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동네
손보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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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에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나'와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경기도 광주의 작은 동네를 떠났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아버지와 연락하며 살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갑자가 만나고 싶다며 전화를 해 온 아버지. 자신들을 버리고 재혼까지 하며 잘 살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가득 안고 만났건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당신은 최선을 다했으며 어머니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한다. 진실의 여부를 밝혀줄 어머니는 이제 세상에 없는데, '내'가 모르는 진실은 무엇일까? 
 
 
어린시절부터 어머니는 과잉보호라고 하기에도 지난칠 만큼 '나'의 '안전'에 집착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적응 기간이 지난 고학년이 되어서도 학교 앞까지 배웅을 하고 끝나는 시간에 맞춰 마중을 왔고, 남들이 어떻게 보든 자신들은 한가족이 분명함에도 타인에게 한 가족으로 보여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어디든 데리고 다녔으며 '내'가 당신이 정한 구역을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종'계획을 세워 일탈이라고 한 것이 고작 버스를 타고 동네를 벗어나는 것이었는데, 그나마도 실패로 끝나고 혼자 산책 삼아 다니던 소나무 숲에서 길을 잃어 문제의 '그녀'를 만나게 된다. 유명한 가수였다가 유력한 정치인의 내연녀가 되어 소나무 숲의 집에 갇힌 여자. 그 여자의 죽음이 원인이 되어 아버지는 집을 떠났다. 
 
185.
어머니와 내가 작은 동네를 떠난 이후로 어머니는 나와 함께 어디를 가든 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했다. "이래야 우리가 가족처럼 보일 거 아니니." 역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말은 참 이상하다. 왜냐하면 팔짱을 끼든 끼지 않든, 손을 잡든 잡지 않든 어머니와 나는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딸에 대한 어머니의 과한 사랑과 집착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던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했고 더없이 자상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화를 낸 것은 어머니가 소나무 숲의 여자와 교류한다는 사실을 안 그때였다. 그녀가 술에 취해 '나'의 집앞에 차를 몰고 와서 술주정을 부리며 소란스럽게 굴었던 그날, 처음으로 화를 낸 아버지. 며칠이 지나 그녀가 음독 자살을 하고 소나무 숲 집에서 '나'가 놓고 왔던 가방이 발견되어 경찰이 집으로 찾아온 얼마 후 아버지는 작별 인사 한 마디도 없이 집을 떠났다. 다만 어느날 밤 어머니에게 "우린 실패한 거야"라는 짧은 말만을 남기고. 아버지는 왜 그렇게 도망치듯 서둘러 떠나야 했을까?  
   
 
어머니는 죽기 얼마 전이 되어서야 당신의 과거를 말해 주었다. 서해에 있는 섬 출신으로 열아홉 살에 집에서 도망쳤고,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방통대를 다니면서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하다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고. 그리고 고향에 결혼한 여동생과 남자 조카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죽고 없다고. 그러면서 그들의 죽음을 '나'가 슬퍼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왜? '나'는 그들을 모르는데. 
 
223.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복기했다고 생각했다. 터져 나오는 말, 그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느꼈지만 어쩌면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 내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면, 그건 어머니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었을까? 그건 터져 나오는 말이 아니라, 너절함을 가장한 취사 선택된 말이었던 것일까? 

 
 
   
어느날 남편의 신문 스크랩북을 들춰보던 중 엄마가 어린시절 살았다는 섬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된 '나'. 신문에는 동해상에서 북한 함정에 나포되어 1년여의 억류 끝에 귀국했지만 반공법상 월북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 받은 후 미금도(어머니의 고향)에 정착해서 결혼하고 평범한 삶을 살다가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끌려가 고정간첩이라는 죄를 뒤집어써 고문과 폭행으로 자백을 강요받고 20년 행을 선고 받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어머니와 고향이 같을 뿐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흘려버렸던 그 기사. 
  
 
돌이켜보면 미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엄마가 거짓으로 말한 동네의 큰 화재, 명절이면 아버지만 본가에 가고 어머니와 '나'만 집에 남아 있었던 상황, 어린시절 정서적으로 좋지 않다는 이유로 '나'에게 신문과 뉴스를 절대 보여주지 않았던 것, 남들과 교류하지 않는 어머니가 유독 소나무 숲 집의 여자를 돌보다시피 관계를 맺은 사실, 단순히 '그 여자'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사실만으로 화를 내고, 떠난 것도 납득이 안되지만 단 한번도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타인으로 산 아버지, 그리고 털어놓지 않는 오빠의 존재.  
 
이 퍼즐을 맞춰줄 사람은 오직 아버지 뿐이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경주로 향한다. 그리고 알게된 진실. '나'는 과연 누구였던 걸까?  
 
 
  
소설에서 어머니의 지상과제는 '나'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온전한 한가족으로 보여지는 것에 과민하게 신경 쓴 이유도 오로지 '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가능하면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았는데, 왜 소나무 숲의 집 여자에게만 그 경계를 넘어오도록 한 걸까? 어머니는 숨겨진 존재로 살아가는 그 여인에게서 자신과 여동생과 '나'의 모습을 본 게 아닐까? 출산이 임박하도록 불러오는 배를 감추고 몰래 아이를 낳을 수 밖에 없었던 여동생, 여동생이 낳은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완전한 제 아이로 키워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모르는 채 살아야만 했던 '나'.   
 
연예 기획사에서 근무하는 남편의 소속 연예인 윤소이. '나'는 남편의 회사 송년회 때 마다 늘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의 매니저 부부와 한 자리를 차지했던 그녀가 사라진 것에 집착한다. 어느해 송년회 때부터 보이지 않은 그녀는 편지 한 장만을 남겨두고 사라졌다고 한다. '나'는 남편으로부터 그녀가 사라진 것이 차라리 회사에 더 잘된 일이라는 말과 '사라졌다'는 용어에 집착하며 윤소이의 흔적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나'는 평소에 인사조차 하지 않았던 윤소이의 은퇴에 이토록 집착하는 걸까?  
 
안전에 대한 강박으로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했던 어머니,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산발적으로 내뱉은 어머니의 말들이 주변에서 부유하듯 떠다녀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작은 자극에도 흔들려왔던 정체성을 농담으로 대체했던 '나'.  
 
252.
삶의 어떤 부분들은 아무리 내 이름을 지워도 결국은 내게로 돌아온다고,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에는ㅡ이러한 종류의 상징들이 으레 그렇듯ㅡ진부하고 손상되기 쉬운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10.
같은 의도의 다른 일면, 혹은 이중적인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동일한 환상.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그런 환상을 지속하고 싶어서 무모한 도박을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삶은 그런 식으로 매 순간 판돈을 걸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결혼을 앞둔 '나'를 향해 이제야 딸의 인생이 안심이 된다고 말한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지상과제를 완수했다고 믿는 것이려나. 그러나 어디에 안전과 행복이 완전하게 보장된 삶이 있을까. 진실이 늘 옳은 것도, 행복을 지켜주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나'의 안전은 외부가 아닌 그들 안에서 지켜져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비밀이 아닌 진실과 이해로써. 
 
282.
얘, 그냥 흘려버려. 그냥 지금의 너의 삶에 집중해, 너의 행복을 지키려고 노력해. 그리고 나는 언제나 결국은 어머니가 말하는 대로 해다. 어떻게 어머니는 내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너의 삶, 너의 행복, 너의 안전. 하, 어머니는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당신은 실패했어요. 나는 내 삶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어요.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진실을 찾아가는 미스터리한 전개 방식을 취한다. 화자 '나'의 가족사를 통해 개인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더불어 그들의 비밀을 풀어내는 과정이 읽는 맛을 배가한다. 
 

267.
우리의 선택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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