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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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DANT IN THE KITCHEN》

이렇게 허당기 가득한 까칠함이라니...... . ㅎㅎ

줄리언 반스 작가의 사진을 보면 꾹 다문 입에 옅은 미소를 띈, 적당한 이마의 주름은 영국 신사 느낌이 가득하다.

그동안의 글들도 그렇지만 이 책도 썩 말랑말랑한 글은 아니다. 하지만 투덜거림 작렬하는 이런 유쾌한 내용은 내가 읽어본 작가의 책 중에서는 처음인 듯 하다.

책을 다 읽은 후 표지를 다시 보자니, 불만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난다. 그의 불평이 들리는 것 같다.

31.

훌륭한 요리사가 되는 것과 쓸 만한 요리책을 집필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후자는 소설처럼 창의적인 공감 능력과 정확한 표현력을 필요로 한다. 대부분 사람들의 삶에는 소설로 쓸 만한 내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요리사들에게는 요리책으로 쓸 만한 것이 없다.

레시피에서 계량이나 (과)채소의 크기를 언급할 때 한 '덩이'라든가 포도주 한 '잔', 혹은 '중간' 크기의 양파에 대해 불만스러워(불안하니까)하는 부분에서는 폭풍 공감을 할 수 밖에. 엄마나 할머니께 요리(라고 하기엔 심하게 민망함)를 배운 나로서는 늘 불만이였던 것이 계량이었다. 한 국자, 한 컵 등 기구의 사이즈도 모두 다르건만 두 분의 계량법은 늘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럴 수 밖에. 두 분은 부엌과 부엌 내 모든 용품을 공유하셨으므로.) 그 애매한 계량이 내 요리의 실패의 원인이라고 둘러댔기에 작가의 불만에 동의!를 외친다.

의외이고 조금 놀라웠던 건 작가가 백 권에 육박하는 요리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 무엇 때문에? 심지어 주스기도 없는데 주스책은 왜? 읽다보니 요리책을 선택함에 있어 실패를 많이 한듯 하다. ㅎㅎ 그래서 독자들에게 요리책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74.

요리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교훈은, 요리책이 아무리 솔깃해 보여도 어떤 요리들은 반드시 음식점에서 먹어야 제일 맛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디저트가 위의 사항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빵이 그렇다. 익숙한 두세종류를 제외하면 빵이 아니라 떡이 되어버린다.

78.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시간도 문제다.

내 말이...... . 레시피대로 시간을 맞춰도 늘 넘치거나 모자란다. 그래서 감으로 하면 또 폭망. 결국은 내가 왜 이걸하고 있나. 이 시간이면 책 두 권은 읽었을 것을... 이러고 있다.

101-102.

요리책의 책장들에(...) 가지각색의 잡다한 자국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그 책에는 명예다.

나의 요리책 책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박한)에 꽂혀있는 책들 중에 요리의 흔적이 남아있을 만큼 명예로운 책은 얼마나 되려나? 작가가 소장한 요리책의 1/10 정도만 가지고 있는데도 나는 크게 활용을 못하고 있다.

110.

최고의 책은 저자를 알지도 못하는 독자들까지 저자의 친구라고 믿게 만드는 책이다.

138.

요리한다는 것은 법석 떠는 과정을 거쳐 불확실성을 확정성으로 변형시키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요리를 한다고 부엌에서 한참 분주하게 움직이다 뒤를 돌아보면 뭔가가 한가득 벌려져 있다. 정리를 하고 완성품을 식탁에 올리면! 애걔...... . 이 노고의 과정을 먹는 이들이 알아줘야하는데 말이다. ㅎㅎ

164.

요리는 즐거움이 전부여야 하지 않을까? 계획을 세우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할 기대감에서 오는 즐거움, 지나치게 자축하지 았는 흐뭇한 회상의 즐거움. 하지만 그런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가.

친구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놓고 메인 요리인 포르치니 라자냐를 를 식당에서 주문 후 굽기만 한 후 자신이 요리한냥 시치미 떼는 줄리언 반스는 상상이 안된다. 심지어 레시피를 알려달라는 친구에게 자신만만하게 알려주는 모습이라니......

또한 사용하지도 않고 사용할 예정도 명확하지 않은 주방용품을 버리지도 못하고 창고에 던져놓는 모습과 요리도 요리지만 아름답고 효율적인 주방을 꿈꾸는 작가의 모습은 여느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아 웃음이 난다.

꿈의 부엌을 소망하지 말라. 그러한 부엌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에 걸맞는 요리를 해야한다는 스트레스와 요리를 망쳐도 변명거리가 없어 곤란할 것이니. 큭큭

줄리언 반스가 요리라니...... . 라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포개졌다. 요리를 통한 사람에 대한 애정, 도덕성, 추억, 소통 등 오래 전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안에 나와 함께 했(었)던 이들이 떠올랐다. 이번 주말에는 '그들'을 초대해 오븐에 닭이라도 구워야겠다.

좋은 요리란 일상생활의 간단한 음식을

성실하게 만드는 것이지,

뚜렷한 목적이 없는 진수성찬이나

진기한 요리를 전문가처럼

훌륭히 조합해내는 것이 아니다.

조지프 콘래드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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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도둑 - 아름다움과 집착, 그리고 세기의 자연사 도둑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박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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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소유하려 한다.
/ 마이클 소마레 (파푸아뉴기니 총리) 
 
 
책의 뒷표지에 보면 김중혁 소설가는 도서관 사서가 이 책의 분류 작업을 할 때 고생깨나 할 것 같다고 썼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윈과 월러스를 언급하며 진화론과 새를 통한 인간의 사회 변천사를 다룬 인류사, 플라이 타잉이라는 한 분야의 오타쿠들의 세계, 명망있는 음악학교 학생이자 플루트 연주자인 19세 청년의 범죄, 그에 대한 진실과 회수되지 않은 새를 찾기 위해 모든 것들을 쫓는 미스터리 탐정물 등 이 책에는 여러 분야가 망라되어 있다. 
 
이 책은 에드윈 리스트라는 19세 청년이 자연사박물관에 소장된 299점의 새(박제)를 훔쳐갔다는 사실과 1년이 지나서 체포됐지만 집행유예 12개월에 그친 그의 재판, 이후 에드윈의 범행과 재판에 대한 진실이 큰 줄기다. 
 
에드윈은 어린시절 우연히 플라이 낚시 타잉에 대해 알게 되고 그것에 매료된다. 타고난 재능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플라이 타잉에 점점 깊이 빠져들면서 '진품(깃털)'을 향한 욕망은 커져만 간다. 그러던 중 트링박물관에 가장 많은 수의 조류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급기야 박물관 유리창을 깨고 훔쳐 내기에 이른다. 
 
먼저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박물관의 소장품을 훔친 에드윈을 논하기 전에 인류의 탐욕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가야하지 않을까? 
 
사람은 여러 이유로 자연을 그냥 두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발전, 지적 호기심, 아름다움을 향한 집착, 상업주의 등 명분도 각양각색이다. 장신구를 치장하기 위해, 권위를 자랑하기 위해, 한겨울 따뜻함을 위해, 이제는 취미를 위해서 가죽을 벗겨내고 깃털을 뽑아댄다. 그렇다면 에드윈에게 거리낌없이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 얼마나 될까? 자신의 잘못은 박물관 유리창을 깬 것 뿐이라는 그의 말에 어떤 답을 해줄 수 있으려나. 
 
열대에서 사투를 벌여가며 수만종 표본을 수집한 월리스 조차도 '살아있는 생명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 자연의 경이로움을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인지도. 
 
이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2007년이다. 그런데 박물관 유리창이 깨져도 달려오는 경비원 한 명 없고, 심지어 다음날 깨진 유리창이 발견됐음에도 소장품 분실 여부도 확인하지 않는 박물이라니! 에드윈은 절도 후 기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그것도 박물관에서 사용한 학명 그대로. 평소와 다름없이 등교를 하고 연주 연습을 했다. 그리고 방학이 되어 벽장에 깃털을 보관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읽는동안 복장이 터진 건 나만일까. 
 
에드윈 리스트. 이 사람에 대한 진실 여부는 정확하게 단정할 수 없다. 다만 5년간의 정황으로 유추만이 가능할 뿐.  
 
시작은 플라잉 타이였다. 진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 그래서 싹튼 탐욕. 
 
"가짜라는 것을 아는 순간 맥이 빠지잖아요. 여기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예요. 저도 그렇고요.(p349)" 
 
하지만 에드윈은 그 외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가정 상황과 새로 구입해야 하는 플루트 등 돈이 필요했고, 깃털을 판매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여행 등 여가를 즐긴다. 전혀 양심의 가책없이. 에드윈은 절도 직후에도 잠시나마 경찰에게 잡혀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 '훔쳤다'는 행위에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물론 이 부분 덕분에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아 집행유예를 받아냈지만. 
 
297.
"저는 제가 도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저는 도둑이 '아니예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요. 지갑이 떨어져도 저는 가져가지 않을 겁니다. 지갑에 신분증이 들어 있으면 어디 찾아줄 만한 곳에 갖다줄 거라고요." 
 
318.
에드윈은 자기가 물건을 훔쳐 온 곳은 개인이 아니라 기관이고, 그 기관은 이제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 아니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건 발생 5년 후, 저자와 에드윈의 인터뷰를 읽다보면 이 사람이 플라이 타잉과 플룻 연주에만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듣는 사람은 납득이 안되지만 자신만의 논리가 구축되어 있고, 타인을 읽는 눈이 남다르다. 첫 만남에 자신을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가 유도하는 질문에 맞는 행동을 즉흥적으로 해낸다. 뿐만 아니라 사교성이 부족하고 친구가 없는 롱의 심리를 이용해 그 자신도 모르게 범죄에 가담시킨다. 경찰이 현장에서 찾아내어 회수된 새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 걸까?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에드윈. 그는 어떤 사람일까? 에드윈과의 인터뷰와 롱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훅 올라 온 분노는 내 몫인가 보다. 
 
189
그가 훔친 새들의 가치는 거의 100만 달러에 달했다. 게다가 그는 밀거래로 멸종 위기에 처한 새들을 보호하는, 모든 국제 협약을 어겼다. 

 
이제 남은 이들은 구매자요, 방관자였던 사람들.
그들은 에드윈이 온라인에 깃털 판매를 올리자 고가로 구매를 했다. 그를 칭송해마지 않던 이들이, 그가 체포된 후 비난의 말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저자가 남은 깃털 회수를 호소하기 위해 글을 올리자, 불편함을 드러내고 게시한 글은 삭제한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사람들. 결국 내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행동을 누군가 대신해서 거기에 결과물만 득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 이들의 행동이 불편한 건, 그저 나쁘다고 생각해서만 일까? 
 
318.
플라이 타이어들은 자기들이 가진 가죽이나 깃털이 박물관 것이 아닌지 걱정하면서도 큐레이터들이 주장하는 사라진 가죽의 개수는 허수에 불과하다며 양심의 가책을 덜었다. 나는 누군가 책임을 느끼고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시인해 주기를 바랐다. 
 

 
 
저자는 이 사건을 지식이냐 탐욕이냐로 정의했고, 이들 사이의 전투에서 탐욕이 승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지식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탐욕 중 하나이지싶다. 호기심이 남달랐다는 월리스. 그의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그를 말레이제도로 향하게 했고, 학자로서의 욕망이 살아있는 생물을 표본화 시켰다. 
 
인간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알 수 있다는 오만함.
그 한계의 끝이 있기는 한건가......?

 

 

 

 

 

 

 

 

출판산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지극히 사적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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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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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성의 고리>
- W. G. 제발트

한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992년 8월,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함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퍽주로 도보 여행을 떠났다.
(첫 문장)

공허함을 달래고자 떠난 여행. 1년 후 화자는 그 여행에서 여러 파괴의 흔적들을 보고 먹먹한 전율로 인해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그가 전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대인 학살,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전쟁과 폭력, 그로인한 도시 파괴. 문명화라는 명분을 내세운 침략, 사유재산과 자본주의가 장악한 대규모 산업에 의한 영세 산업의 몰락, 그리고 자연(생태계) 파괴.

205.
아니,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소리도, 어떤 날도 없었다. 그리고 들릴락 말락한 작은 소리로 장송행진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밤은 끝나가고, 여명이 다가온다. 저 멀리 창백한 바다 위의 섬에서 싸이즈웰 발전소의 묘처럼 보이는 마그녹스 원자로의 윤곽이 드러난다. 도거뱅크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 오래 전에는 라인강의 삼각주가 있었고 범람된 모래 위로 푸르른 초지가 자라나던 그곳에서.


소설에서 화자는 이러한 사건들에 실존 인물을 기억 속으로 또는 현재에 불러들여 허구의 인물들을 만나게 함은 물론 사용된 사진 또한 실제와 허구가 교묘하게 섞여 있다.

뼈단지와 관련해 매장 형식을 논한 토마스 브라운을 비롯하여 콩고강을 왕래하는 기선의 선장으로서 제국주의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던 작가 조지프 콘래드, 권력의 늪에서 끝까지 헤어나오지 못했던 서태후, 시인 엘저넌 스윈번과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낭만주의 문학가 프랑수와 샤토브리앙까지. 작가는 화자가 되어 이들을 통해 지나온 역사를 비판하고 성찰한다.

96.
토마스 브라운은 유골단지 매장에 대한 그의 논문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들 무렵 미국의 사냥꾼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난다고 썼다. 브라운은 이어서, 질질 끌리는 긴 옷자락처럼 밤의 그림자가 지구를 쓸고 지나가고, 해가 지면 세상이 한 구역씩 줄줄이 드러누우므로, 지는 해를 계속 따라가면 우리가 사는 행성이 언제나 사투르누스의 낫이 쓰러뜨리고 거두어 들인 시신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썼다ㅡ그런 지구란 간질병에 걸린 인류를 위한 끝없이 긴 묘지일 것이다.

145.
코르제니오프스키는 그가 겪어야 하는 고생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단지 그가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콩고에 저지르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146.
이곳의 모든 것이 싫습니다. 사람들도, 사물들도 모두 싫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싫군요. 아프리카 상인들과 거래업자들은 비열한 본능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 온 것이 후회되는군요. 그것도 아주 비통하게. (코르제니오프스키)


화자는 길을 잃기도 하고 멜랑콜리해지는 여행을 하면서 역사는 힘의 과시와 파괴로 점철되어 있으며, 다수는 이를 묵인함으로 동조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또한 문명과 진보라는 명분 안에서 자행되는 행위는 국가와 사회의 이익에 묻혀진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172.
그들(영국)이 원명원을 불태운 진정한 이유는, 중국인이 미개하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보여주는, 현세에서 창조된 이 낙원이 고향에서 끝없이 멀리 떨어져 강요와 궁핍과 갈망의 억압 밖에 알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어처구니 없는 도발로 비쳤던 데 있었을 것이다.

278-279.
우리 사회의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남겨놓은 금속과 기계의 쓰레기더미 사이를 돌아다니는 미래의 이방인처럼 나 또한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 여기서 살고 일했는지, 벙커 안의 원시적인 장비들과 천장 아래의 철제 궤도들과 아직 군데군데 타일이 붙은 벽에 걸린 괭이들, 쟁반 크기의 물뿌리개, 승강장과 하수구 따위들이 어디에 쓰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점점 더 눈을 파고드는 역광 속에서 문득, 사라진 지 오래인 풍차들이 어두워져가는 풍경 속 여기저기서 무겁게 진동하며 날개를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작가는 감정이 격하지 않은 절제된 문장으로 내용을 펼쳐 놓는다. 이러한 역사가 새로울 것 없이 늘 그래왔다는 듯이. 제국주의에 의한, 개인의 삶을 연소시켜 이뤄낸, 문명의 발전과 풍요가 과연 올바른 길인지 생각해 보라고 독자에게 툭! 던진다.

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짐작건대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서 있다. 아마도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

역자는 토성의 고리가 토성의 힘에 의해 파괴된 달의 잔해들이 듯, 화자가 여행했던 폐허의 잔해는 힘에 의해 파괴된 것들임을 말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잔해들로 이뤄진, 그래서 얼만큼이나 두꺼운 고리에 둘러쌓여 있을까.


처음 접하는 작가다.
찾아보니 1995년 출간된 작품이고 우리나라에는 2011년에 처음 출간됐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작품을 몰랐을까? 1944년 독일 출생이지만 1966년에 영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독일문학 교수였고 작가로서 십여년 동안 글을 써서 작품은 많지 않다고.

청소년 시절에 전쟁과 유대인 학살에 대해 침묵하는 부모 세대에 분노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전쟁과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한 그의 성찰이 남다르다.
다른 작품도 찾아서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사족.
소설, 토성의 고리!
너의 정체성은 무엇이냐?!








[소설 속 문장]

31.
병이 들어 기형적으로 성장한 것들이나 병적이라는 점에서는 조금도 뒤지지 않는 왕성한 발명 능력으로 자연이 자신도 자신의 지도 안 모든 빈 곳에 채워넣은 온갖 기괴한 것들에 우리의 관심이 주로 쏠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낙원을 꿈꿀 용기를 읺어버린 것이다.

43.
한 시대가 끝나는 건 한 순간의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60.
(독일 출신 수공업자는) 가끔씩 자신은 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지 스스로 물어보게 될 때마다 거대한 저택과 호화로운 배를 가졌지만 결국 비좁은 무덤에 묻힌 그 암스테르담 상인을, 마지막 가는 길을 자신도 함께 배웅해주었던 그 상인을 떠올렸다.

70.
여자들이 청어의 내장을 빼내고 크기에 따라 분류한다. 다음으로 바다의 쉴 줄 모르는 방랑자들은 열차의 화물칸에 실려 지상에서의 마지막 운명을 완수하게 될 곳들로 수송된다.

180.
열심히 일하고, 기꺼이 죽고, 짧우 시일 내에 마음대로 번식시킬 수 있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목적에 맞게 활동하는 데만 열중하는 누에들이 황태후에게는 이상적인 백성들로 보였던 것이다.

182.
되돌아보면 역사란 해변으로 거듭 몰려오는 파도처럼 우리를 덮치는 불운과 시험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 가운데 어느 한 순간도 진정으로 근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서태후)

200.
나는 검게 반사되던 노간주나무가 차례차례 불의 혓바닥에 닿자마자 마치 부싯깃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둔탁하게 폭발하듯 순식간에 불길을 일으키고, 곧이어 고요하게 흩날리는 불꽃 속에서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309.
나무들은 아직 너무 작아서 내가 나무와 태양 사이에 서면 나무에 그림자를 드리워 준다. 하지만 후일 다 자라고 나면 나무들이 내게 그림자를 돌려줄 것이며, 내가 나무들의 유년 시절을 돌봐 주었던 것처럼 나무들은 나의 노년시절을 돌봐 줄 것이다. 나는 나무들에 결속감을 느끼고 있고, 그들에게 소네트와 비가와 송시 들을 바친다. 나는 아이들의 이름처럼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고, 언젠가 나무들 아래에서 죽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282.
끝없이 직선으로 뻗어나간 길을 걷는 동안 자동차라고는 한 대도 보지 못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외로이 걷는 것이 즐거웠는지 고통스러웠는지 나 스스로도 모르겠다. 때로는 납처럼 무겁고 때로는 새털처럼 가벼운 시간으로 기억되는 그날, 구름이 가끔 약간씩 틈을 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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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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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 오테사 모시페그


1964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일주일 앞둔 금요일.
스물네 살 아일린 던롭은 X빌에 살고 있고 십대 소년들을 위한 민간 청소년 교정시설인 무어헤드에서 비서 업무를 맡고 있다.

어머니는 아일린이 열아홉 살에 돌아가셨고, 언니는 건너 건너 지역에서 어떤 남자와 동거 중이며, 아버지는 전직 경찰관으로 교회를 갈 때를 제외하면 술로 세월을 보내는 알콜중독자다.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언니 사이에서 편애를 당했던 아일린. (정작 술꾼 아버지의 뒷치닥거리는 언니가 아닌 자신이 하고 있건만 아버지는 여전히 아일린에게 독설만 퍼붓는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시선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라고 여기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교도관 랜디를 짝사랑할 뿐만 아니라 스토킹까지 하고, 그를 상대로 야릇한 상상을 즐긴다. 종종 사소한 절도를 재미로 여기며, 죽이고 싶지만 죽기를 바라지 않는 아버지와 집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며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언제 실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크리스마스 이브 사흘 전 월요일.
무어헤드 교도소에 새로 부임한 교육국장 리베카. 아일린은 자신과는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다른 리베카를 본 순간부터 그녀를 동경하게 된다. 리베카의 친근한 말 한마디 한마디와 사소한 몸짓, 행동에도 혼자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아일린. 이제 아일린의 눈에 짝사랑 랜디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직 리베카만이 존재한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하나 뿐인 친구다.

급속도로 친해진 두 여인. 리베카는 아일린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 초대로 인해 아일린의 운명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일흔 살이 넘어 노인이 된 아일린이 자신의 운명을 바꾼 50년 전, 일주일 동안을 회상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젊은 시절 현관문 열고 나올 때마다 두꺼운 고드름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져 죽게 되는 상상을 하지만 아일린은 늘 살고 싶었다. 아버지를 죽이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지만 아버지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X빌을 떠나고 싶지만 용기가 없다. 자신을 조롱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욕설을 날려주고 싶지만 그저 삼킬 뿐이다.

아일린은 누구에게도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을 받은 적이 없고 누구와도 마음을 나눈 경험이 없다. 그래서 사랑이든 연민이든 그러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대상을 이상화하고 동경할 뿐이다.

유년시절의 정서적 결핍이 이십대의 아일린을 만들었다고 단정짓고 싶지는 않다. 큰 결핍을 겪었음에도 문제 없이 어른이 되는 이들도 있고, 보통의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도 성향에 따라 많은 갈등 요소를 안고 살아간다.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태도, 나약한 자신의 한 부분을 꽁꽁 싸매어 내면 깊숙한 곳에 숨기기도 하는, 제일 마음 편한 사랑이 짝사랑이라고 하니 한번쯤은 해봤음직한, 닮고 싶은 누군가가 있었던 경험.

스물네살 아일린은 방황하고 갈등하는 청춘의 단면 단면을 모두 끌어안고 있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 때문에 아일린을 지켜보는 독자는 불편하지만 비난할 수 없지 않을까. 조금은, 아니면 살짝, 기억 속 한 귀퉁이에 있는 누군가의 한 때가 떠올라서.


[소설 속 문장]
17.
나는 누구에게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여자애였다.

36.
세상에 나와 같은 이들, 다들 흔히 하는 말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게다가 소외되고 총명한 젊은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지구라는 이 이상한 행성의 생물체로 존재한다는 것의 기이함을 의식 또는 인식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굉장히 쓸쓸했다.

171-172.
X빌에 사는 젊은 여자였을 때의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만큼 깊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몰랐다. 누군가의 고통이 내 고통에 탐닉할 기회를 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공감하지 못했다. 이 부분에서 발달이 심하게 지체되어 있었다.(...) 내 가슴이 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아파야 하나? 갇혀 있고 고통받고 학대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였다. 진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오직 나.

229.
아버지가 보기에 내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는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딸의 의무가 아닌 무언가를 하는 것이었다. 나만의 의지가 있다는 증거는 최고의 배반으로 간주되었다.

310.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 건, 왜 어머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313.
다 지나고 나면 누가 누구보다 더 힘들었는지 헤아리기 굉장히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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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위엄 - 상 민들레 왕조 연대기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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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위엄(상)ㅡ민들레 왕조 연대기 1부>
- 켄 리우

다라 제도의 일곱 신과 티로 7국.
키지(밍겐 수리) 신의 자나, 투투티카(금붕어) 신의 아무, 루피조(비둘기) 신의 파사, 타주(상어) 신의 간, 루소(바다거북) 신의 하안, 피소웨어(늑대) 신의 리마, 그리고 카나와 라파(까마귀) 쌍둥이 신의 코크루.

본섬에서 떨어진 자나국. 자신들을 은근히 멸시하고, 본섬의 풍요로움을 누리는 6국을 정복하기 위해 자나의 레온 왕자가 일어섰다. 정복 전쟁의 성공으로 본섬은 자나국에 머리를 조아렸고 다라 제도는 '자나 제국'이, 레온은 절대지존 렌가(황제) 마피데레가 되었다.

마피데레 치세 말기.
황제는 병약해졌고, 숨죽여 복수와 권력을 노리던 자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친구이자 충신이라 믿었던 시종장 피라와 크루포의 배신을 시작으로 6국의 왕들과 백성은 반란을 시작한다.

이 거대한 역사의 두 인물, 쿠니 가루와 마타 진두.
민들레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쿠니, 국화처럼 기품있고 우아하며 자신의 신념이 곧은 마타.

목적지는 같았으나 지향하는 바가 달랐던 두 사람. 서로 다른 신분과 환경, 각자 어깨에 얹혀 있는 다른 소명과 무게감. 납득은 안되지만 이해하려 노력하며 허심탄회하게 술을 나눴던 의형제.

멸망이 보이는 자나 제국. 그 이후에 6국은 어떤 형태로 분리되고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 어떤 행보를 하게 될까. 그리고 두 영웅은 어떤 선택을 할까.


'한나라' 왕조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작가.
'초한지'를 골격으로 하는 이 소설은 <민들레 왕조 연대기 3부작> 중 1부 1권이다. 고대 중국 역사에 SF 판타지와 신화적인 요소까지 함께 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한 마디로 단정지을 수 없을 만큼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쿠니의 진가를 알아 본 지아, 가장 낮은 하층민으로 대변되는 미로 형제, 마타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핀, 긴 세월 복수의 칼을 갈아 온 피라,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키코미 공주, 시작은 원대 했으나 자신의 그릇을 넘지 못했던 후마, 시종보다 못한 어리석은 어린 왕 에리시, 그리고 글로벌 자나 제국과 자신의 영생을 꿈꿨던 마피데레.

이 등장인물들과 속도감 있는 스토리로 재미면에서 빠지지 않는다. 책을 펼쳐서 오른쪽 두께가 점점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로.

<종이 동물원> 이후로 나에게 있어 챙겨보는 작가가 된 켄 리우의 대하 3부작 소설. 전작이 워낙 좋았기에 큰 기대는 안하리라 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는. 2부 출간을 기다린다.



[소설 속 문장]


48.
마피데레 황제의 죄는 자연을 거스른 것, 우주 자체의 비밀스러운 작동 방식을 거스른 것이었다.

86.
"우주는 적이 될 운명인 것들을 친구로 맺어주길 좋아하나 봐요." (지아 마티자)

103.
"무기를 빼앗아 봤자 평화는 오지 않아. 인간들은 몽둥이로 돌로 싸울테고, 그것도 없으면 이와 손톱으로 싸울테니까. 마피데레가 불러온 평화는 두려움 덕분에 유지도는 것일 뿐이야. 썩은 가지 위에 지은 둥우리처럼 위태로운 평화지."

109.
"인간들은 그 교훈을 몇 번이고 거듭해서 배웠지만.... 제대로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아."

164.
운명이란 돌이켜보면 우연의 연속이 아니던가?

270.
"자기만의 인생보다 행복한 것은 없단다.(...) 그런 삶은 남이 적어 주는 대로 말하고 남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삶보다 훨씬 행복한 법이야. 너는 절대로 야망을 품지 말거라."
(리마의 왕인 지주의 아버지)

282.
만약 그들이 황릉 공사장이나 해저 땅굴 공사장에서 에리시 황제를 위해 하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면, '반란군'이라는 이름이 왜 필요한가 하는 궁금증이었다.

313.
진실은 남에게서 들은 세상이 아니라 실제로 뛰어든 세상에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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