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해의 철학 -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
후지하라 다쓰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사월의책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7.
세계의 가치의 진정한 역전은 세계를 분쇄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세계를 비옥하게 하는 일에 존재한다.  



이 책은 생태학을 기본 줄기로 삼고 생물학 개념인 부패와 분해를 통해 과학, 경제, 철학, 문학, 교육, 환경 등 각 분야에서 우리가 간과했거나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외면해왔던 사회 현상들을 고찰한다.  









쓰레기란 어떤 특정한 사회경제 상황 속에서 그 물건의 최종 형태를 나타내는 말이고,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어떤 것의 생산량이 자연의 분해 능력을 웃돌 때 비로소 발생한다. 어떤 것의 속성이나 기능이 최종적으로 다 소진되어 운동의 방향성이 상실되고 마침내 사라져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흡수되고 이용되는 것을 생태학 세계에서는 '분해'라 부른다.  


'공통적인 것'의 부패를 초래하는 것으로 가족 제도와 민족주의를 든 네그리와 하트는 가부장적 문화의 확산,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지배를 강화하는 '제국'의 양태를 띠고 있다고 했다. '제국'은 자연적인 부분들을 대지로부터 분리하고 사유화 및 상품화함으로써 '부패'시킨다. 자연의 사유화는 사유 및 착취를 지속시키는 방패이며 이 점이 자연적인 부패와는 다른 차원의,즉 인위적인 '부패'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자연적인 부패력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데, 부패하지 않는다함은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쓰레기로 남아 지상에 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토지를 사유화함으로써 자연적인 부패의 기능, 즉 자정 능력을 소멸시켰다.  


저자는 부패로 부패에 저항한다는 모순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미 세계는 하나의 제국처럼 연결되어 있고, 농업조차 비물질적 노동으로 변화해감을 느그리와 하트를 통해 인정한다. 인터넷 테크놀로지와 그에 따른 인프라에 사용되는 여타 자재와 발전소는 부패하지 않는다. 저자는 부패하지 않는 것에 기반한 사회는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생명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제국'을 사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에 대한 답을 '분해'에서 찾는다. 이 부분을 짚어내는 대목에서 인간이 '먹는 객체'가 아닌 '먹는 주체'가 되어야한다는 주장이 인상적이다. 먹는 주체의 과정이 물건의 생산에서 폐기까지의 과정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어 말하기를 활성화시켜야할 것은 생산 과정이 아니라 분해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ㅡ 


저자는 카렐 차페크의 소설들을 짚어가며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를 비롯한 노동, 전쟁 등을 통해 분해와 재생이 약화된 인류에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얘기한다. 


카렐 차페크는 담담한 일상 속의 균열을 통해 엿보이는 이면의 세계를 꼼꼼히 묘사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임계 쪽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해주는 작가라고 평가한다. 그의 작품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 노동과 생활에서 벗어나 획득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자유 여부,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 전쟁의 존재 여부, 인간과 세계의 끝 등에 대해 고찰한다.  


저자는 문학적 고찰 뒤에 인간의 육체가 자연을 향해 분해를 이룩해가는 과정이기에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그 변화에 공명하는 감각과 정신이 성장한다면서 과도하게 생산 및 파괴되는 사회에서 순환되는 것은 물질이 아닌 화폐라고 지적한다. 또한 이러한 과잉 속에서 한 번 쓰고 버림의 가속적 순환에 있어서 인간도 예외가 아님을 지적하는데, 분해되기 쉽다는 게 반드시 약하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강조한다. 


ㅡ 


넝마주이를 아는가? 
저자는 넝마주이를 일컬어 상품 세계에서 하강해온 것을 다시 상품 세계로 되돌리기까지의 사이 공간, 즉 소유권 제도의 공백 지대를 치고 들어가는 일이라고 얘기한다. 지구 역사 안에서 분해 활동자로 영위했던 넝마주이가 지구가 폐기물에 매몰당하지 않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음을, 저자는 상기시킨다.


저자는 이보다 앞서 나무블럭 부수기 놀이를 동해 자연, 인간, 사회, 역사의 흥망성쇠를 분해라는 현상으로 확장해 들여다본다. 그리고 프뢰벨의 삶과 그가 개발한 교구와 유치원 및 교육 이념을 짚어가면서 불완전성, 자기 증식을 통한 무한성과 균형, 생산과 분해, 증식과 제어에 대해 고찰한다. 그런데 읽다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넝마주이와 나무블럭은 묘하게 일맥상통한다. 


ㅡ 


저자는 생태학의 잠재력을 인문학의 언어로 끌어내려고 시도한다. 그는 먹이사슬과 인간의 신분제 사회를 나타내는 피라미드 구조의 서열을 같은 선상에 놓으면서 먹히는 존재, 즉 하위 계급은 폄하될 존재인지 혹은 그 반대의 질문을 던지며, '분해자'는 과연 이 서열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탐구한다.  


생물들의 '장례' 모습을 통해 생명의 재탄생과 영겁의 반복을 짚고 생산과 소비와 분배를 대입하는데, 저자는 어떤 분류 체계도 생물 군집의 역동성을 단정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얘기하며 분해의 공동 작업에서 답을 찾으면서 부패와 분해는 상호 연대적 행위임을 포착하며 보완성에 주목한다.  


수리의 미학에서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물건을 만들어 파는 생산자 혹은 판매자 조차도!). 그럼에도 사양을 (아주) 조금만 바꿔서 하루가 멀다하고 초고속으로 신제품이 출시되는 이유는 당연히 '돈' 때문이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게 최우선하는 신자유주의 경제가 장악한 세상에서 수선이나 물건에 대한 애착과 추억은 감성팔이로 치부된다.  


저자는 앞서 부끄러움에 대해 얘기했다. 낡은 것, 고쳐쓰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닌 소비의 허영이 부끄러움의 대상이라는 의식이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산 시장만이 아닌 재사용 시장, 그리고 여기에 투입될 다양한 직종의 노동 시장이 활성화되어 신품과 구품이 보완성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쓰다보니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네...).   


ㅡ 


신품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직접적인 폭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우리를 통치하고 있다. 이 책은 이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사유하며 더불어 신품 문화의 취약점과 수선과 분해의 측면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인간은 어떠한 위치에 있든 모두 분해의 담당자다. 그럼에도 인류는 분해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발전이라고 간주하면 전진해왔다. 소위 근대화 혹은 문명화라고 불려온 것들은 대체로 분해력으로부터 이탈하는 행위였다. 우리가 대면한 작금의 사태가 그에 대한 증거다. 저자는 이제부터라도 하등하다고 여기는 동물들에게 배워야겠다는 결심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동의하는 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난한 사람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선영 옮김 / 새움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스토옙스키의 첫 소설이자 출세작인 이 작품은 가난한 중년의 남자와 고아 소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큰 줄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가난에 대한 이야기도, 애끓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돈이 없어 벼랑 끝에 내몰린 '인간'을 들여다 본다.  


두 남녀의 편지로 시작되는 소설은 바르바라의 과거를 서술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서간문 형식이다. 도입부부터 작가는 마카르의 편지를 통해 당시 러시아 하층민의 생활 환경을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도스토옙스키가 가난과 사람을 분리해 놓고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의 궁핍한 모습을 그려냈다기보다는 돈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그로인해 달라지는 모습들을 말하고자 했던게 아닐까싶었다.  


일단 마카르는 30년 근속에 행실이 바르고 성실한 하급관리다. 법규를 어겼다거나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적이 없으며 누구에게 비난받을 만큼 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벌이가 넉넉해 여유로운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먹고 사는 데에 큰 문제가 없는, 그야말로 사회 구성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는 인물상이다. 그런데 먼 친척뻘 고아 아가씨를 보고 사랑하게 되면서 헌신적으로 그녀를 돌봐준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카르가 바르바라에게 제 분수를 넘어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도 본인은 하숙비도 내지 못하고, 심지어 가불과 빚까지 얻어 요즘으로 치자면 파산할 형편에 놓인다. 이떄부터 마카르의 모습은 눈에 띄게 황폐해지고 자괴감에 빠진다.  


마카르는 푸시킨의 <역참지기>를 읽고 너무나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마치 자신의 얘기인 양 이입된다. 가난한 이들의 암울한 삶,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그들 방식대로의 비극을 안고 사는 귀족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저마다 불행을 안고 산다고 말하는 마카르를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자기가 쓰는 바로 이 소설 <가난한 사람들>이 지극히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하고자함은 아니었을까.   


마카르의 처지를 대변하며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단추다. 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마카르의 단추가 하필이면 상관 앞에서 뜯어져 나가고, 쉽사리 잡히지 않는 굴러가는 단추를 집기 위해 그 뒤를 쫓는 마카르의 모습은 돈을 구하기 위해 상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세상사 새옹지마라고 결국 이 난처한 상황이 그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그렇다면 마카르에게 헌신적인 사랑과 도움을 받는 바르바라의 상황은 어떤가? 그녀는 마카르가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록 말로는 돈을 아껴쓰라고 얘기하지만 그가 하는대로 다 따르며 호의를 다 받아들인다. 바르바라는 마카르가 파산에 가까운 상황에 처하자 그제서야 그를 호되게 나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를 안심시켜 달라고 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대놓고 돈을 융통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재미있는 점은 그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다. 마카라는 바르바라를 아기씨, 선녀님, 내 비둘기, 내 천사님 등으로 부르고, 바르바라는 마카라를 주로 친구님이라고 부른다. 편지의 내용상 분위기도 마카라는 바르바라를 연인보다는 숭배하는 느낌이 크고, 바르바라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있는 듯 느껴진다. 마카라는 바르바라를 사랑한 것일까? 


ㅡ 


위에 썼듯, 소설은 '가난'으로 인해 달라지는 인물들의 모습을 면밀하게 보여준다.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처세에 실패하고 경쟁에서 밀려나면 무능력한 스스로를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고 성격이 거칠어지며 자포자기하듯 건강을 돌보지 않는다. 사회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돈이 없으니 아파도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어렵고, 마치 기다렸다는듯 죽음을 받아들인다. 


마카르의 동료 예스타피 이바노비치는 시민의로서의 가장 큰 덕목은 '돈 버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궁핍한 사람에게 도덕은 그저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성실하고 정직하고 야망이 없는 것은 무능력을 넘어서 죄로 취급된다. 바르바라는 마카르에게 가난은 죄가 아니니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고상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 가난은 유죄다. 헌신으로 포장된 두 사람조차 경제적인 상황이 몰리자 슬슬 서로를 원망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편지는 어느 순간부터 신세 타령으로 바뀌지 않았나.  


다른 관점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르바라와 마카르의 대화에서 나오는 '쓸모'다. 바르바라는 연약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이기에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마카르는 떠나겠다는 그녀를 만류하기 위해 그녀의 '쓸모'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지만, 정작 그 역시 직장에서는 '쓸모'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는 간혹 인간의 존엄성을 들어 존재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인간을 '쓸모'로 판단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한다. 그런데 노년기에 접어든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자신이 사회 구성원으로 쓸모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라고 한다. 이는 바꿔말하면 존재감이다. 마카르는 바르바라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도 본인은 하숙비도 내지 못하고 이후에는 더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는 처지가 된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사랑 때문만일까? 이 사랑을 통해 마카르는 자신의 쓸모, 즉 존재의 이유를 찾았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안나 표도로브나. 그녀는 내켜하지 않는 바르바라 모녀를 집요하게 설득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후 그들이 의지할 데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임을 확인한 후 노골적으로 악담을 퍼붓고 모욕을 주며 혐오감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면서 그집을 방문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자비심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모녀를 거둬줬노라고 자신의 선행을 강조했다. 그녀는 바르바라의 죽은 아버지를 비난하고 모녀를 괴롭히면서 왜 굳이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일까? 또한 바르바라가 그 집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바르바라를 괴롭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안나와 바르바라와의 별다른 서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는 안나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 짐작해볼만한 점은 그녀가 바르바라를 괴롭힘으로써 마카르까지 벼랑 끝으로 몰고가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 정도. 


ㅡ 


미련할 정도로 헌신하는 마카르를 보면서 이후에 탄생할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 밑바탕에 자리한 것이 존재감이든 사랑이든 자존심이든, 무엇이든 간에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숭고한 인류애를 열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족. 
1. 마카르도 역시 수다스럽다.

2. 독서모임 중 한 팀의 1월 도서다. 어떤 얘기들이 나올지 무척 궁금하네. 마카르와 바르바라에 대해서는 다양한 얘기들이 나올 것 같아.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소설, 잇다 1
백신애.최진영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1.
그들은 나에게 아름다운 보물이 되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방 안 장롱 속에나 선반 위에 잠겨 있는 귀한 옥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랍니다. 나는 불행히도 옥돌이 아니어요. 보물이 되기를 또한 원치 않는답니다. 나의 가림 없는 본질은 거친 창파에 씻기어가며 제대로 다듬어지는 백사장에 흩어져 있는 조약돌이 아니라면, 험악한 산꼭대기에 모나게 솟아 있어 비바람 눈보라에 저절로 다듬어지는 바윗돌이 아닌가 합니다. 그보다도, 솟으며 떨어지며 감돌며 흘러가는 계곡물에 밀려서 넓고 깊은 바닷속까지 갈 수 있는 한 조각 모래가 됨을 원한답니다.
('혼명에서' 중에서) 


참으로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그저 제 이름으로 살겠다는 바람이 이렇게까지 비장할 일인가.  









책에 실린 백신애 선생의 세 작품은 모두 한 번씩은 읽었기에 최진영 작가의 소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를 먼저 읽었다. 순희와 정규라는 이름에서 바로 떠올려진 작품 <아름다운 노을>. 처음 읽었을 때 1930년대 당시의 시대 정서를 고려해보면 비록 소설이라도 적잖이 파격적이라 대중들이 쉽게 용납하지 않았을 거라는, 그래서 백신애 선생이 참 용감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결혼 생활 동안 유학과 정치활동으로 대부분 부재 중이었던 남편, 유난스런 시어머니와 시누이, 가슴 졸이며 살아왔던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제법 살만해졌다고 여길 무렵 벌어진 남편의 외도. 아내가 광인이 된 까닭은 남편의 외도가 아니라 그동안의 삶을 부정당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광인수기) 


'나'는 결혼 후 전통적인 여성의 삶을 살 수 없어 이혼하고, 그것으로 주변인들은 그녀가 이혼녀란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방 안에서 나오지 말아야 하며, 세상의 기구한 억측에 흘러나온 갖은 비평을 일일이 변명하고 근신해야 되며, 얌전한 여인으로서의 본분을 지켜야만 한다고 강요한다. 그녀가 이러한 환경을 헤치고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실상 어머니 때문이다. 자기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을 품고 있는 어머니의 눈물이 세상의 편견에 맞설 용기를 소멸시키고, 주저앉아버린 자신에게 실망하는 그녀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놓지 않는 그녀의 희망과 지금 우리의 희망은 맞닿아 있다.
(혼명에서) 


약 스무 살 나이 차를 뛰어넘는 사랑. 남자의 나이가 더 많을 때와 그 반대의 경우에 대중이 보내는 시선의 차이는 1930년대나 2020년대나 별반 다르지 않다. 
(아름다운 노을) 


회화를 전공하고 결혼 후 안정적인 삶을 살 줄 알았지만, 이혼한 후 우체국에서 근무하며 독립적인 생활을 하지만, 남편이나 시집 식구들만큼이나 괴롭히는 직장 상사도 모자라 성별 덕분에 먼저 승진한 남자 동기를 상사로 모셔야하는 사태까지 직면한 순희. 일주일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취업은 요원하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에는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묻지마 성폭력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정규. 그들의 이름 대신 누구의 이름을 써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ㅡ 


일제강점기에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여류작가 백신애. 친일 활동을 했던 가부장적인 아버지, 독립 자금을 댄 혐의로 수감생활을 했던 오빠로부터의 영향, 여성단체에서의 사회운동, 시베리에아 갔다가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감금 후 추방, 일본 유학, 늦은 결혼과 이혼, 췌장암으로 서른한 살에 요절. 넓은 스펙트럼으로 파란한 삶을 산 그녀의 작품이 관통하는 주제는 조선 민중의 고통받는 지난한 삶과 극단적인 가난, 가부장제에서 교육조차 제대로 받기 힘든 여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차별과 억압된 욕구와 가혹한 편견을 통해 바라본 여성주의, 그리고 허위에 찬 엘리트주의다.  


물리적으로는 100년에 가까운 시간 차이가 있지만 백신애의 분노와 최진영의 분노에 별 차이가 없다는 최진영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이렇게 큰 시차를 둔 두 작가가 거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독자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마치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는듯이 당연스럽게 여기며, 그래도 나아지고 있지 않냐는 말로 불편함을 대신한다. 하지만 유선 전화기가 디지털 통신 기기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성별을 가진 이들이 여전히 사회 구조에서 보조적 소수자의 위치에 있음은 너나할 것 없이 아주 많이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책의 끝에 실은 에세이에서 현대의 순희에게 직장과 가정에서 느끼는 피로감만으로 벅찰 것 같아 사랑의 혼란과 피로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는 최진영 작가의 글에 1930년대의 순희, 2020년대 순희 모두를 배려하는 마음을 읽었다. 아픔과 위로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서 이처럼 과거와 현재를 모두 위무할 수 있을 때야말로 비로소 '이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홀로 달리고 있는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심심하고 외로운 당신이 그 사실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순희와 정규의 마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0개의 단상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서제인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작가의 단상을 모아놓은 에세이다. 세라 망구소는 미사여구, 혹은 잠언처럼 아름답고 차분한 명상이나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활 전선에서 마주하게 되는, 야박할 정도로 현실적인 상황에 닥쳤을 때 드는 생각들을 얘기한다. 


얼마 전 <질문일기장>을 받아들었다. 매일 매일 한 가지 질문에 답하는 일기장이다. 세라 망구소는 에세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는 질문일기장처럼 마치 그녀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래. 넌 어때?" 같은. 


그래서 이 책처럼 작가의 짧게 나열된 몇 가지 생각들에 더 짧은 나의 생각들을 보태보고자 한다.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과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쁜가? 남에게 거짓말을 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감정 및 에너지 소모를 따져가며 오랜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을 비롯해 무엇이든 가성비를 따지는 요즘의 세태에 대한 생각.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낭비라고만 여긴다면, 누군들 나를 이해하기 위한 수고를 들이겠는가.  


눈앞에 닥친 자신의 고통을 핑계로 친구의 질환을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 상대에 대한 공감과 배려는 찾아볼 수 없이 제 아픔만 고통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천재는 뭔가를 쉽게 해낸다기보다는 빨리 해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쉽게'와 '빨리'는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최악의 일이 일어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안도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더 나빠질 것도 없다는.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때면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진다는 말에 공감. 한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친숙하지 않은 관계의 사람과 한 공간에 둘만 남은 상황(으... 생각만 해도 불편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내가 말을 많이 해야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을 피하고 싶어진다. 


세라 망구소는 적응을 잘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자기 삶 한구석이 아닌 삶 여기저기로 골고루 분배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는데, 적응 속도가 비교적 느린 편인 나는 이 말을 곰곰 생각해 본다. 그런데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가 두려움 때문일까? 꼬리를 물어 질문을 되짚어가보면 일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듣기만 하라는 조언. 그런데 상대가 듣고 싶지 않은 비밀을 털어놓으면 그아말로 대략난감이다. 저자는 읽고 싶은 책, 다시 읽고 싶은 책, 얼마나 형편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펼쳐보고 싶은 책 등 세 종류를 소장한다고 하는데, 얼마나 형편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소장한다고? 신박한데... . 


학생이 그녀의 기대를 뛰어넘으면 자랑스러우면서도 배신당한 느김이 든다는 저자. 이렇게 솔직하다니. 그나저나 난 그렇지는 않던데. 살짝 당황스럽긴 하지만. 자기가 가진 두려움을 하나씩 하나씩 버리고 싶다는 세라 망구소. 그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약이 불가능한 글을 좋아한다고 쓴 그녀의 글에 나는 어떤 글을 좋아하는지 좀 길게 생각해봤다. 더하여 그녀가 사랑하는 일들을 썼길래 나 역시 포스트잇에 단정하게 써서 책에 붙여놓았다. 그런데 이런 시간들이 꽤 무척 좋았다. 쓰다보니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라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고.  


세라 망구소는 자신이 죽은 뒤에 어떻게 해달라는 지시를 왜 그녀가 내려야 하는지 물음표를 놓는다. 유골은 그녀 본인이 아니라 가족이 소유할 테고, 유골을 뿌리는 일은 그들이 망자를 기억하도록 돕는 일일 것이라면서. 결국 나의 죽음 이후는 내 소관이 아닌건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 역시 가끔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쓰게 된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필요에 의한 위장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단정짓기 어렵다. 선의의 거짓말처럼 우리를 딜레마에 빠뜨리는 일도 수두룩하다. 세라 망구소는 모든 새로운 일상은 절망 속에서 시작되고, 다른 절망 속에서 끝난다고 말한다. 위선과 가식, 선의와 악의, 유혹과 딜레마, 흔들리는 자아감, 절망의 연속. 그럼에도 우리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까닭은 인생의 퍽퍽함 사이에 생기는 틈들을 작고 짧은 행복이 메워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저자를 따라 함께 써내려간 짧은 글쓰기가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고, 나도 모르는 새에 위안을 준다. 책을 읽었지만, '쓰는 행위'의 즐거움을 새삼 깨달은 시간이었다.  



78. 
어딘가로 도망치고 나면 되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그저 도망치고 싶어 한다. 어디로든.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쇼샤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40.
모든 사물과 인간의 본성은 동기와 언어로써 표현될 수 있다고 한 것은 누구인가? 나는 오랫동안 문학이 단지 사실을 묘사하거나, 또는 인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설 속의 모든 동기는 분명하거나 잘못된 것이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부터 든 의문은 '이 책의 제목이 왜 쇼샤일까?'였다. 사실 쇼샤는 작 중 인물들 중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위치하지 않는다. 주인공 아론 그라이딩거(아렐레)가 갖는 선택적 갈등의 한 축일 뿐이다. 쇼샤는 아렐레와 비슷한 또래로 어릴 때부터 학습부진아였고 삼십대가 되도록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전히 미숙한 여성이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아렐레에 대한 지순한 사랑을 지켜왔기 때문에 작가는 이 여성의 이름을 제목으로 택한 것인가?   








율법에 따라 성장한 유대인 청년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율법에 어긋나는 많은 것들을 경험한다. 시온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책을 비롯해 금기시했던 책들을 탐독했고, 혁명에 따른 새로운 이념과 개념들을 닥치는대로 받아들였다. 그 시간 동안 유년 시절을 함께 했던 많은 소년들이 전쟁터에서 죽었고, 그의 고향은 온갖 이념들로 뒤섞였다. 글을 쓰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아렐레는 이십 대에 이미 자신이 노인이 된 것처럼 느꼈다.  


물이 흐르듯 청년이 삼십 대가 되어가는 동안 히틀러는 빠른 속도로 독일의 통치자가 되어 영향력을 확장했고, 러시아에서는 숙청을, 폴란드에서는 군부 독재가 시작됐으며, 미국에서는 이미 이민 할당제를 시작했다. 아렐레는 물리적으로 꼼짝 못하게 되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언어와 문화 속에 갇혀버렸다. 아렐레의 이삽십대를 지켜보자면 그가 정서적으로 사면초가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적으로도, 작가로서도, 경제적으로도. 그래서 히틀러의 학살이 점점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쇼샤와의 동반 죽음 외에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ㅡ 


공산주의자 도라, 아렐레 미래의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베티, 그의 육체적 갈망을 채워준 테클라, 모성애같은 사랑으로 청년을 보호해준 셀리아. 그들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면서 근원을 알 수 없는 갈망을 순간순간 해소한 아렐레는 행복에 대해 자문하지만 어떤 대답도 찾지 못했다.  


도라는 세상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고자 혁명을 했고, 베티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역할을 필요로 했고, 셀리아는 감각과 전율을 추구했고, 테클라는 그저 제 할 일을 함으로써 뭔가를 원하기 보다 주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늘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랑을 했던 아렐레가 선택한 여자는 백치에 가까운 쇼샤다. 마치 이십 년 세월을 건너 뛴 듯 한결같이 아렐레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말끔한 모습으로 너를 기다려왔다고, 네가 없는 동안에도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그녀. 아렐레가 앞선 여성들의 피보호자 입장이었다면, 쇼샤에게는 완전한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다.  


ㅡ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아렐레가 쇼샤를 선택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외관상으로 보이는 지적.육체적인 미숙함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독자인 나에게는 그의 사랑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쇼샤와의 재회가 마치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그에게 운명적 사랑이며 이것이 곧 자신의 미래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이는 앞서 맨 처음 가졌던 의문에 닿아있다. 왜 쇼샤인가? 


재회 후 추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보듬는 두 사람. 그런에 이들은 늘 삶이 아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은 자기의 죽음에 서로를 동반자로 삼으려고 한다. 쇼샤는 죽을 거면 자기를 데려가라고 하고, 아렐레는 자기의 죽음에 데려가겠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이십 년 만에 만나 격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이 나눌만한 대화인가? 아렐레는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인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 즉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죽음 외에는 벗어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뇌는 아렐레만의 것은 아닐 터다.  


ㅡ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작가의 서술에서보다 등장인물의 대화에 핵심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파이텔존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부패하기 때문이고 그로인해 인간은 우상숭배를 하며 각기 다른 형태의 신을 창조하기 마련인데, 유대인만이 영원한 신을 믿음으로써 세계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엘빙거의 말을 통해 당시 유대인의 사회적 위치와 그들이 자부하는 민족성과는 별개로 아웃사이더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불안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도라와 베티의 짧은 대립을 통해 볼 수 있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까지.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시온주의, 유대인동맹, 수정주의 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렐레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은 너무도 많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어머니의 말은 그에게 어떤 위안도 주지 못한다. 수용소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는 유대인들과 이념 때문에 죽어가는 젊은이들, 그리고 백치라고 무시당하는 쇼샤. 신은 이토록 약한 자들을 버려둔 채 어디에 있는 것일까. 


쇼샤와 결혼함으로써 아렐레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그가 내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신한, 어떤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한 것이라고 느끼는데, 아마도 우리는 이처럼 후회, 무책임, 회피 앞에서 운명이라는 핑계를 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ㅡ 


나는 연달아 두 번이나 읽은 이 소설이 전혀 '순수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읽혀지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처절하게 인간다운 삶을 갈구하는 한 청년의 몸무림이자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유대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자본자의자들에게도 파시스트에게도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베티의 말처럼 어딘가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아렐레는 스탈린과 히틀러같은 압제자만이 인류의 비극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얘기한다. 대중의 다수가 살인과 약탈, 강간을 저지르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명망있는 지도자들 역시 각자의 명분으로 이러한 범죄를 정당화하고 있음을 일갈한다. 즉 쇼샤를 백치라고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모욕을 주는 대다수의 사람들 역시 그러한 압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얘기하면서 동시에 도라를 통해 인간은 어떤 희생도 무마할 수 있는 '대의'라는 명분으로 얼마든지 이율배반적인 존재임을 얘기한다. 


ㅡ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 스스로에게 던진 의문에 대해 내가 찾은 답은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이를 관조하는 아렐레의 시선에 있었다. 사상과 이념, 이상과 현실, 선과 악, 지배자와 피지배자, 독재와 혁명, 자유와 억압 등을 놓고 대립하는 인물들을 회의와 허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렐레가 추구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아닌 본질적인 순수이며, 인간이 가진 기쁨과 사랑과 슬픔과 두려움과 불안을 거짓과 가식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쇼샤에게 투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정리한다.


유대인을 비롯한 인류에게 가해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잔혹하고 비극적인 고통은 왜 있어야 할까?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살아남은 아렐레,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그 해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신은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하려고 하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