 직후의 유럽 여행이라는 흥분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실상은 홍보 책자와 판이하게 달랐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지만.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직후 독일은 충격과 절망을 고스란히 껴안았다. 식량과 석탄이 부족해 곤궁했고, 모든 식민지들을 포기해야 했으며, 독일 내 생산적인 산업 지역들은 적어도 향후 19년간 외국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전쟁 배상 지불 및 병력을 현저하게 감축해야 했고, 단치히 항구 관할권을 폴란드로 이관해주는 바람에 동프로이센 주와 절연되었으며 무엇보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인정하는 "유죄 조항"에 서명함과 동시에 카이저와 약 1천 명의 저명인사는 협상국 사령부로 넘겨져 전범 재판을 받야야만 했다. 독일에게는 마지막 사항이 모욕적이었고, 자존심을 상실하게 했다. 독일인들은 배고픔보다 일방적으로 교류를 끊고 추방자 대우에 더 분노를 느꼈다. 독일의 경제 붕괴와 더불어 중산층이 몰락했고, 정치적으로도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이는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강력한 독재를 수긍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했을 터다. 


​1932년 연방 총선에서 나치당은 230석을 획득하여 제국의회 내에서 제1당이 되었다. 스물두 살 제프리 콕스가 느낀 당시 분위기는 6개월 이내에 독일은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거나 전력을 강화해 폴란드와 전쟁을 할 거라고 예상할만큼 위험했다. 그 정도로 독일인들, 특히 젊은이들의 절망감은 컸다. 1932년, 독일에서는 이미 유대인을 노골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33년 1월 10일, 새로운 독일 총리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내각은 대통령 집무실에 집결했고, 52일 뒤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수권법으로 인해 히틀러는 사실상 절대 권력을 갖게 됐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죽음의 비명이 시작된 것이다. 



 
제3국을 방문한 여행자들은 모두 끊임없는 프로파간다에 노출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불공정하다, 히틀러는 평화를 신봉한다, 독일은 국방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등 나치가 강력하게 내세우는 프로파간다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 독일에서는 양가적인 모습이 존재했다. 한쪽에서는 스포츠와 피크닉을 즐기며 여유롭고 한가로운 모습으로 일상을 보내는 반면, 한쪽에사는 파시즘, 볼셰비즘, 절망, 전쟁, 혁명 등 폭발 직전의 위기가 존재했다. 이 애매하고 모호한 경계가 방문객들로 하여금 나치의 프로파간다를 거부감없이 느끼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일인 내부에서도 대학생 및 친 나치 평론가들은 유대인 문제를 비롯해 나치의 폭력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언론이 사태를 과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많은 독일인들은 독일 정부의 반유대주의가 일시적 현상으로서 곧 지나갈 것이라고 봤다. 무엇보다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맹렬하게 외쳐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은 독일의 유대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독일을 향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독일의 열망을 잘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독일인들의 활기는 공산주의에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편한대로 판단했으며 여행자들은 독일 국민의 전반적인 환대, 집중적인 토지 경작, 아름다운 자연, 독일인의 호율성과 질서 의식, 깨끗한 숙소, 거픔 가득한 맥주잔에 더 압도됐다. 히틀러가 집권한지 100일째 되는 날, 괴벨스는 보란듯이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과 베를린에서 책 화형식을 벌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를린 분서 사건이다. 


이때(1933년) 또다른 앵글로색슨족인 영국인과 미국인은 독일인 형제들과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를 상대로 싸울 준비를 해야했다(영국이 독일 나치당을 지켜보기만 한 근본적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가난한 독일인들이 부자 유대인들에게 갖는 상대적 박탈감이 유대인 박해를 방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히틀러의 독일 정체성은 모호했다. 이러한 점들이 복합적으로 엮여 독일은 공사주의에 맞서는 유럽의 버팀목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이 명분이 유대인 박해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나치당으로 사람들을 집결시킨 중요한 부분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 혹은 낮은 신분으로 모멸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나치당 입당은 벼락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패전 후 지지부진한 현실을 히틀러가 타개해 주기를 희망했고, 독일의 방문객들 역시 같은 차원의 바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폭압으로 얼룩진 잔혹한 독재를 묵인했던 것으로 느껴진다. 
 



 
문화.예술 측면에서는 교묘했지만, 교육과 학계에서의 프로파간다는 노골적이었다. 이러한 차별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교육자 및 인사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정치와 여행은 별개라고 여겼던 지성인들은 대부분 의도적으로 나치당이 자행하는 독재를 외면했다. 정작 독일에서는 분서를 비롯해 대학을 나치의 프로파간다의 용도로 전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녀를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독일은 여행지로서의 높은 수준의 아름다움과 청결함, 문화와 예술, 국가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온갖 장식물이 공존하고 있었다. 여하튼 이 시기에 독일을 거쳐간 여행객들의 나치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이었으나 1차 대전 같은 참호전은 막아야 한다는 데에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간혹 히틀러의 독재체제에 매혹되어 그릇된 판단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억압과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문제 의식을 깊고 구체적으로 파헤지지 못하고 독일을 떠나면서 모두 외면한 게 화를 키웠다. 


1936년 말이 되자 유대인 난민, 신문 기사,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의 증언 등으로 누구든 나치의 악랄한 소행을 모른다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낙관론자(기득권층)들은 히틀러에 대한 믿음을 계속 유지했고, 합리적인 요구들이 충족되면 점차 괜찮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전히 정치를 무시한 많은 여행객들은 독일을 다녀갔고 독일인들의 획일적인 기이한 모습을 의식했지만 본국에 전하는 인상은 대부분 친독일적이었다. 그들에게는 굳이 유대인을 신경쓰며 휴가를 망칠 이유가 없었고, 히틀러 정권의 경멸과 여행은 별개로 놓았다.  


나치의 프로파간다는 음흉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묘하고 친근하게, 드러내놓고 그들의 정치적 사상과 호전성을 과시했다. 1938년이 될 때까지도 평범한 관광객들이 꾸준히 독일로 휴가 여행을 가기로 선택 한 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곳에 가서 직접 나치 정권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그 체제를 크게 비난하지 않으면서 귀국했던 것이까? 무엇이 여행자들을 매료시켰을까? 생각해보면 지금도 관광객을 유치하는 여행지는 대체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관광 명소, 레스토랑, 잘 관리된 자연 환경 등 관광객을 유치할 목적을 갖고 있는 공간은 여행이라는 환상을 품게 해주지 않는가. 그리고 여행자는 말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이며 이방인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거주자가 아닌 다음에야 민간 여행객들이 굳이 외국의 정치에 왜 관심을 쏟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아무도 히틀러의 나치가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보고싶은대로 보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나치 당원이 아닌 사람들이 신속하게 나치 당원에 가입하며 나치 정권을 지지한 까닭은 히틀러가 독일이 동유럽에서의 생활권을 제공하고 빼앗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되돌려 받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 독재는 감수할만 하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독일인 비율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를 합병하면서 뭰헨에 나부끼는 깃발은 유니언잭과 트리콜로르, 스와스티카였다는 것, 그리고 남의 땅 가지고 생색내며 유럽의 평화를 운운한 체임벌린의 연설은 쓰디 쓰다. 겉으로는, 전쟁없이 베르사유 평화 조약을 극복했고 실직을 없앴고 과거의 적을 친구로 돌려놓은 히틀러에게, 독일 국민이 열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치의 프로파간다는 1938년 즈음부터 독일 내에서 확실하게 성공을 거둔것으로 보여진다. 열광적으로 동참한 사람들도 있지만 출세나 부의 기회로 삼거나 혹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지지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정리하자면, 많은 외국 방문객들은 혼란한 감정을 느꼈다. 그들은 독일 곳곳에 침투되어 있는 프로파간다에 의해 진실과 왜곡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나치 초창기,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독일을 혁명적으로 재건해줄 희망으로 삼았고, 외국인 방문객들은 반유대주의나 독재 등의 문제들을 독일의 국내 문제로써 자기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여겨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나치를 경멸하는 방문객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독일 문학, 예술, 철학에 대한 존경심으로 수많은 부모가 자식들을 나치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그들은 나치의 만행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고, 정치와 문화와 학문을 별개로 보았다. 더불어 숙소 등 비용도 저렴해 비싼 비용을 들이지 않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데에 매력을 느꼈다. 무엇보다 방문객을 사로잡은 것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 평범한 독일인들의 청결함과 효율성, 독일 젊은이들의 활기찬 이상주의와 뚜렷한 목적 의식, 애국심이었다. 그 당시 독일은 양면성이 넘쳐났다. 국가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방법상의 유사함, 반유대주의자인 유대인, 친절함과 잔혹함, 가정의 안그함과 거리의 폭력, 귀에 거슬리는 노래와 베토벤을 향한 존경 등 한가지로 단정할 수 없는 모순들이 존재했다. 


저자는 '보이지 않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고 말한다. 다수의 여행자들은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 히틀러의 독일에 찬사를 보냈다. 나치의 악랄한 프로파간다는 교묘하게 독일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방문객이 알아챌 수 없거나 혹은 그 폭력성을 아예 드러내놓아 외면하도록 만들었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1936년 이후부터는 나치의 민낯을 모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책을 통해 독자가 알게 된 것은 양차 대전 당시 독일의 모습을 넘어서 비극적인 시대로 이끌고 간 것에, 외면과 방관과 무관심이 한 몫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독일을 방문했던 여행자들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역시 외면과 방관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들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전하는 것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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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3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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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에서는 때를 노리며 칼을 벼리고 있던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가 소아시아에 파견된 로마 위원단의 횡포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켜 대대적인 침략과 끔찍한 학살을 저지르고, 이에 로마에서는 동방 전쟁의 지휘권을 두고 술라와 마리우스의 대결이 내전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을 그렸다.  









풀잎관 3권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사건은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의 변화다. 그는 열렬한 애국자이자 극렬 보수주의자였고 드루수스가 입안한 이탈리아인의 로마시민권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미트리다테스가 아시아 속주에서 벌인 대학살 사건으로 사고를 전환한다. 스스로 정통 로마인의 혈통에 자부심을 가졌고, 외부인들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마 귀족들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사실, 외부인의 시선에서는 로마인이나 이탈리아인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로마가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이탈리아인을 죽인 것과 미트리다테스가 아시아 속주에 있었던 로마 시민과 이탈리아인들을 죽인 것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눈을 뜬 것이다. 즉 로마와 폰토스의 만행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죄책감의 각성이다. 그는 모든 원인이 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된, 이중성을 가진 원로원에 있으며 원로원은 사라져야한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여기서 또다시 드러난 맹점은 이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그 소수 중 한 사람인 마리우스와 결탁해야만 한다는 모순이다.



후반부에 눈에 들어 온 다른 한 명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다. 열일곱 살 때부터 마리우스의 휘하에서 수습 보좌관으로 술라와 함께 동거동락했던 인물인데, 그만큼 마리우스에 대한 존경과 애착이 크다. 그러나 개인보다는 대의에 입각한 그의 소명의식과 결단력이 두드려졌다. 그리고 메텔루스 피우스의 재발견이다. 비교적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고 있었고, 어느 한쪽의 편이 아닌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있으며 집정관인 킨나보다 더 정확하게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제 아버지보다 낫더라는.  



국고가 바닥나자 국유지를 매각하는 의논을 하는데, 그 말은 땅을 매입할 개인 자산가가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개인이 국가보다 재산이 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보통의 서민 복지 재정을 결정하는데 그들의 입김이이 만만치 않게 작용한다는 데에 씁쓸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희망은 술라가 해결해야할 문제점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동방 원정을 앞두고 로마에 주둔하게 된 카푸아 군단의 불만도 해결해야할 문제였지만, 술라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로마 시민의 민심이었다. 로마가 아닌 술라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장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한 술라를, 불구의 노장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쫓아버린 그를 향한 보이지 않는 시선은 곱지 않다. 민심을 두려워할 줄 아는 권력이 그나마 희망이라면 희망이다(마리우스의 말년에는 이 마지막 두려움조차 없었다).



읽다보면 재미있는 점은 마리우스와 술라의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도망자 신세가 된 상황에서도 마리우스는 술라가 로마로 진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서로가 서로를 납득하고 인정하지만 야망이 크기게 함께 할 수 없는 마리우스와 술라. 기울기가 어느 한쪽으로 살짝만 치우쳤어도 이 두 사람의 대립은 이토록 극단이지 않았을텐데(아닌가?). 그나마 이때까지만 해도 마리우스의 상태는 절망적이지 않았다.



소설에서 소소하게 느꼈던 점은 위대한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성장한다는 것에 대한 압박과 부담이 마리우스2세에게도 있었던 것 같다(그럼에도 이성적이더라는). 로마 한가운데를 향해 최고자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군대를 밀고 들어오는 와중에도 허위에 집착하는 몇몇의 못난이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폼페이우스와 키케로의 우정. 늘 느끼는 바지만 인간 관계에 있어 적 아니면 지지자, 쓸모와 무쓸모만 존재하는 술라의 가차없는 냉혹함.





정리해보자면, 술라의 로마 진군은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하나의 사례를 만들어 놓은 셈이다. 술라 개인으로 놓고 보자면 효과가 있었겠으나 국가적 차원에서 긴 안목으로 보면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다.



마리우스는 현명하게 늙지 못했다. 명예롭게 삶을 마감할 수 있었던 그를, 마르타의 예언이 모두를 비극으로 몰아넣었고, 마르타는 정작 했어야할 예언을 하지 않았다. 일곱번째 집정관에 오를 수 있으나 그 대가는 후대에 광인으로 남을 것이라는. 마리우스의 삶에 대한 열망과 대담함은 확실히 남다르다. 마르타의 예언이 그의 야망에 불쏘시개가 됐을지는 모르겠으나, 예언이 아니었더라도 마리우스는 충분히 같은 삶을 살았을 것 같기도 하고.



3부에서는 앞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술라의 독재관 시대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청년 모습을 만나게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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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줄리아 보이드 지음, 이종인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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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미가 조여 오다 
 
 


1931년에 접어들면서 독일의 생활 환경은 더 나빠졌다. 대공황으로 유럽이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전쟁 배상금 지불의 부담까지 안고 있는 독일의 상황은 특히 심각해졌다(북부보다는 남부가 그나마 나았지만). 관광객 유입이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독일의 혁신.문화.기술은 사업가, 과학자, 지식인, 기인들을 꾸준히 끌어들였다. 그러나 독일의 경제적 위기로 인한 환율의 변동은 유복한 여행자들조차 귀국 경비가 부족한 지경에 이르게 했다. 1932년 연방 총선에서 나치당은 230석을 획득하여 제국의회 내에서 제1당이 되었다. 스물두 살 제프리 콕스가 느낀 당시 분위기는 6개월 이내에 독일은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거나 전력을 강화해 폴란드와 전쟁을 할 거라고 예상할만큼 위험했다. 그 정도로 독일인들, 특히 젊은이들의 절망감은 컸다. 1932년, 독일에서는 이미 유대인을 노골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33년 1월 10일, 새로운 독일 총리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내각은 대통령 집무실에 집결했고, 52일 뒤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수권법으로 인해 히틀러는 사실상 절대 권력을 갖게 됐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죽음의 비명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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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독일에는 지역마다 다른 모습들과 편차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모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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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3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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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최대 규모의 행사인 로마 경기대회가 열리는 9월, 신임 집정관으로 선출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마침내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심한다. 술라는 동방에 가 있고, 술라를 지지하는 스트라보와는 서로에게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협상했다. 그는 백인조회 집회 날짜를 로마 경기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으로 정했다. 그런데 킨나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은 술라의 지지자이자 스트라보의 선임 보좌관이며 자신과 함께 집정관에 선출된 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루소였다. 옥타비우스는 퇴역병사 천 명을 완전 무장 상태로 고용했고, 그들은 가차없이 칼을 휘들렀다. 백인조회의 상류 계급 사람들 수천 명이 마르스 평원에 시체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옥타비우스의 계획과는 다르게 제거하려고했던 킨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비무장 민간인들만 살해되고 말았다. 물론 용병들에게도 임기중의 정무관을 암살하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일이었다. 옥타비우스는 파트리키 예언자라고 일컬어지는 쿨레올루스를 매수해 여엔을 조작하고 킨나의 집정관직을 박탈한다. 그의 목적은 킨나의 사형이었지만, 이를 눈치 챈 대신관의 대처로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옥타이우스는 킨나와 여섯 호민관이 도망갔을 거라고 짐작해 그 어떤 후속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가 술라가 될 수 없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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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우스 옥타비우스 루소, 뭐 이렇게 안하무인이고 제멋대로인 사람이 있을까. 공포를 조장하고 폭력을 행사한다고 모두 다 술라가 되는 것은 아니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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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
플루타르코스 지음, 신복룡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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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술한 역사서가 아닌 제목 그대로 인물을 그려낸 평전이다. 재미있는 점은 두 인물을 배치해서 쓴 비교 평전인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을 비교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인명 사전같은 느낌이지만 문헌뿐만 아니라 구전으로 전해지는 소소한 에피소드 등 해당 인물에 대해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과 지금 우리의 생각이 다른 부분들이 의외성을 띠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플루타르코스가 클라디우스 황제 임기 말년에 태어나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 시대를 살았다고 하니 비교적 전쟁과는 거리가 먼 시기였을테고, 권력의 중심에 있는 가문의 후손이 아니였으며, 아테네에서 수학한 후 청년 시절에는 이집트를, 이후에는 이탈리아와 로마로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힌 것으로 봐서 그가 다각적 측면에서 인물 평전을 쓸 수 있었겠다고 짐작해 본다.   






 


스파르타와 로마를 실질적으로 체계를 형성해 놓은 지도자는 리쿠르고스와 누마라고 할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가 얘기하는 두 사람의 공통점은 지혜와 절제를 갖추고, 신 앞에서 경건했으며, 남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데 탁월한 능력이다. 누마는 시민이 그를 왕으로 추대했고, 리쿠르고스는 왕이었다고 스스로 평민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저자의 표현이 흥미로운데, 누마는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인정을 받을 만큼 덕망이 높았고, 리쿠르고스는 왕위를 비웃을 정도로 덕망이 높았다고 썼다. 한 마디로 두 사람 다 난 인물이라는 것. 두 사람의 기본적인 성향은 같지만 정책을 시행하는 방향은 아주 달랐는데, 현악기로 비유하자면 리쿠르고스는 현의 줄을 조였고 누마는 느슨하게 조율했다. 리쿠르고스는 지시를, 누마는 설득을 통해 시행했다. 저자는 인간의 본능적인 성질을 놓고 보면 리쿠르고스가 정책을 시행하는데 훨씬 어려웠을 것이라고 얘기한다(동의!). 결론적으로 두 사람의 의도는 같았으나 한 사람은 용맹에, 다른 한 사람은 정의에 더 큰 가치를 두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평등을 주장한 리쿠르고스보다 누마의 정치가 친서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리쿠르고스를 지지하는 부분은, 스파르타 여인들은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정치 문제에서도 논쟁에 참여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비교에서 딜레마는 강력하게 통제했던 리쿠르고스의 법조는 오백 년 넘게 유지되었던 반면, 누마가 이룩했던 평화와 우호는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는 점이다. 고대 시대의 한 국가의 토대가 되었던 정책과 가치들의 생성과 소멸을 읽다보면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는 어떠한 가치를 두고 정책을 세워야할지에 대한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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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론과 푸블리콜라의 관계는 조금 독특하다. 푸블리콜라는 먼저 태어난 솔론을 본받았으며, 솔론은 푸블리콜라가 옳았음을 입중해 주었다. 무슨 의미냐하면, 솔론은 불의하지 않고 고귀한 사람을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를 실행함으로써 행복진다는 것을 푸블리콜라가 몸소 증명했다. 플루타르코스가 두 사람을 한 줄로 평가한 문장이 재밌다. 솔론이 가장 지헤로운 사람이었다면, 푸블리콜라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들이 시행한 정책과 정치 방식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1권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 두 사람이었다. 생각해 보건데, 이들에게는 남다른 현명함과 분별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독재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권력을 더욱 민주적으로 행사한 푸블리콜라,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지 않은 솔론. 쉽지 않은 일이다. 새털같이 하찮은 권력에도 목에 힘이 들어가는 요즘의 세태를 떠올려보면 두 사람에 대한 플르타르코스의 평가가 아깝지 않다.  





동시대 사람들이 그리스와 로마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본보기라고 극찬한 카밀루스는 로마의 두 번째 건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카밀루스의 공통점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서 자신들의 능력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간, 그야말로 자수성가한 인물들이다. 데미스토클레스에게서 지략이 돋보인다면, 카밀루스에게서는 그의 됨됨이가 돋보인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의 극명한 차이는 말년에 있다. 데미스토클레스가 자신이 구원한 시민들과 정적들에 의해 쫓겨나다시피 조국을 떠난 반면, 카밀루스는 장수를 누리며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잘 파악했는데, 지나친 자신감과 분별없는 열정이 데미스토클레스의 발목을 잡았고, 카밀루스는 좀더 분별력(속된 말로 눈치)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 장章에서는 아리스티데스와 대大 카토를 비교하는데, 아리스티데스와 테미스토클레스를 라이벌 전으로 평전해도 재밌겠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아리스티데스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주 교과서적이고 고지식한 사람이다. 정치인으로서 불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친구를 두지 않는다고 할 정도면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맹점은 이런 사람이 과연 인민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할까? 국고 감독관과 지휘권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읽자니 이런 사람, 드물다. 행정가로서는 더할나위없는 맞춤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이 사람에 대해 가장 인상적인 면은 그가 추방되던 날, 조국의 인민들이 자신을 기억하게 만드는 불행이 이 땅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람한다. 즉, 자신은 억울하게 추방당하더라도 이 나라가 자신이 떠올려질만큼 부정부패가 만연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그 사람, 참... 진국일세). 근검절약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대 카토다. 문제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인데 그로인해 민중들에게 극심한 적대감(사치하면 세금 부과)을 사게 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 남자, 마이 웨이를 넘어서 더 엄격해진다. 그럼에도 그는 자상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아이들 교육에도 열성적이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아버지이자 남편이다. 아리스티데스와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아리스티데스는 가정을 돌보지 않아 거지꼴을 못면했지만, 카토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만큼 가정을 돌봤다. 아리스티데스가 위기에 약하고, 카토가 위기 극복에 탁월했던 까닭이 이런 부분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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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전에 읽고 다시 읽으니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싶다. 아마 그때는 배경 지식도 빈약했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지리와 이름 혹은 명칭들이 곤혹스러웠던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역사적 사건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배경 지식이 풍부하지 않아도 옛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이왕이면 알면 더 좋고). 플루타르코스가 매칭한 인물뿐만 아니라 독자가 매칭하는 재미도 쏠쏠하겠더라는. 무엇보다 툭툭 내뱉듯 써놓은 저자 혹은 인물의 몇 마디에 삶의 혜안이 담겨 있는 점도 좋았다.   





♤ 협찬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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