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연대기 클래식 호러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좀비를 소재로 한 세계적인 작가의 단편소설 12편을 모았다.

쓰여진 소설들의 대부분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까지 인것을 보면

아마도 이 소설들이 좀비에 관련해서는 1세대가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된 것이 두 가지 있다.

좀비들의 고향이 아이티라는 것과 좀비는 소금을 먹으면 제 무덤을 찾아가 다시 죽는다는(?) 것.


책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아이티'와 '부두교'

부두교가 무엇인지 몰라 사전부터 찾아봤다.

부두교에 대한 용어 정리부터 해야할 듯 하다.

부도교 : 서인도제도의 아이티에서 널리 믿어지고 있는 애니미즘적 민간신앙.

넓은 뜻으로는 서인도제도와 미국의 흑인들 사이에 행해지는 악마숭배, 주물숭배,주술  등을

포함하는 관습을 말하기도 한다. 쿠바의 산테리아교(Santeria), 브라질의 마쿰바교(Macumba)와

유사하다. 아이티의 부두교는 아프리카 서부에서 서인도제도로 팔려 온 흑인 노예들이 퍼뜨렸기

때문에, 초자연에 관한 근본적 관념은 아프리카에서 유래한다. 이 일반적인 테두리 안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신념과 숭배 양식이 존재하거니와, 여기에서는 서인도제도 토착민 특유의 종교

에서 오는 요소와 함께, 특히 가톨릭교적 의식의 강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소설들에 의하면 좀비들은 부두교의 주술사들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지막 소설 '좀비 감염 지대'에서만 좀비가 다르게 묘사된다.

소설들이 쓰여진 시대에서 알 수 있듯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한참 심했던 때이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속에 나오는 일반적인 좀비들은 대부분이 흑인이고,주술사 역시 흑인들이다.

물론 좀비가 부두교를 근간으로 하고 있고 부두교는 아이티를 비롯한 아프리카 민간신앙이므로 그렇긴 하겠지만, 소설 내에서도 요염하고 아름답지만 사악한, 혹은 그저 무식한 이들은 대부분 흑인이다. 시대 상황을 생각해도 현재의 기준으로 볼 때 불편한 점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래 전부터 좀비는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요즘 영화에서 그려지는 좀비들과는 좀 다르다.

현대의 좀비들은 악하고, 잔인하고, 서로간에 의사 소통을 하는 몇 차원 올라간 시체들이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때론 불쌍하고 우습기까지 하다.

사고가 가능하지 않은, 생명력이 없는 수동적인 노예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끔은 좀비처럼 살고 있는 때가 있는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첫번째로 읽은 로버트 어빈 하워드의 '지옥에서 온 비둘기'

제일 무서웠다. 짧은 단편에 스토리와 호러, 스릴러가 모두 들어간....


라프카이오 헌의 '귀환자들의 마을'

이 소설은 우리가 중,고딩시절 "무서운 얘기 해줄까?" 할 때 들었던 부류의 소설.

마지막 문장에서 오싹! 소름.....

 

마지막 소설, 앨피어스 하이엇 베릴의 '좀비 감염 지대'

이 소설이 요즘 현대 좀비에 가까운 좀비들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좀비도 좀비지만 등장인물 파넘 박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생명'에 대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생노병사가 없는 불사, 불멸이라니.......

좀비, 자신들 조차도 영면에 들 수 없음을 고통스러워하는데, 누구를 위한 불렬의 약이란

말인가... 그 실험으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됐는지 결말을 보면 인간의 젊음에 대한 끝없는

욕망은 시대와 상관이 없는 듯 하다.


백만년만에 읽은 호러물... 재미있게 읽었다.


 

p213.

이제 달릴리와 같은 운명을 공유한 야다르는 유령 같은 열망을 가지고 그녀 곁에 있었다.

그녀가 곁에 있어서 유령같은 위로를 느꼈다. 예전에 그럴 괴롭혔던 참담한 절망,

그리고 갈망과 이별의 기나긴 고문은 견디고 잊어버리는 그런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달릴리와 헛헛한 사랑과 희미한 만족을 공유했다.

 / 나트에서의 마법


p246

에일릿이 다가와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십자가가 몸에 닿자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그리고 축 처진 눈꺼풀이 치켜 올라갔고 입술이 움직였다. "자네는 은혜를 갚았어."

그 입술에서 부드러운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그의 몸이 조금 흔들리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흙에서 흙으로...."

 / 화이트 좀비

p333

뷸멸의 삶은 유전될 수 있었다. 수세대 동안 그 비밀을 공유한 거주자들은 모두 죽지 않을

것이다. 한 국가가 가진다면 얼마나 큰 힘이고 큰 비밀인가! 한 종족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니!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인간이 두뇌와 근육을 이용하여 성취할 수 있는

진보와 발명은 또 얼마나 거대한 것이랴! 

 / 좀비 감염 지대


p353

영혼, 전신, 이성 등등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건 간에 인간이나 다른 동물의 군형감을 유지

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이 불가해한 미지의 요소가 망자의 소생 후에도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예측 불허였다.

 / 좀비 감염 지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 여행 중독자가 기록한 모든 순간의 여행
추스잉 지음, 김락준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p40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를 여행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루하루를 여행하듯

지 못하는 사람은 깃발을 휘날리며 세계를 일주해도 여행을 오롯이 즐기지 못한다. (...)

여행은 낭만적인 외출이 아니다. 중요한 것을 여행을 통해 스스로 변하고, 독립적인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배우고, 스스로 더 만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p57

어떤 사람들은 여행할 때 세상 더없이 즐거워하다가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 돌아오면 다시 우울해

한다. 난 그들이 왜 그렇게 변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만의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국적인 풍경으로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공간을 요리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 DNA가 충만한 사람은 힘들게 진수성찬을 차리지 않고

한 가지 요리에 작은 변화만 줘도 인생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킬 수 있다. 일상을 적극적으로

바꾸면 굳이 이국적인 풍경으로 자신을 충전할 필요가 없다.

 

p115

여행은 나에게 세상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가 거의 없고, 나의 의견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굳이 다른 사람에 대해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p139

나는 나와 동갑인 독일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할 거야,

아니면 미래가 보장되는 일을 할 거야?" 그는 이렇게 반응했다. "무슨 질문이 그래?"

내 부모님은 항상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그 분야에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나에게 그 질문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내 부모님은 이런 믿음이 자신이나

자녀에게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는 사고방식을 심어준다는 사실을 모르셨다. 이상과 현실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p147/148

"우리는 이주 노동자들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또 고용주와 순조롭게 소통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건 광장히 중요한 일인데요, 고용주와 노동자는 모두 서로 인생의 일부분을

 함께 나누고 있는 사이입니다.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 동반자가 되는 것을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도 같다. 물론 여행으로 세상을 종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행자를 변화시키는 동시에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p188

왜 사람들은 남이 자신에 대해 잘못 알고 있으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정작 자신이 남에 대해 잘못

알고 있을 땐 아무렇지도 않게 '나 몰라라'하는 태도를 취할까? (...) 오해받은 것을 그렇게 문제

삼고 싶다면 나 자신부터 이 세상에 대해 모든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한 뒤에 문제

삼으라.


 

발췌해 놓은 문장들만 보아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예측될 것이다.

이 책은 여행실용서가 아니다. 여행지로서 어디가 적합한지, 혹은 어느 명소가 좋은지, 어떤

경로를 통한 여행이 유익한지를 알려주는 안내서가 아니라 여행자로서의 철학, 가치 등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여행을 통해 사고를 넓혔고,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됐으며, 자만과 오만,

편견을 버리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져야 하며

타인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타인의 시선에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단다.

 

나는 어떤 가치관과 철학을 가지고 여행을 다녔던 걸까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가족, 친구들과 관광차원에서 다녀온 여행도 물론 있었지만. 나는 저자와는

다르게 뭔가 비워내야하는 시점이 되면 집 밖으로 나갔었다.

다른 여행자들과 혹은 현지인들과 교류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한번 비워내고 다시 채워지면 떠나는....

여행에는 각자 추구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어떤 형태이든간에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저자의 말처럼 여행을 단순히 먹고, 보고, 만족스럽지 못한 서비스에 불평하는 '관광'이

아닌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로, 다양한 상황을 접하고 사고를 넓힐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이 여행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 91년 5월투쟁과 김은국의 《순교자》로 본 정치.죽음.진실
강정인 지음 / 책세상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장   정치. 죽음. 진실 -1991년 5월 투쟁을 중심으로.

2장   신없는 세계에서의 진리/진실 - 김은국의 <순교자>분석을 중심으로

3장   미국의 반전 영화는 과연 '반전'적인가?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1장에서는 정치에 있어서 죽음이 어떠한 역할을 했으며, 왜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지를 말한다. 2장에서는 소설 '순교자'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종교와

현실의 진리/진실, 그리고 정치적 관계등을 이야기한다. 3장에서는 미국에서 제작된 반전

영화들이 과연 인류애를 동반한 진정한 반전 영화인지를 살펴본다.


[정리]


1장

한국에서 군부 독재가 저지른 가장 커다란 죄악은 인간 생명의 경시와 부정, 곧 죽음이다.

이는 타살은 몰론이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한 강요된 '자살'을 포함한다.

p50

한 개인이 정치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떄, 그는 '공동체가 과연 자신의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민주적 정부의 지도자들은, 그

정부가 특정 계급이나 집단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정부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이 스스로 통치에 관여하는 정부이며, 따라서 구성원들이 목숨 바쳐 지킬 가치가 있는 구성원들 자신의 정부라고 역설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므로 이 정치 지도자들의 연설은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이상을 천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몰 병사들의 사기를  앙양하고자 한 것으로,

단순한 응변술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과거든 현대든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지는, 협의로든 광의로든, 사실상 엘리트에게 독점돼 있다.

이 엘리트들은 통상적 일상생활의 제약과 조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별도의 활동이 아니

더라도 정치에 참여하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일상적 삶과 정치적 삶이 선거와 같은 상징적, 의례적 행위에 참여할 때를 제외하고는 분리되어 있다. 이에.

P57

보통의 사람들이 엘리트 계급을 설득하는데 실패했을 때,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참됨을 타인은 몰론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죽는 것이다. (...) 우리는 종종 단순한 삶을 위해 참된 삶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참된 삶을 위해 단순한 삶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기도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참된 삶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참된 삶의 필요조건이 단순한 삶이 없어진 마당에 참된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이러한 딜레마를 타개하는 방법중 하는 타인(또는 공동체)의 참된 삶(또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다. (...) 인간의 참된 삶이 개체로서의 삶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전 및 복지와 연결된 것임을 직시한다. (...) 적어도 참된 삶은 '나의 삶의 위해머에

내맡기더라도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려는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정치적 죽음'은 정치권력이 죽음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었다는 점, '사회적 죽음'은 산재

사고로 노동 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의 경우를 말한다.

P70

사회적 죽음은 통상 사회 구조 자체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내지만, 그 사회 구조가 전반적으로 용인되는 상황에서는, 별도의 정치적 대책을 강구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정치하 과정을 밟지 못한채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기체를 통해 우발적인 '불행한 사태' 또는 당장 개선이 어려운 '불가피한 사태'러 치부되고 일간지 회면을 짧게 장식한 채 사사회되어버리는 것이다.

P71

강경대 사건이 궁극적으로 불법 폭력 시이에서 비롯된 것이며 일부 전경의 감정적인 과잉 진압에 의해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임을 강조함으로써 강경대의 죽음을 탈정치화하려 했다. 공권력에 의한 시위 참가자의 타살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많은 국민들이 공권력 자체를 일상적 삶을 근본적으로 위혐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P72

명색이 '민주 국가'인 나라에서 국민들이 정치적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상적 방법의 하나인 시위 참가가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모험이 된다면, 이는 민주 국가에서의 일상적 삶이 위협 받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는 거짓과 불의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왔다. '정의로운 삶'이 '참된 삶'이라는 진리/진실을 죽음으롴써 증명하고자 했던 이들과 그 가족들이 감당해야 했던 부조리한 현실은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청산'의 핵심은 그 많은 죽음을

둘서싼 진실을 밝히고 그에 상응하는 정의를 실현하는데 있다.


2장

p171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가 함쳐지는 오직 그떄에야 비로소 질리/진실과 정치의 갈등은 어느 일방을 희생시키지 않고 화해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3장

흥행에 성공한 미국의 반정영화들은 대부분 적대국가에게 가해진 말할 수 없는 인적, 물적 피해는 물론이고 무차별 서민 살상과 강간 같은 범죄 행위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약소국인

그들이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왜 목숨을 걸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불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묻지도 않는다.

p192

미국의 반전 영화는 전쟁 동기의 타당성이 아닌 수행 방식의 타당성에 의거해 저쟁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전쟁 방식을 제한하는 움직임도 상대방의 피해는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피해'만을 고려한 결과로, 집단 이기주의를 드러낼 뿐이다.

p193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민의 대다수가 반정 여론에 동조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베트남 정쟁이 자신들의 '고귀한 아들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었지, 제국주의적 전쟁이자 베트남 

인민 다수의 의사에 반하는 전쟁이고, 화학무기나 대대적인 공습을 통해서 베트남의 생태계와

생활 기반을 회복 불능 수준으로 파괴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미국의 반전 여론은 모든 생명의 고귀함과 인류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의 생명의 고귀함에 있을 뿐이다. 만약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모든 생명의 존엄함과 인류애에 기반한 것이라면 이라크 전쟁을 열렬히 지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을 객과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호국이라는 명분 아래 강대국의 시야에 갇힌 상황만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그저 상국을 모시는 속국이 될 뿐이다.

역사 속에 주체적인 국가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은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고대의 놀이적 사유 유형을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을 통해 살펴본다.

2부는 놀이의 근대적 사유 유형을 칸트, 실러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3부는 놀이의 현대적 사유 유형을 탐색해 본다.

 

[정리]


<들어가기> 

놀이는 인간의 본성 (노동과 놀이의 차이)

1) 노동은 기본적으로 외적 강요가 전제되고, 놀이는 생존을 위한 물질적 보상보다는 개인의 명예이다.

2) 노동은 자신의 먹적이나 의도를 대상에 실현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그러나 놀이는 놀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예술가의 행위는 놀이의 본질을 실현하는 대표적인 사례)

3) 노동은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결과의 예츨 가능성이 중요하다. 놀이는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4) 놀이의 열광은 꿈과 상상력의 산물이다.

5) 놀이는 사회적 활동이다.


철학자들이 놀이에서 발견한 가치

1)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나 중심이 아니라 놀이하는 과정 자체이다.

2) 놀이는 존재와 생상에 관한 전통 형이상학의 좌표를 전도한다.

3) 놀이에 담긴 생성과 우연, 순가의 속성은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의 뿌리가 된다.'


<1부 놀이의 고대적 사유 유형>

헤라클레이토스가 정의한 단편 B52는 관점에 따라 번역이 달라져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대립자들의 배후에 대림과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내재적 법칙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이것을 로고스라 일컫는다.) 여러 의견을 종합해 보면 '삶은 하나의 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놀아움의 연속이다. 삶의 놀라움은 아이가 놀이에서 왕이 되고 왕국의 통치권자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어른들을 비판한다. 플라톤은 놀이가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윤리적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 유아의 영혼에 적절한 교육 수단임을 인정한다. 아이들이 법을 지키는 놀이를 하게 되면 준법적이고 진지한 사람으로 성장하지만, 반대로 범을 지키지 않는 놀이에 익숙한 아이들은 결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놀이와 관련한 고대 철학자의 이해는 플라통이 전형적으로 잘 보여주며,그가 놀이를 대하는 태도는 이후 오랫동안 서양 철학사를 지배한다.

p31

무슨 일에서든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바로 그걸 어릴 적 부터 줄곧 수련해야만 하는데, 이는 그일에 적합한 각각의 것들로 놀이를 할 때나 진지하게 임할 때나 그리해야만 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플라톤)


 

<2부 근대 철학에서의 놀이 이해>

칸트가 파악하는 놀이는 우연적이며 특수하고, 그 자체로 어떠한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으며, 어떠한 목적도 지향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법칙과 목적을 담아내는 활동이다. 여기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칸트의 놀이 개념이 인식능력, 즉 상상력과 지성, 상상력과 이성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놀이가 수단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비판한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능력인 취미는 상상력과 지성의 조화와 일치에서 된다. 또한 칸트는 놀이개념의 속성이 목적에서 자유롭고 어떠한 의도나 강제로부터도 자유롭다고 설명한다.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롭고 우연적 일치를 놀이라고 한다.

놀이는 상상력이 지닌 잡다함과 무질서를 지서의 규칙에 일치시킴으로써 미적 판단의 보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p127

칸트에 따르면 훈육이 필요한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인간의 '방종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성벽 탓이다. 즉 방종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선호는 인간이 버려야만 할 본능이며, 이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은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즉 칸트에서 인간의 방종으로서의 자유는 동물적 야만성의 핵심이다.

칸트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놀이는 엄격하게 제한되어야하며 수단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일과 놀이의 가치를 분명히 구분한다.

p129

일을 하면서 전심전력하여 몰두하는 것 자체는 우리에게 즐거운 것도 아니고 편안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어던 목적을 위해서 일을 실행에 옮긴다. 반면에 놀이를 하면서 전심전력하여 몰두하는 것 자체는 어떠한 목적도 지향하지 않ㅇ으며 우리에게 즐겁고 편안한 것이다.

칸트의 놀이 개념은 아이들의 신체단련과 휴식의 방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칸느의 이러한 놀이개념은 근대적 사유 틀 속에 있으며 그 한계도 분명하다. 칸트에 이론에 대해 니체는 비판한다. 니체는 칸트가 놓친 예술가의 창작과정에 시선을 집중하고, 세계와 예술가의 관계 맺음을 놀이로 설명한다. 또한 우리의 사고란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는 매우 정교하게 서로 얽힌 놀이일 뿐이라고 말하다. 더불어 실러는 말한다.

p159

인간은 오로지 아름다움과 더불어 놀이해야 하며, 오직 아름다움과 더불어서만 놀이해야 한다. 간략하게 말하면, 인간은 오직 그가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일 경우에만 놀이하며, 놀이할 경우에만 온전한 인간이다.

곧 놀이(충동)은 인간성의 전체성 회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3부 현대철학에서의 놀이 이해>

현대에 놀이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심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디지털 시대의 놀이는 더욱 빛난다,. 디지털 문화에서 중심은 끊임없이 생서되고 이동하며 사멸한다. "모든 것은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언명은 디지털 시대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현대의 놀이와 곤련한 철학적 이해는 니체에서 출발한다. 니체는 놀이를 철학의 제한적이 영역으로 수용하고 설명하는 여느 철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모든 철학적 주장을 놀이로 설명한다.

니체는 세계를 '스스로 분만하는 에술작품'이라고, 더 극단적으로는 '세계 자체가 예술'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예술은 더 이상 연주회나 전람회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생성, 우연, 순간, 차이, 웃음, 춤 등에 가치를 둔다. 이러한 가지의

바탕에는 놀이의 정신이 있다.

p205

아이의 놀이가 잘 보여주듯이 자기 극복은 낡은 서판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순간과 우연의 긍정에서, 그리고 모든 순간에 자기를 뛰어넘어 창조하는 행위에서 현실화 한다. 놀이하는 아이의 '새로운 출발'은 세계사의 새로운 시작, 가치의 전도, 즉 니힐리즘 국복의 출발을 뜻한다.

p207

니체 놀이철학의 극치는 '힘을 향한 의지' '영원회귀' '운명애' 등과 같은 그의 핵심 사유를 놀이로 설명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때 놀이는 세계와 삶에 대한 가치를 전면적으로 전환하는 동시에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등대 구실을 한다. 니체의 놀이철학은

우리에게 순간과 우연의 긍정을, 그리고 운명의 사랑을 알려준다. 니체는 문화의 건강함은 바로 놀이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에 따른다고 본다.

가다머는 놀이와 예술을 같은 선상에서 놓고 있는데, 놀이와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에서 공통적으로 더 본질적인 것, 즉 주체를 놀이하는 사람이 아니고, 놀이하는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표현은 미적 존재의 본질에 속하고, 이 표현은 놀이이며, 관객은 놀이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작과 끝 (목적)이 아니라 경과 또는 진행됨이다. 가다며가 볼 때 동물의 놀이든 인간의 놀이든 모두 자기펴현이다. 특히 인간의 놀이는 '무엇에 대한' 표현이면서 동시에 '누구를 위한' 표현일 수도 있는데, 이러한 놀이가 바로 예술놀이이다.

핑크의 실존 범주로서의 놀이를 살펴보면 놀이는 다른 실존 범주인 죽음, 노동, 지배, 사랑과 같은 무게를 지닌다.  핑크는 놀이를 '놀이세계'라는 개념으로 통합한다. 놀이는 재미를 추구하고, 의미가 있으며, 공동체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규칙이 있고 도구가 용된다. 따라서 놀이세계는 현실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p294

놀이는 의무, 진지함, 목적, 의미에서 일탈하는 것으로 보이고 선.악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지만, 삶의 통일성을 위해 빠질 수 없는 실존 범주이다. 그래서 핑크는 놀이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진지함을 놀이하며, 진정성을 놀이하며, 현실성을 놀이한다.

우리는 노동과 토쟁을 놀이하며, 사랑과 죽음을 놀이한다. 심지어 우리는 놀이조차 놀이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활동의 전 과정을 '언어놀이'라고 일컫는다. 간의 삶이란 직간접으로 언어를 배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삶의 조건과 과정도 언어놀이의 형식을 취한다고 주장한다. 어놀이에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의 규칙을 그저 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맥락을 이해하고 생한다는 의미이다. 즉, 놀이의 규칙은 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시작되고, 수정되고, 변한다. 그래서 놀이의 규칙은 삶의 양식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p329

이간이 언어를 습득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질서, 그리고 공동체의 규범을 배우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것은 문화의 뿌리가 언어놀이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뜻한다. (...) 언어의 의미는 언어놀이를 통해서 획득되며, 언어놀이는 인간 삶의 형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문화는 삶의 형식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언어놀이의 산물이다.


<4부 탈현대와 놀이의 질주 - 현대예술과 놀이>

예술과 관련하여 니체가 주목한 것은 '도취'이다. 인간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구현하고자 할 때, 언제나 도취가 함께한다. 도취가 없다면 인간은 감흥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니체는 예술생리학에서 예술은 천부적으로 비범한 천재가 작품을 구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 감동을 준다는 칸트식의 근대적 예술관을 거부한다. 예술생리학에서 예술은 장르, 재로, 양식에 따라 구분되지 않는다. 근대에 예술은 대부분의 인간을 관람자와 소비자의 지위로 묶어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수용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p357

예술생리학은 예술을 도취와 힘을 향한 의지의 차원에서 정의 내림으로써 예술을 확장한다,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는 유.무형의 활동 자체를 예술로 본다면, 이론적으로 모든 인간은 예술가가 되고 모든 것은 예술이 되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즉 니체에게 예술가란 '자기 자신을 조형하는 자'이다. (...) 인간 개개인에게 잠자고 있는 창조의 능력을 일꺠움으로써, 외부에서 주어진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의 주체임을 확인 시킨다.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힘을 세계에 투사하여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조형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삶의 과정이자 예술 창작의 과정이다. 삶을 예술작품을 창작하듯 살아가는 것, 이것이 니체가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삶이다.

플럭서스 운동의 특징은 360쪽의 선언문에 잘 드러나 있다.

부르주아적 질병의 세계, 즉 '지식인적인' 전문적이고 상업화한 문화를 제거하라, 죽은 예술,모방, 인공예술, 추상예술, 환상주의 예술, 수학예술의 세계를 제거하라!/ 예술에서 혁명적인 흐름과 조류를 촉진하라. 살아있는 예술, 반-예술을 촉진하라. 비평가, 딜레탕트를, 전문가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비예술실재를 촉진하라./문화적.사회적. 정치적 혁명가들의 핵심집단을 통일된 전선과 행동으로 융합하라.

플럭서스는 삶에서 소외되는 예술활동 일체를 부정한다. 예술활동의 과정 자체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플럭서스는 실험과 창조의 놀이로 파악한다. 플럭서스가 추구하는 바는 모두 놀이의 정신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끄는 디지털 예술의 유형은 바이오 기술을 웅용한 터치스크린과 관객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 기술을 적극 활용한다. 이는 작품과 관람자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디지털 예술의 특징은 이러한 고전적 예술작품의 원본성과 물질성의 개념을 해체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예술행위는 온갖 절망스럽고 부정적인 삶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조형하는 것, 자신을 조형한다는 것은 자기를 긍정하고 동시에 자기를 국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과 삶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결국 인간의 본질은 놀이에서 시작해서 사는 동안 다양한 형태로 놀이를 바탕으로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그 놀이에는 언어를 기본으로 철학,예술까지 즐거움과 호기심을 탐닉하는 놀이를 추구하는 심리로 발전을 거듭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고 있는 교육 등 지식의 축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른 각도로 바꾼다면 좀더 긍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전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현대미술이나 여러 디지털 예술들은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감흥까지는 아직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내가 단순 관람자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든다.


책을 읽는동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고, 반복 기술되는 부분이 있어서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일면 반갑기도 했다.

과다한 배움에 지친, 혹은 강요에 의한 지식 축적에 지치신 분들 일독해 보시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아나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최빈곤층, 소위 밑바닥 인생이다.

이대로 살다간 자신의 앞날은 불보듯 뻔하다.

삼류건달의 성상납이나 하며 살든가, 마약 복용자가 되어 어느 날 죽게 되거나...

그렇게 살 수 없었던 영리한 리아나에게 달콤한 사탕이 던져졌다.

호강에 겨워 정신 못차리는 오드리로부터...

한번 달콤한 사탕 맛을 본 리아나는 그 인생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리아나에게 달콤한 사탕이 사실은 보편적인 평범한 삶일 뿐인데

불행의 극에 다달았던 리아나에게는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쟁취하고 싶었던 복권

같은 것이였을테다.

삶의 밑바닥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소망.

오드리 한 사람의 희생으로 가능했던 꿈이 조지로 인해 계획이 틀어져 버린 리아나.

어쩌면 리아나가 마지막까지 조지를 이용했던 건 애당초 자신의 계획을 망쳐놓은

복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 주인공 조지를 보자.

읽는 내내 이 남자 때문에 복장 터지는 줄....

대학 신입생 시절 만나 석달 동안 사랑하고 헤어진 여자에게

바닥까지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자신에 대한 사랑을

믿고 싶은 남자. 왜일까?  왜지?

진심 묻고 싶다. 

당신은 그게 사랑인가요? 라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 애인의 인생 계획을 틀어놓고 해맑게 사랑타령이나 하는

이 어리숙한 남자.

조지의 죄는 리아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데서부터 시작한게 아닐까.....

그래서 털어낼대로 털어낸 후 어리석은 조지를 골로 보내놓고 깔끔하게 자취를 감춘

리아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덜 생기는 아닌가 싶다.


소설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캐릭터는 아이린.

조지와 애인, 친구 중간 어디쯤에 있는 사이.

인간적으로 애정이 가는 캐릭터.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이해할 줄 아는 여자.

이런 여자를 두고 리아나에게 눈 돌리는 조지가 이해는 안되지만

내가 남자는 아니므로 그 심리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걸로...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흐름이 거슬리는 부분은 있으나

재미면에서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