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49 장면.
자네에게 많은 행복을 기원하지는 않겠네. 지루할 테니, 불행을 바라지도 않네. 민중의 철학을 따라 그냥 다시 한번 말하지. <오래 살게나>, 그리고 어떻게든 너무 지루한 삶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게나. 이 쓸데없는 소망은 내가 덧붙여 주는 것이네. 그럼, 잘 가게, 진심으로 잘 가게. 그리고 문 앞에 서 있지 말게. 문을 열지 않을테니. ('악령'에서)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라는 카뮈의 말, 이보다 더 나아가 '그런 형벌에 처해진 인간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도스토옙스키의 경고. 그런데 나는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의 기준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언급된 <죽음의 집의 기록>은 유형지에서의 노동이기에 이런 단정이 가능하지만, 현대인에게 이러한 고민이 갖는 무게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39 장면.
세상은 날이 갈수록 하나로 합쳐지고, 이로써 거리를 줄여 나가고 허공을 통해 사상을 전달하는 형제적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아아, 인류의 그 같은 결합을 믿지 마십시오. 자유를 욕구의 즈대와 신속한 충족으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왜곡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많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욕망과 관습과 비합리적인 망상을 탄생시켰기 때문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장면을 통해 저자는 유대와 연결의 차이를 지적한다. 현재 SNS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이 과연 유대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타인과의 거리와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연결이 될 수 있음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것처럼 자유를 욕구와 충족으로 왜곡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벼랑 위의 집
TJ 클룬 지음, 송섬별 옮김 / 든 / 202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532.
우리가 우리인 건,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이 삶을 어떻게 살기로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보통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괴물이라고 핍박하는 인물들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섬의 정령 채플화이트, 고아원 원장이자 출신을 알 수 없는 아서 파르나서스 , 악마의 자식으로서 적그리스도 종족인 여섯 살 루시, 어린 나이에도 얼굴에 수염이 나는 노움족 탈리아, 변신이 가능한 열여섯 살 샐, 형태가 불분명하고 촉수가 있는 메두소조아 천시, 희귀종 와이번 시어도어, 어린 숲 정령 피, 그리고 소심하기 짝이 없이 라이너스가 그들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괴물'은 과연 누구인지 독자는 알게 된다.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일방적 명령에 복종하며 시키는대로 일만 하면 만사형통이고, 동료가 처한 곤란한 상황을 방관하고 나아가 한낱 조롱거리로 삼으며, 다수의 생김새와 다르다는 이유로 편견을 앞세워 학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이어트 때문에 샐러드만 먹어야 한다는 라이너스의 말에 너도나도 몸을 동그랗게 부풀리고, 친구의 허물이나 행동이 의도된 것임이 아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며, 서로의 다른점을 개성으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존중하는 아이들.   



 
이 소설은 곳곳에 천진한 아이들을 통해 어른들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이 바다를 처음 본다는 라이너스에게 왜 바다를 처음 보냐고 묻자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바다를 보러 갈 시간이 없었다고 대답한다. 원하지 않는데도 샐러드만 먹어야 하는 자신이 행복하다는 라이너스의 말에 의아해 하는 아이들. 열심이 살고 있는 우리, 삶이 즐거운가요? 
 


마을 사람들이 고아원을 향해 쓴 비방문이 뗏목을 타고 숲으로 흘러들어 온 것을 본 라이너스는 마법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향한 편견과 차별을 목격한다.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문구를 써 넣은 깃발을 뗏목에 실어보내면서 처음으로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는 라이너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삶을, 혹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자신이 원하는 삶이 진정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의 시간을 갖는 이는 많지 않다. 상황에 떠밀려, 시간에 떠밀려 결정한  숱한 것들이 나 역시 얼마나 많았던가. 아서는 호기심이 결여된 삶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유머의 반대는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많은 시간을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 싶어서 조금 씁쓸하다.  
 


이 소설에서 짚고 넘어가는 또 한 가지는 집이라는 공간과 가족이다. 아서는 (소외 당한) 아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희망, 보살핌, 자기만의 장소, 어떤 두려움도 없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수 있는 집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후반에 라이너스가 최고위 경영진들 앞에서 여섯 명의 아이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는 장면에서야 독자들도 아이들의 사연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공감하고 이해하며 보듬어 줄 수 있는 존재라면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각성한다.  
 


또한 작품에서 '괴물'로 취급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심지어 멀쩡히(?) 마법아동관리부에서 일하는 라이너스나 마르시아스섬의 시장인 헬렌조차 소설 밖 현실에 존재한다면 억압당하는 소외계층이었을 터다. 그러나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마법 아동을 꾀어내 퇴마술을 하고, 무턱대고 괴물로 몰아붙이며 어린아이에게 총구를 들이미는 마을 주민 역시 '괴물'이기는 마찬가지다. 
 


소설 초반, 마법적 존재들이 보통의 인간에게 동화되어야 한다는 라이너스의 주장에 아서는 왜 동화되어야 하며, 동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이고, 동화를 강요당한 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라이너스는 이에 대해 동화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조치라고 반박하는데, 과연 그 '공공의 이익'에 동화를 강요당하는 자들의 이익도 포함되어 있는지를, 독자는 되묻고 싶어진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려면 먼저 소수의 마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아서의 말이 와닿는다. 소설은 버티는 것 말고 살아가는 삶의 중요함을 얘기한다. 소설의 마지막, 돌아온 라이너스가 우는 탈리아를 번쩍 안아 올리는 장면에서 덩달아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한때 이영도 작가의 전작부터 나니아 연대기, 호빗, 레모니 스니켓, 해리포터 시리즈까지 일정 기간 동안 열혈 판타지 독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기가 지나고 켄 리우, 신서로 등 사이사이 읽고 있으나 2,3년 전쯤부터는 의도치 않게 손절이라고 할 정도로 판타지와 거리가 먼 독서를 해왔다. 정말 오랜만에 읽은 판타지다.  
 


읽으면서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업>이 생각났다. 물론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그때 느꼈던 따뜻함과 뭉클함이 다시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인생에서 때로는 판타지가 필요하다.  
 
 


420.
우린 모두 각자의 미눗방울 속에 안전하게 갇혀서, 이렇게 넓고 신기하기만 한 세상을 만나지 못하는 거야. 얼마나 손해인 줄도 모르고. 하지만 비눗방울 속에 갇혀 살기란 참 쉬워. 반복되는 일과는 평온을 주고든. 그러다가 비눗방울이 터지고 비로소 정신을 차리면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게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차마 믿어지지 않는 거야. 심지어 겁이 나기도 해.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시 그 비눗방울 안에 들어가기도 하지.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7.
바렌카, 도대체 무엇이 날 파멸시키는 걸까요? 나를 파멸하게 하는 건 돈이 아니라 삶의 이 모든 불안, 이 모든 쑥덕거림, 냉소, 농지거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불안은 누구나 평생 동안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녀야 하는 삶의 일부임을 알았기에 불안에서 해방되려는 노력보다 오히려 불안을 더 깊이 탐구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타인의 조롱과 비웃음, 그리고 인간을 생명체보다는 기능체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따라오는 열등감이다. 불안이 커지면 세상에 대한 적의가 커지고, 당면한 문제에서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순간, 불안은 혐오로 확장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이에 대해 <가난한 사람들>의 마카르, <분신>를 통해 말하고 있다. 
 
 


- 학창시절부터 따라다니던 별명 중 몇 개가 '투덜이'와 '걱정쟁이'였다. 우스갯말로 땅 꺼질까봐 길은 어떻게 다니냐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데 의외로 낙관적인 면이 많아 주변 사람들이나 나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재되어 있는 불안감이 큰 사람임은 분명하다. [불안] 부분을 읽으면서, 불안이 삶의 일부분이라는 저자의 말씀이 심하게 와닿는구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7년, 트랜스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보호(후견)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예루살렘 시장이었던 후세인 박사(저자의 첫째 큰아버지)는 아랍-미국 협회의 지시에 따라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을 만나러 간다는 이스마일(저자의 아버지) 편에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다는 답신을 보낸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영국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이어서 요르단의 굴레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더구나 요르단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결국 요르단이나 영국이나 별반 차이가 없음이었기에 그만큼 자주적 독립을 열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서신이 요르단 국왕에게 전해진 그 순간 유엔 총회가 팔레스타인 분할에 찬성한다는 발표가 보도됐다. 1947년 11월 29일이었다. 이로써 새롭게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은 팔레스타인을 희생시켜 유대국가가 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이 결의안은 또 다른 희생을 불러오게 만드는데, 아랍인이 다수인 땅에서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를 가능케하 하기 위해서 아랍인을 추방하는 조치가 이어진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닥친 재앙은 강력한 시온주의를 넘어서 미국, 소련, 미국과 손잡은 아랍 국가에 의한 결과이다.  
 
​ 
 
1949년 여름에 이르면, 팔레스타인 국가는 황폐해지고, 사회는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신생 이스라엘 국가가 된 지역에 사는 아랍 주민의 80퍼센트 정도가 자기 집에서 좇겨나고 토지와 재산을 잃었다. 팔레스타인인 가운데 최소한 72만 명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된 요인들에는 외국의 간섭, 아랍 내부의 의견 차이와 경쟁, 팔레스타인의 근대적 국가 기관의 부재가 있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동안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영국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후원자들에게 접근하는 외교적 조정을 기민하게 추진했다. 또한 군사 역량을 계속 증강하면서 1944년에 처칠의 지지 아래 영국군 내 유대인대대 그룹(시온주의 군대)을 구성해 상당한 수준의 훈련과 전투 경험을 함으로써 앞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질 충돌에 상당한 우의를 확보한다. 그와 반면, 위에서 언급했듯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사분오열된 상태였고, 많은 지도들이 망명 상태거나 영국에 구금되어 있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1만 2천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군에 자원 입대했지만 유대인처럼 단일한 부대를 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전쟁 경험을 활용할 수 없었다.  
  
 

- 유엔의 설립 목적은 전쟁 방지, 평화 유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의 국제협력 증진이다. 도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한 평화 유지이며, 누구와의 극제협력인가. 유엔 빌딩 소재지가 미국 뉴욕에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 아랍민족기금이 1944년에 창설됐는데, 유대민족기금은 이미 50년 전에 시작됐다고 한다. 1930년대 중반에 팔레스타인 식민화를 위해 이미 350만 달러를 모았다는 사실은,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 식민화를 얼마나 오래 전부터 구상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팔레스티인의 정보 부재에 대한 안이함과 구성원들의 분열을 탓해야 할지, 순박함을 탓해야 할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