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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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지각했다.

첫문장

 

암 말기 선고를 받고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빅 엔젤은 전국에 흩어져있는 가족을 불러들여 아무도 잊지 못할 자신의 완벽한 마지막 생일 파티를 하고자 마음 먹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의 생일 전날에 100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게 되다니! 

 

13.

'어머니, 아직 돌아가시면 안 되는 거였어요.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요. 아시잖아요. 이미 너무 힘들다고요.' 

 

빅 엔젤이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마마 아메리카의 장례식과 그의 생일 파티를 위해 전역에 있는 사돈의 팔촌까지 가족이 하나둘 모여든다.  

 

빅 엔젤의 어머니 마마 아메리카의 장례식과 빅 엔젤의 마지막 생일 파티를 위해 오해와 미움으로 분열되었던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면서 솔직한 마음을 서로에게 털어놓고 진실을 얘기하며 용서와 화해를 이루는 따뜻한 소설이다. 

 

데 라 크루스 집안은 멕시코 이민자다. 돈 안토니오는 당시 다수의 가장이 그랬듯 가부장적이고 훈육을 매질로 했지만 든든한 울타리였고 빅 엔젤에게는 영웅같은 존재였다. 어느날 느닷없이 이모부에게 보내져 배를 타게 된 빅 엔젤. 이모부의 학대와 폭력을 더이상 참아낼 수 없없던 그가 생각없이 흔들어 대던 갈고리에 이모부가 맞아 배에서 떨어져 다시 떠오르지 못했다. 그에 대한 죄책감은 엔젤을 평생토록 짖누른다. 지치고 무서웠던 그 시절을 버틴 빅 엔젤의 한 마디,  

 

244.

"나는 가치 있는 놈이야. 난 가치 있는 놈이야."  

  

 

집으로 돌아온 빅 엔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 돈 안토니오는 경찰 업무를 핑계로 외도를 했던 '미국인' 여성에게로 떠났다. 장남이지만 아직은 어린 빅 엔젤은 졸지에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고, 아버지 없는 성탄절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처럼 영웅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를 뺏어간 그 미국인 여자와 그 여자와 아버지의 아들인 리틀 엔젤이, 빅은 죽도록 싫었다. 

 

맏형이 무서웠지만 가까워지고 싶었다. 엄마가 아버지를 쫓아내고 엄마와 둘이 남아 궁핍했던 어느 성탄절, 찾아갈테니 걱정 말라던 형의 전화에 리틀 엔젤은 기뻤다. 그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형은 오지 않았다. 그 수모와 절망감. 어쩌면 그 분노가 리틀 엔젤을 살 수 있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삶은 원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이, 백인 혼혈이라는 손가락질이 왜 내 몫이어야 하는가.   

 열여섯 살에 아버지의 경찰서에서 처음 만난 페를라. 빅 엔젤은 한눈에 그녀를 영원히 사랑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그녀는 두 아들ㅡ인디오, 브라울리오ㅡ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페를라는 빅에게 다가가는 것을 머뭇거리지만 결국 둘은 결혼한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안토니오에게 배우지 못했던 빅 엔젤은 두 아이, 특히 인디오와 관계가 어긋나고 깊은 골이 생긴다. 돌아올 수 없는 브라울리오.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꼭 보고 싶은 사람 중에 하나인 인디오. 빅 엔젤은 인디오에게 용서를 받고 싶다.  

 

489.

"네가 보고 싶었다. 넌 내가 보고 싶었니? 널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무서웠다, 아들아."

  

 

소설은 만 이틀 동안 벌어진 일들을 쓰고 있다. 한때는 대가족을 호령했던 빅 엔젤은 일흔 살에 말기암을 진단 받고,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지도, 혼자 용변을 볼 수도, 씻을 수도, 휠체어 없이는 걷지도 못한다. 사랑하는 페를라와 외동딸 미나만이 자신의 곁을 지킬 뿐이다.  

장례식과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병약하고 노쇠한 빅 엔젤을 보고 우울해 하지 않는다. 잠시 놀랄 뿐, 그들은 늘 그랬다는 듯이 욕설을 내뱉고 그들의 시간을 보내면서 지나온 세월을 더듬는다. 남몰래 형부를 짝사랑했던 루피타, 본의 아니게 조카들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꼴이 된 짐보, 화려하지만 방황하는 라 글라리오사, 의붓 아버지와 용서를 주고받고 싶은 인디오, 남자보다 더 집안을 잘 이끌어가는 미나, 그리고 긴 세월 동안 오해와 미움으로 거리를 뒀던 빅 엔젤과 리틀 엔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며 깊은 회한을 흘려 보낸다. 

빅 엔젤은 모두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특별한 놈이 아니야.

그냥 한 여자의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빠였지.

일하는 남자였고,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는데."

그는 말했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p101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앞에 둔 그에게 '당신은 우리의 영웅'이라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빅 엔젤은 그저 그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때론 비겁했고, 위악을 부렸고 싫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피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삶이 좋았다. 

 

507.

" 좋은 인생이었어."  

깊은 밤, 죽지 말라는 리틀 엔젤의 귀찮은  전화가 그를, 행복하게 한다. 

 

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지각했다.

죽음이라. 참으로 우습고도 현실적인 농담이지. 노인들이라면 어린 애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하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모든 수고와 욕망과 꿈과 고통과 일과 바람과 기다림과 슬픔이 순식간에 드러낸 실체란 바로 해질녁을 향해 점점 빨라지는 카운트 다운이었다. - P149

"내가 왜 걔들을 두고 가야 해?"
"믿으라고."
"이 거지 같은 데이브 놈아. 넌 망설여본 적도 없어?"
"왜 없겠어. 당연히 있지. (...) 그게 바로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거야, 친구. 아무도 피해갈 수 없지. 자네가 의문을 품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하나도 의미 없겠지만. 그게 바로 만사를 현실적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우리를 사람답게 만드는 거라고. 하느님은 천사를 보내서 요정처럼 날갯짓을 하게 시킬 수도 있었고. 우주 유람선에다 럼 펀치와 만나를 실어 보내실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랬다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
- P365

"미겔 엔젤. 죽는 건 어렵지 않아. 다들 죽는다고. 심지어 파리도 죽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죽어가고 있어.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고.(...) 자네의 인생 여정이 나와 조금 다른 것 뿐이야. 죽음이란 시카고행 열차를 잡아타는 것과 같아. 노선은 백만 개나 되고, 기차는 모두 밤에 운행하지. 어떤 기차는 완행이고, 어떤 기차는 급행이야. 하지만 모두 낡고 커다란 기차 보관소에 있어.(...)" - P366

모든 사람은 비밀을 품고 죽는다. 빅 엔젤은 분명히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가장 끔찍한 사실을 안전하게 숨긴 채로 죽을 테니까. 삶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또한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긴 투쟁이다. 이것이 그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었고, 그건 결코 죄가 아니었다. 다만 그가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것 뿐이었다. - P466

비로소 자신이 왜 아직 죽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불꽃이 휘몰아쳐다. 자신의 각성을 즐기기 위해 살아 있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아직 살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단합시키기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살려 했던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알게 되었다. 이 빛의 회오리가 참 예쁘구나. 바로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살아 있었던 거다. 그의 막내 아들. 빅 엔젤은 세상에서 가장 영웅적인 행동을 한 참이었다. 그는 이제 분노가 아니라 기쁨에 차서 씩 웃었다. 세상 모든 책에 쓰인 세상 모든 형사들의 활약을 능가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리틀 엔젤에게 보여주었다. 모든 사람 앞에서 말이다. - P487

매일 오는 그 1분은 모든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황금 거품을 창조하는 것과 같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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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지 1 패시지 3부작
저스틴 크로닝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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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ㅡ PASSAGE TRILOGY 1

[인류 멸망 5년 전]

미국 정부는 강력한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바이러스를 개발하기 위해 볼리비아 정글로 조나스 리어 박사를 중심으로 한 연구단과 군대를 파견한다. 탐사 도중 갑작스럽게 박쥐 떼의 공격으로 파견단은 대부분 사망한다. 몇 년 후 군 주도 하에 '노아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프로젝트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험체가 필요하다. 이 실험체를 데려오는 임무는  FBI의 울가스트와 도일 요원이 맡고 있다. 

 

한편, 형편이 어려운 지넷은 생계를 위해 매춘을 하던 중 실랑이가 벌어져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어린 딸 에이미를 때마침 눈에 띈 수녀원에 맡기고 도망을 간다. 수녀원에 혼자 남아있던 레이시 수녀는 에이미를 받다주고 내전 중인 고향에서 탈출한 이력이 있는 그녀는 에이미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다. 에이미를 동물원에 데려간 레이시, 열세 번째 실험체인 에이미를 데리러 온 울가스트와 도일, 울가스트 또한 에이미를 보자 첫돌 전에 죽은 자신의 딸 에바를 떠올린다. 그때 동물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동이 일어나고 그 소동을 틈타 요원들은 에이미를 데리고 그곳을 벗어난다.  

우여곡절 끝에 '노아 프로젝트' 실험실에 도착한 에이미와 울가스트. 그동안 조나스 리어 박사의 연구는 몇 명의 실험체를 거쳐 뱁콕이라는 살인범을 첫 시작으로 성공을 알린다. 이후 열두 번째인 카터를 끝으로 실험을 마치고, 에이미를 통해 완성체를 이룰 것이다. 하지만 수술을 마친 에이미는 깨어나지 못하고, 에이미와 교감했던, 감금 중인 울가스트를 불러내 그녀를 깨우고자 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실험체 '트웰브'는 탈출하고, 그들에게 물리면 죽지도 살지도 않은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과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실험체들로 인해 연구소는 아비규환이 된다. 깨어나지 못하는 에이미를 안고 도일과 레이시의 도움으로 탈출하는 울가스트. 이제는 딸과 아버지가 된 두 사람은 산 속으로 숨어든다. 그리고 뱀파이어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으로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만 가끔 확인하던 어느날, 두 사람은 핵폭탄이 터짐을 목격한다. 이제 인류는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누군가를 살려야 한다.

[제로의 시대]

388(1).

그때 누군가가 나를 들어 올렸다. 아빠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덩치가 크고 뚱뚱한, 수염을 기른 백인 남자였다. 그 남자가 내 허리를 붙들고 낚아채더니 다리의 반대쪽 끝을 향해 달렸다.(...) 그 남자는 누가 이 아이를 받아 달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때 누군가가 내 다리를 붙잡더니 나를 끌어 내렸고 다음 순간 나는 달리는 열차 속이었다. 열차에 탄 뒤 나는 깨달았다. 이제 엄마도, 아빠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알고 지냈던 어떤 사람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391-392(1). 

여기는 지금부터 우리가 살아갈 곳이야. 성벽과 조명들이 우리를 점프들에게서 안전하게 지켜줄 거야. 노아 이야기 기억나지? 여기가 바로 방주야.(...) '최초의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대부분은 오래전에 죽거나 감염되었고 이제는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내가 느끼는 것은 내가 느끼는 것은 슬픔이 아니다.(...) 생각할 때 가장 고통스러운 것들은 스스로 생명을 놔버린 사람들이다. 슬픔 때문에, 걱정 때문에, 아니면 인생의 무게를 더는 감당하고 싶지 않아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 하지만 아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나이가 들어서라고 생각한다. 예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이 머릿속에서 마구 뒤섞인다. 이제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은 나를 '앤티Auntie'라고 부르는데, 나에게 자식이 없기 떄문이다.(...) 이곳이 지금부터 우리가 살아갈 곳이었다. '최초의 밤', 조명이 켜지고 별들이 꺼진 그날 밤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다시는 별들을 볼 수 없었다.

 

 

[콜로니, 그리고...]

핵폭발 이후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살아남은 인류는 '귀환의 날'까지 규칙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수립해 공동 생활을 이뤄낸다. 파수, 육체노동, 조명 및 전력, 농업, 가축, 상업, 제조, 성소(교육), 병원 등 7개 사업 부문으로 구성된 업무를 분담한다. 그들은 '귀환의 날'이 오면 군대가 그들을 찾아내리라 희망하지만, 파수꾼들의 '긴 여정'을 통해 아마 군대는 없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주민들은 바이럴의 공격을 피해 콜로니 밖으로 나가지 않지만 전기를 공급받는 발전소에 가기 위해 정기적으로 게이트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날도 다를바 없이 물자 수송을 위해 발전소로 향하는 테오, 피터, 알리시아, 아를로. 언제 어디서 바이럴이 나타날지 알 수 없어 경계를 늦출 수 없다. 그런데 도착한 발전소에는 아무도 없다. 무슨 일일까? 이 상황에 알리시아는 피터에게 숨겨진 총들을 보여준다. 총이라니! 그 사이 몰려드는 바이럴 들. 괴물들과의 전투로 사면초가에 몰린 원정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피터는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때 나타난 한 소녀. 열다섯 살 쯤 됐을까? 그녀는 엎드려 있는 피터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덮고 숨을 죽이며 바이럴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소녀와 영혼의 대화를 하는 피터. 그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다.  

 

116(2).

피터는 또다시 이 대화가 기묘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머릿속에서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피터가 아이에게 소리내어 대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누구라도 본다면 분명 피터가 돌아버렸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형 테오를 잃고 가까스로 돌아온 콜로니는 이 소녀의 등장으로 갈등이 시작되고, 심지어 사건 사고가 연이어 터진다. 에이미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누군가와 대화하고, 콜로니 주민들은 소녀가 불행을 몰고왔다고 생각한다. 소녀를 지키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이제 피터와 친구들ㅡ알리시아, 마이클, 사라, 케일럽, 홀리스, 모사미ㅡ는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지도가 가리키는 콜로라도를 향해 떠난다. 소녀, 에이미와 함께. 

 

74(2).

공포가 사람들ㅡ그가 잘 아는,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살림을 꾸리고, 성소의 아이들을 찾아가던 사람들ㅡ을 성난 군중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불과 어제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책의 내지가 쑥쑥 넘어갈 정도로 무척 재미있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먼저 사라가 기록하는 일기. 그들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다는 피터의 제안에 사라가 그 역할을 맡는다. 사라가 남긴 기록에 '발췌', '해독 불가'라는 단어가 쓰여진 것을 보면 이 일기는 세월이 지나서 누군가에 의해 발견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일기가 보여지는 방식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언어와 기록의 중요성을 작가가 언급한 것 같아 좋았다. 

 

사라 피셔의 일기 (사라의 서) 중에서

무언가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이상 두려움조차 예전과는 다르다. 콜로라도에 가면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 우리가 정말 콜로라도까지 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게 정말 중요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오랜 세월 군대가 오기를 기다린 끝에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바로 그 군대라는 사실이다. 

232(2).

 

사라가 원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 사라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 세상이란 그보다 훨씬 위태로운, 수많은 불행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 일의 연속이었다

464(2).

 

 

1부의 막바지에 에이미가 예상 밖의 인물과 해후하는 장면은 뭉클하기까지 하다. 그들이 그런 모습만 아니였다면(그 모습이 아니였다면 해후가 가능하지도 못했겠지만) 얼마나 좋았을까. 그들과의 해후가 에이미에게는 위로가 되었을까. 이 만남으로 인류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게 되는 피터와 일행들. 이제 그들은 단순히 개인의 목적을 넘어선 '사명'을 떠안는다.

알리시아를 살리기 위한 선택. 그후 에이미의 완벽한 조력자가 되기 위한 피터의 결심과 마이클, 홀리스가 피터와 함께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장면에서 조금 아쉬워지려고 했는데, 에이미의 선택은 나의 섣부른 예상을 민망하게 했다.

미안해요, 피터.

하지만 피터를 나처럼 만들 수는 없었어요.

554(2).

 

아무리 선의의 목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과정이 올바르지 않으면 정당성을 잃는다는 이 선택을 에이미가 했다는 사실이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뭉클했다면 내 감정이 넘치는 걸까?

554(2).

그 여행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다. 에이미라는 존재 그자체와 마찬가지로, 이 여행 역시도오로지 믿음 하나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한참 읽다보니 재미있는 사실 발견. 8인의 원정대 구성을 보면 리더(피터), 전사(알리시아), 기술자(마이클), 노동자(홀리스, 아를로), 임산부-어머니(모사미), 의료(사라), 그리고 구원자(에이미). 이 사회를 구성하는 보통의 인물들이다. 세상은 천재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조화를 맞춰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될 것이다.

1부 마지막.

로즈웰 전지에서 안정을 찾아가면서 홀리스의 아기를 임신한 사라는 희망이, 행복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만 같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독자는 불안하다.

그 단어가 뭐였더라? 행복하다.

그래, 나는 행복하다.

바깥에서 총성이 들린다.

나가봐야겠다.

마지막 문장

PASSAGE 3부작 중 1부.

뱀파이어를 등장시킨 인류 멸망에 관한 소설이다. 비평가와 각종 매체들은 코맥 맥카시의 <로드>와 견주는 것을 비롯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로드>와 이 작품은 결이 다르다는 생각이다. 사실 <로드>는 구성이나 재미를 따지자면 선뜻 쉽게 손이 가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로드>는 인류 종말의 원인이나 사건보다는 인간 내면, 본질에 접근하는, 그래서 인류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하는, 보다 철학적인 소설이다.

이 작품 <패시지>는 과도한 폭력을 욕망하는 인간의 과오가 인류 종말의 원인을 제공하고, 종말을 눈앞에 둔 순간, 그로인해 희생된 소녀가 역설적으로 인류 구원의 희망이 되는 판타지 소설이다. PEN/헤밍웨이 상을 포함해 여러 상을 수상한 작가의 필력이나 구성, 밀도감, 몰입도는 칭찬이 아깝지 않다. 엄청난 떡밥도 모두 회수한다. 소소한 반전 또한 흥미를 높인다. 두께의 압박은 있지만 시간을 들여 읽어도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1부 <패시지>는 등장인물들에게 동기부여를 했을 뿐이다. 이들의 본격적인 여정을, 나는 기다리는 중이다.

아름다운 그대여,

내 눈에 그대는 영영 늙지 않는다.

처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그대 아름다움은

변치 않으리라. 

셰익스피어, 소네트 104번

‘문득 나타난 소녀‘, ‘난데없이 나타난 자‘, 천 년을 산 ‘최초이자 마지막이며 유일한 자‘가 되기 전 그녀는 아이오와주에 사는 에이미라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에이미 하퍼 벨라폰테가 그녀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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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 미트 - 인간과 동물 모두를 구할 대담한 식량 혁명
폴 샤피로 지음, 이진구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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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멋진 신세계를 디자인할 때는 호모 사피엔스뿐만 아니라 지각이 있는 모든 생명체의 복지를 고려해야 한다. 생명공학이라는 기적은 낙원과 지옥, 어느 쪽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 유발 하라리


얼마 전,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돌았다. 의심 지역은 출입을 자제하고, 감염 지역 돼지들은 모두 살처분 됐다. 그러던 중 살처분한 돼지를 방치해서 피가 땅 과 식수로 사용되는 물까지 오염시켰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조류독감, 광우병 등 동물 전염병으로 인해 가축들이 대량 학살 되는 사태는 잊혀질만 하면 발생, 반복한다.

이 책은 위에서 언급한 동물 학살 뿐만 아니라 공장식 사육의 문제성, 그에 따른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까지 짚으면서 그 대안으로 청정 고기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논한다.

먼저 가축을 사육하기 위해서는 얼만큼의 사료와 물이 필요할까? 달걀이 닭이 될때까지 필요한 달걀 하나당 물은 50갤런(욕조 하나)이고, 콩과 옥수수는 사람이 먹는 양보다 동물이 먹는 양이 더 많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 가축을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찌우고 키워야 하므로 사료 또한 빨리 키우고 대량으로 생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사용하고 그 많은 농산물을 재배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이미 많은 국가가 물부족 국가 상태이다)하며 재배 면적이 증가하면서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 된다. 동물 생산물의 소비를를 대폭으로 줄인다면 운송 수단보다 더 적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고 할 정도이다.

공장식 사육은 제대로 된 청소도 힘들어서 소독에만 신경을 쓰니 동물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까지 비위생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사료에도 항생제를 섞기 때문에 그 고기를 먹는 사람은 항생제 과잉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도축 과정에서 살모넬라균 등에 오염되는 부분도 무시하면 안된다.

윤리적인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양계장에서 빼곡히 들어찬 닭 한마리는 온전히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라고 한다. 소도 예외일 수는 없다. 우유를 뽑아내고 식용으로 도축하기 위해서 될수있는 한 빠르게 성장시킨다. 푸아그라를 생각해 보라. 간의 크기를 늘리기 위해 목구멍으로 억지로 사료를 쑤셔넣는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보온성 의류를 만들기 위해 살아있는 오리와 거위털을 뽑고, 사치품을 위해 가죽을 벗겨 무두질을 한다(이 과정에서도 화약약품으로 인한 환경오염도 심각하다). 인간은 필요 이상 먹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잔인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과학자들이 대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청정 고기, 즉 세포를 배양해 원하는 고기를 만드는 것이다. 현재 소고기 육포와 패티를 완성한 회사가 있고, 가죽을 개발하는 회사도 있다. 스테이크는 좀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연구 중이다. 가금류도 계속 연구 중이며, 푸아그라와 우유, 액상 난맥은 시식 단계이다. 이 모든 세포 농업에 대한 지지와 반대에 대한 의견은 팽팽하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처럼 사람들은 기존의 식단에서 큰 비중을 차치하고 있는 수많은 동물 생산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산해 내면 받아들일까?

배양 고기에 대해 반대하거나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내놓은 부분들은 먼저 배양액으로 쓰는 소태아혈청인데, 계산해 보면 소 태아 1마리의 혈청으로 1킬로그램 고기 밖에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비용의 문제다. 상용화가 된다면 모든 제품을 연구소에서 생산해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산 라인을 구축한다고 해도 배양 과정까지의 비용이 일반 소비자가 감당할 수 있는 시장성을 확보할 수 있느냐다. 빼놓을 수 없는 맛. 고기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육질과 향, 맛을 배양 고기가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의심. 또한 사료를 재배하는 농업자와 축산업자, 그리고 그와 연계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자리 문제의 해결이다. 채식주의자들의 입장은 고기 소비를 줄이는 편이 지구 환경이나 건강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훨씬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배양 고기를 개발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위생적이고 안전하며 기후 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도살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윤리적인 부분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결국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맛이 있어야 할테고, 공장식 사육만큼 저렴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유기농 식품의 가격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경우에는 단순히 고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장과 뼈까지 사용하니 서양보다는 정착하기가 쉽지는 않을 듯 하다.


사실 나는 고기보다는 가죽에 더 관심이 갔다. 개인적으로 가죽 제품과 모피는 사용하지 않지만 나만 안쓴다고 될 일은 아닌 듯 하여. 사람은 머리카락 한 올만 뽑아도 아프다면서 오리와 거위의 털은 무자비하게 뽑아댄다. 애완동물은 가족이라고 하면서 가방은 소가죽, 소파도 소가죽, 파카는 거위털(그것도 롱패딩). 그리고 좀 덜 먹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모임에 가면 종종 잔뜩 먹고 소화제를 찾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굳이 거위처럼 억지로 간을 키워야 할 일도 없는데...... . 과식하지 않는다면 배양 고기가 조금 더 비싸더라도 이용하지 않을까?


2016년 청정고기 버거가 만들어져 시식 후 연구자 마크 포스트는 질문을 던진다.

"앞으로 20년 후면 슈퍼마켓에서 두 가지 동일한 제품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쪽은 동물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포장지에는 제품 생산을 위해 동물이 고통받거나 죽었다는 문구가 찍혀 있습니다. 환경에 나쁜 영향을 미치므로 환경세도 부과됩니다. 그리고 완전히 같은 제품이지만 실험실에서 생산된 것이 있습니다. 맛과 품질은 동일합니다. 가격은 같거나 더 저렴합니다. 어떤 제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책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현대에 온전하게 '청정'한 식품이 얼마나 될까? 요즘에는 귤도 교배종이 점점 늘고 있고, 오래 전에는 다양했던 바나나 또한 단일종만이 남았으며, GMO 옥수수는 초등생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얼마 안있으면 자연 그대로의 청정 식품은 정글에나 가야 있을지도 모른다(그때까지 정글이 남아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그렇다면 '오리지널'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여러 환경을 고려해 봐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나는 무엇보다도 드루 엔디의 말처럼 '지구에서 산다는 개념을 지구와 함꼐 산다는 개념', 그리고 '생명을 다치게 하지 않고' 동물 생산물을 수확하고자 한다는 발레티를 지지한다. 무엇보다 이대로 간다면 지구도 인간도 안전할 수 없다. 인간이 지구(와 생명체)를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공전의 개념으로 간다면, 아마 선택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저는 고기를 좋아해요. 한번도 채식주의자였던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동물을 취급하는 방식을 정당화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고통을 주지 않고 고기를 키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결책이라고 봅니다."
(판 에일런)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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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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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부터, 외형은 그대로인데 몸무게가 하루에 0.5kg가량씩 줄고있는 스콧. 군살 가득한 몸에 불룩한 배는 여전하고 식욕감퇴, 무기력, 피로감도 없건만 100kg이 넘던 몸무게는 96kg이 되어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점은 아무리 무거운 물건을 들고 저울에 올라가도 맨몸으로 올라갈 때와 몸무게가 같다는 것. 병원에서 특이 케이스로 의료 연구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은 스콧은 이웃에 사는 정년퇴직한 의학 박사 엘리스를 찾아가 상담한다. 하지만 70대에 의사로서 정년퇴직을 한 엘리스도 처음 마주한 증상. 엘리스는 스콧의 마음을 이해하고 당분간 지켜보기로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콧은 몸무게가 줄자 컨디션이나 기분이 훨씬 좋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또 다른 이웃의 개들이 자신의 정원에 똥을 싸자  그 사실을 전하고 주의를 부탁하려고 그들의 집을 찾아가지만, 사과는 커녕 디어드리의 싸늘한 냉소만 받고 왔다. 그녀의 행동이 납득이 안되던 스콧은 팻시의 식당에 붙어있는 지역 마라톤 대회 포스터와 트레버라는 사내와 말다툼, 서점을 운영하는 마이크를 통해 디어드리의 입장을 이해한다. 디어드리와 미시는 '결혼까지'한 레즈비언 부부.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이 동성애자일 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결혼까지 한 것에 대해 거부감과 경계심을 갖고 있다. 캐슬록이 아름다워 이사 와 식당을 연 부부는 관광철에만 장사가 되고 비수기에는 동네 주민들이 식당을 찾지 않아 문을 닫아야 할 상황. 그 기저에는 자신들을 향한 혐오가 있음을 안다. 그래서 마라톤 선수 출신인 디어드리는 지역 마라톤 대회에 나가 우승을 노린다. 식당 영업이 잘 되기를 바래서가 아니라 소수자를 차별하는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당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미시와 디어드리를 돕고 싶은 스콧은 마라톤 대회에 신청한다. 그의 몸무게는 이미 64kg이고 활동량이 많아지면 몸무게는 더 빠르게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손에 잡혀있는 물체는 무중력 상태다. 마라톤 대회 당일, 겉으로 보기에 스콧의 몸무게를 알리 없는 사람들은 그에게 당황스런 눈빛을 보내지만, 마라톤이 시작하자 더 당황하게 된다. 결승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급격히 악화되는 기상 상태. 쏟아지는 빗속에서 넘어질 뻔한 디어드리는 스콧의 도움으로 우승한다. 경기가 끝나고 엘리스 부부, 미시와 디어드리 부부와 저녁 만찬을 준비하는 스콧. 이 식사 시간에 미시와의 대화를 통해 편견에 갖혀 있는 마이라 엘리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스콧. 더불어이제는 몸무게가 하루에 0.5kg이 아닌 더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음을 밝힌다.그의 몸무게가 0을 가리키는 순간 그는 어떻게 될까? 
 
 
소설은 우리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차별과 고정관념, 혐오와 다름의 인정에 대해 통찰한다. 동성애 부부인 미시와 디어드리, 몸무게가 줄어드는 순간부터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난 스콧. 그들은의 대화를 통해서 소수자로서 겪는 아픔과 상처를 짐작할 수 있다. 
  
159-160.
"저는 병실이나 정부 기관에서 검사나 당하면서 이 체중 감소 프로그램의 남은 시간을 허송하고 싶지 않아요. 어쩌면 대중들의 흥밋거리가 되거나요." (스콧)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완벽하게 이해돼요." (디어드리)
(...)
"자네 너무 무섭지? 얼마나 겁이 나겠어 그래."
"그게 말이죠. 무섭지는 않아요. 아주 초반에는 겁이 났죠. 그런데 이젠...... 모르겠어요...... 괜찮은 것 같아요." (스콧)
"난 그 말도 이해가 돼요." (디어드리)
 

 
 
인간의 존업성과 평등에 대해서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배워왔고, 어른이 되어서도 가장 우선해야 할 가치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집단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 안에서, 다수자들끼리만의 평등과 존엄성이 무슨 의미가 있나. 집단을 운용함에 있어 '다름'과 '다양성'은 불편한 명제다. 그래서 틀을 짜고 그 틀 안에서 획일적이지 않은 이들을 차별하고 혐오한다. 진정한 힘은 편을 갈라 어느 편을 누르고 우위에 서는 것이 아닌 이해와 인정, 이를 통한 조화다. 
 
출판사에서는 이 소설에서 상냥한 스티븐 킹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책을 덮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만큼 따뜻한 이야기다. 190cm 키에 마흔 살이 넘은 상냥하고 친절한 스콧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빗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넘어질 뻔한 디어드리를 가뿐하게 안아 올린는 스콧의 모습과 무엇보다 고도에 있을 그를 상상해 본다. 길지 않은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스티븐 킹이 오마주 했다는 리처드 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도 읽어봐야겠다. 
 
 
사족.
책의 표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편이다. 원서의 표지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환하게 터지는 저 불꽃 안에 그가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번역본 책은 표지가 2개. 먼저 겉표지는 고도에서, 초록이 가득한 공원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들을 지켜보는 스콧. 소설의 내용이 잘 전달된다. 속표지는 뭉실뭉실한 구름 위의 푸른 하늘만 있다. 표지를 보자마자 애니메이션 'UP'이 떠올랐다. 그이도 저 구름 속 어딘가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으려나?

 

그녀의 미소 뒤에 있는 화나고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세상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리라 결심했을 것이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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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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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시가 허물로 뒤덮이자 정부는 D구역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다국적 제약 회사의 기업도시로 지정한다. 허물이 온몸을 감으면 방역 센터에서 치료 받고, 허물을 막아준다는 프로틴을 구입해 먹는다. 하지만 아무리 치료를 받고, 프로틴을 사 먹어도 허물은 어김없이 반복적으로 사람의 몸을 휘감는다.  
 
파충류 사육사인 '그녀' 또한 치료를 위해 방역 센터 치료에 지원하고 그곳에서 후리와 김씨, 임상실험을 거부하는 척을 만난다. 거대한 뱀 '롱롱'이 허물을 벗는 순간 인간의 허물도 벗겨지리라는 전설. 때마침 폐쇄된 궁에 거대한 뱀이 있다는 소식에 '그녀'는 후리, 김씨와 함께 롱롱을 잡기 위해 궁으로 향한다. 각각 다른 소망을 품고 마침내 마주한 롱롱. 100여 미터에 가까운 길이와 1미터 정도의 몸통 폭. 파충류 사육사인 '그녀'조차도 처음 보는 거대한 크기다. 포획에 성공한 세 사람은 롱롱을 김씨의 타이어 가게에서 사육하고 이 소문은 일파만파 퍼진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허물을 벗고 싶다는 단 하나의 간절한 소원을 안고 롱롱의 앞에 모여 든다.
롱롱을 살리고자 하는 '그녀', 롱롱을 통해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과 제약회사의 음모를 밝히고자 하는 척, 그리고 롱롱을 이용해 또다른 야심을 드러내는 공 박사. 속속들이 밝혀지는 검은 세력의 비인간적이고 사악한 계략.  
 
혐오와 공포를 이용해 개인의 탐욕을 충족하고, 그에 따른 양심의 가책은 말할 것도 없이 오히려 도시를 유지시키는 선순환이라고 말하는 공 박사와 허물이라는 공포로 인해 저항은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악을 들여다 본다. 
 
"어떤 의미에서, 이 도시가 생산하는 건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네. 사람들은 몸에 허물이 생기면 자발적으로 방역 센터로 오지. 허물은 혐오스럽거든. 방역 센터로 오면 허물을 벗겨주고 유효 물질을 추출하지. 그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 허물을 키워.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선순환이란 말일세." (p277 / 공 박사) 
 
공 박사의 욕망은 돈일까, 명예일까, 아니면 과학자로서의 성취감일까? 소설을 읽어보면 도시 하나를 표본 집단으로 만들 정도로 연구에 열정적이지만 그는 돈에 대한 욕심도, 명예욕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악의적인 방법을 이용하면서까지 연구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의 마지막 롱롱의 허물을 벗기기 위해 제 발로 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 그녀와 롱롱의 동결 세포주를 손에 쥐고 다른 도시를 찾아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하는 공 박사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도시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것만 있으면 다시...... ." (공 박사) 
 
우리가 공포스러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어떤 허물을 뒤집어 쓰고 있는가, 그리고 그 허물과 그 허물에 대한 공포를 벗어낼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영원히 허물을 벗으면 한 번도 허물 입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한 번도 버림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 P71

"공포는 방역 센터가 시민을 통제하는 도구입니다. 허물을 퇴치하기 위해 세금을 걷고 수십 종의 프로틴을 출시해 점점 가격을 올리고 방역대를 도심에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허물을 입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허물에 대한 공포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을 지배합니다. 전설 따위에 기대 당신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 - P146

"이 도시에서 공포는 거짓을 진실로 뒤바꾸는 알리바이입니다. 공포가 실재하니까 거짓은 없다는 논리입니다. D구역은 이 거대한 알리바이의 중심에 있습니다. 백신이 개발되면 D구역도 사라집니다. 방역 센터가 공들여 만든 시스템을 제 손으로 무너뜨릴 리 없습니다."
- P153

"보험 영업이란 게 말입니다, 실은 불안을 퍼뜨리는 일입니다. 허물에 대한 불안을 수치로 증명하고, 만일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고 고객을 설득하죠. 허물이야말로 이 도시에 존재하는 제일 큰 불안이지 뭐겠습니까. (...)" - P179

"시민들은 프로틴 업이는 소원조차 빌지 못했습니다. 이 도시에선 바코드가 찍히지 않은 소원은 불량품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시장에 유통되지 않는 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두지 않았습니다. 거대 제약 회사의 시스템 안에서만 안전하다고 느겼습니다. 방역 센터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도 침묵했습니다. 의심을 품는 것조차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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