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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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괜찮아?

 

입에 착착 붙는다는 말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마음에 착착 붙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 책에서 언급된 도서들 중에서 두세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읽은 책이라 발췌한 문장 앞뒤 문맥의 흐름이 새록새록 기억이 나 더 깊이 공감했다. 

 

4부로 나눠지는 에세이는 나의 감정, 시간, 관계, 세계를 살피는 시간을 갖는다.

누군가가 물어주는 안부, 어느 이에게 전하는 위로, 온전히 나를 다독여줄, 열정을 부어주고 충전할 나만의 시간과 공간, 때론 혼자이고 싶지만 부대끼고 귀찮은 그들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그래서 쉽지 않은 타인과의 관계, 오롯이 나로서 설 수 있어야만 함께 하는 것이 더 자유스러울 수 있기에 나를 들여다봐야하는 나의 세계.

 

작가는 살면서 종종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또 그 안에서 위로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정하게 건드린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혹은 겪어봤을 크지 않은 상처들에 밴드를 붙여준다고 해야 할까...... . 

 

 

읽으면서 조금 다른 생각도 해본다. 

 

굳이 어른으로 살거나 훌륭하게 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매 순간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최선을  다해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걸 테니까요. 

p129

 

훌륭하지 않아도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이미 충분히 가치있는 인생이라는 말에 많이 공감한다. 다만 나는 어른으로 살고 싶다. 그것도 좋은 어른으로 살고 싶다. 젠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래서 내가 어느 시절 무서울 때 잠시 숨어 기댈 이가 있었던 것처럼 나도 그리해줄 수 있는 믿음직한 어른이고 싶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오래 전에 읽었던 책들을 단편적으로나마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장 그리니에가 쓴 <카뮈를 추억하며>에서는 장 그르니에의 에세이에 쓴 카뮈의 '찬사의 글'이 떠올랐고, 허수경 시인의 시 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아릿하게 읽었던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묵직한 감흥을 안겨주는 나의 완소 애정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등등등.

뒷표지를 덮고 그 책들을 다시 읽고 싶어 책장 앞을 서성인다.

 

발췌한 문장들이 모두 좋았지만, 무척 좋아하는 에세이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우종영 저)>의 일부분을 옮긴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가 싫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오로지 혼자 가꾸어야 할 자기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떨어져 있어서 빈 채로 있는 그 여백으로 인해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 구속하듯 구속하지 않는 것, 그것을 위해 서로 그리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 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늘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나무들이 올곧게 잘 자라는데 필요한 이 간격을 '그리움의 간격'이라고 부른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바라볼 수는 있지만 절대 간섭하거나 구속할 수 없는 거리, 그래서 서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거리.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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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룸 - 영원한 이방인, 내 아버지의 닫힌 문 앞에서 Philos Feminism 6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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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46  이슈테반 프리드먼

1946-1953  이슈테반 팔루디

1953-2004  스티븐 팔루디

2005-2015  스테파니 팔루디 

 

수전 팔루디가 2004년부터 트랜스젠더 아버지를 10여년간 추적한 기록이다. 남성 유대계 헝가리인에서 미국인으로, 여성 헝가리인의 삶을 살아왔던 아버지의 역사를 그와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거꾸로 되짚어 간다.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자신의 여성성을 찾고 싶었던 트랜스섹슈얼인 아버지와 이 시대 페미니스트의 대표선수 격인 수전 팔루디의 서로에 대한 관점이었다. 가끔 지인 중 페미니스트에게 성전환 수술한 여성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어떠냐고 봤을 때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많은 페미니스트 들이 트렌스젠더 페미니스트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트랜스젠더는 페미니스트 들이 탈코르셋을 외치는 와중에 왜곡된 여성성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이러한 나의 궁금증은 의미가 없었다. 스테파니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기도 하고, 이 책은 페미니즘과는 별개(?)인 젠더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부분들이 더 크다. 수전 팔루디 또한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대화는 많지 않았다. 

 

2004년 7월 어느 오후, 아버지로부터 '사랑하는 부모'라는 서명과 함께 사진 한 장이 첨부된 이메일이 도착했다. 사반세기 가깝게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아버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헝가리에 한 번 방문하라고 써있다. 

 

수전이 10대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가부장적이고 고압적이며 어머니가 법원에 접근금지명령을 신청할 정도로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왜 여성이 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왜 70대에 굳이 성전환 수술을 한 것일까? 수전은 2004년 8월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헝가리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녀는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추적한다.  

 

페미니즘이란, 계속되는 만트라에 따르면, '산텍'에 대한 것이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선택했을까? 그것은 내가 물려받은 것, 내가 조절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역사로부터 이룩해낸 것이 아닐까? 아내와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 남자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분노 때문에 나는 여성평등을 위해 움직이는 운동가가 되었다. 페미니스트로서 나의 정체성은 아버지가 겪은 '정체성 위기'의 잔해, 자신이 선택한 남성적인 페르소나를 주장하지 못했던 좌절에서 태어났다. 취미이자 피난처였던 페미니즘은 내가 선택한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내가 도망치지 못했던 것은 아버지였다.

p99

  

 

이슈테반 프리드먼.

유대계 헝가리인으로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둘 다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각자의 사업과 사교생활에 바빴으며, 어린 아들을 가정교사에게 방치했다. 부모와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 이슈테반. 유대인이 아닌 헝가리인(마자르인)으로 살았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프리드먼 집안 사람들은 가차없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슈테반은 살아남아 미국으로 떠났고, 유대식 이름을 버리고 개명하여 미국에서 가정을 꾸렸지만 안정을 찾지는 못했다. 헝가리로 돌아온 그는 스테파니 팔루디로서 새로운 삶을 산다.  

 

그녀 삶의 이력을 쫓다보면 그녀가 고압적이고 독재적인 성향을 가진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어린시절에 기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스테파니는 아버지, 어머니 두 사람 모두에게 방치됐었는데, 유독 어머니를 미워하고 비난하며 임종의 순간까지 외면한다. 그에비해 아버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 수전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페미니즘을 선택했다면, 스테파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여타 다른 여인들처럼 되고 싶었던 것일까?  

스테파니는 성정체성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잘 동화되었던 헝가리 유대인이였건만 히틀러가 득세하자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용소로 보내진다. 유대인이었지만 마자르인으로 살았던, 그러나 결국 국가로부터 배격된 민족 정체성까지 혼란을 겪는다.

 

"오래된 습관을 없애야 해. 그러지 않으면 언제나 이방인이 되고 말지. 이... 이 소속감 없는 불안 속에서 말이야."  

p145

 

"사람들은 구분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경계에 있는 사람들조차 구분이 필요하죠. 그래야 경계에 있을 수 있잖아요. 정체성이 있어야 해요." (멜) 

p217

 

개인의 역사, 모든 개인이 저마다 경험하는 특별한 투쟁, 실망, 삶에 대한 열망, 이 모든 것이 '정체성'이라고 이름 붙은 하나의 유리병에 깔끔하게 들어갈 수 있을까?

p228

 

스테파니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그 위험한 수술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전은 아버지의 담당의인 미슐레이 박사를 만나서 수술 이후 아버지의 성격에서 어떤 차이를 발견했냐고 묻는다. 그는 스테파니가 '행복한 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그것이다. 얼마를 더 살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내가 가장 마음 아프게 읽었던 부분은 자녀에 대해서 언급하는 두 부녀의 대화였다. 스테파니는 아이(자식)가 없다면 인간으로서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얘기하지만, 수전은 존경했던 한 여성이 낙태 수술 이후 평생을 괴롭히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임신을 중지한 자신의 삶을 회복시키고 젊은 페미니즘을 키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고압적인 독재자이자 폭력자일 뿐만 아니라 가정을 버렸다는 사실이, 수전은 아이러니하다. 이 대화의 연장선에서 수전은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결혼했는지, 그리고 아버지와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이처럼 수전은 아버지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그의 내밀한 부분까지 알게 되며 아버지가 아닌 인간 스테파니(스티븐) 팔루디를 바라본다. 

 

25장의 제목이 <탈출>이다. 아마 이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지만, 나는 문득 수전은 스테파니를 규정짓는 것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수전은 치매는 자아의 해체이자 정체성의 사망이라고들 하지만 오히려 스테파니로서는 말년에 앓았던 치매로 인해 그녀를 평생 괴롭혀온 피해망상과 과거의 현실들, 외면하려 했던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던 까닭은 단순히, 성전환자인 아버지를 페미니스트인 딸이 들여다본다는 스토리 때문만은 아니다. 헝가리 근현대 역사, 그 안에서 유대계 헝가리인들이 겪는 민족 정체성 혼란과 배신감, 트랜스젠더들의 성정체성 혼란과 심리적 고통 그리고 수술의 과정에서 오는 위험(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부담 등 일반적으로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다. 

 

스테파니 팔루니의 파란만장한 일생과 수전 팔루디의 필력이 만나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부녀의 티격태격 하는 정다운(?) 말다툼이 웃음짓게 하고, 무겁게 누르는 역사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호기심을 넘은 진지한 궁금증 혹은 숙제 비슷한 고민 몇 가지가 생겼다. 트래스젠더, 페키니즘의 고정관념을 접어두고 책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트랜스섹슈얼은 ‘이전의‘ 자아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리고 당신의 과거를 삭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그 성별이라고 믿는 성별처럼 ‘보이도록‘ 신체를 변형시킴으로써 당신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완고하고 성차별적인 이해에 동조하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은 그런 변형을 통해서 생물학이 운명이 아님을, 그리고 ‘트렌스‘는 젠더에 처진 경계선을 단순히 건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인가?​ - P230

히르슈 펠트가 인정한 하나의 정체성은 ‘범인권주의자 panhumanist‘였다.

"당신은 어디 소속입니까? 당신은 무엇입니까?"는 정말로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당신은 독일인인가요? 유대인? 혹은 세계시민?"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의 대답은 어느 경우에도 ‘세계시민‘일 것이다, 혹은 ‘그 세 가지 모두‘이거나.​


- P249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유대교도인가 기독교도인가?

헝가리인인 미국인인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너무 많은 상반되는 것들이 함께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의 누워 있는 몸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단 하나의 구분,

단 하나의 진정한 이분법이 있구나.



삶과 죽음.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 P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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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시간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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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도덕. 도덕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을까.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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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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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께서 책마다 쓰신 서문과 발문 모음집.
어느새 9주기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믿기지 않았던 감정이 떠오르면서 책을 펼치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전작을 모두 읽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작품을 읽었기에 글을 읽고 있으니 새록새록 내용들이 생각난다. 
 
자식들을 다 키워놓고 마흔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하여 어떻게 그토록 많이 쓸수 있을까 싶을 만큼 다작을 해오셨다. 서민과 여성의 삶, 성차별에 대한 시선, 산업화로 접어들면서 사그라드는 인간성에 대한 고민을 길게 혹은 짧은 꽁트로 담아내셨다.
(불현듯 글쓰기를 늦게 시작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으셨던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39.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집 밖에서의 일이 더 많이 있고, 그 일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데, 나는 그들을 보살피고 기다리는 게 전부고 그 일이나마 하루하루놓쳐가고 있다는 깨달음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나도 뭔가 나만의 일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같이 열정적인 여자가 계속 그 일정을 가족에게만 쏟는가면 종당엔 가족관계를 지옥으로 만들 것이 뻔했다. 
('장밖은 봄' 서문에서}

 
 
<휘청거리는 오후>로 처음 신문연재를 하셨을 때 당신은, '나에게 집요한 간섭이 되어 작용한 것은 신문소설이란 형식이었다. 다음 회를 기다리게 끝은 맺는다는 잔꾀 같은 건 처음부터 염두에도 두지 않았지만, 어떻든 8장 미만에서 딱딱 호흡을 끊어야 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당한 괴로움이었다. 이런 고통은 나의 체질과 역량과 다분히 관계가 있는 개인적인 고통일 뿐이지 신문소설 작가의 보편적인 고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생경한 경험을 토로하기도 하고, 자신의 글이 '또 하나의 책을 내면서도 이것이 이 땅의 문학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활자 공해에 보탬이 되지나 않을까 싶어 이리저리 눈치 보인다 ('배반의 여름' 서문에서)'는 걱정을 하시기도 했다. 서문 혹은 발문에 자신의 글이 활자 공해가 되는 것을 자주 언급하시는 것을 보아서 쓰신 작품이 세상에 어떻게 보여질까, 어떤 영향을 미칠까에 대한 우려를 계속하셨던 것 같다.  
 
소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 등을 통해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억압 관계, 결혼 제도에 있어서 남녀 평등에 대한, 당시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문제들을 짚어내고 계신다. 
 
52-53.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이런 억압의 관계만은 별로 문학의 도전은 안 받으면서 보호 조장돼왔던 것 같다. 도전은 커녕 그런 관계롤 비호하고 미화하는 것들 편에섰다는 혐의조차 짙다. 그렇다고 그 까닭은 문학하는 사람이 남자가 여자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 것들은 자기가 두둔하고 있는 쪽뿐 아니라 억누르고 있는 쪽한테까지 자기편이란 착각을 일으키게 할 만큼 아름답고 낯익은 미풍양속이란 탈을 쓰고 있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내가 감히 그런 것들에게 싸움을 걸어보려 했던 것은 내가 여자라는 것과 무관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언제고 꼭 써보고 싶은 이야기였지만 이것으로 끝난 얘기는 아니다. 집요하게 되풀이 시도해볼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회성을 무시할 수 없는 신문소설에 담기에는 너무 줄기찬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하는 동안 내가 접할 수 있는 독자의 반응이란 목청 높은 비난 아니면 냉랭한 무관심이었다. 고독한 작업이었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 발문에서) 
 
68.
내가 이 소설을 통해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혼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나 없나보다는, 남자와 여자의 평등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결혼이 과연행복할 수 있나 없나라는 내 딴엔 좀 새로운 문제였다. 

 
'고독한 작업이었다'라는 말씀이 콱 박힌다. 어떤 심정이었고, 쓰는 동안 얼마나 외로웠을지 가늠이 된다. 지금도 맘충을 미롯한 혐오 발언이 빗발치는데, 1980년대에야 말해 무엇할까. 
 
인상적인 서문(발문)을 꼽아본다. 
 
먼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이 책은 물론 읽었고, 발문 역시 토막토막 기억이 난다.
선생은 전쟁의 비극이 아닌 풍요의 비극을 쓰고 싶다하셨다. 급속도로 수직상승을 한 경제성장의 안정과 풍요가 얼마나 냉혹한 이기심과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그래서 수지가 특별한 악인이 아닌 자칭 중산층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악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또한 가족이란 혈연관계인 동시에 오랫동안 공들인 관계라는 것, 그러므로 같이 산다고 해도 서로에게 공들인 경험이 없다면 결속은 불가하는 것을, 그리하여 이데올로기 못지 않게 우리를 갈라높고 있는 풍요의 몫이니 그것을 넘어서 정말 있어야 할 삶의 모습을 꿈꾸기를 바란다고.
(쓰면서 또 울컥한다. ) 
 
61.
오목이가 너무 불쌍해서 상심한 독자가 있다면, 오목이를 우리 모두가 그동안 좀 더 잘살기 위해, 좀 더 안일하기 위해 짐짓 외면하고 망각한 것들의 편린으로 봐주기 바란다고.
  
 
 
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어 썼다는 <부숭이는 힘이 세다>.  
'기승전입시'인 요즘 아이들. 초등부터 고등까지 학교를, 학원을 왜 다니냐고 물어보면 대학가기 위해서라는 답이 대다수이다. 다섯 살 아이를 두고 사립초등학교 입학설명회를 다녀와 볼까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배움의 기쁨 따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걸까싶어 종종 우울하다.
 
117.
스포츠보다는 일(노동)으로 터특한 힘, 교과서보다는 자연에서 배운 폭넓은 앎의 힘, 경쟁에 이겼을 때의 교만함보다는 화합했을 때의 겸손한 기뿜의 힘, 허세가 아닌 진정한 자존심의 힘, 사랑과 우정의 힘 등 경쟁사회에서 잊혀진 근원적이고 소박한 힘을 깨우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개정 증보판 2002)> 서문에서 초판본에 썼던 "원태 간직하거라. 엄마가"라는 당신의 필적으로 보고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는 선생. 이제는 죽어 세상에 없는 당시 열다섯 아들에게 보냈던 마음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25년의 세월, 이렇게 선생은 글을 쓰며 버텼던가 싶다. 
 
 
가장 기억에 남는 <창밖은 봄> 서문. 
1977년 썩 늙지도 않은 나이에 작가 자신이 쓴 박완서 연보를 서문으로 썼다. 서문 말미에 대작을 쓸 자신은 없고, 늙을수록 더 나은 작품을 쓸 자신은 있으며, 티 안나게 조촐하고 다소곳이 늙을 자신도 있다고 말한다.
나는 어떻게 나이들어 갈 것이며, 내가 자신할 수 있는 나의 늙음은 무엇일까.
한참을 그저 창 밖만 바라봤다.
 
 
이렇듯 세상을 통찰하는 눈이 있었기에 여러 사회 문제들을 짚어낼 수 있었을테고, 용기가 있었기에 글로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힘을 더 낼 수 있지 않았을까. 
 
159.
나도 사는 일에 어지간히 진력이 난 것 같다. 그러나 이짓이라도 안 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처음 쓴 작품이 당선되어었다고 솔직히 말하면 괜히 잘난 척 하는 것 같고, 집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마음 상태이건만 그것조차 없었다고 하면 꼭 거짓말을 시키고 난 것처럼 떳떳지 못해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건 집념하곤 달랐다. 그럼 그건 뭐였을까.
(‘목마른 계절‘ 발문에서) - P46

욕심이란 조만간 부끄러움을 맞게 돼 있다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지만(후략).
(‘목마른 계절‘ 발문에서) - P48

전쟁과 굶주림의 공포처럼 지긋지긋한 건 없다. 그때 인간성이 이만큼이라도 덜 파괴된 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피비린내가 휩쓸고 간 들판에서도 부드러운 미풍은 들꽃을 피우고, 짓더미가 된 마을에도 장독대는 의연히 남아 있다는 걸 눈여겨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목에 핀 꽃‘ 서문에서)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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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과 탄광
진 필립스 지음, 조혜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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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탄광 마을, 앨버트 가족의 우물에 한 여성이 아기를 버렸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아홉 살 소녀 테스. 그녀는 언니와 부모에게 사실을 알지만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며칠 후 아기의 시신이 발견되고, 테스는 이 사건으로 악몽을 꾸고, 엄마 리타는 매번 물을 끓여 사용하는 등 평범한 일상에 작은 균열이 일어난다. 
 
먼저 출간된 작가의 <밤의 동물원>을 읽은 터였고, 임팩트 있는 사건의 시작으로 미스터리 스릴러라고 여겼지만 이 소설은 가족과 이웃, 차별, 공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설의 구성은 꼭지마다 앨버트, 리타, 버지, 테스, 잭이 화자가 되어 현재와 과거를 회상하며 풀어나간다. 
 


1.
공간적 배경인 탄광 마을은 탄광 뿐만 아니라 목화 농사도 짓는다. 시대 배경은 1930년대로써 흑인 차별이 극심하다. 검은 탄을 캐고 갱도 밖으로 나와 새까만 얼굴만 보면 누가 흑인이고, 백인인지 알아 볼 수 없다. 그리고 하는 일 또한 다르지 않으며 갱도 안에서는 똑같이 목숨을 걸고  일한다. 귀천을 따질 상황이 아닌거다. 하지만 그들은 피부색에 따라 보수가 다를 뿐만 아니라 백인들은 흑인들을 향한 근거없는 우월의식에 빠져 있다.  
 
그곳에 나름대로 공정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앨버트가 있다. 흑인 노동자에게 친절했고, 그들의 노동을  존중했으며, 선입견과 차별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읽다보면 앨버트는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한계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난한 백인들과 백인 기득권 층에 대한 차별과 무시에 대해서는 인지하지만, 왜 인종차별이 존재하는지, 업무 능력이 뛰어난 그들이 왜 보수를 적게 받아야 하는지, 어떠한 근거로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지 말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이 공정하다고 믿는 다수의 사람들이 갖는 한계를 앨버트를 통해서 꼬집으려고 했던 게 아닐까. 
 
 
또한 이는 테스의 남매가 목화밭에서 처음으로 일을 하는 장면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목화밭에서 아빠의 제안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삼남매. 테스의 가정도 가난하다. 하지만 땅이 있어 농사를 짓는 덕분에 경기가 어려워도 밥을 굶지는 않는다. 짧은 시간 동안 일을 하다가 지쳐버린 삼남매의 앞에 함께 목화 솜을 따던 흑인 꼬마들이 나타난다. 남매에게는 잠시 지나가는 목화 따기가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점심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일상이다. 삼남매는 점심을 먹는 동안 편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게끔 흑인 아이들이 자리를 떠나주면 좋겠다. 하지만 점심 식사를 끝낸 후 뭔가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한다. 만약 점심을 먹는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백인이었다면 삼남매의 반응은 어땠을까? 
 
120.
하지만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 사람들, 탄광 소유의 건물이나 빌린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런 대비책이 없었다. 탄광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그들에겐 당장 먹을 것이 없어졌다. 다른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실직한 남자들과 그 가족들이 기댈 곳은 없었다. 어쩌다가 교회에서 지원품을 주거나 친척들이 음식을 제공해주는 일이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다. 하루가 몇 주가 되고, 그 몇 주가 몇 달이 될 때까지 무작정 굶주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배고픔이 어떤 건지 잘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배가 고픈 느낌 말이다. 농사를 지을 땅이 있어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들인 우리가 배를 곯았던 적은 없다. 엄마와 아빠가 땀 흘려 키워낸 땅속의 채소를 깨끗하게 씻고 절이고 요리해 내주면 우리는 무엇이든 먹으면 되었다. 비록 고기는 없었지만 엄마의 요리 솜씨 덕분에 그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1. 
사건을 목격한 테스가 악몽에 시달리자 버지는 동생을 위해 범인을 직접 색출하고자 한다. 범인을 잡는다면 테스가 악몽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믿으면서. 범인은 마을 사람 중 하나일 것이라고 확신한 자매는 갓난아기가 있는 집을 일일이 방문해 그들 중 갑자기 아기가 사라진 집 주인이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이웃들과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갓난아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방문한 롤라 아줌마의 집. 알고보니 롤라는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고, 롤라의 딸은 테스의 (친하지 않은)학교 친구다. 두 남편이 먼저 죽고, 지금의 남편도 멀리 떠나 있는 가난한 롤라 아즘마는 열세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무척 사랑한다는 것과 그 사랑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테스와 버지는 가난때문에 자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한다. 이렇듯 선입견으로 사람을 단정하고 그것이 사실인 양 매도하는 경우가 현재도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185.
그녀의 아버지는 늘 술에 절어 있었고,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최선을 아했지만 롤라는 늘 팔다리 곳곳이 퉁퉁 부은 채 학교에 왔다. 그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과연 다른 곳은 멀쩡한지 알 수 없었다. 비슷한 사연을 가진 여자아이들이 수없이 많았기에 딱히 새로운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1.

부모로서 앨버트는 아이들에게 다른 삶을 보여주고 싶다. 목숨을 건 갱도에서의 삶이 아닌, 뙤약볕에서 목화 솜을 따야하는 고된 삶이 아닌, 다른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의 몸이 바스러지도록 일을 하면서 잭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당시에 온전한 몸으로 되돌아오도록  비싼 병원비를 감당하고, 버지와 잭을 대학에 보낸다. 앨버트를 보면서 세상의 모든 부모는 다르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하지만 요즘에는 그것이 너무 과해서 본인과 자식의 인생이 하나라고 여기는 부모들이 많은 것도 우려스럽다. 
 
 
결론.
부검 결과 우물에 던져진 아기는 이미 죽은 상태에서 버려졌다. 아이들은 범인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녀에게 누구도 비난이 담긴 손가락질을 할 수 없었다. 죽은 아이를 가장 깊고 슬프게 애도한 사람은 엄마였으니까, 그리고 차라리 미쳐버리면 좋을만큼 그 슬픔은 영원할테니까. 
  
우리는 복잡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이 없는 현실이다. 다만 방식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가 놓치고 살면 안되는 것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회사의 높으신 분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가정부와 정원사를 부리는 저택에서 원할 때면 언제든 크림을 넣은 커피와 구운 닭고기를 즐길 수 있는 그분들은 자기 주머니에서 잔돈만 조금 털면 불구가 된 직원에게 일년치 급여를 줄 수 있었지만 절대 그러지 않았다. 돈이 혈관 소겡 퍼진 병균 같은 것이라 해도 그들은 아마 더 많은 돈을 원할 테다. 누군가 열악한 탄광 현장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어도, 그래서 장례식이 끝나면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굶어죽을 상황에 놓여도 그들은 관에다 한두 푼 던져주는 게 다였다. 그야말로 심장이 꽉 막혀 감정이란 게 없는 사람들 같았다. 자기 아이를 죽일 수 있었던 우물의 여자처럼. - P75

나는 늘 실제로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점박이든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친절하려고 노력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법이나 다른 규율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았다. 법이나 규율은 울타리를 치고 선을 규정하는데, 왜 그런 선 긋기가 중요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 선 안으로 떨어졌다. 결국 그 선 안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셈이었다. (...) 내가 스스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흑인과 선을 그어놓고 서로 다른 교회를 다니며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그 선들이 스카츠보로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소년들에겐 아주 중요한 문제였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 P221

우리는 각자 빵을 한 덩이씩만 가졌지만 그걸 반으로 잘라 나눠먹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애들이 밥도 먹지 못하고 일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내가 이 빵을 먹으면서 죄책감까지 맛보지 않도록 사라줘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애들이 눈앞에서 없어지자 죄책감도 금방 사라졌다. "반가웠어"라는 말도 없이 그애들은 일하던 목화밭으로 돌아갔다. 그런뒤 우리 중 누구도 그애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한입까지 먹어치우고 손가락에 묻은 부스러기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함께 묻어 있던 약간의 피와 먼지, 그리고 목화솜까지. 나는 축축한 손가락으로 치마에 붙어 있는 부스러기까지 전부 찍어 먹었고 언니는 치마를 풀밭에 털어버렀다. 그렇게 다 먹어치우고 나자 마치 속쓰림처럼 죄책감이 다시 밀려왔다. - P217

"그런 일을 한 여자라면 슬픔에 빠져 있었을 겁니다, 감독관님. 못된 여자가 아니고요. 죽은 자식을 데려가 착한 사람들이 사는 집의 우물에 던져버린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그 사건이 말해주는 바가 있는 것 같아요. 감도관님 말씀대로 그 여자가 미쳤을지도 모르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에 비하면 미친 건 아무것도 아니죠."
(조나) - P170

"사람은 뺏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 살아가는 거야."
(앨버트) - P161

"최악의 상황은 모르겠다만 아기가 혼자 남겨지는 것, 아무도 없이 완전히 혼자 남겨지는 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겠지.(...)"
(마셜 선생) - P190

잭은 나보다 더 일찍 그 사살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정답이 동시에 여러 개일 수 있다는 삶의 진리를.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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