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고 나를 알았다
이근대 지음, 소리여행 그림 / 마음서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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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볕 아래에서든, 비 오는 날 차 한 잔과 함께 빗소리를 들으면서든,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시집이다. 더욱이 알록달록한 예쁜 색감이 가득한 그림까지 있어 읽는 맛이 더 좋다. 
  
 
 
비가 오는 날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만날 수 있는 날.
(비 내리는 풍경 / p20) 

 
시인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만날 수 있는 날이 비 오는 날이라고 했다. 왜일까? 우리는 비가 오는 날이면 원인을 알 수 없는 멜랑콜리한 감정을 느낀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무념무상이 되기도 하고, 우산으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거리를 산책하기도 한다. 비가 오면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활동 범위가 좁아지게 된다. 참 적절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만난다니. 
 
 
 
 
인생을 꽃 피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한 영혼으로 따뜻하게 웃는 거예요.
(인생의 목표 / p31)  

 
많은 사람들이 일정 평수의 집, 일정 수준의 연봉, 노후 계획 등 풍족한 미래를 위해 오늘을 미뤄두고 내일을 살고 있다. 좋은 자식,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지만 정작 '좋은' 가족이 무엇인지 고민조차 못해보고 늙어간다. 인생의 꽃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지의 내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피워야 할 것이다. 
 
 
 
 
내 곁에 있을 때
한 번 더 
사랑한다 말할걸 그랬다.
(그리운 얼굴 / p83) 

 
살면서 가장 자주 후회하는 부분이 아닐까.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더 많이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애썼다고 서로 위무하고 쓰다듬어주면 좋겠다. 
 
 
 
 
많이 배운 사람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더 향기롭고
많이 가진 사람보다
사랑받는 사람이 더 빛납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 / p112) 

 
실제로 남녀노소 막론하고 사랑 받는 사람들에게서는 건강함이 느껴진다. 타인의 바라보는 데에 꼬임이 없고,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가식이 없다. 조금 부끄럽거나 민망한 일이 있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 건강한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 하더라. 
 
 
 
 
절대 잊지 마라.
낮과 밤 사이에 과일이 익어가듯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삶이 익어간다는 것을.
(잊지 마라 / p154) 

 
인생이 늘 꽃길만 일 수 도, 흙길만 일 수도 없다. 오르막 내리막 길, 평탄한 길, 꽃길, 진흙탕길을 오락가락하면서 우리는 단단하게 다져지고 성숙해진다. 표현이 참 마음에 들어온다. 삶이 익어간다...... . 
 
 
 
 
시간이 많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말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기다려줄 줄 알았는데
시간은 당신을 순식간에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전하지 못한 말 / p158)  

 
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사랑을 전하는 시다. 나중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나중에'라는 말을 무심코 너무 자주 뱉는다. 그러지 말아야지...... .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따뜻하게 데워진 내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 놓아두고 가슴 한 켠이 헛헛해 질 때 펼치면 좋을 책이다. 
 
 
세월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도
나를 사랑할 시간은 오늘뿐이에요.
(오늘, 나를 사랑할 시간 / p241)

세월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아도
나를 사랑할 시간은 오늘뿐이에요.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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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쇼팽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3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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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폴란드 대통령 레흐 카친스키는 '카틴 숲 학살사건' 추모행사 참석을 위해 러시아를 방문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동승했던 영부인과 함께 사망한다.  
 
 
같은 해 10월, 변함없이 개최되는 쇼팽 콩쿠르.
5년 동안, 어쩌면 이 날만을 기다리며 실력을 키워온 열여덟 살 소년 얀 스테판스. 음악가 집안임에도 아직까지 쇼팽 콩쿠르 우승자을 배출하지 못한 비톨트는 외아들인 얀에게 모든 기대와 희망을 쏟아부었다. 오로지 쇼팽 콩쿠르 우승을 위해 키워진 얀. '명예'는 있지만 '영예'가 없는 스테판스 집안에 그 부족함을 채워줄 역할을 해야할 것이다. 더구나 지난 4월에 있었던 대통령 서거와 수시로 일어나는 테러 사건으로 폴란드로서는 자국민이 우승을 해야 하는 명분은 더 확고해졌다. 폴란드 국민에게 쇼팽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는 얀의 어깨에 집안의 영예를 넘어 어수선한 시국에 있는 국민의 위안과 기대까지 모두 얹혀있다는 의미다.  
 
오랜 세월 동안 얀의 스승이자 이번 쇼팽 콩쿠르의 심사위원장인 카민스키는 제자에게 이번 대회에 대항마가 될 두 사람에 대해 언급한다. 시력을 잃은 천재 피아니스트 사카키바 류헤이, 대회 최연장자인 미사키 요스케다. 두 사람의 국제대회 이력이 없어 얀은 그들의 실력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간 종종 보아왔던 일본인 연주자들의 패턴과 같은 연장선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1차 예선 셋째 날, 사카키바의 순서를 앞두고 시간이 지나도 사회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15분이 지나자 사회자가 나타나 연주가 연기되었음을 알린다. 참가자용 대기실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열 손가락이 전부 두 번째 관절까지 사라진 채로 발견된 피살자는 그동안 있었던 테러 사건을 수사하던 피오트르 형사다. 그를 목격한 자는 시력을 잃은 콩쿠르 참가자 사카키바 류헤이. 범인으로 지목된 자는 국적과 나이, 성별도 모르는 폭탄 전문가, '피아니스트'다. 

 

 

■  ■  ■

 

소설 안에서 비톨트에게 있어 피아노는 욕망을 채우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아들의 우승을 위해서라면 부정 행위도 불사하겠다는 비톨트. 수십 년간 음악가로서 살아온 비톨트는 고작 18세 아들보다 음악을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폴라드적 쇼팽'을 정작 그는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가 추리소설임에도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능한 것은 음악을 소재로 하고 있음과 더불어 음악을 전공하는 주인공들이 테크닉이 아닌 음악에 대한 진정성을 깨닫고 배우는 과정, 그리고 그 진정성이 인간에 대한 존중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심에 미사키 요스케가 있다. 
 
이 시리즈가 여타 다른 추리소설과 다른 점은 사건을 해결하는 미사키가 스토리를 끌고 나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미사키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그저 소설 사이사이에 등장해서 무심히 하는 행동들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고, 주인공들에게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잠깐씩 나타나는 그의 피아노 연주는 들어보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감으로 결정적 영향력을 미친다고 해야하나. 이는 기존에 카리스마 넘치는 탐정들과는 다른 결로 인상적이다. 

나는 쇼팽 때문에 모든 것을 얻었고, 또 쇼팽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미워하려 해도 미워할 수 없고 사랑하려 해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 그가 바로 쇼팽이다 - P189

누군가가 살아가는 수단이라는 것은 그 사람만의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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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구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정영목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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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 쇼크로 쓰러지면서 외부 충격으로 인한 쓸개 파열로 병원에서 수술 대기 중 철사로 교살당한 자산가 노부인 애비게일 도른.

때마침 사건 현장인 네덜란드 기념병원에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엘러리가 있었고, 그는 바로 사건 현장을 접수한 후 경찰에 신고하도록 조치한다. 현장에는 범인이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하얀 즈크 바지 한 벌과 하얀 캔버스 구두 한 켤레가 남아 있다. 즈크 바지는 길이를 줄이기 위함으로 보이는 가봉이 되어 있었고, 구두는 끊어져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으며 구두 혀가죽은 구두 안쪽 앞심 위로 말려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피살자와 직.간적접으로 관련 있는 사람은 물론 병원 관계자들을 한 사람씩 심문해 나가는 엘러리.

애비게일의 수술 집도의로 예정된 닥터 재니를 심문하던 중 그가 월요일 10시30분부터 10여분간 방문객을 만났음을 알고 방문객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스완슨이라는 이름만 말할 뿐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용무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같은 시각, 혼수상태로 피살자가 대기 중인 부속실에서 재니를 목격했다는 간호사의 증언이 나온다. 닥터 재니의 조수이자 간호사인 루실 프라이스와 클레이튼 간호사를 심문 중 그가 수술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눈과 특유의 다리를 저는 모습만 봤다고 말한다. 이에 재니는 누군가 자신의 흉내를 낸 것이라며 반박한다. 

 

상황이 점점 불리해져 가는 상황인데도, 재니는 범행 시각에 자신을 찾아온 방문객이 누구인지를 고집스럽게 밝히지 않는다. 그외에도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애비게일의 말동무 역할을 했던 가정부 사라 풀러는 이십 년이 넘도록 함께 살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피살자와 말다툼이 심했고, 그녀의 남동생인 핸드릭 도른은 도박과 사치로 빚투성이었다. 그 빚의 채권자는 현재 네덜란드 기념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회복중인 공갈 협박꾼 마이클 커더히다. 그는 커더히로부터 누이동생을 죽여 빚을 갚으라는 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 애비게일의 상속녀인 홀다 도른과 연인 사이이자 도른 집안의 변호사인 필립 모어하우스는 자산가 노부인의 모든 재산과 유언장을 관리하고 있다.

 

천재 연구자인 크나이젤과 재니는 비밀 연구의 후원금을 애비게일로부터 받아왔으나 2년이 넘도록 연구 성과가 없자 후원을 끊겠다는 연락을 받았었고, 그녀는 이러한 내용을 담아 유언장을 수정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경찰은 애비게일과 잦은 다툼이 있었던 가정부 사라 풀러가 병원의 내과 의사인 닥터 루시우스 더닝을 만난 사실을 미행으로 알아낸다. 연결 고리가 없는 두 사람이 만난 까닭은 무엇일까? 재니를 찾아왔던 수수께끼의 방문객은 누구이며, 재니를 가장한 자는 누구일까? 목을 조르는 데 사용한 철사를 판 상점은 어떻게 찾아내야 할까?

 

사건은 진전없이 오리무중 상태고, 퀸 경감을 비롯한 경.검 관계자 뿐만 아니라 천하의 엘러리까지 포기를 선언할 지경이다. 수요일 아침에 퀸 부자를 직접 찾아온 토마스 스완슨. 그는 재니의 양아들로 그날 돈을 빌리기 위해 네덜란드 기념병원을 찾아왔음을 확인시켜준다. 스완슨은 과거 한때 네덜란드 기념병원의 외과의사였으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애비게일에 의해 병원에서 쫓겨난 이력이 있다. 이후 재니의 도움으로 생활을 이어갔지만,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와중에 스완슨의 진술로 용의자에서 벗어난 닥터 재니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사망 원인은 애비게일과 같은 교살. 단 머리 뒤쪽을 가격당한 후 기절한 상태에서 살해됐다. 동일범의 소행일까, 아니면 동일범으로 가장한 다른 범죄자일까? 

 

미결사건으로 남을 위기에 놓일 즈음, 엘러리는 끊어진 구두끈과 가봉된 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닥터 재니의 방에 있던 캐비넷에 집중한다.

끊어진 구두에 즉흥적으로 반창고를 붙일 수 있을 만큼 반창고를 상비하는 사람, 구두 혀가죽이 말려 올라가도 불편한 줄 모르는 사람, 뒤통수를 칠 때까지 경계심을 갖지 않을만큼 닥터 재니와 관계가 있는 사람, 과연 그 사람은 누구일까? 

 

  

 

 

□ □ □ □ 

 

 

이번 작품은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숨겨져 있는 부분이 많아서 범인을 짐작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후반부 쯤 범인이 '혹시...... 이 사람?'라는 의심을 했지만 섣불지 단정지을 수 없었던 것은 범행동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인물 간 관계가 동기와 갈등에 미치는 영향이 컸음에도 마지막에 밝혀져, 논리적으로 범인을 유추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이를 눈치챌 만한 복선이나 미끼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마지막에 드러난 그들의 관계는 독자 입장에서 조금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살짝 억지스럽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러해서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안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신뢰나 애정 따위는 돈이라면 얼마든지 팔아치울 수 있는 세상이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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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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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리다 배경을 관련해 열한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작가의 개인사를 알지 못하지만 읽으면서 그녀가 플로리다 출신이거나 적어도 꽤 오랜 기간 그곳에서 거주했을 거라는 짐작이 들 만큼 플로리다에 대한 물리적, 서정적 묘사는 무척 섬세하다 (작가는 뉴욕 출신임을 다 읽은 후에 알았다).  
 
 
불안증을 달래기 위해 밤산책을 나가지만 살고 있는 동네는 빈집이 많고 강간과 폭력 범죄가 빈번이 일어나는 곳이다. (유령과 공허)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가 군대 입대한 사이에 모자는 이사를 하지만, 돌아온 아버지로부터 잡혀오고 결국 엄마는 떠난다. 홀로 남아 아버지의 폭력과 방치 등 온갖 학대를 견뎌낸 주인공 내면에는 가족의 상이 형성되지 못한다. (등근 지구, 그 가상의 구석에서)
외딴섬에 가족도 없이 남겨진 어린 두 자매. (늑대가 된 개)
남편의 갑작스런 볼일로 인적 드문 외진 캠핑장에 두 아이들과 남겨진 주인공은 낙상으로 머리를 다치고 꼼짝하지 못한다. (미드나이트 존)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지만 유복한 가정환경의 친구를 질투하는 어맨다, 아내의 친구를 사랑하는 맨프레드, 숨막힐 듯한 플로리다를 떠나고 싶은 그랜트. (사랑의 신을 위하여, 신의 사랑을 위하여)
지친 일상과 플로리다를 벗어나 낯선 나라, 살바도르에서 보내는 휴가. 헬레나는 섹스 파트너를 구하며 하루하루를 즐기지만, 우연히 마주한 태풍에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는 없다. (살바도르)
한때는 대학강사였으나 장학금을 놓친 것을 계기로 부랑자가 된 제인. 노숙자, 청소부,  급기야 매춘까지 감행하지만 경찰에 구속된다. 어떻게 해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다. (위와 아래)
젊은 시절 꽤 괜찮아 보이는 사람과 연애했지만, 강간에 가까운 성관계를 강요당했던 '나', 어느날 불법이민자로 보이는 다친 여성에게 도움을 주려 했으나 거칠게 거부당한다. (뱀 이야기)
가슴을 짓누르는 무언가 때문에 도망치듯 플로리다를 떠나 두 아들과 함께 이포르에 온 그녀. 주인공은 기 드 모파상 취재와 휴식을 목적으로 프랑스로 날아왔건만 달라진 건 없다. (이포르) 
 
  
 
사람은 인생이 꼬이거나 문제가 생기면 환경 탓을 한다. 
부모 혹은 남편을 잘못 만나서(물론 사실 이련 경우도 있다), 돈이 없어서, 가정환경이 불우해서,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등 많은 핑계들을 진실처럼 인정한다.  
 
그러나 극단의 문제(폭력, 학대)가 아니고서는 이를 해결할 방법은 대체로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쉽게 깨고 나오지 못하는 고정관념과 트라우마, 문제의 원인에서 자신을 제외시키고 회피하려는 의식은 보탬이 되지 않는다. 
 
흑인과 가난한 자들이 사는 지역도 모두 사람이 사는 곳이며, 낯선 곳에서 호의를 베푸는 남성의 직업이 고작(?) 상점 주인이라고 해서 불온한 마음을 먹었다고 볼 수 없다. 어린 시절 가족에 대한 긍정적 경험이 없다고 해서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압박과 권태에 대해 진솔하게 자신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갖지 않고서는 어디를 가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인생의 가치관을 세워놓지 않은 채 대상을 상대로 한 끊임없는 비교는 상실감만을 안겨줄 뿐이며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을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이념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이라고 규정되어진 삶의 방식이 정답이 아님을 깨닫지 않는 한 우리는 온전히 자립된 인생을 살기 힘들다.  
 
학대받은 어린 시절을 지나 사고로 청각 장애까지 안게 되지만 가정을 이룰 수 없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함께 가족을 이룬 주드처럼, 주변에서 위험하다고 걱정했던 동네에서 별일 없이 아이들을 키워내고 늙어가는 것 처럼, 권태에 빠져 주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어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미나처럼, 낯선 사람의 호의를 호의로 받이들이게 된 헬레나처럼,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낸 제인처럼 인생에는 모범답안이 없다. 
 
 
삶은 엄청나게 대단하지도, 보잘 것 없지도 않다. 각자 나름의 고통과 우울과 불안을 동반해 살고 있으며, 사소한 기쁨으로 그 불행을 위로 받는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이야 학교에서 늘 배우지만 현실은 어디 그런가. '내'가 타인을 외모로 점수를 매기듯 나 또한 타인으로부터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한 인간의 일생은 기나 긴 역사 안에서 보면 찰나일 것이며,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먼지 한 톨 만큼의 크기도 아닐테다. 놀라운 발전을 이룬 인류의 업적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흘러가는 세월의 한 부분임을, 우주의 한 원소임을 종종 상기한다면 삶의 고통 또는 권태로움의 가운데를 지나기가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한 번의 호흡이 끝나고 다음 호흡이 시작되는 사이 정지된 모든 순간이 길다. 그러고 보면 늘 전환의 순간에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내일이라도 곧 아이들은 어른이 될 것이고, 어른이 되면 집을 떠날 것이다. 그러면 남편과 나는, 우리가 함께 걸어어다닌 그 모든 시간과 내 몸과 내 그림자와 달에 더해서, 우리가 소리지르지 않고 소리지를 수 없는 그 모든 것의 무게 아래 웅크리고 있는 서로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외로운 인간은 너무 작고, 달이 우리를 조금이라도 알아차리기에 우리 삶은 너무 순식간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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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사랑하고 수시로 떠나다 - 낯선 길에서 당신에게 부치는 72통의 엽서
변종모 지음 / 꼼지락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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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변종모 여행가의 신작 포토 에세이.
'함부로' 사랑하지 못하고, '수시로' 떠나지도 못하는 사람으로서 제목부터 아련해진다. 길 위에서 떠올려지는 단상 단상이 72통의 편지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자라기보다 관광객에 가깝다. 자유여행이라고 하지만, 세부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랜드마크 앞에서 인증샷을 찍는다. 현지인들의 문화와 일상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을 향유하기보다 서비스 품질과 문명의 이기의 첨단화를 들먹이며 돈으로서 가치를 평가하기에 바쁘다.  
 
 
캄보디아 아이들의 미소, 새벽 담배를 나누어 피는 노인, 포르투갈 출근 시간의 어느 낯선 플랫폼,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기에 머리를 깎고 몸에 흰 실을 감은 인도 브라만 계급의 소년, 소원이 별이 되는 치앙마이의 보름밤, 사소한 것들을 귀하게 여겨 매일이 행복한 쿠바, 욕심이 없는 미얀마, 모든 계절을 삼킨 늦가을의 부르고뉴. 
 
 
누구가에게 가장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으리라 짐작하고, 홀로 여행하지만 연대를 꿈꾸는 사람. 행복할 일 없는 일상이더라도 불행하지 않으니 족하며 아이와 강아지가 어울리는, 아무것도 아닌 풍경이 근사하다는 사람. 오로지 '내'가 되기 위해서 걷는다는 사람. 
 
 
삶의 냄새가 나는 글을 한 번에 읽기가 아까워 두세장을 쪼개고 쪼개어 읽는다 
 
 
 

 
□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홀로여행자였다. 
 
□ 정말 걷다 보면 낫는다는 말은 믿어도 좋겠다. 
 
□ 누군가에게 무어라 요구하지 않는 일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좋은 사람일 수 있을 것이다.  
 
□ 그리움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우체국으로. 
 
□ 누구나 가슴속 어딘가에 지워지지 않는, 지울 수 없누 문신이 있을 것이다. 
 
□ 살아가는 자세는 이처럼 누군가에 부담스런 손짓이 아니라 공손히 제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향기로워야 한다. 
 
□ 나도 이렇게 잠시 흔들리다가, 어느 날 멈춘 곳에서 누군가에게 소금처럼 쓰일 일이 있을까? 그물처럼 성긴 지붕아래서도 저들처럼 빛나는 눈으로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 삶이란 바깥으로 채우는 일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채워나가는 일. 내 안의 열정으로 바깥의 냉랭함을 다스리는 일. 스스로 뜨겁지 않으면 세상 그 무엇도 뜨겁지 않을 것이다. 
 
□ 말문을 다는다는 것은 더 이상 너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보이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 우리가 견뎌온 모든 것들은 절대로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스스로 찬란하게 드러날 때를 기다려야 한다. 바위가  굳의 또 다른 세상이 되기까지의 시간에 비한다면 잠시가 아니겠는가. 그런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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