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동네
손보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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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에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나'와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경기도 광주의 작은 동네를 떠났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아버지와 연락하며 살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갑자가 만나고 싶다며 전화를 해 온 아버지. 자신들을 버리고 재혼까지 하며 잘 살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가득 안고 만났건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당신은 최선을 다했으며 어머니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 진실의 여부를 밝혀줄 어머니는 이제 세상에 없는데, '내'가 모르는 진실은 무엇일까? 
 
 
어린시절부터 어머니는 과잉보호라고 하기에도 지난칠 만큼 '나'의 '안전'에 집착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적응 기간이 지난 고학년이 되어서도 학교 앞까지 배웅을 하고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마중을 왔고, 남들이 어떻게 보든 자신들은 한가족이 분명함에도 타인에게 한 가족으로 보여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어디든 데리고 다녔으며 '내'가 당신이 정한 구역을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종'계획을 세워 일탈이라고 한 것이 고작 버스를 타고 동네를 벗어나는 것이었는데, 그나마도 실패로 끝나고 혼자 산책 삼아 다니던 소나무 숲에서 길을 잃어 문제의 '그녀'를 만나게 된다. 유명한 가수였다가 유력한 정치인의 내연녀가 되어 소나무 숲의 집에 갇힌 여자. 그 여자의 죽음이 원인이 되어 아버지는 집을 떠났다. 
 
185.
어머니와 내가 작은 동네를 떠난 이후로 어머니는 나와 함께 어디를 가든 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했다. "이래야 우리가 가족처럼 보일 거 아니니." 역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말은 참 이상하다. 왜냐하면 팔짱을 끼든 끼지 않든, 손을 잡든 잡지 않든 어머니와 나는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딸에 대한 어머니의 과한 사랑과 집착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던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했고 더없이 자상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화를 낸 것은 어머니가 소나무 숲의 여자와 교류한다는 사실을 안 그때였다. 그녀가 술에 취해 '나'의 집앞에 차를 몰고 와서 술주정을 부리며 소란스럽게 굴었던 그날, 처음으로 화를 낸 아버지. 며칠이 지나 그녀가 음독 자살을 하고 소나무 숲 집에서 '나'가 놓고 왔던 가방이 발견되어 경찰이 집으로 찾아온 얼마 후 아버지는 작별 인사 한 마디도 없이 집을 떠났다. 다만 어느날 밤 어머니에게 "우린 실패한 거야"라는 짧은 말만을 남기고. 아버지는 왜 그렇게 도망치듯 서둘러 떠나야 했을까?  
   
 
어머니는 죽기 얼마 전이 되어서야 당신의 과거를 말해 주었다. 서해에 있는 섬 출신으로 열아홉 살에 집에서 도망쳤고,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방통대를 다니면서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다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고. 그리고 고향에 결혼한 여동생과 남자 조카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죽고 없다고. 그러면서 그들의 죽음을 '나'가 슬퍼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왜? '나'는 그들을 모르는데. 
 
223.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복기했다고 생각했다. 터져 나오는 말, 그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느꼈지만 어쩌면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 내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면, 그건 어머니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을까? 그건 터져 나오는 말이 아니라, 너절함을 가장한 취사 선택된 말이었던 것일까? 

 
 
   
어느날 남편의 신문 스크랩북을 들춰보던 중 엄마가 어린시절 살았다는 섬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된 '나'. 신문에는 동해상에서 북한 함정에 나포되어 1년여의 억류 끝에 귀국했지만 반공법상 월북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 받은 후 미금도(어머니의 고향)에 정착해서 결혼하고 평범한 삶을 살다가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끌려가 고정간첩이라는 죄를 뒤집어써 고문과 폭행으로 자백을 강요받고 20년 행을 선고 받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어머니와 고향이 같을 뿐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흘려버렸던 그 기사. 
  
 
돌이켜보면 미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엄마가 거짓으로 말한 동네의 큰 화재, 명절이면 아버지만 본가에 가고 어머니와 '나'만 집에 남아 있었던 상황, 어린시절 정서적으로 좋지 않다는 이유로 '나'에게 신문과 뉴스를 절대 보여주지 않았던 것, 남들과 교류하지 않는 어머니가 유독 소나무 숲 집의 여자를 돌보다시피 관계를 맺은 사실, 단순히 '그 여자'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사실만으로 화를 내고, 떠난 것도 납득이 안되지만 단 한번도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타인으로 산 아버지, 그리고 털어놓지 않는 오빠의 존재.  
 
이 퍼즐을 맞춰줄 사람은 오직 아버지 뿐이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경주로 향한다. 그리고 알게된 진실. '나'는 과연 누구였던 걸까?  
 
 
  
소설에서 어머니의 지상과제는 '나'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온전한 한가족으로 보여지는 것에 과민하게 신경 쓴 이유도 오로지 '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가능하면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았는데, 왜 소나무 숲의 집 여자에게만 그 경계를 넘어오도록 한 걸까? 어머니는 숨겨진 존재로 살아가는 그 여인에게서 자신과 여동생과 '나'의 모습을 본 게 아닐까? 출산이 임박하도록 불러오는 배를 감추고 몰래 아이를 낳을 수 밖에 없었던 여동생,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완전한 제 아이로 키워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모르는 채 살아야만 했던 '나'.   
 
연예 기획사에서 근무하는 남편의 소속 연예인 윤소이. '나'는 남편의 회사 송년회 때 마다 늘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의 매니저 부부와 한 자리를 차지했던 그녀가 사라진 것에 집착한다. 어느해 송년회 때부터 보이지 않은 그녀는 편지 한 장만을 남겨두고 사라졌다고 한다. '나'는 남편으로부터 그녀가 사라진 것이 차라리 회사에 더 잘된 일이라는 말과 '사라졌다'는 용어에 집착하며 윤소이의 흔적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나'는 평소에 인사조차 하지 않았던 윤소이의 은퇴에 이토록 집착하는 걸까?  
 
안전에 대한 강박으로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산발적으로 내뱉은 어머니의 말들이 주변에서 부유하듯 떠다녀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작은 자극에도 흔들려왔던 정체성을 농담으로 대체했던 '나'.  
 
252.
삶의 어떤 부분들은 아무리 내 이름을 지워도 결국은 내게로 돌아온다고,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에는ㅡ이러한 종류의 상징들이 으레 그렇듯ㅡ진부하고 손상되기 쉬운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10.
같은 의도의 다른 일면, 혹은 이중적인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동일한 환상.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그런 환상을 지속하고 싶어서 무모한 도박을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삶은 그런 식으로 매 순간 판돈을 걸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결혼을 앞둔 '나'를 향해 이제야 딸의 인생이 안심이 된다고 말한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지상과제를 완수했다고 믿는 것이려나. 그러나 어디에 안전과 행복이 완전하게 보장된 삶이 있을까. 진실이 늘 옳은 것도, 행복을 지켜주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나'의 안전은 외부가 아닌 그들 안에서 지켜져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비밀이 아닌 진실과 이해로써. 
 
282.
얘, 그냥 흘려버려. 그냥 지금의 너의 삶에 집중해, 너의 행복을 지키려고 노력해. 그리고 나는 언제나 결국은 어머니가 말하는 대로 해다. 어떻게 어머니는 내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너의 삶, 너의 행복, 너의 안전. 하, 어머니는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당신은 실패했어요. 나는 내 삶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어요.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진실을 찾아가는 미스터리한 전개 방식을 취한다. 화자 '나'의 가족사를 통해 개인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더불어 그들의 비밀을 풀어내는 과정이 읽는 맛을 배가한다. 
 

267.
우리의 선택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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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자극적인 나라 - 짐 로저스의 어떤 예견
짐 로저스 지음, 전경아.오노 가즈모토 옮김 / 살림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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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투자가로 불리는 짐 로저스가 돈의 흐름을 예측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역사에 입각해서 앞날을 읽으며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사고하지 말고 변화에 대응하라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이 책에서는 21세기에 가장 매력적이고 자극이 될 나라와 현재 추세로라면 쇠락의 길을 걷게 될 나라를 들어 그 나라들의 장.단점을 짚어내고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먼저 한반도가 맞이할 극적인 변화에 대해서 언급한다.
한국은 현재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북한이 개방하면 해결된다고 보고 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잘 풀렸던 것처럼 평화적 관계 전제 하에서 본다면 여러모로 아주 이상적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북한의 천연자연과 노동력, 남한의 기술력과 자본이 조화를 이루고 무엇보다 현저하게 줄어들 국방비와 긴장감을 생각하면 더할나위 없다. 다만 이 책이 출간된 연도가 2019년이다. 그래서 2020년 6월 현재에는 변수가 생겼다. 북한이 평화협정을 폐기하고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지 불과 보름이 채 되지 않았다. 모쪼록 현 정부가 이 고비를 무사히 해결해 저자가 그리는 그림이 완성되기를 희망한다. 
 
북한은 여러모로 잠재적인 국가임을 강조한다. 북한의 잠재력을 예의 주시하며 진출을 준비하는 주변의 강대국들의 속내를 한국은 잘 간파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개방, 하나된 한반도, 이것만 이루어진다면 한반도의 미래는 활기찰 것이라고 예견한다. 
 
또하나 짚어내는 것이 있다면 젊은이들이 혁신을 이루기 위해 도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등생부터 공무원에 준하는 안정된 직장을 장래 직업 우선 순위에 둔다면 사회는 변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요즘에는 중학교부터 진로 교육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진로 결정에 영향이 미치는지는 미지수다. 많은 직업군에 대해서 아는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생만 교육해서 될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시민 교육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우려를 나타나는 국가는 일본이다.
역사의 필연을 들어보면 폐쇄된 나라는 망하고 개방된 나라는 번영한다고 했다. 일본은 이민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했으며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그리고 현재 국내 부채 비율도 높다. 그러나 일본인의 성실성, 높은 저축률, 제품의 품질, 그리고 관세 인하와 이민자 수용을 들어 충분히 회복 가능성이 있음을 조언한다.
 
저자는 이민자를 받으면 사회가 불안정해진다고하지만 이민자가 가장 많은 미국의 경우를 봐도 자국민 범죄자가 훨씬 많다고 주장한다. 이민자 범죄가 일어났을때 언론에서 유독 강조하기 때문이지 실제로 비율로 따지면 이민자 범죄율이 높다고 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난민을 꺼리는 이유가 첫째로 난민 범죄를 드는데, 사실 난민 범죄를 수치로 나타낸 정확한 근거 자료는 없다.  
 
  
 
저자가 북한과 일본의 사례를 들어 육성을 권장하는 사업은 관광업과 농업이다. 나는 무엇보다 농업 육성에 강하게 공감한다. 지금 세계는 종자 전쟁이다. 누가 더 많은 종자를 보유하고 있느냐가 관건이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는 외국 회사에 많은 종자권을 팔았고, 그 결과 현재 한국은 로열티를 받는 종자가 거의 없다(알기로는 전무하다). 가장 중요한 건 농수산물(특히 농산물)의 자급력이 일정량으로 유지해야 한다. 수입이 막할 경우 외국 의존도가 높으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업은 꾸준히 투자하고 육성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어린 아이들의 진로를 농업에 뜻을 두는 것도 좋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어찌됐든 현재 세계의 경제를 이끄는 나라는 미국이다. 그렇다면 지금대로라면 미래가 없는 미국을 이어 세계의 패권국이 될 나라는 어디일까? 
저자는 중국을 지목한다. 무엇보다 긴 역사를 자랑하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았으며 발명과 기술의 기질을 타고난 국가라는 이유를 든다. 부채 비율이 점점 늘고는 있고 시장 자율성이 제한적이라는 부분이 걸리지만, 부채는 우려할 정도는 아니고 자유시장은 좀 더 지켜봐야할 것이다. 이외에도 러시아, 콜럼비아, 인도 등이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같은, 미래가 기대되는 나라라고 보고 있다. 
 
 
AI등장으로 사라질 산업과 성장할 산업에 대한 조심스러운 예측을 보탠다. 
일단 캐리시스 결제가 세계적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미 많은 국가가 일반적 실행 단계에 올라서 있으며, 추세 또한 현물 통화를 지양하고 있지 않은가. 책에 의하면 캐리시스 결제비율이 한국은 89.1%로 압도적이고 중국, 캐나다, 영국 등이 뒤를 잇고 있다. 의외인 나라는 일본과 독일인데, 지인을 통해 들어보니 일본에서는 아직도 동전 회전율이 높다고 한다. 사실 돈을 만드는데, 액면가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드니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화폐 사용량을 줄이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고령화 사회로 IT기기 사용이 미숙한 고령자들에 대한 대안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사족, 제발 돼지저금통에 동전 모으기 하지 말기를!) 
 
 


저자는 시대의 흐름을 역사적 사실과 현재에 보여지는 근거에 의해서 판단하고 예측해 개인의 의견을 피력할 뿐 특정 이념이나 사상에 무게를 둔다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특정 국가, 정당, 이념, 사상,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우며, 무엇보다 사고의 틀이 열려있는, 냉철한 시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보인다. 짐 로저스는 오히려 자신의 말을 무작정 따라하는 이들에게 경고한다. 스스로 모든 것을 확인하라고. 더불어 젊은이들에게 기다림과 인내심을 가지라는 진심어린 조언을 건넨다.  
 
 
세상은 예측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불가항력적인 사고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할 때에는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이다. 현재 아직까지는 코로나19에 대한 치료제나 백신을 개발하지 못한 상태이고 세계의 모든 감염학자들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문득, 짐 로저스는 포스트 코로나를 어떻게 예측할까, 궁금해졌다. 
 
 
사족을 한 번 더 달자면, 그의 예견이 맞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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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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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삶도 다른 여덟 명의 한국 여성이 주인공인 옴니버스 소설집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 꼭지마다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이 사례들이 과연 한 사람한테 한 가지씩만 일어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갈 곳이 없어 도움을 얻고자 찾아간 선배의 아르바이트 주유소에서 알게 된 건호와 동거하는 정아,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만 고시생 남자친구 뒷바라지에 열성을 다했으나 제대로 뒤통수 맞은 정정은 씨, 처음으로 교제한 남자가 유부남인 것도 모자라 오히려 뻔뻔하게 몰랐냐며 되묻는 그에게 물 한 잔도 끼언지 못했던 영진, 명예퇴직을 당했다는 사실에 결혼을 전제로 5년간 교제한 남자친구가 위로는 커녕 맞벌이가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작별을 선언하면서 야무지게 결혼자금 공동 통장의 돈까지 삼켜버린 그로부터 맥없이 당해버린 지윤, 큰 욕심 없이 지금만큼만 딱 지금만큼만 행복하면 더는 바랄 게 없었건만 하필 그 시간에 공용 화장실에 들어간 죄로 살해를 당한 수연.
 



 

소설을 읽다보면 처신 똑바로 하지 못한, 영악하게 굴지 못한, 좀 인내심을 갖고 참지 못한 그녀들의 잘못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이런 사람들 꼭 있다). 각 소설의 내용은 사실 특별할 것이 없다. 십수 년 전부터 꾸준히 회자되었던 사회 문제이자 많은 이야기의 소재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들이 특별하지 않다는 게 문제라는 걸 직시하지 않는다. '아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이런 일이 있어?' '예전에는 이랬단 말이야?' 라는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전하지 않은 밤길이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 밤길을 다니는 걸 문제 삼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을 대상으로 칼을 휘두르는 묻지마 범죄자보다 해 떨어진 시간에 술집 화장실을 드나드는 것이 원인이라고 여긴다.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화하고 비하하며 상품화하는 건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차고, 여성의 성욕구는 정숙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한다. 직장 내 성추행은 입 아픈 얘기이고 회식 자리에 여성 직원이 일찍 자리를 비우는 건 소속감이 부족해서라고 혀를 차면서 자기의 아내가 회식으로 늦게 오는 건 탐탁해 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런 이중적인 잣대는 어디에서 근거한 것일까? 
 




 
이 소설집의 결정타는 고작 다섯 쪽에 불과한, 에필로그다.
만약 여덟 사례를 보여주고 앞으로 태어날 성별을 선택하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성별을 선택할까?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어느 설문 조사의 결과를 읽은 내용을 썼다. 시간여행을 하여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가장 해주고 싶으냐는 것. 압도적 1위가 "결혼하지 마"였다고 한다. 엄마가 결혼하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만큼 인간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특히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녹록치 않다. 
 
요즘에는 여성의 높은 교육 수준과 정.재계 진출, 대기업 임원, 공무원과 교사 비중이 높아진 것을 들어 더이상 차별은 없다고,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지난 대비 상승률이 아닌 현재의 평균 비율과 표면적인 수치가 아닌 오랜 관습도 함께 짚어봐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쪽이 권력을 잡고 우위에 서는 관계가 아닌 진정한 '공존'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136.
시위장에서 본 '함께 살자'라는 깃발이 떠올랐지만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걸까. 사각사각, 김은정의 마음속 빈자리에서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공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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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3 :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 불타는 사막에 피어난 꽃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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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중국편3,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부제 : 불타는 사막에 피어난 꽃) 
 


실크로드란 길로 나 있는 선이 아니라 오아시스 도시에서 오아시스 도시로 이어지는 점의 연결. 
  
 


이번에는 타클라마칸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순례 답사기다. 
저자의 답사기는 나에게 늘 유용한 지침서가 되어 주었다. 이번 순례기 또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요, 언젠가 가볼 수 있기를 희망하는 실크로드의 길잡이가 되어 주리라 믿는다.  
 
책의 표지를 펼치면 약도가 나온다. 동쪽에 있는 누란을 시작으로 투르판을 거쳐 천산산맥 아래쪽의 쿠차로 가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사막을 횡단해 호탄, 야르칸드, 카슈가르를 종착으로 한다. 간단한 지도만으로도 이 엄청난 구간이 놀라운데, 하루에 거의 10시간을 버스를 타야하는 일정은 병적으로 멀미가 심한 나로서는 가능할지 쓸데없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답사기는 여행의 과정이나 문화유산의 자료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크지만 그에 못지 않게 현장에서 느껴지는 답사가들의 감흥과 간접적으로나마 전해지는 자연의 경관이 인상적이고 깊게 들어온다. 이 책에서도 인상적이고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다. 
 


지금은 사라진 누란을 비롯해 가는 곳마다 남겨진 문헌들을 읽고 있자면 삶과 세상을 통찰하는 혜안들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누란에서 발굴된 가로슈티문자로 기록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고 한다. 
 
'살아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베면 말 한 필을, 작은 나무를 베면 소 한 마리를, 묘목을 벤 자는 양 두 마리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 
 
그들은 나무 한 그루를 키우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지와 나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란 사람들도 신도시 건설로 인해 생태계 파괴를 불러왔고, 현재는 사라진 나라가 됐다. 현대 사회에도 도시화라는 명분으로 산은 깎여 나가고, 화석 연료 사용으로 오염과 지구온난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누란의 경고가 아무 소용이 없다.  
 
 
휴먼 스케일은 인간 감각과 신체조건의 한계에 바탕을 둬 한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크기를 말한다. 현대에는 이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데, 투르판의 교하고성 도시는 이러한 휴면 스케일을 일찍이 완성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투르판의 인공수도 카레즈인데 카레즈는 위구르어로 '우물'이라는 뜻으로, 지하에 우물을 파고 이 우물들을 서로 연결해서 물길을 만든 지하 관개수로를 말한다. 연간 강우량이 16밀리미터밖에 안되지만 증발량이 엄청나기 때문에 지상에 수로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단다. 그래도 지하에 만든 인공수로라니... 모세혈관처럼 연결되어 있어 그 길이가 무려 5천 킬로비터가 넘는다.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만리장성, 대운하와 함께 중국의 3대 불가사의 공정으로 꼽힌다고 한다. 
 
 
이번 답사기에는 오아시스 도시를 탐험했던 탐험가와 학자들, 그리고 이들이 도굴하고 훔쳐간 문화재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인간을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동력은 제각각일 터다. 고고학자, 탐험가 등 입장에 따라 지적 호기심, 금전적 욕망, 명예욕 등 다양하겠지만, 타국의 문화재를 제멋대로 떼어내 가져가는 행위는 비난받아야 할 일이다. 내심이야 어떻든 명분은 문화재를 보존할 소양이 안되는 나라에서 훼손되느니 선진국인 제 나라에서 잘 보관해 주겠다는 건데, 그렇다면 협의 하에 서로 납득할 만한 방법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주로 독일과 프랑스, 영국의 도굴이 심했는데, 꽤 놀라웠던 것은 19세기에 일본도 서역 탐험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속내가 학문에 비중을 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외에도 실크로드의 실질적 상인이라고 살 수 있는 소그드인, 불경 편찬에 절대적 역할을 했던 쿠마라지바, 신라와 교역을 했다는 증거로 보여지는 키질석굴의 장식보검 벽화, 그리고 키질석굴의 엄청난 입장료(키질석굴의 입장료는 한화로 10만원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경복궁 입장료 3천원이 너무 싸다며 3배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막이 없는 나라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막에 대한 로망이 있는 이들이 있다. 모래라면 진저리를 치는 나도 사막에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저자의 설명과 사진을 보니 쿰타크 사막에 앉아 물결치는 모래 언덕과 끝없는 지평선, 그리고 천산신비대협곡의 한가운데를 맨발로 걸으며 자연의 경외감을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불교와 이슬람의 종교, 동.서문화가 만나는 곳. 
저자는 어느 '도시'가 제일 좋았냐는 물음에는 투르판이라고, 어느 '오아시스'가 매력적이냐는 물음에는 쿠차라고, 어디가 제일 '인상 깊었냐'는 물음에는 타클라마칸사막을 건너간 일이라고, 어느 코스가 제일 '감동적'이었냐는 물음에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천산산맥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오아시스 도시는 각각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다르고 사막을 한가운데 놓고 발달한 지역적 특성이 잘 살아 있어서 답사지로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저자는 이 책이 여행자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현장에 가보지 않은 독자를 위해 유물.유적을 실감 나게 묘사해 현장감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새로운 시각의 일깨움을 통해 유익한 독서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바람을 갖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세 가지가 충분히 전달 되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답사을 넘어 역사를, 과거에 살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터전의 이야기가 무엇보다 좋았고 즐거웠다. 
 
  
좋아하는 시인 이상은의 시가 나와 남겨놓는다. 
 
날은 저물고 기분이 울적하여
수레 몰아 높은 언덕에 올라보니
석양은 한없이 좋기만 한데
단지 아쉬운 것은 황혼이 가까운 것이다
(등낙유원 登樂遊原) 

  
 
 
 
[책 속으로] 
  
61.
답사는 찾아가는 유적지 못지않게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적지가 처한 지리적 환경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186.
여행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경험을 확대시켜주기 때문이다. 해외 여행에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를 보고 배운다. 문화유산 답사는 인류의 역사와 인문정신을 가르쳐주고, 도시 여행은 인간 삶의 다양한 면모를 엿보게 하며 자연 관광은 대자연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준다. 
 
229.
색色이란 형태가 있는 것을 말하고 공空이란 실체가 없고 변해가는 것을 말하지만 결국은 둘이 같다고 말한다. 이를 쿠마라지바는 개념화시켜 이렇게 번역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 여덟 글자 속에 삼라만상의 세상만사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261.
세월의 흐름 속에 한편으로 사라지면서 한편으로 남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에서 일어나는 스산한 서정이다. 그 폐허에서 살아온 인생과 살아갈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그 나름의 또 다른 종교 감정이 아닐수 없다. 
 
388.
티베트인은 신앙의 힘으로 버티는 느낌이다. 오체투지의 인내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이에 반해 실크로드 오아시스 도시 사람들은 춤과 음악으로 인생을 위로한다. 그런가 하면 차마고도 사람들은 종교고 가무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어진 생존의 시간에 충실하게 시기를 놓치지 않고 일하며 살아갈 뿐이다. 어느 것이 더 낫고 부족하고가 없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자연조건에 맞추어 사는 인생이다. 그리고 우리 같은 현대 도시인들은 이 세가지에다 문명이란 복잡하게 뒤엉킨 삶을 영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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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고전 살롱 : 가족 기담 - 인간의 본성을 뒤집고 비틀고 꿰뚫는
유광수 지음 / 유영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가족을 주제로 고전 톺아보기를 통해 삶과 죽음, 가족 구성원 내의 차별, 인간의 본능, 덕목으로 여겨졌던 관습의 오류와 허점 등이 허구와 지난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비판하며, 현실을 통찰한다. 
 
쥐 변신 설화, 옹고집전, 배따라기, 열녀함양박씨전,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춘향전, 구운몽, 옥루몽, 홍계월전, 흥부전, 심청전, 헨젤과 그레텔, 장화홍련전, 여우누이, 최고운전 등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옛 이야기들을 통해 마녀 사냥, 열녀 이데올로기, 가부장제에 따른 희생, 그리고 혁명을 위한 가족의 재탄생 등 늘 들어왔던 식상한 주제로 비칠 수 있지만, 읽어보면 그 당연한 문제들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에 놀라게 된다. 
 
 
 
'쥐뿔'의 의미를 아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그런데 뜻과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면... 낯 뜨거워서 사용할 수가 없다. 지금으로 치자면 고시 준비를 하기 위해 절로 간 선비가 깎은 손.발톱을 쥐가 먹은 후 선비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의 집에서 한동안 그의 역할을 하며 살았다는 것인데, 문제는 부부관계다. 아이까지 임신한 아내를 향해서, 돌아온 진짜 선비 남편은 '쥐뿔'이라는 단어를 쓰며 비난하는데, 여기에 시부모 및 가족까지 합세해서 아내를 그야말로 쥐잡 듯 한다. 여기에 마녀 사냥 메커니즘이 등장한다. 선비를 못 알아본 사람이 아내 뿐인가? 하인은 그렇다치고 낳아 키운 부모도 못 알아봤다. 그런데 왜 시부모는 며느리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변명조차 못했을까?  
 
당연히 시대적 환경을 들 수 밖에 없다. 아내가 설령 동침을 통해 남편이 진짜가 아님을 알아봤다고 하더라도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거다. 성관계를 통해 진위 여부를 알아냈다고 하면, 더구나 그 시대에 정숙한 여인이라고 누가 여기겠는가? 아내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을 상황이다. 알든 모르든 내색을 할 처지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시부모는 왜?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모두 며느리에게 덮어 씌울까? 며느리를 희생양 삼아 죄를 은폐가 아닌 소멸시키고자 함이다. 
 
49.
희생양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희생양에게 자신들의 죄를 모두 옮겨버림으로써 주변 사람들은 속죄하게 되는 메커니즘이다. (르네 지라르)
 
51.
인간 내면에 감춰진 폭력성이 극대화되는 이런 희생양 메커니즘은 보이지 않는 가상의 적을 향한 두려움과 광기를 쏟아내기에 더 강렬하고 더 치열해 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性의 문제에 있어서 지금은 크게 다를까? 남편의 외도와 아내의 외도는 사회나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의 온도가 다르다.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는하나, 남성의 외도는 살면서 한번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지만 여성의 외도는 얘기가 다르다. 이처럼 아직도 여성에게 있어서 성에 관해서만큼은 여전히 보수적이고, 부계 관습을 생각해 보면 성의 독립과 평등은 아직도 요원한다.  
 
   
 
 
□ □ □ □ 
 
 
'홍길동'하면 떠오르는 것은 의적, 도술, 율도국 등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신분제를 타파하고 인간 평등을 이루자는 혁명적 정신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나만 느꼈을까?했던 부분을 저자가 시원스럽게 집어냈다. 홍길동 마지막을 읽다보면 율도국 왕이 되어 자식을 몇 낳았고, 누구의 소생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그렇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으로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하고, 제 어미는 투기가 심한 첩에게 그토록 괴롭힘을 당했었는데, 결국 그도 왕이 되어 처와 첩을 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홍길동은 처첩의 자식들을 공정하게 대하자는 것일 뿐, 그가 품은 평등 사상에 여성은 없다.  
  
 
책 속에는 투기하는 여성들과 방관을 넘어 방조하는 남성들이 등장한다. 
구운몽과 옥루몽, 홍계월전이다. 이 소설의 남성들은 기녀에게 순결을 요구하고, 현숙함을 들먹여 한쪽 편을 대놓고 든다. 남성은 아쉬울 게 없다. 일부다처제가 합법적이니 죽도록 사랑하는 여인과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첩으로 들이면 그만이기에 출세와 욕망을 동시에 충족한다(물론 죽도록 사랑하는 여성이 같은 신분이면 얘기는 조금 다르겠지만). 사랑해서든 아니든 결혼한 '처'는 죽든 살든 남편만 바라봐야 하는 상황에서 애정을 한몸에 받는 다른 대상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힘들다. 이렇게 살벌한 눈치 게임판을 벌여놓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남성의 태도는 폭력에 다름하지 않다. 이 투기 싸움에 있어 주범은 남성이지만 이를 직시하는 이는 드물다. 
 
물론 일부다체제가 현대 사회에 무슨 해당이냐 하겠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여전히 비혼녀의 순결을 따지고 남성들의 단톡방의 외모 품평회, 여성의 상품화,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는 데이트 폭력 등 문제가 되는 것이 어제 오늘에 그치지 않는다.  
 
183.
투기의 본질은 모두 남성 가부장제의 폭력적 구조 때문이지만, 누구도 그 욕망의 삼격형을 알아내지 못한다.   

 
  
 
□ □ □ □ 
 
 
책에는 무능한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심봉사와 흥부다. 저자는 심봉사와 흥부는 다르다고 말한다. 심봉사는 무능할지언정 무기력하지는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동냥젖을 먹이고 적선을 받아가며 딸을 키운다. 심청이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아버지를 닮아 야무지고 똘똘하게 자란다. 심봉사의 잘못이라면 눈이 뜨고 싶어 앞뒤 생각을 못한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흥부는 무기력하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제비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굶어 죽었을 거라고 말하는데, 동의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징징거리기만 할 뿐 그 많은 자식 중에 구걸조차 나가는 녀석이 없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 했던가.
 
기실 부모들이 가장 흔하게 쓰는 말 중에 하나가 "누구를 닮아서"이다. 누구를 닮았겠는가, 당연히 제 부모를 닮았겠지. "걔네 아빠 뭐하니?", "몇 동에 사니?" "걔 성적은 어떠니?" "공부 못하는 애랑 놀지 마" 등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이 자신의 가치관에 기반해 있고, 그 가치관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흡수된다. 몇 년이 지나 아이들의 냉랭함에 서운해 하지만, 그건 모두 아이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어른들이 뿌린 씨앗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요즘 매체에 종종 보도되는 뉴스 중 하나가 근친 상해다. 
보험을 들어 배우자를 살해하고, 돈을 주지 않는다고 부모를 때리고, 친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하며, 너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자식의 미래를 담보 삼아 몰아붙인다. 이 책에도 만만치 않은 부모가 등장한다.  
 
그 중 한 명이 장화와 홍련의 아버지 배 좌수이다. 외모, 성품, 집안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자매가 죽은 어미를 꼭 닮아 아버지가 아낀다는 이유만으로 혼인도 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 배다른 동생 장쇠가 누나를 연못에 빠뜨릴 정도면 장화의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장화가 죽자 홍련은 언니를 따라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계모의 눈에 거슬리면 혼인시키면 그만인데, 왜 딸들이 말 한마디 못하고 그 지경까지 내몰렸을까? 저자는 근친 강간을 의심한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해 꼭 닮은 장화의 방을 자주 찾았고, 계모 허씨가 장화의 낙태를 의심했으며, 장화가 끝까지, 심지어 죽어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홍련은? 홍련 또한 언니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침묵했던 언니가 죽음으로써 아버지가 곧 자신의 방을 찾을 것임을 알기에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의 부모와 가난한 살림에 입을 줄이기 위해 어린 자식을 버리겠다는 <손순매아>도 언급되는데, 저자가 날카롭게 지적하는 바는 "부모,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이다. 세상이 불황이고 태어날 때 부터 가난했는데 어쩌라는 항변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럼에도 그들은 먹는 입 줄이기 위한 패륜적 행위가 아닌 다른 방편을 찾아야 했다는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에 끊이지 않는 뉴스 중 하나가 경기 불황으로 인한 일가족 동반 자살이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의 선택에 의해서 삶이 결정된다. 그들 중 누가 아이들에게 죽겠냐고 물어봤을까?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삶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대신 선택을 하는 이 월권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 
 
역으로 넘쳐서 화근인 경우도 있다. 자식 뒷바자리에 언감생심 노후대책은 고사하고 수입의 절반을 사교육에 쏟아붓는다. 학교와 학원 셔틀은 보통 일이고, 성적부터 입시 설계까지 부모가 다 해준다. 심지어 법적 성인인 나이에도 부모가 수강 신청을 해준다. 실제로 직접 들은 지인의 경험담으로, 아르바이트생 면접 온 학생을 불합격 시켰더니 학생의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는 웃지 못할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키웠으니 배우자인들 제 맘대로 선택해서 결혼할 수 있으려나. 힘들다고 하면서도 자식에게 매달린 끈을 놓지 못한다. 
 
저자는 이러한 작금의 세태를 <여우누이>를 통해서 꼬집는다. 제 오라비와 부모의 간까지 빼먹는 여우누이 말이다. 과연 이렇게 넘치는 사랑이 자식을 위한 희생이라고 위안 삼으며 살텐데, 이것이 과연 옳은 희생이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외에도 <춘향전>을 통해 체제의 확장, <아기장수>를 데려와서 젊은 세대들이 이루어야 할 혁명에 대해서 말한다. 그 다름과 확장과 혁명이 기존 세대에게는 안정을 뒤흔드는 배반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그들로 인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져 왔다. 
 
캐캐묵은 옛 이야기와 고전을 들춰내 읽고 사고하고 확장해야 하는 이유는 미처 우리가 각성하지 못했던 바를 깨달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변화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희망이라는 사실이다.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무척 소중하다. 
  
 
 
 
세상 모든 것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진정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던져지듯 있다는 무의미에서 허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오히려 그렇게 이유 없이 던져진 듯하기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혜안이다. 본래부터 결정되고 정해진 것이 없기에, 오히려 본질적으로 구속하는 것이 없는 진정한 자유 상태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선택하고 생동하고 책임짐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어떠한 인간이다[본질]'라는 것보다는 '스스로 선택하고 의미를 만들어가는[실존]'것이 더 먼저 있다는 거다.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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