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 김소월×천경자 시그림집
김소월 지음, 천경자 그림, 정재찬 해제 / 문예출판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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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인의 시풍과 천경자 화가의 화풍. 언뜻 색깔이 전혀 다르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1958년 판본의 표지를 보니 왜 이 콜라보가 조화로운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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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소설
앙투안 로랭 지음, 김정은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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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렌이 책임자로 있는 출판사 원고 검토부에 도착한 170쪽짜리 원고 한 편. 관련 직원들의 만장일치로 출판이 결정되고, 출판 후 대대적인 성공으로 공쿠르상 후보 지명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정작 원고를 보낸 작가 카미유 데장크르가 신분을 밝히기를 꺼려한다. 나이는 고사하고 심지어 성별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 공쿠르상 심사위원회에서 작가의 신원 확인을 요구하지만, 카미유와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비올렌이 갖고 있는 카미유의 정보라고는 이메일 주소가 전부였다. 그리고 얼마 후 비올렌을 찾아온 경찰 소피 경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1부를 읽다보면 내용이 장황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내용을 일일이 언급할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3부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사실 소설이 2부에 접어들면 실체 없는 작가가 누구인지, 살인범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이 가능해지는데(독자는 그렇게 여기게 된다), 작가는 여봐란 듯이 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한다. 독자가 궁금해지는 지점이 카미유 데장크르가 누구냐라는 관점에서 범인이 왜 범죄를 저질렀으며 굳이 이를 대중에게 알리려 했던 의도는 무엇이냐는 관점으로 옮겨간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소설이 후반부로 치달으면서 독자의 시선은 다시 '누구' 로 옮겨진다. 이렇듯 소설은 독자들이 유추할 수 있게끔 스토리를 풀어놓다가 마치 독자를 약올리듯 결정적인 순간에 흐름의 각도를 틀어버린다. 꽤 흥미로운 진행 방식이기는 한데 세 번째 범죄의 해결 부분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차라리 네 번째 예상 피해자 죽음의 방식이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이사이 은근히 문학상과 상업성의 유착과 관례를 비판하기도 하는데,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인 것 같더라는.  


얼핏 성공을 위해서라면 성상납 쯤이야 예사로 여기는 한 여성의 출세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스터리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소설은 예상 외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만약 르파주 부부가 엘렌의 사건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들 가족은 행복했을까? 가해자의 부모들이 자식의 범죄를 부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까? 반면 비올렌의 인생에서 샤를과 에두아르(의 사랑)가 없었다면 그녀는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을까.  


가끔, 책을 덮고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칠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우리 삶에 필요한 건 오직 사랑 뿐이라는 듯 여전히 사랑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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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
앨러스데어 그레이 지음, 이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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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시작부터 끝까지 이 글이 과연 실화인지 허구인지 종잡을 수 없게끔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프랑켄슈타인> <피그말리온> 등 여타 몇몇의 문헌들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들을 고딕소설 양식으로 직조한 이 작품은 독자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괴물처럼 묘사되는 고드윈 백스터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우생학적 의도에 따라 태어났으나 콜린 경의 예상과는 다르게 실패작에 가깝다. 백스터는 자신의 창조물인 벨라에게서 본인을 투영시킨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공포스러운 목소리, 기괴할 정도로 거대하고 불균형적인 신체 등 아버지의 실험체이자 실패작인 자신을, 친절하고 인기 많고 사랑받는 치료사가 되고 싶었던 소망을, 벨라를 통해 완성하려고 했다는 짐작이 든다.


여성이 어떤 이유에서든 원하지 않은 임신을 했을 때 출산을 막을 방법은 없고, 이를 거부할 시에는 열악한 정신병원이나 감화원, 혹은 감옥으로 보내진다. 매년 젊은 여성 수백 명이 가난과 부당한 사회의 편견 때문에 스스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기형과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영아들을 태어나자마자 질식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서술과 함께 백스터는 영국을 가리켜 세계의 공장이라고 표현하는데, 소설 사이사이에는 산업화로 인한 환경 오염과 도시의 비위생적인 상황, 빈부격차에 대해 언급한다. 


백스터는 여성을 사회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배제하고 진출을 막아 오히려 많은 것을 잃고 있음을 지적하고, 더불어 과학기술이 사용된 분야는 대체로 개인적 혹은 국가적 차원에서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됐음을 짚는다. 


ㅡ 


소설에서 가장 핵심 인물인 벨라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와 경험을 통해 다방면으로 문학, 사회학, 과학, 철학, 종교, 정치, 이념, 경제학 등 실질적인 지식과 지혜, 처세와 수완을 배운다.  


백스터와 벨라는, 전능을 향한 명예에 대한 탐욕, 급변하는 산업화의 폐해, 불합리한 결혼제도, 여성·장애인·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위치와 한계 등 사회 문제가 빚어낸 산물로 의미되는 게 아닌지 생각을 해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폐해의 산물로 느껴지는 벨라가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삐뚤어진 종교와 신념 등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남성인 백스터가 여러 분야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과 가정 내 남성의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한 문제점을 짚어냈다는 점이다. 또한 작가가 이 괴기한 소설의 주인공 벨라를 통해 근대 이후의 인류사 전반을 훑으면서 정작 전하고픈 말은 생명 존중에 따른 평등과 자유, 인간의 존엄성이다.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창조물을 괴물이라 치부하고 악마로 규정했다면, 고드윈 백스터는 벨라를 괴물같은 자신을 대신할 구원의 통로로 여겨 모든 헌신을 다했다.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듯 하지만, 소설 내에서 그들의 창조물이 욕망의 결과물임은 분명하다.  


ㅡ 


소설은 백스터와 맥캔들리스를 대척점에 놓으며 두 사람이 서로의 주장에 반대 급부를 이어감으로써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바를 찾아간다. 그런데 스토리는 예상과 전혀 다른 흐름이다. 19세기 고딕소설처럼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독자를 여러 분야의 인류사로 끌어들여 현실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데, 이 점이 무척 시선을 끈다.  


재미있는 점은 세 남녀의 관계다. 백스터가 벨라에게 가르침을 주는 멘토의 역할을 한다면, 맥캔들리스는 그녀의 정서를 보듬어 주는데, 마치 세 사람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 관계로 읽혀진다. 분명한 건 두 남자 모두 벨라를 그들의 방식으로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마무리는 훈훈하지 못하다. 책의 마지막에 빅토리아 맥캔들리스가 직접 서술한 그녀의 삶과 소설의 진실에 대한 일기를 생략하지 말고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그 남자, 그가 벨라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진짜 이유, 그리고 놀라운 반전.  


이 소설의 엔딩이 슬픈 로맨스, 그리고 희대의 OOO 일 될 줄이야.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의 '가여운 것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지 독자는 알 수 있다. 



끝으로 벨라의 말이 인상적이다.
무언가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의 즐거움과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관계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에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싶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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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은 없고요?
이주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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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전작 <어느 날의 나>를 읽고 '이런 글도 참 좋구나'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서정적인 혹은 각자 다른 결의 삶을 살아가는 일상적인 다큐멘터리를 내레이션 하는 듯한 이 책의 단편 소설들은 잔잔한 물결이 퍼지듯 담담하게 마음에 스며든다. 








실패한 자신과 화해할 용기.
가벼운 안부 문자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은 따뜻한 날.  


타인에 의해 규정된 삶의 색깔.
나의 의도와 선택이 아닌 나를 제외한 외부자들이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씌운 고정관념.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충분히 애도할 시간이 우리에게는 있는가?
어느 집단, 주변 사람, 세태에 의하지 않은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조건없는 무자비한 따뜻함.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의 안온함을 바람하며 기다리는 마음.
스스로 알든 모르든 사랑하는 이를 향한 마음의 발걸음.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산다는 것, 그래서 행복과 죄책감이 동의어가 되어버린 삶. 


ㅡ 


실패와 낙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기다림, 부서진 자아, 천진한 선의, 혼란스러웠던 한때의 청춘, 치유와 회복, 다시는 볼 수 없는 이에 대한 그리움. 


이주란 작가의 소설들에는 빌런이 없다. 지독한 적의나 악의를 가졌다거나 악다구니에 받쳐 저주와 독설을 퍼붓는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선량한 사람들만 있는 건 더더구나 아니다. 때론 얄밉고 집요하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인물들이 있고, 세상에 없을 착한 사람임에도 본인이 의식하지 못한 채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한 켠으로 제 나름 몫의 아픔과 선의와 악의를 가진다. 


작가는 그들의 히스토리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어떤 사연이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독자는 어느새 등장인물들에 깊이 이입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체로 누군가의 가족이며 친구이며 동료이며 소득생산자들이고, 그들이 겪었을 실패와 상실과 사랑과 우정 등의 과정을 그 감정의 무게를 떠나 한 번쯤은 지나쳐온 경험이 있기 때문일 터다.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건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한다. 


실린 소설 여덟 편의 전후 사정 설명없이 서술하는 방식은 자칫하면 독자가 읽기에 소위 불친절하다고 느껴지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주란 작가의 글들은 전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감정이 함축적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격한 감정선이나 특정할만한 절정이 없어도 전혀 평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지나치게 사회적 문제를 의식하거나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글들이라서 더 좋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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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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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내 눈에는...... 날개가 잘려나간 크고 검은 새들로 가득찬, 아주 커다란 새장 같아요." 



'칼비노 이전에 팔라체스키가 있었다' 라는 문구에 홀랑 넘어가 읽게 된 작품이다. 책장을 넘기면 곧바로 소설의 남다른 분위기가 전해진다.  


페나, 레테, 라마 세 노파가 땐 벽난로의 연기에서 태어난 연기 인간 페렐라. 그는 세 노인이 불을 때면서 주절거린 대화 내용 덕분에 본의 아니게 아무 쓸모 없는 지식ㅡ사랑, 전쟁, 철학 등ㅡ을 배웠다. 언제부터 생각과 이해의 기능이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존재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자신이 하나의 생명임을 느꼈다. 언어를 듣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말을 할 줄 알게 됐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람이었다. 








소설은 인간의 욕망과 제 잇속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덕스러움, 그리고 폭력적인 군중 심리를 통해 인간의 민낯을, 그리고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사회 문제를 환상적이고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세 노파의 이름인 페나pena, 레테rete, 라마lama는 각각 고통, 그물, 창을 의미하는데, 페렐라가 이들이 피운 연기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은 의미를 갖는다. 소설에서 '한 사람은 마음의 고통을, 다른 한 사람은 고통스런 마음을 포획한 그물을, 또 다른 한 사람은 포획한 마음을 꿰뚫는 창'이라는 표현을 쓴다. 소설의 진행 과정을 보면 이 이름 들이 왜 반복적으로 불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육신과 정신이 순화된 신비롭고 새로운 존재인 연기 인간 페렐라는 등장하는 순간부터 왕을 비롯한 왕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신과 비견되는 추앙을 받는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단조롭기만 한 그의 말은 계시요, 구원이다.  


재미있는 점은 페렐레는 거의 말이 없다. 화가, 사진사, 은행가, 시인, 박사, 철학자, 대주교, 왕궁의 하인 등 페렐라를 찾아온 이들은 페렐라가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얘기를 하지만,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성공, 대중의 인기 등을 탐하는 속내를 교묘히 감추며 자신들의 주장만 강화하고 정당화한다. 말 끝에는 한마디도 대꾸를 하지 않은 페렐라에게 고맙고, 감사하고, 존경한다고 말한다. 또한 다과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페렐라에게 질문을 하지만 그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 역시 페렐레 뿐 아니라 타인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제 말만 할 뿐이다. 사회적 갈등의 원인 대부분이 경청의 부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비혼이든, 기혼이든, 혹은 외도 대상자든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자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남자들은 지적 허영을 부리며 교양을 과시하면서 여자들을 외모로만 평가하며 낮잡아 보고,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여성들은 괜찮은 남자들의 청혼을 기다리는 게 전부다. 여러 여성들의 발언을 통해 당시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차별, 정략결혼, 성에 대한 내밀한 고민, 성정체성에서 오는 혼란과 번민, 드러낼 수 없는 성욕과 관능 등 여성이 갖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페렐라가 내려간 도시는 왕이 죽으면 가장 부유한 시민이 왕좌에 오른다. 나라의 금고에 금을 가장 많이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이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이다. 왕을 죽인 자는 새로운 왕에게 은총을 받고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의 신분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지경이니 돈이 많은 자들은 왕을 꿈꾸고, 꿈을 이룬 순간부터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세상의 주체는 과연 누구(무엇)일까?  


ㅡ 


일방적 추종이 흔들리는 계기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아주 사소하게 시작된다. 분노에 찬 근거 없는 짐작과 비방, 혹은 농담처럼 흘리는 말 한 마디 등 스치듯 가볍게 지나가는 의심은 귀와 입이 더해질수록 그 크기와 무게가 커지면서 과거의 기억들이 재편집된다. 간혹 누군가는 대중의 억지스러운 짐작을 제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을 왜곡하고, "누가 알겠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라는 무책임한 말들은 모든 것들을 이미 하나의 결론에 두고 있다.   


한때 페렐라를 추앙했던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과도하게 평가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연기 인간은 신적인 존재에서 악마의 자식으로 추락하고 만다. 정작 페렐라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단죄하는 데에 있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대중에게 페렐라에 대한 약간의 비난과 적개심만 뿌려놓으면 그만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존재, 무無에 '신'이라는 프레임을 씌어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 세상에서 가능한 멀리 둔다. 군중을 조종하고 죄의식을 손쉽게 씻어내는 데 이만한 수단이 없다. 


페렐라는 늘 그 모습 그대로다. 전혀 변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군중은 폭도가 되어 페렐라를 몰아 세웠다. 페렐라는 야유와 창피를 당하고, 비웃음과 경멸을 사며, 물리적 공격을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아무도 그를 보호하려 들지 않았다. 페렐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추앙했을 때도, 폭력적으로 가해할 때도 그 이유를 모른다. 도대체 왜?   


대주교를 비롯해 과거 펠레라를 구원과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이들 모두가 증인으로 나서서 그를 부정하고 비난한다. 그토록 경외했던 단어인 '가볍다'는 어느새 혐오 단어가 되어버렸다.   


페렐라는 왜 스스로를 '가벼운' 인간이라고 했고, 사람들은 한때나마 가벼움에 매료됐을까? 어쩌면 인간의 삶이, 세상사가 너무 무거워서 아닐까? 욕망, 질투, 사랑, 아름다움, 부富, 권력 등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치고 어느 것 하나 무겁지 않은 것이 없다. 삶의 무거움은 페렐라가 왕궁을 출발해 도시의 중심 도로를 가로질러 포르타 칼레이오에 도착하는 동안 걷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사람들의 욕설과 비웃음과 경멸을 감내해야하는 그 길이 마치 인간의 인생 행로 같이 느껴졌다. 



1911년에 쓰여진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와 군중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 투영해도 전혀 괴리가 없다. 또한 이념의 전쟁 시대였던 20세기를 빗대어 볼 때 이렇게 적절한 소설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책소개에서 언급했듯 이탈로 칼비노의 느낌이 곳곳에서 보여진다.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을 비롯한 '선조 3부작'의 주인공들에게서 '연기 인간'의 면면이 보이고, 가상의 두 도시에 대한 묘사는 칼비노의 소설들에서 표현된 도시들이 연상된다. 환상문학이라는 공통점에도 이 두 작가가 그려낸 작품의 맛은 사뭇 다르다. 팔라체스키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었기에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그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주제에 접근한다면 칼비노는 좀더 은유적이고 해학적이다. 읽으면서 칼비노의 작품들을 부분 발췌해 읽었는데, 비교하며 읽는 맛도 제법 쏠쏠하더라는. 


좋은,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작가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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