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온도 - 얼어붙은 일상을 깨우는 매혹적인 일침
이덕무 지음, 한정주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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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파 실학자이자 규장각 사검서 간서, 간서치 이덕무가 쓴 혹은 그가 모아 놓은 시를 엮었다. 글을 읽고 쓰는 데에 있어 말이 필요없는 사람. 개인적으로 더할나위 없이 존경하는 학자다. 
 
연암 박지원을 통해 이덕무를 처음 알게 된 때부터 틈이 날 때마다 그의 글을 조금씩 읽어왔다. 한시에 대한 깊이가 턱없이 얕은 내가 읽어도 이덕무의 글은 "아... 좋다."라는 말을 연신 내뱉게 된다. 청렴이라는 표현이 사치스러울만큼 궁핍했고, 그 궁핍함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던 그를 위로해준 건 백탑파 친구들과 책(글)이었다. 서자로 태어나 큰 출세는 할 수 없었지만, 정조에게 글의 우아함을 인정받고 사후 왕의 지시로 유고집까지 간행했던 조선 최고의 문장가. 몇 년전 <문장의 온도>에 이어 이덕무의 글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나와 반갑다. 
 
이덕무의 시는 대단한 사상이나 이념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있는 소소한 자연 현상이나 일상과 생활 소품들을 바라본 편안한 감상의 글이 많다. 그렇지만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관찰력과 통찰이 깊은지 알 수 있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일상의 가치를 그는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밭 사이 가는 풍물, 눈이 온통 즐겁고
완두는 가늘며 기다랗고 옥수수는 거칠고 굵네
아구새 서리 맞아 반질반질 빛이 나고
기러기 추위 피해 그림자 늘어뜨렸네
소나무 장승 무슨 벼슬 얻어 머리에 모자 썼나
('과천 가는 길에' 에서) 
 
사방 산 고요한 밤, 낙엽 날리는 바람 소리 요란하고
저 멀리 돌문 차가운 푸른 우물 상상하네
달 뜬 삼경 바람 소리 더욱 요란하고
그 소리 푸른 전나무에 솟구쳐 구름소반까지 들어가네
('첫겨울' 에서) 
  
 
그는 사대정신에 묶이지 않는 혁신적인 문장가다. 엮은이는 혁신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불온성'이라고 말한다. 당시 양반들이 중국의 사조를 그대로 베끼거나 따라한 것에 반해 이덕무는 중국 사조의 틀에 벗어고 향토적인 조선의 시를 썼다. 주변에 평가에 개의치 않았고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받아들이며 경험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었다.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에도 청나라 문인들과 사유와 글을 거리낌없이 주고받았다. 또한 글을 쓰고 나눔에 있어 신분과 나이를 초월해 교감을 나눴다. 
 
묵은 찹쌀로 담근 술 맛있게 김 오르니
털모자 쓴 글방 선생 날마다 찾아오네
낫을 찬 꼴머슴은 갈대 베다 쉬고 있고
냇가의 수건 두른 여인 빨래하며 노래하네
서리 내린 들녘에는 벼 쪼아 먹는 기러기 쫓고
볕 쬐는 언덕에는 고양이 숨겨 국화를 지키네
타향의 사투리는 객지의 시름을 잊게 하니
깊고 깊은 흙담집에 누워서 듣네
(천안 농가에서 쓰다)  
 
닭 잡고 밥 짓느라 부엌에서 도란도란
울타리에 저녁 안개 서려 으스름 짙어가네
반쯤 누런 버들잎은 시들어 쳐지고
대추는 새빨갛게 익었네
냇물은 빨리 흘러 그물 치기 어렵고
산바람은 차가워 이불 자주 끌어안네
목동이 돌아올 적 뿔 두드리는 소리 나니
이것이 바로 틀림없는 가을 소리네
(조촌 사는 일가 사람을 만나 함께 읊다)  
 
 
이덕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벗들을 빼놓을 수 없다. 
박지원, 박제가, 백동수, 유득공, 이서구 등이 대표적이인데, 그들은 '백탑시사'라는 시문학 동인 맺어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그들은 단순히 글만 나눈 게 아니라 서로의 빈곤한 살림을 위무하고 술을 나누며 시와 산문을 써 우정을 나눴다. 박제가는 신혼 첫날밤에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장인의 말을 빌려 벗을 찾아다닐 정도였다니 말해 무엇할까. 
 
도연명 문집 즐겨 읽으니
그 사람 이름 높은 선비로다
겉모습 온화하고 마음속 슬기로워
첫째는 인품 둘째는 재주로다
한가로이 매화나무 감상하며
다정하게 술잔 기울이네
벗들 돌아가니 어찌 달래랴
마음속 친구 생각 금할 수가 없네
(벗들에게 보여주다) 
 
봄 지나 서로 만나 아담한 모임 갖추니
마을 북쪽 성곽 서쪽, 손님이 찾아오네
내리쬐는 처마 빛 청량한 대나무에 반짝이고
잠시 시원한 뜰 그늘, 한낮 우는 닭 천진하네
어두워지도록 놀자는 약속, 옷깃 잡아 나서는데
술 마시고 떠들며 더위 잊자고 술병 당기네
간혹 보는 벗이기에 정감 넘쳐 흐뭇하고
이런저런 이야기, 대나무 발에 저녁달 비치네
(관헌의 여름 모임) 
 
 
매화를 사랑한,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삶의 냄새가 글에 드러나는, 가장 빛나는 것은 일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시를 쓺에 흥興과 정情 있는, 인간의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 만물로 시선을 옮겨 인간 세상을 더 눈여겨 볼 수 있었던, 그래서 시선과 관점의 변환이 가능했던, 그런 사람, 이덕무. 
 
 
400여쪽이 넘는 소설 한 권보다 읽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그가 쓴 시 한 편마다 따라오는 사념 혹은 감흥이 읽는 시간보다 더 길었다. 어수선한 요즘, 이덕무의 시를 만나 잠시 편안했다. 
 
엮은이가 이덕무의 평전을 약속했다. 그 약속을 고대하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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