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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코스트 블루스
장파트리크 망셰트 지음, 박나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6월
평점 :
"세상에는 예전과 딱히 다를 바 없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무언가 희미한 진전이 있음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르포는 그것이 무엇을 향한 진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르주 제르포는 파리의 대기업 중간급 임원으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사는 평범한 삼십대 후반 남성이다. 어느날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 시간, 외곽순환도로를 달리던 제르포는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부상을 입은 운전자를 병원에 데려다준 후 별다른 사후 조치 없이 의료진에게 한 마디 언질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 사고가 앞으로 제르포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줄이야. 교통 사고 부상자라고만 여겼던 그는 총상 환자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여름 휴가를 떠난 제르포와 가족들. 바닷가 물에 들어간 순간 그를 향해 린치를 가하는 두 남자.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빠져나온 제르포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누가? 왜? 휴양지에서 어슬렁거리는 불량배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미심쩍다고 여기고 혼란스러움을 느낀 조르주는 아내와 딸들을 남겨 둔 채 파리의 집으로 돌아간다.
알론소 에메리크는 도미니크 공화국 출신으로 거칠게 살아온 이력 덕분에 누구도 믿지 못해 아무도 집에 들이지 않고 엘리자베스라는 개를 키우면서 홀로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다. 그는 바스티앵과 카를로, 두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해 필요한 일을 처리한다. 그는 얼마 후 죽을 것이다. 그의 개, 엘리자베스까지.
바닷가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제르포의 집을 지키고 있는 두 살인 청부업자. 그러나 제르포는 아파트 관리인을 통해 휴가지 숙소 주소를 낯선 남성 두 명이 알아갔음을 알게 되고, 렌트한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가 미행하던 두 남자와 주유소에서 마주한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자동차와 총알, 여기저기 부숴진 주유소에서 제르포는 라이터를 켠다. 화상과 부상으로 제정신이 아닌 제르포는 미친듯이 철길을 향해 도망가고, 그들 중 바스티앵이 죽었다.
제르포가 눈을 떠보니 열차의 화물칸이고, 앞에는 낯선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도움을 청하려고 했으나, 부랑자는 이미 그의 지갑과 현금, 수표책을 훔쳤다. 그것도 모자라 그 남자에 의해 제르포는 열차 밖으로 내던져진다. 추락한 이후, 의식을 잃었지만 곧 정신이 돌아오자 자신이 죽지 않은 것이 놀라웠다. 이러한 상황이 영화나 꿈이 아니라 정말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맞는 걸까? 실패와 좌절이라고는 몰랐던 인생이었다. 여전히 그는 믿기 힘들다.
114.
안락한 유년기와 성공적인 사회적 신분 상승으로 점철된 청년기를 보낸 후 겪은 최근 사건들로 인해, 그는 자신이 무적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된 차였다. (...) 지금 제르포가 생각하는 본인의 이미지는 10년 전에 읽은 추리소설, 그리고 작년 가을 올랭피크 영화관에서 본 짤막하고 형이상학적인 그전 웨스턴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걷기를 며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밀입국자 포르투갈인 벌목꾼이었다. 다리가 부러진 그를 위해 벌목꾼들은 외진 산동네에서 사냥꾼이자 의사 노릇을 하고 있는 라귀즈를 데려온다. 조르주는 자신을 조르주 소렐이라고 소개하며 신분을 속이고, 그와 함께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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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는 주유소 총격 화재 사건과 피해 차량의 소유주가 조르주 제르포이며 현재 실종 상태라는 기사가 실린다.
알론소는 조르주를 처리하라는 오더를 내렸는데, 두 청부업자에게서는 연락이 없고 소식도 끊겼다. 예감이 좋지 않다.
카를로는 제르포의 실종으로 알론소에게 연락을 끊었다. 몇 달이 지나는 동안 그는 다른 일을 맡았고, 수입도 괜찮다. 알론소와의 계약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바스티앵이 죽었으니 복수를 해야한다. 카를로는 부랑자를 찾아 내어 제르포의 뒤를 쫓고 지도를 들고 그가 도망쳤을 구간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다 산골 마을에서 꼬리를 잡았다. 이제 그를 잡으러 간다.
늙은 라귀즈가 죽고 그의 손녀 알퐁진이 집과 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온다. 몇 달 후 그녀가 다시 찾아오고 두 사람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그런데, 그녀만 온 것이 아니다. 얼마 후 카를로가 도착한다. 사냥을 하기 위해 외출하던 두 사람을 향한 총구. 카를로가 쏜 총알에 알퐁진은 숨지고, 조르주는 그에게 총구를 겨냥한다. 조르주는 더이상 모른 채 있을 수가 없다. 누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 걸까?
제르포는 배후를 찾기 위해 기억을 몇 달 전 외곽순환도로 교통사고로 되돌린다. 제르포가 병원에 데려다 준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왜 한적에 외곽순환도로에서 사고를 낸 것일까? 얼른 이 사건의 고리를 끊어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겠다.
제르포는 도대체 자신도 전혀 모르는 어떤 사건에 연류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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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포의 일상을 뒤흔든 계기는 그가 선의를 가지고 한 작은 행동 하나였다. 교통 사고가 난 환자를 응급실에 데려다 준 것이 전부다(이 소설은 1976년에 출간 한 작품이다). 이 별 거 아닌 사소한 일이 멀쩡한 남성을 살인자로 만든다.
소설을 읽다보면 제르포의 투사같은 대응과 전투력,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손에 총을 쥐고 사람을 죽이는 모습에서 과거에 미스터리한 혹은 살인과 연관한 직업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했었다. 그러나 지나치다 싶을 만큼 모범적으로 성장한 그는 천연덕스럽게 주유소에 불을 지르고, 열차에 올라타고, 산을 뛰어내려 총을 쏜다. 늘 그래왔던 사람처럼. 그리고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수개월 만에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다녀왔어" 이다. 아내는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어디 갔다왔냐는 물음에 모르겠다는 말만 할 뿐이다.
제르포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가장해 그간의 기억을 모두 잃은 것으로 위장한다. 어차피 자신이 주유소에 불을 지르고, 포르투갈인 벌목꾼들의 숙소에 머물렀으며, 카를로와 또 한 명을 죽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를 둘러싼 의혹은 말 그대로 의혹에 머물 뿐이다.
누와르 소설을 표방하면서 이토록 담담하게 긴장감을 끌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또한 소금기 가득한 바닷가의 끈적함과 제르포가 언급하는 재즈 요소가 가득한 블루스, 그리고 미래의 사고를 예고하는 듯한 트릭에서 오는 긴장감 등이 진하게 전해진다.
나는 제르포가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 베아에게 대답한 "모르겠어"를 다른 의미로도 해석해 본다. 그는 정말 그가 겪은 일이 왜 일어난 건지, 그토록 사소한 일로 인생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은 아닐까? 휴가지 숙소의 사소한 불편함도 못참는 자신이 냄새나고 더러운 밀입국자 벌목꾼들 숙소에서 지내고 낯선 여인과 외도를 하며 익숙한 듯 사람을 죽이다니.
이렇듯 영화에서나 일어날 것만 같은 일들을 우리는 일상에서 직.간접적으로 겪는다. 끊임없는 사건.사고들이 나와는 무관한 듯 하지만, 당장 2020년 지구는 상상조차 못한 전염력을 가진 역병으로 국가 간 이동이 거의 막힌 상태 아닌가.
작가는, 말하는 게 아닐까?
사소한 사고로 일상의 균열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인간은 내면에 여러 군상을 갖고 있다고, 그래서 어떤 모습도 이상하지 않다고, 누구도 예외는 아니라고, 그러니 방심하지 말라고. 그럼에도 세상은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고.
217-218.
조르주 제르포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정확히 알 방도는 없다.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전반적으로는 알 수 있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는 법이다. (...) 언젠가 한번 모호한 상황에서 그는 파란 가득한 피투성이 모험을 경험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찾아낸 할 일이라고는 가축우리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이제는 우리 속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우리 속에서 조르주가 파리 주변을 시속 145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다는 것은 그저 조르주가 자신에게 속한 시공간에 자리해 있다는 사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