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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게 끝나, 지니. 머지않아. (재키)
여성은 하루에 100단어만 말할 수 있고, 모든 책을 읽을 수 없으며, 살림을 위한 용도의 글만 읽을 수 있다. 핸드폰 뿐만 아니라 이메일 계정도 삭제. 가장 기본적인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몸짓까지 감시 당하며, 우편물조차 집안의 남성만이 받을 수 있다. 여권과 개인 재산은 몰수되고, 마음대로 여행도 할 수 없다. 여성들만이 착용하는 손목의 카운터는 하루에 100단어를 초과하는 순간부터 몸에 고통을 가한다. 여성 성소수자는 수용소로, 강간과 불륜에 있어서도 여성만 감옥에 간다.
2년 전부터 시작된 불길한 조짐. 칼 코빈 목사가 등장하면서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 교양을 부활시키고 여성들을 공공 영역에서 배제하려는 '순수운동'을 주도하면서 여성 혐오를 표면화 했다. 코빈 목사와 한통속인 마이어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미국의 디스토피아는 시작됐다.
신경언어학자인 진 매클렐런. 1년 전까지는 해당 분야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있는 학자였지만 현재는 하루에 100단어를 초과해서 말을 해서는 안되는 여성이다. 다섯 살 딸에게 노래를 불러주지도, 잠자리 동화를 읽어줄 수도 없다. 아이가 악몽에 시달려도 입을 틀어 막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 모든 일은 이제, 남편 패트릭의 몫이다.
사춘기 아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던 시절은 사라졌다. 학교의 교육은 '순수운동'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급기야 큰 아들 스티븐은 린에게 우유를 사다 놓는 일은 엄마가 하라고, 그게 바로 여자인 엄마가 할 일이라며, 비수를 꽂는다. 딸 소니아는 말할 것도 없고, 아들 들도 이런 세상에서 살 게 할 수는 없다. 린은 오래 전 친구인 재키가, 그리고 희망이 그립다.
어느날 집으로 진을 찾아 온 칼 코빈 목사. 그는 허수아비 대통령을 대신해 국정을 농단했던 대통령의 형 바비가 스키 사고로 뇌 손상을 입자 '베르티케 영역'의 신경언어학 권위자인 진에게 치료약을 개발하는 팀에 합류하라고 부탁(이라고 포장한 명령)한다. 진은 그들이 제시한 조건ㅡ한시적인 카운터 제거, 보수, 이후 카운터 수치 증량ㅡ에 딸 소니아의 카운터 제거를 보태서 수락한다. 연구소에는 예전 동료이자 불륜 관계인 로렌조와 진이 존경하는 린이 기다리고 있다.
연구실에 다니면서 진은 의심스러운 점들을 하나둘씩 발견한다. 며칠 사이에 준비할 수 없는 의료 검사 시설들, 색깔로 구분된 연구 세 팀, 그리고 문서의 제목에서 들어나는 의혹. 칼 목사가 개발하려는 것은 치료약인가, 실어증 유발 혈청인가!
진의 의심은 속속들이 드러나는 증거로 인해 확신이 된다. 실어증 유발 혈청이 여성에게 투입되는 순간,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이 와중에 로렌조의 아이를 임신한 진은 함께 떠나자는 로렌조의 제안에 갈등한다. 남아 있자니 딸 소니아의 인생과 뱃속의 아이가 걱정이고, 떠나자니 세 아들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사면초가 진 매클렌런. 외부와 단절된 미국은, 그리고 그녀는 어떻게 될까.
본격적으로 디스토피아가 시작되기 전, 성소수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재키는 활발한 사회 운동을 하며 미래를 예견했었다. 그리고 우체부 델의 아내는 여성 혐오를 넘어 인종 혐오 시대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소설은 공간적 배경을 미국으로 제한하지만 타자를 혐오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을 향한다.
학계의 최고 권위자인 린은 동성애자다. 재키 또한 동성애자이고 사회운동가다. 우체부 델은 백인이지만 흑인 아내와 결혼했다. 이성애자 남편의 아내는 여성이다.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부부 들에게는 딸이 있다. 아들이든 딸이든 모두 여성이 낳는다. 이렇듯 혐오의 대상은 나와 전혀 무관한 이들이 아니며 나 자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당장 그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관심하다.
어느 한 집단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규칙에 맞춰 개인성을 말살하고 세뇌하는 과정은 의외로 쉽다. 지금도 사회가 원만하게 꾸려져 가기에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상식처럼 여기고 있고, 소수의 희생이 당사자가 되기 전까지는 당연시 한다. 우리가 가장 흔히 사용하는 '다수결의 원칙',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관습, 소수 의견의 배제, 이기주의를 포장한 개인주의, 나와 타자의 기준이 달라지는 이중적 잣대 등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다른 디스토피아 문학에 비해서 비교적 낙관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낙관적인 결말이 제자리 걸음에 다름하지 않다는 사실이 어쩌면 이미 현실은 소설에서 우려하는 바가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려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127.
잃어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 모든 단순하고 평범한 것들.
264.
"박사님, 저항은 어디에나 있어요."
348.
내 잘못이 맞다. 다만 내 잘못은 목요일에 모건의 계약서에 서명했을 때 시작된 게 아니다. 20년 전에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투표하지 않았을 때부터.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시위에 참여하거나 포스터를 만들거나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고 재키에게 수없이 말했던 그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