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세상에서 처음 눈을 뜬 아이처럼 그 풍경을 바라보며 경탄하는 것, 이렇게 경탄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다.
/ 카뮈

예술, 문학, 철학, 자연, 과학, 사회 등 다각적 관점에서 인문학을 만나 볼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왜 미학을 공부해야하는가에 대해서 다섯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다른 것(현실 혹은 세계)들의 만남이다. 예술이 이끄는 다른 영역과 만남으로 우리는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둘째, 감각의 쇄신. 좋은 예술작품은 감각을 쇄신한다. 이는 곧 생활의 쇄신으로 이어진다.

셋째, 넘어가는 능력. 각자의 삶이 감각을 넘고 사고를 전환함으로써 일상을 초월해 다른 온기와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더 넓고 깊은 지평으로 나아가기. 넘어섬을 통해 좌절을 겪더라도 삶을 개선을 의지를 키우게 된다.

다섯째, 자기 삶을 향유하는 일. 인생에 있어 영원한 완성을 이뤄낼 수는 없겠지만 심미적 경험은 삶을 향유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는 심미적 경험이 삶의 변형에 이어지지 못한다면,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책을 읽는동안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저자의 말처럼 나도 이 책을 통해 심미적 경험으로 잠시나마 삶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였을까?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를 보고 있자면 나는 지금의 내 모습,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본다. 조각배에 올라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매달리고, 배를 물어 뜯고, 아구 다툼을 한다. 배를 노 젓는 이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일을 할 뿐이며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그들을 외면한 채 배 위에서 강을 건너고 있다. 이 정도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너무나 닮아있지 않은가!

라 투르의 [점쟁이 여자]는 정말 재밌다.
네 사람이 모여 있지만 시선도 손짓도 모두 제각각이다. 가운데 젊은 남성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 젊은 두 여성과 늙은 점쟁이가 짜고 치는 고스톱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이 남자, 나중에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이 봄, 비록 미세먼지 때문에 망설여지더라도 벚꽃 피는 어느날에 르누아르의 그림처럼 유쾌한 이들과 즐거운 식사를 나눠야겠다.

43.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것에 배어 있는 작가의 흔적ㅡ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다. 그는 어떻게 이 세상을 표현했고, 어떻게 자기 삶을 살았을까? 예술도 결국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한 방식인 까닭이다.

73.
인간의 이념은 찬란하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것에 못 미친다. 간극은 그래서 생겨난다. 삶의 간극과 균열은 불가피해 보인다. 이는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고, 현실 자체의 모순성에서 오기도 한다.

88.
슬퍼해야 할 것은 이 모든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우리의 무감각일 것이다.

97.
수백 개의 무대가 있다면, 이 무대 뒤의 사연이란 수천, 수만 개에 이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어두운 배경 아래 잠겨 있는 것이다. 예술이 묻는 것은 바로 이것이고, 그림 감상을 통해 우리가 깨닫는 것도 바로 이 배경 아래 잠긴 사연들이다.

127.
삶의 정경은 창문의 안과 밖, 여기 이곳과 저기 저 너머, 나의 이쪽 현실과 그들의 그 밖 현실 사이의 경계를 지금의 내가 얼마나 넘을 수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이 넘어섬, 아니 넘어서려는 의지야말로 비루한 일상에 품위를 부여하는 낭만적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143.
모든 인공적인 것은 사멸한다. 사람은 기막힐 만큼 짧고도 부박한 삶을 산다.

154-155.
창조성이란 자신만의 고유성이면서 동시에 대상으로 확대 된 객관성을 뜻한다. 그래서 좋은 글은 자신의 목소리와 타인의 목소리를 함께 담는다. 그러므로 글쓰기란 나의 생각을 너의 생각으로 넓혀가고, 그들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으로 불러들인다.(...) '나로 돌아온다'라는 것은 좁게는 자기 반성이지만, 넓게는 내가 서 있는 현실의 테두리를 돌아본다는 뜻이다. 네게로 나아가는 것은 너를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나의 이해를 통해 우리를 더 잘 파악하기 위함이다. 즉, 타자 지향과 자기 회귀는 주체의 동일한 자기 확대 운동 속에 있다.

182.
삶에는 잘못된 가르침과 전제가 무척 많다. 삶은 버겁고 위험하며 혼란스럽지만, 이 복잡함은 역설적으로 무겁게가 아니라 경쾌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마치 관광객처럼 여기에서 저기로 떼지어 다니며, 안내서에 없는 것은 묻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매일매일 고갈시켜 가는 것은 아닌가? 문제는 이런 피상성을 너무 늦기 전에, 그래서 회복 불가능 하기 전에 깨닫는 일이다. 그래서 눈으로는 수없이 보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옹졸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278.
그 노력은 강제적으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관심과 흥미 그리고 탐구로 추동돼야 한다. 단순히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영화를 보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묻고 보고 답변하며 또다시 탐구하는 절차 속에서 조금씩 체화된다. 교양은 수동적 주입이 아니라 적극적 형성의 과정인 것이다.

291.
좋은 사회란 갈등이 없는 곳이 아니라, 갈등을 폭력 이외의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곳이다. 이런 사회는 비극의 원인을 특정인에게 덮어씌우기보다는 그가 그 일을 하기까지 사회는, 이웃은 그리고 가족과 동료는 무엇을 했나를 먼저 성찰한다. 인간적 삶의 체계란 전가와 배제의 체제가 아니라 이해와 공존의 체제인 까닭이다.

298.
인문학은 나의 현재의 느낌ㅡ현재적 순간의 충일된 느낌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느낌은 생각으로 이어지고, 생각은 언어로 표현되며, 표현된 언어는 다시 성찰의 대상으로써 결정과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으로 나아간다. 감정ㅡ사고ㅡ언어ㅡ결정ㅡ판단ㅡ행위는 반성적 과정 속에서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것이다. 이런 경로 속에서 인간은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이렇게 돌아보는 가운데 주체성의 내용을, 그 정체성의 성격을 꾸려나간다.

339.
한 사회에 숨통이 트인다는 것은 그 사회가 생기를 얻어간다는 뜻이다. 문화의 문제가 '삶의 세부적인 면에 충실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회경제적, 정치적 조건에 지탱되면서 무엇보다 내용적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는 문화적 유연화의 많은 것이 개인과 사회가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잃지 않는 데서 시작됨을 말해준다.


생각한다는 것은 빈자리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자리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 '꽃 진 자리에'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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