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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고흐 : 따뜻한 위로가 필요할 때 - 전통과 도덕적 가치를 허문 망치 든 철학자의 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공공인문학포럼 엮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스타북스 / 202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년여 정도, 서양철학을 소홀히 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외국인이 쓴 사회과학 도서를 읽고, 미뤄놓은 동양철학 재독에 여력이 없기도 했다.
(신간에 정신팔려...가 진실에 더 가깝겠지만.)
오랜만에 니체의 글을 만났다. 그것도 고흐의 그림과 함께. 글 모음이라 개인적으로 감질나게 읽을 수 밖에는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글을 읽으니 좋았고 아직 니체의 글을 접하지 못한 이라면 이 책이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을 듯 하다.
한두 해 전에 고흐 평전을 읽은 터라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등장하는 그의 그림이 새삼 더 애틋하다. 예상보다 많은 고흐의 작품이 실려 있어 특별히 고흐를 애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처음 보는 작품도 있을 수 있어 좋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한때 얼마나 사랑했던가. 펼치기만 해도 설레었던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일었다.
[니체]
54.
양심을 따르는 것은 의지를 따르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실패했을 경우 양심은 자기 변호나 기분 전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은 극소수인 데 반해, 자신을 양심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많다. ㅡ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에 '남들도 다 그래'라는 편한 핑계를 대며 스스로 양심을 합리화 시키며 살고 있는가.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겠지만,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더 잘살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 물론 남들보다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그 욕구로 인해 타인의 고통은 모르쇠로 일관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56.
자서전을 통해 생존 가운데 체험하고 탐구한 것뿐 아니라 자신이 믿었던 가치를 타인에게 강요하겠다는 전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ㅡ 반시대적 고찰
: 어린 시절 적지 않은 위인전을 읽으며 자랐다. 지금의 아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위인전도 부족해서 본인이 직접 쓴(물론 다수가 대필작가를 통해서 쓰겠지만) 자서전까지 챙겨 읽는다. 우리는 왜 어린 나이부터 위인전을, 청년이 되어서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의 자서전을 읽을까? 어쩌면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본인이 주체가 아닌 이상적인 삶의 기준을 무의식적으로 강요받는 건 아닐까?
110.
내가 동정을 비난하는 까닭은 그것이 수치에 대한 감정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타인을 동정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례한 짓이다. 동정은 운명을 파괴하고, 치명적인 고독에 특권을 부여하며, 거리낌 없이 죄를 용서한다. 인간은 자신이 누군가를 동정할 때 느껴지는 고귀한 감상 때문에 이 무례한 괴물에게 도덕의 관념을 덧씌웠다.ㅡ 이 사람을 보라
: '동정'이란 남의 어려운 처지를 알아주거나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동정을 받는 대상이 어떠한 관점에서(혹은 전반적으로)는 자신보다 낮은 처지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우월의식을 품게 된다. 동정은 공감과 배려와는 다른 차원이지만 우리는 종종 이들을 구분없이 사용하곤 한다. 동정을 무례한 괴물에게 덧씌운 도덕적 관념이라고 말하는 니체의 말에 동의한다.
옆에 나란히 한 그림, 고갱에게 헌정했다는 <자화상>을 본다. 이 '동정'이라는 단어가 고흐에 얼마나 친밀하다고 여기는가. 그러나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던 그를 누가 감히 동정할 수 있나.
122.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인간은 노예와 자유인으로 분리된다. 만약 하루의 3분의 2정도를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그가 정치가이든 상인이든 혹은 관리나 학자이든 그저 노예일 뿐이다. ㅡ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나는 노예인가, 자유인인가! 니체의 말대로라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겠지만) 노예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싶다.
156.
현대인들은 인간의 고민을 위선이라고 비난한다. 우리는 너무 빨리 결정하고 있다. 고민이나 사색은 그저 걸어가면서 해치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점차 품위를 상실하고 있다. 인간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단지 기계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 머릿속에 이미 기계가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그 기계의 성능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품위가 결정되는지 모른다. ㅡ 즐거운 학문
: 성장중심의 사회에 살면서 현대인(특히 우리나라)이 자주 쓰는 단어가 '빨리빨리', '신속하게'다. 멍 때리는 것은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며, 느리고 빈 틈이 있다는 것은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여긴다. 말이 자유여행이지 일정표를 만들어 전혀 자유스럽지 않은 여행을 한다. 많은 디스토피아 문학에서 사유의 부재를 우려하고 있지만, 이미 지금을 사는 사람에게 진정한 사유가 존재하나?
이 글에 옆에 있는 그림 <르픽 가의 빈센트 방에서 본 파리 풍경>. 고흐는 이 방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174.
그 행복은 너무나 가혹한 행복이다. 잠시 후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한낮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다. 생활이 다시 그를 삶의 터전으로 던져 버린다. 맹목의 눈을 가진 생활이 어젯밤처럼 그의 동반자가 되어 그를 기만한다. 그의 뒤에는 소망, 망각, 향락, 부정, 무상이라는 그림자가 펼쳐진다. 그리고 또다시 황혼이 찾아온다. ㅡ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찰나의 행복했던 순간은 지나고 다시 먹고사는 걸 고민해야 하는 일상의 비루함은 다시 찾아온다. 그러나 햇빛처럼 반짝이는 짧은 달디 단 행복으로 우리는 그 비루함을 감수하고 산다. 해와 달이 늘 뜨고 지듯이 우리 삶도 뜨고 지고를 반복하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
244.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분열이다. 어느 한 군데에도 확실성이 없다는 점이다. 자신의 발로 이 땅을 디딜 수 있는 자가 없다. 단지 사람들은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위해 살고 있다. 모레는 감히 예측할 수 없기에 오직 내열을 그리워한다. ㅡ 권력에의 의지
: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잡혀 산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별 감흥조차도 없지만, 그래도 여전하다. 미래에 대비해 보험도 들어야 하고, 노후자금도 마련해 놓아야 하니 오늘만 살 순 없다. 그렇다고 해서 뜻대로 미래를 대비하지도 못한다. 물가는 오르고, 아이의 학원비, 연로하신 부모의 생활비, 각종 공과금과 대출금, 틈틈이 다니는 여행 경비 등 하루하루 달리기의 연속이다. '오늘만 살다 죽겠소'라는 마음가짐도 걱정스럽지만, 때때로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자싶다.
300.
섬세한 감각과 섬세한 취미를 가질 것. 강력하고 대담하며, 자유분방한 마음을 유지할 것. 침착한 눈동자와 확고한 발걸음으로 인생을 짓밟을 것. 터무니없는 일을 당해도 마치 축제에 참가한 것처럼 즐길 것. 미지의 세계와 해양, 인간과 신들을 기대하며 인생을 지켜볼 것. 마치 그 미지의 세계를 지키는 병사와 선원들이 잠시 동안의 휴식과 즐거움으로 피로를 잊는 듯, 혹은 이 찰나의 쾌락 속에 인간의 눈물과 진홍색 우수를 잊는 듯이 밟은 음악에 귀를 기울일 것. ㅡ 즐거운 학문
: 터무니없는 일을 당해도 마치 축제에 참가한 것처럼 즐기고, 인생을 지켜보려면 얼마나 내공을 쌓아야 가능할까. 미지의 세계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배움의 길. 소망하는 바이다.
니체는 인간이 학문에 의해 신의 지혜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학문이 도덕과 지식과 행복의 결합이 신의 삼위일체를 대신해 줄 것으로, 그리고 학문이 인간과 전혀 상관없는 것에 집착하기를 바라는 기대 즉 착각에 의해 학문이 발달했다고 말한다. 학문이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끝까지 지속해야만 하는 것이 학문아닐까.
[고흐]
131.
작품명 : 구두 한켤레
닳고 풀어헤쳐진 구두 한 켤레. 누구의 신발이려나. 일상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따라오는 니체의 글, '마치 진리는 인간이 존속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증명이나 되고 이쓴 듯 말하고 있다'. 생존의 증명이 고단함이라는 건가. 자신이 살아있고, 그리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동생에게 증명하듯 살아야 했던 그의 일생이 전해진다.
205.
작품명 : 담뱃대를 문 자화장
고흐의 많은 자화상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다. 귀를 잘라내고 붕대를 감은 모습보다 더 인상적인 이유를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덥수룩한 수염, 잔뜩 일그러진 양미간,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한 시선, 그리고 그림은 짙은 색감까지. 마흔도 되지 않은 남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회한이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279.
작품명 : 숲속의 소녀
개인적으로 고흐적인 느낌이 덜 하다고 생각하는 그림이다.
홀로 나무를 등지고 숲속에 서 있는 어린 소녀. 왜 아무도 없이 혼자 서 있는 걸까?
소녀의 자리에 고흐를 대신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한때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펼치기만 해도 설레었던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오랜만에 감성과 이성이 넘나드는 책읽기였다. 니체, 다시 만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