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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성의 고리>
- W. G. 제발트
한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992년 8월,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함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퍽주로 도보 여행을 떠났다.
(첫 문장)
공허함을 달래고자 떠난 여행. 1년 후 화자는 그 여행에서 여러 파괴의 흔적들을 보고 먹먹한 전율로 인해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그가 전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대인 학살,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전쟁과 폭력, 그로인한 도시 파괴. 문명화라는 명분을 내세운 침략, 사유재산과 자본주의가 장악한 대규모 산업에 의한 영세 산업의 몰락, 그리고 자연(생태계) 파괴.
205.
아니,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소리도, 어떤 날도 없었다. 그리고 들릴락 말락한 작은 소리로 장송행진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밤은 끝나가고, 여명이 다가온다. 저 멀리 창백한 바다 위의 섬에서 싸이즈웰 발전소의 묘처럼 보이는 마그녹스 원자로의 윤곽이 드러난다. 도거뱅크가 있으리라 짐작되는 곳, 오래 전에는 라인강의 삼각주가 있었고 범람된 모래 위로 푸르른 초지가 자라나던 그곳에서.
소설에서 화자는 이러한 사건들에 실존 인물을 기억 속으로 또는 현재에 불러들여 허구의 인물들을 만나게 함은 물론 사용된 사진 또한 실제와 허구가 교묘하게 섞여 있다.
뼈단지와 관련해 매장 형식을 논한 토마스 브라운을 비롯하여 콩고강을 왕래하는 기선의 선장으로서 제국주의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던 작가 조지프 콘래드, 권력의 늪에서 끝까지 헤어나오지 못했던 서태후, 시인 엘저넌 스윈번과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낭만주의 문학가 프랑수와 샤토브리앙까지. 작가는 화자가 되어 이들을 통해 지나온 역사를 비판하고 성찰한다.
96.
토마스 브라운은 유골단지 매장에 대한 그의 논문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들 무렵 미국의 사냥꾼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난다고 썼다. 브라운은 이어서, 질질 끌리는 긴 옷자락처럼 밤의 그림자가 지구를 쓸고 지나가고, 해가 지면 세상이 한 구역씩 줄줄이 드러누우므로, 지는 해를 계속 따라가면 우리가 사는 행성이 언제나 사투르누스의 낫이 쓰러뜨리고 거두어 들인 시신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썼다ㅡ그런 지구란 간질병에 걸린 인류를 위한 끝없이 긴 묘지일 것이다.
145.
코르제니오프스키는 그가 겪어야 하는 고생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단지 그가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콩고에 저지르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146.
이곳의 모든 것이 싫습니다. 사람들도, 사물들도 모두 싫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싫군요. 아프리카 상인들과 거래업자들은 비열한 본능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 온 것이 후회되는군요. 그것도 아주 비통하게. (코르제니오프스키)
화자는 길을 잃기도 하고 멜랑콜리해지는 여행을 하면서 역사는 힘의 과시와 파괴로 점철되어 있으며, 다수는 이를 묵인함으로 동조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또한 문명과 진보라는 명분 안에서 자행되는 행위는 국가와 사회의 이익에 묻혀진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172.
그들(영국)이 원명원을 불태운 진정한 이유는, 중국인이 미개하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보여주는, 현세에서 창조된 이 낙원이 고향에서 끝없이 멀리 떨어져 강요와 궁핍과 갈망의 억압 밖에 알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어처구니 없는 도발로 비쳤던 데 있었을 것이다.
278-279.
우리 사회의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남겨놓은 금속과 기계의 쓰레기더미 사이를 돌아다니는 미래의 이방인처럼 나 또한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 여기서 살고 일했는지, 벙커 안의 원시적인 장비들과 천장 아래의 철제 궤도들과 아직 군데군데 타일이 붙은 벽에 걸린 괭이들, 쟁반 크기의 물뿌리개, 승강장과 하수구 따위들이 어디에 쓰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점점 더 눈을 파고드는 역광 속에서 문득, 사라진 지 오래인 풍차들이 어두워져가는 풍경 속 여기저기서 무겁게 진동하며 날개를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작가는 감정이 격하지 않은 절제된 문장으로 내용을 펼쳐 놓는다. 이러한 역사가 새로울 것 없이 늘 그래왔다는 듯이. 제국주의에 의한, 개인의 삶을 연소시켜 이뤄낸, 문명의 발전과 풍요가 과연 올바른 길인지 생각해 보라고 독자에게 툭! 던진다.
토성의 고리는 적도 둘레를 원형궤도에 따라 공전하는 얼음결정과 짐작건대 유성체의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서 있다. 아마도 과거에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
/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
역자는 토성의 고리가 토성의 힘에 의해 파괴된 달의 잔해들이 듯, 화자가 여행했던 폐허의 잔해는 힘에 의해 파괴된 것들임을 말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잔해들로 이뤄진, 그래서 얼만큼이나 두꺼운 고리에 둘러쌓여 있을까.
처음 접하는 작가다.
찾아보니 1995년 출간된 작품이고 우리나라에는 2011년에 처음 출간됐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작품을 몰랐을까? 1944년 독일 출생이지만 1966년에 영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독일문학 교수였고 작가로서 십여년 동안 글을 써서 작품은 많지 않다고.
청소년 시절에 전쟁과 유대인 학살에 대해 침묵하는 부모 세대에 분노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전쟁과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한 그의 성찰이 남다르다.
다른 작품도 찾아서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사족.
소설, 토성의 고리!
너의 정체성은 무엇이냐?!
[소설 속 문장]
31.
병이 들어 기형적으로 성장한 것들이나 병적이라는 점에서는 조금도 뒤지지 않는 왕성한 발명 능력으로 자연이 자신도 자신의 지도 안 모든 빈 곳에 채워넣은 온갖 기괴한 것들에 우리의 관심이 주로 쏠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낙원을 꿈꿀 용기를 읺어버린 것이다.
43.
한 시대가 끝나는 건 한 순간의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60.
(독일 출신 수공업자는) 가끔씩 자신은 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도 거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지 스스로 물어보게 될 때마다 거대한 저택과 호화로운 배를 가졌지만 결국 비좁은 무덤에 묻힌 그 암스테르담 상인을, 마지막 가는 길을 자신도 함께 배웅해주었던 그 상인을 떠올렸다.
70.
여자들이 청어의 내장을 빼내고 크기에 따라 분류한다. 다음으로 바다의 쉴 줄 모르는 방랑자들은 열차의 화물칸에 실려 지상에서의 마지막 운명을 완수하게 될 곳들로 수송된다.
180.
열심히 일하고, 기꺼이 죽고, 짧우 시일 내에 마음대로 번식시킬 수 있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목적에 맞게 활동하는 데만 열중하는 누에들이 황태후에게는 이상적인 백성들로 보였던 것이다.
182.
되돌아보면 역사란 해변으로 거듭 몰려오는 파도처럼 우리를 덮치는 불운과 시험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지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 가운데 어느 한 순간도 진정으로 근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서태후)
200.
나는 검게 반사되던 노간주나무가 차례차례 불의 혓바닥에 닿자마자 마치 부싯깃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둔탁하게 폭발하듯 순식간에 불길을 일으키고, 곧이어 고요하게 흩날리는 불꽃 속에서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309.
나무들은 아직 너무 작아서 내가 나무와 태양 사이에 서면 나무에 그림자를 드리워 준다. 하지만 후일 다 자라고 나면 나무들이 내게 그림자를 돌려줄 것이며, 내가 나무들의 유년 시절을 돌봐 주었던 것처럼 나무들은 나의 노년시절을 돌봐 줄 것이다. 나는 나무들에 결속감을 느끼고 있고, 그들에게 소네트와 비가와 송시 들을 바친다. 나는 아이들의 이름처럼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고, 언젠가 나무들 아래에서 죽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282.
끝없이 직선으로 뻗어나간 길을 걷는 동안 자동차라고는 한 대도 보지 못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외로이 걷는 것이 즐거웠는지 고통스러웠는지 나 스스로도 모르겠다. 때로는 납처럼 무겁고 때로는 새털처럼 가벼운 시간으로 기억되는 그날, 구름이 가끔 약간씩 틈을 벌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