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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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리나의 장남 마티아스 로드리게스 데 산타 크루스는 유럽의 유명 박물관을 모두 섭렵하여 예술에도 일가견이 있고 고전 시인이라면 누구의 시든 한 편쯤 읊을 수 있을 만큼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집 안의 서재를 이용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댄디하게 말끔한 차림새와 자유로운 영혼까지,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최고의 배필감이라고 여겼지만 정작 본인은 독신주의자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성적 욕망을 해결하기 위해 거리낌없이 직업 여성을 찾았다.  


마티아스는 시를 무척 좋아하고 시구의 아름다움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비관적이고 음울한 광기에 매료되어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이런 면에서 세베로와는 아주 달랐다. 서른 살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는 마티아스 때문에 골치를 앓고 파울리나와 펠리시아노.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사촌지간이다. 이성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이며 보이는 것을 믿는 세베로, 지나치다싶을만큼 감성적이고 스스로를 학대하고 위악을 덮어쓰며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마티아스.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인생의 행로를 걷게 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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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벽지 - 샬럿 퍼킨스 길먼 단편선 에디션F 4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임현정 옮김 / 궁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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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누런 벽지>를 포함한 단편 스무 작품이 수록됐다. 작가 본인이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사회개혁가였던만큼 수록작에는 우리가 부딪쳐왔던 고정관념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다. 작가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그 방식이 역설적이든 비유적이든 상당히 직접적으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휴식을 강요하고 신경과민이라고 강제하는 남편에 의해 정신적으로 파멸하는 여성, 여성의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한발 더 나아가 사교장에서 춤추고, 산책 몇 번 했다고 대뜸 청혼을 받아들여한다고 우기는 남성 등을 시작으로 당시 만연했던 여성 차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천사를 여성에 비유해 천사가 지성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열망하면서 한 종족으로서의 천사가 멸종했음을 말하는가하면, 실질적 가사노동과 양육을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가정의 경제 설계까지 여성이 거의 혼자 전담하면서도 가장의 역할과 경제적 권한은 남성이 독차지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자신의 인생을 찾기 위해 가출한 여성은 무조건 남자와 떠났을 거라는 근거없는 추측과 편견, 가사 노동과 육아로만 하루 일과가 이루어진 여성의 독백을 반어적인 감성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모성애가 본능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곤 하는데, <엄마의 자격>에서는 이를 두고 상당히 모순적이다 못해 어처구니 없는 설전이 벌어진다. 에스더는 마을 세 곳의 천오백 명에 가까운 인명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네 사람들한테 모성애가 없다는, 여성적이지 못하다는, 심지어 제 아이를 지키지 못해 아이가 마을 사람들의 짐이 되었다는, 그래서 그녀는 엄마 자격이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 숭고한 죽음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상대의 욕구를 인정하며 자유롭게 사는, 무엇보다 가족애를 넘어선 이타심을 가진 에스더 가족은 전혀 상식에 맞지 않는 별난 가족일 뿐이다.  



똑같이 일을 해도 가사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여성의 몫이다. 남편 혹은 연인을 사랑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 이유로 가사 출산 양육이라는 부담을 거의 혼자 감수해야하는 것이 타당한가? 청혼하는 여인의 예술성을 지지하기 위해 결혼 후 요리를 담당하겠다는 남성. 가사 노동을 분담하겠다는 이 남성의 친절함은 당연한 것임에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도 되는지를 자문하는 말다의 혼잣말에 더 씁쓸해진다.   


엘더 씨(엘더 부인의 계획)나 솔로몬 씨(솔로몬 가라사대)처럼 배우자의 말을 곧바로 납득하고 인정하는 사람은 드물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자신의 역량과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여성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누런 벽지>의 '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를 일이고. 이 책에서 <전혀 다른 문제로 바뀔 때>는 영리한 작품이다. 남성들을 앞에 두고 남녀의 입장을 바꿔서 서술하는데, 이 말을 들은 남성들의 우격다짐이 볼만하다. 이와는 다르게 작가는 <다섯 소녀>를 통해 여성들이 지향해야하는 지점을 짚는다. 


스무 편의 소설들을 전반적으로 봤을 때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여성의 경제력이다. 그는 여성에게도 그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돈과 경제활동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동업 관계>에서는 벌어다주는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사업을 하겠다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경제활동은 단순히 돈을 번다는 의미를 넘어 일 자체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또한 부부 서로가 원하는 일을 했을 때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는 비단 돈 뿐만이 아님을 강조한다. 소설에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 스스로조차 인지하지 못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여성들이 많다. 이는 당시 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능력이 사장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인 자립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성의 주체적인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전히 일 하는 여성보다는 전업주부가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고, 가사 노동에 금전적인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며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가사 노동과 육아는 개인이든 사회든 반드시 누군가가 해야 할, 방치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가족구성원이 공평성을 따지며 마지못해 나눠서 해야하는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 활동과 집안 일(가사, 양육, 교육을 포함한)의 균형을 잡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은 그 균형을 찾아가는 데에 있어서 우리의 고민에 얼마간의 도움을 준다. 다만 소설들이 출간된 시기를 고려할 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고, 확장시켜 사고하는 것은 독자 개인의 몫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 놓인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결국 균형의 노력은 어느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과 국가가 함께 움직여야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ㅡ 


비록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불편했던 점은 등장하는 하녀들마다 모두 흑인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하녀가 노예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 작품들이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 임을 감안할 때 부자연스러운 바는 아니지만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의식차를 좁히지 못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파블스 씨의 마음>은 현대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상황이자 우리가 생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남편은 자기의 욕구를 누르고 가족 부양에 온 힘을 쏟는다. 그런데 정작 아내는 현재 생활에 있어서 남편의 헌신에 대한 감사는 없다. 남편은 아내에게 구태한 여성성을 강요하며 혼자서 죽도록 일하고 중년이 넘어서는 인생무상을 토로한다. 아내는 가정 내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점점 잃어가면서 동시에 여러 면에서 지나치게 남편에게 의탁하는 자신을 자조한다. 결과적으로 길게 봤을 때 상대에 대한 헌신에 대해 감사하지도 않고, 두 사람 모두 만족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가정 생활이 달라져야한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을까.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소설이 맨 마지막에 실려 있어 좋았는데, 마치 앞의 소설들을 정리하는 느낌?이 들었다.  


새삼 멋지게 늙고 싶어졌다. 



사족.
노년에 접어든 여성은 자식에게 의탁하거나 남겨진 유산으로 살아갈 거라는 고정관념을 통쾌하게 깨트려준 모리슨 씨에게 박수를!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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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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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시절에 존경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세베로 델 바예는 어찌할 바를 모르던 어머니에 의해 카톨릭 학교로 보내진다. 그러나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온 아들을 어머니는 다시 군대에 보냈고 그는 예비역 장교로 제대했지만, 여전히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다녔다.  


당시 비타협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을 겪고 있었던 칠레는 젊은이 사이에 퍼져나가는 자유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귀족이자 극우파였던 델 바예의 집안에서 보헤미안처럼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세베로를 그냥 놔둘리 없었고, 집안의 어른들이 나서서 그를 미국에 있는 파울리나 고모에게 보내기로 합의한다. 그런데 벌로 보내는 미국행이었건만 세베레는 쾌재를 부른다. 보수주의자가 사탄이라고 믿으면서 칠레를 변화시키고 정화하고 싶었던 세베로는 미국에서 새로운 사상을 접하고 싶었던 차였다.  


세베로가 미국에 도착하자 파울리나는 그를 군대로 보내버리라는 집안의 지시와는 다르게 조카가 원하는대로 변호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세베로는 파울리나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장한다.  


ㅡ 


세베로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할아버지의 밀서를 뜯어서 먼저 읽고 바다에 던져버리고 위조해서 고모에게 보여주다니. 그 고모에 그 조카라서 그런가. 단박에 위조 편지를 알아챈 파울리나도 평범치 않고,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조카를 이해해주는 모습이 멋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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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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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수 년만에 재독이다. 
재독을 하리라 작심했던 이사벨 아옌데의 여성 3부작 중 두 번째로 읽는 작품이다. <영혼의 집>은 2년 전쯤? 재독을 했고, 사실 <운명의 딸>을 먼저 읽어야하는데 기회가 생겨 이 작품을 먼저 읽는다. 줄거리도 가물가물했는데 한 장 두 장 넘기니 새록새록 기억이 더듬어진다. 


ㅡ 


파울리나 델 바예는 편협하고 영혼이 가난한 가부장적인 칠레 지주 집안 태생이다. 철자법과 산수는 겨우 초보적인 수준의 교육만 받았고, 수를 놓고 기도를 하는 것 외에는 딱히 배운 게 없었음에도 그녀가 손을 대는 것은 모두 돈이 되었다.  


그녀는 열여덟 살 때 펠리시아노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 그는 칠레 북부의 은광 주인으로 잘생기고 야망 있는 청년이었다. 파울리나의 아버지 아구스틴 델 바예는 극우 보수당원으로서 서민 혈통에게 이끌리는 딸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파울리나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남편과 육체적 관계를 하지 않아도 부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젊은 시절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펠리시아노는 파울리나와 달리 나이가 들면서 매력을 더해갔다. 과거 서로를 지극히 사랑해 젊은 시절 함께 도망쳤던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서로에게 날선 신경전과 복수를 주고받았고, 펠리시아노가 뇌출혈로 쓰러져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때까지 싸움은 이어졌다. 그럼에 그들은 관계를 깨뜨리지 못했다. 


ㅡ 


인류사에 있어 남녀 차별이야 새로울 것도 없다할 수 있겠다만 아프리카 혹은 남미 문학에 있어 가부장적인 배경은 유독 심하다. 여성이 좀더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은 남미 문학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소설은 시작부터 도망치듯 미국으로 이민 와 부를 축적하는 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파울리나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데, 두 사람이 결혼 생활을 지속한 데에는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부부는 사랑, 그 이상의 무언가가 더 있어야만 유지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 말이다. 


그나저나 파울리나의 미다스 손, 돈을 읽을 줄 아는 감각과 수완, 부럽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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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트, 묘지지기
발레리 페랭 지음, 장소미 옮김 / 엘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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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를 마치고, 일단 이토록 길게 드리워진 여운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숱한 감정들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대체 그들은 그 마음들을 어떻게 담고 살았던 건지... . 


소설은 묘지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삶과 비올레트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커다란 두 개의 사건에 대해 필리프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관점에서 진행한다.  







 
아르덴 지방에서 부모를 모르는 채로 태어난 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의 문턱에 머물다 온 아이의 이름은 조산사가 급조해 지은 비올레트 트레네. 필리프와 결혼해 얻은 성, 투생. 위탁가정에서 자란 비올레트가 늘 꼿꼿하게 곧은 자세를 유지하는 이유는 부모의 부재 때문이다. 그것이 오히려그녀에게 척추의 지지대 역할을 했다.  


건널목지기였던 투생 부부는 1997년에 건널목이 자동화되면서 직장을 잃었다. 비올레트는 묘지지기가 되기 위해 남편을 설득했다. 비올레트가 숨막힐듯한 건널목지기의 업무를 하는 동안 필리프가 한 일이라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와 어울리는 것 뿐이었다. 묘지지기가 된다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 1997년 8월 15일, 투생 부부는 부랑시옹엉살롱 묘지에 도착했다. 비올레트는 비로소 편안해 졌다. 마치 자기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시작한 묘지지기의 일을 20년째 하고 있는 비올레트. 어느날, 어머니가 죽은 뒤 가브리엘 프뤼당이라는 사람의 묘 옆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겨서 그의 묘지를 보러 왔다는 쥘리앵 쇨. 죽은 남편이 묻힌 묘지가 있는데도 버젓이 다른 남자의 묘지 옆에 묻시고 싶다는 어머니의 사연을 들고 온 남자는 추도문 작성을 위해 비올레트에게 도움을 청한다.  


소설은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시작으로 이렌과 가브리엘의 긴 세월동안 이어진 러브 스토리와 비올레트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그동안 감춰졌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ㅡ 


간혹 리뷰를 쓸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독자가 읽어야만 감흥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에 섣부른 리뷰는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하는데, 이 소설이 그렇다. 도대체 나의 이 얕은 글솜씨로 소설 전체에서 전해지는, 이 짙게 눌러내리는 감정들과 촘촘한 고리들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난감하기만 하다. 


읽는 동안 비올레트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마음에 동화되면서 여러 번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나는 그곳에서 레오닌의 이름을 읽는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미워했던 필리프. 그가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소설 중반까지도 절대 악인처럼 느껴졌던 그 역시 어머니의 과보호로 인해 상처받은, 그래서 내면의 아이는 성장하지 못한 채 몸뚱이만 커버린 사람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중년이 넘어서야 자신이 진정 놓친 게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은 그를 보면서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왜 어리석게도 번번이 기회를 놓아버렸을까.   


이렌과 가브리엘의 사랑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영화가 생각났다. 소설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와 영화 <데미지>. ( 이 소설에서는 영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가 등장한다.) 인생을 물리적으로 함께 영위하지 않았으나 삶이 다할 때까지 서로를 놓지 않았던 두 사람(메디슨카운티의 다리)과 격정적 사랑 이후에 모든 것을 잃고 수 년이 지난 후 우연히 스치듯 지나쳐버린 만남을 통해 회한을 느끼는 남자(데미지). 나처럼 겁이 많은 사람은 상처받는 게 두려워 두 방식의 사랑을 모두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데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부부 관계를 지속하는 게 서로에게 괜찮은 건지, 모든 것을 잃어도 좋을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열정을 부러워해야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이 소설의 유쾌한 장점은 이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백작 부인이 있다는 것인데, 그녀는 아주 지극히 현실적이고 솔직하다).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 보이는 쥘리앵과 비올레트의 인연은 이렌에게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늘 얘기하듯 인생에 있어 옳고 그름이 언제나 명확하지는 않고, 인연 또한 장담할 수 없다. 어느날 길에서 우연이 시선이 마주쳤거나, 어깨를 스친 이들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누가 알겠는가. 알고보니 SNS에서 수없이 '좋아요'를 누른 사람일지도)? 


소설 종반에 드러나는 마지막 두 개의 반전. 그들의 아픔에 함께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나도 모르게 손이 저절로 입을 막게 된다). 비올레트는 묘지에서 타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치유받았다. 삶은 지속되기에,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사람을 살게하는 것은 사랑, 그리고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쥘리앵과 나탕, 비올레트처럼.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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