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우샤오러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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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인간은 각자 자기 운명의 주재자다. 누가 한 말이더라? 이보다 더 잔인한 말은 없을 것이다.  

 

어느날 아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판옌중은 아내를 찾기 위해 행적을 추적하면서 그동안 미처 몰랐던 아내의 과거와 숨겨왔던 비밀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돌아가셨다던 어머니와 오래 전에 연락이 끊겼다는 오빠의 등장, 아내를 경멸하는 듯한 고향 이웃, 그리고 남편도 모르는 아내의 절친이라고 자처하며 오히려 판옌중을 가해자 취급하는 오드리까지. 그는 자신이 늪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소설이 왜 <화차>와 <도가니>의 결합이라고 소개했는지 알겠다. 여기에 작가 임솔아의 <최선의 삶>, 최진영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까지 보태진다면 네 권을 통해 들여다봐야할 사회적 문제를 이 책 한 권에서 톺아보고 고민해 볼 수 있겠다. 


소설은 성폭력 및 근친성폭력, 가스라이팅, 가정폭력, 학대와 방치, 과잉보호, 가출 청소년, 가출팸 등의 폭력 범죄 앞에서 우리가 미처 짚어내지 못했거나 혹은 간과했던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준다. 또한 가정폭력과 성폭력 범죄를 놓고 다양한 관점과 처한 입장에서의 시각, 그리고 인간 내면의 가장 아래쪽에 자리한 악의에 대해 생각해 본다.  


ㅡ 


오드리는 열 살 때 합숙 훈련 중 체조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의 고통과 상처를 부모조차 잊어버리고 덮어두라고만 했고, 누가 알게 될까 쉬쉬하기에 급했다. 심지어 정신과 진료를 받기 시작하면 인생이 끝장난다고 말렸다.  


우신핑은 고등학교때 같은 학교를 졸업한 선배의 집에서 강간당했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였다. 그런데 소문은 우신핑이 원해서 성관계를 갖은 후 가해자를 강간범으로 몰아 돈을 뜯어냈다고 퍼졌다. 더구나 사람들은 강간 가해자 청년이 그 사건으로 신세를 망쳤다며 동정했다.  


소녀의 엄마는 남매를 앉혀놓고 그녀가 아빠의 근친 외도로 태어난 딸이라고 폭탄 발언을 하며 자식들 앞에서 남편을 저주한다. 그 자리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소녀이지만 그 자리에 있던 가족 중 누구도 그녀를 염려하지 않는다.  


젠만팅은 우신핑이 실종되고, 그의 남편이 찾아오자 묘한 흥분을 느낀다. 나보다 더 나은 처지라고 여겼던 동료의 불행에 안도감과 더 나아가 즐거움까지 생긴 그의 심리는 보편적인 감정일까. 


추전샹은 만 열여섯 살이 되지 않은 소녀와 성관계를 가졌다. 소녀의 어머니가 찾아와 보상을 요구했고, 소년의 아버지는 상대가 원하는대로 합의했다. 그런데 전샹은 억울하다. 합의 하에 이루어진 관계였고, 생활비까지 지원했다는 이유다. 소년의 아버지도 소녀를 꽃뱀 쯤으로 몰아붙이며 세상물정 모르는 제 아들이 덫에 걸렸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ㅡ  


소설은 성폭력 범죄의 가해와 피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이에 대한 법적 처벌과 단죄에 대한 단순한 스토리가 아니다. 피해자가 왜 적극적으로 가해자를 신고할 수없었는지, 장기적으로 진행된 성폭력 범죄의 폐해가 개인 일생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면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신핑의 강간 사건이 이슈됐을 당시 동네 사람들이 우신핑을 피해자라고 여기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평소에 가해자를 좋아했으며, 사건 당일 옷차림이 정숙하지 못했고 미성년자가 술에 취했다는 것. 무엇보다 가해자의 아버지는 지역 발전에 힘썼던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고(가장 큰 이유다), 우신핑은 3일이나 지나서 사건을 담임 선생에게 신고했으며,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성폭행 사건 피해자는 어떻게 살아야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등장하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집요할 정도로 서로에게 집착한다. 소설에서 그려진 인물들의 공통된 감정은 외로움과 죄의식이다. 어린 피해자들은 자신의 고통보다 오히려 그들이 가해자의 미래를 망쳐놓을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여러 이유로 그들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피해를 하소연할 수 없었고, 감정을 공유하고 온전한 사랑을 쏟아줄 대상이 필요했다. 그러니 가해자이면서도 마치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보호자인 양 행세하며 외로웠던 자신의 곁을 지켜준 사람을, 세상에서 혼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무릎쓰고 어떻게 내칠 수 있었겠나.  


가해자가 소녀에게 했던 행위만이 가스라이팅일까. 폭력 범죄 피해자들에게 한 마디 한 마디 무책임하게 독한 말을 내뱉으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를 전환시켜 피해자에게 오히려 죄의식을 심은 그 모든 사람들이 가스라이팅에 동조한 것이라고 보면 너무 과하다고 여기려나? 그리고 사건을 사실적으로 보도하기 이전에 왜곡되게 부풀려 2차 가해를 주도하는 언론도 그 책임을 피해가지 못 할 것이다. 



소설은 3인칭, 1인칭으로 번갈아 가며 서술한다. 중반을 넘어서 반전을 향해가는 스토리는 독자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물고기'는 왜 모든 것을 껴안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오랜 시간 동안 가슴에 묻어 둘 수 있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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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담덕 4 - 고구려 천하관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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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은 하대곤과 해평의 반란으로 인해 마동과 함께 도망친 담덕이 우연찮게 백제를 거쳐 중원 - 서역 - 장안까지 돌아보며 고구려 유민 청장년 군대인 태극군을 만들어 금의환향해 태자에 책봉되기까지를 서술한다. 한편으로 전진과 모용부의 역사를 복잡하지 않게 다루면서 모용선비(모용부)의 본격적인 등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백제는 침류왕에서 진사왕으로 왕권이 넘어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세상살이의 경험이 모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이왕이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은 안 겪고 사는 게 훨씬 좋겠으나 4권에서 담덕의 모험은 그에게 큰 약이자 지식이 된다. 


본의 아니게 동진의 상단 대행수의 호위무사가 되어 백제를 방문하게 되는 담덕은 미추홀을 비롯해 서해 바다의 생태와 갯벌을 눈으로 확인하고 지리를 파악하는데, 이는 백제를 좀 더 알아놔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되어 지도까지 그리게 된다. 또한 대행수를 따라 갑비고차 섬에 머물면서 섬 일대뿐 아니라 승천포 근처의 대형 인삼밭 조성 및 인삼 매매에 대한 백제의 정책을 파악한다. 인삼 재배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과 인삼 재배 농가 및 어부들의 삶을 두루 접하면서 전쟁이 날때마다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인지하게 된다.  


담덕은 대행수를 따라다니며 부국강병은 군사력으로만 이룰 수 없음을, 상업과 대외 교역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전쟁에서 많은 살상을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길을 가야 하지 않겠냐는 승상 사안의 말에 스승 을두미를 떠올리고, 서역까지 두루 다니며 사람의 본질은 같으나 지역적 특성과 환경에 따라 다를 뿐임을 느끼며 이러한 동질성과 이질성의 간극에 대해 생각이 깊어진다. 어린 담덕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크게 느낀다. 


담덕은 장안에서 연호가 천하 패권을 쥔 절대적 권력자만이 사용하는 정치적 상징 수단임을 알게 된다(이 지점에서 독자는 어린 담덕이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뺏고 뺏기며 배반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치와 권력의 비정함으로 인해 어지러운 시국에 휘말려버린 힘없는 백성들도 있다.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전쟁의 화살받이가 되고, 다른 부족인과 혼인했다는 이유로 차별과 모욕을 당한다. 전쟁통에 하루가 멀다하고 나라가 바뀌니 이제는 본인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알 수가 없다. 도대체 그놈의 충忠은 어디에 갖다바쳐야 하는지... .


전진이 무너지면서 그야말로 북방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대응이 기대되는 바이다.  




여기서 돌발 퀴즈!
과연 4권에서 담덕은 몇 살일까?
놀라지 마시라. 열한 살이다. 
타고난 깜냥이 남다른 건지, 교육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고, 나보다 낫더라는. 
(그래... 뭐, 소설이기는 하다...)


ㅡ 


기억하고 있어야 할 인물이라면, 줄을 갈아타고 담덕의 사람이 된 조환(두충), 여전히 이련과 연화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일목(추수), 담덕에게 지지세력이 되어줄 이정국, 쇠를 다루는 사람 김슬갑, 복수에 실패한 목만치, 아들이 반역자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줄도 모르고 고구려 검법을 집대성하겠다고 온 천지산간을 돌아다니고 있는 무명선사(왕제 무). 


그나저나 해평은 처자식 데리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잘못은 제가 하고 복수한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건 아닌지... . 나는 그 사람이 괜히 안됐더라.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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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필요한 시간 -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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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아와 삶에 대한 깨달음과 가능성,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등을 문학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얘기하면서 '우리에게 왜 문학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그 답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다. 








문학이 갖는 가치는 무엇일까?
저자는 문학은 잃어버린 시간을 끝내 보듬고 부둥켜안고자 하는 그 모든 상처 입은 자들의 마지막 보루요, 영원히 잃어버린 존재들을 비춰보는 거울이라고 얘기한다. 문학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이야기 속 인물들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지금 살아있는 우리의 이야기'로 승화시켜 살아낼 줄 안다는 것이라고. 


고통, 사랑, 부끄러움, 절망, 슬픔, 자비, 용서, 외로움, 배려, 치유, 희망을 무한 반복하며 사는 게 삶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허구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영원하고 아름다운 사랑, 또는 삶의 이야기들을 다룬 책들을 뻔하고 뻔한 이야기라고 퉁을 놓으면서도 줄기차게 읽는 까닭일 것이다.  


문학을 읽음으로해서 우리는 이해, 공감, 소통의 힘을 배울 수 있다. 그럼으로써 혹여 보상 없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는 끈을 놓지 않고 싶어진다. 저자는 첫 마음을 잊어버릴 때마다 문학이 그를 일깨운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읽는 궁극적인 이유가 아닐까. 


문학, 특히 소설만큼 우리를 역지사지에 위치할 수 있게 하는 매체가 있으려나. 가족, 연인, 친구 등 어느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스스로를 객관화하지 못하고 내로남불에 빠져있는 우리를 거부감없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이제는 고루하게 느껴지는 정서에 다른 시각으로서 힘을 불어넣어주는 것, 그리고 소외된 채 장벽 밖에서 부유하는 이들을 돌아보게 하는 것 역시 문학의 힘이다. 


ㅡ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왜 문학을 읽는가?', 그리고 '삶은 어떻게 이어지는가?'였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지닌 만큼의 무게를 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무게가 참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운명처럼 불공평하게 지워진 자신의 삶의 무게를 원망하며 살아가기보다는 그 고됨을 상쇄할 수 있는 기쁨을 기대하며 오늘을 지낸다. 


우리는 소위 '이야기의 힘'에 대해 누누이 들어왔다. 거창하고 예쁘게 제본 된 한 권의 책이 아니더라도 어린시절 할머니에게 들었던 옛이야기,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수다, 어른이 되어 따라오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넋두리 등등. 누군가에게 늘어놓는 나의 이야기와 누군가로부터 경청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서로에게 위로와 쉼이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이, 모든 이들의 삶이 각각의 소설이자 문학일 터다.  


따라서 진정 중요한 것은 문학을 읽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우리네 삶 속으로 끌어오는 것일테다. 


ㅡ 


정여울 작가가 문학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만큼 그의 글에서 생생하게 전해진다. 저자의 말처럼 고통스런 삶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혹은 서로에게 건네야 하는 건 다정한 유머라는 생각이 드네... .


그런데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언급된 책 이야기보다 저자가 고 황광수 선생이 작고하기 전까지 몇 년 동안 둘만의 독서 모임을 진행했다는 대목이었다. 매달 한 권의 책을 읽고, 서로 좋아하는 대목이나 자신의 느낌을 적은 발제문을 낭독했다는데 그 다정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참 좋았더랬다. 나도 이렇게 둘만의 독서 모임을 할 친구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사족.
책에서 문학평론가 고 황광수 선생과 시인 김정환 선생의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가 짤막하게 나오는데, 한순간에 눈물을 쏟고 말았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투병 중인 친구에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원서를 선물한 김정환 시인의 마음을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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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R - Rossum's Universal Robots 로숨 유니버설 로봇
카테르지나 추포바 지음, 김규진 옮김, 카렐 차페크 원작 / 우물이있는집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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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의 희곡 <R.U.R> 그래픽노블 버전. 원작을 읽겠다고 개인목록에 올려놓았으나 아직 미독 상태인데,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차페크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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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버 - 어느 평범한 학생의 기막힌 이야기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 지음, 한미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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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이 녀석 게르버! 새 장난감을 애타게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쿠퍼는 그를 기다렸다. 그를 망가뜨릴 작정이었다. 



한 학생을 통해 입시위주의 권위적인 학교를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는 이 소설은 작가가 이십대 초반에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 쓰여졌다.  
 







고등학교 졸업반 새학기 시작의 날. 자신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교수 아르투어 쿠퍼, 일명 쿠퍼 신이 담임이 된 것에 크루트 게르버는 긴장한다. 학생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신으로 군림하고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하찮은 존재라고 여기는, 허영심의 노예인 쿠퍼 교수는 누구든 그의 권위를 건드리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성적이 낮거나 허약한 학생들은 무시하고 아예 '미흡'으로 정해놓은 뒤 상종조차 하지 않으며, 심지어 혼자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학생들의 의복조차 일사불란하게 똑같은 옷을 입히고 싶어한다. 또한 편애를 이용해 학생들의 질투와 경쟁심을 불러일으켜 학생들 사이를 반목하게 만들어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못하게끔 한다. 한마디로 학생이란 그의 절대 권력을 확인시켜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쿠퍼가 특히 학교에서 권위와 권력적 지위를 고집하는 이유는 학교라는 세력권을 벗어나는 순간 자신은 보통의 존재, 어쩌면 보통의 존재만큼보다 더 관심을 얻지 못한다는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학교 밖 일반인들은 그의 뛰어난 수학적 능력에 존경심은 물론 관심도 없었다. 그렇기에 학교는 그의 삐뚤어진 욕구를 채우는, 그가 권능있는 신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ㅡ  


소설은 우리가 그동안 겪어왔던 입시 교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과목별 선생마다 졸업시험(이것으로 대학 입학이 결정된다)을 강조하고, 터질듯한 긴장감으로 인해 예민해진 학생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반복된다. 동급생의 죽음을 앞에 두고 친구에 대한 애도보다 다음 수학 필기시험이 더 우선한다.  


개개인 각자가 가진 재능과 개성을 무시한 채 오로지 성적 하나만으로 '우수'와 '미흡'을 규정지으며, 단 한 번의 입학 시험으로 그동안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함부로 재단할 뿐 아니라 목전에 있는 시험을 위해서는 우정이나 동정 따위는 잠시 접어 주머니에 넣어둘 것을 무언으로 강요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백 년 전 오스트리아와 현재의 대한민국이 별반 다르지 않다.  


적어도 스스로 당당하다는 자부심은 있어야 함에도 쿠퍼 교수의 부당함에 불평하고 실패한 결과를 놓고 다른 실패 때문이라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며, 정직함과 자제심과 줏대조차 없는 본인의 모습을 보면서 쿠르트는 점점 스스로에 대해 가치 없고 쓸모 없고 불필요한 존재라고 여긴다. 자신에게 절망해 자조처럼 읊조리는 그의 말은 입시생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죄인의 위치에 놓는데, 이는 안타깝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ㅡ 


소설 중반부까지는 쿠퍼 교수만을 악당처럼 그려지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다른 교사들 역시 정도의 차이일 뿐 비겁하기는 마찬가지다. 쿠퍼는 변함없이 독재자의 펜을 휘둘렀고, 그가 겨냥한 화살은 거의 전부 쿠르트 게르버를 향했다. 원래 학생에게 내리는 구류 처분은 교수회의 결정에 따라 행해지는데, 쿠퍼는 제 마음대로 쿠르트에게 구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다른 교수들은 쿠퍼의 부적절한 행위를 알면서도 학생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쿠퍼의 거칠고 막무가내 횡포에 대응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오히려 격하시키는 것임을 왜 모를까.  


몇몇 학생들의 캐릭터를 잠깐 언급하자면, 쇤탈은 제 잇속만을 챙기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태 파악을 객관적으로 하는 학생이다. 어차피 졸업을 하기 전까지 그들의 입시 합격 여부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교수이고, 교수진 내에서도 강자가 누구이며 또한 그들의 부당함을 건의해봤자 소용없음을 간파하고 있다. 타의든 자의든 순종을 선택한 쇤탈은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돋보이는(?) 캐릭터는 레비. 2년이나 유급했음에도 능청맞기가 이를 데 없다. 독재자 쿠퍼에게 펀치를 날리는 유일한 학생이자 저항자. 내가 고딩 때 이 책을 읽었다면 한 번 따라해보고 싶은!   


ㅡ 


이 소설이 1930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면 선생에게 휘둘리는 상황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그야말로 선생은 갑이요, 학생과 학부모는 을이었다. 훈육과 사랑의 매라는 명분으로 체벌에도 거리낌이 없었고, 학부모가 선생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는 일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으니까. 199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이 50%임을 생각해본다면 짐작이 갈 것이다.  


소설에서 쿠르트의 어머니가 쿠퍼 교수를 찾아가 일언지하에 면담을 거부당한 모습, 그것도 본인이 직접하지 않고 동료에게 시키는 것도 모자라 학부모의 말을 중간에 끊어내는 태도는 당시 선생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쿠퍼는 인격적으로도 선생으로서 적절한 사람이아니다. 수업에 있어 학생은 보조적 역할로 치부하고, 아들의 성적 부진이 모두 부모의 탓이며, 병상에 있는 학생의 아버지가 충격으로 죽든 말든 규정을 들이밀며(그것도 제멋대로 부당하게 적용한) 악의적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이 사람은 선생의 소임이 학생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 아닌 일정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학생을 걸러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도 악착같이 티끌같은 흠집까지 찾아내서라도 반드시.



입시의 실패가 대역죄이자 사형선고이며 교수대라고 표현하는 게르버는 자신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마치에 매인 말에 비유한다. 게르버의 마지막 선택은 입학 시험의 당락 여부와 관계없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 자체가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 아닐까.   


입시에 치이고 짝사랑에 고통스러우며 관능 앞에 흔들리는, 마치 통속소설의 주인공처럼 방황하는 청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나 비극적이고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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