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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평점 :
나이도 삶도 다른 여덟 명의 한국 여성이 주인공인 옴니버스 소설집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 꼭지마다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이 사례들이 과연 한 사람한테 한 가지씩만 일어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갈 곳이 없어 도움을 얻고자 찾아간 선배의 아르바이트 주유소에서 알게 된 건호와 동거하는 정아,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만 고시생 남자친구 뒷바라지에 열성을 다했으나 제대로 뒤통수 맞은 정정은 씨, 처음으로 교제한 남자가 유부남인 것도 모자라 오히려 뻔뻔하게 몰랐냐며 되묻는 그에게 물 한 잔도 끼언지 못했던 영진, 명예퇴직을 당했다는 사실에 결혼을 전제로 5년간 교제한 남자친구가 위로는 커녕 맞벌이가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작별을 선언하면서 야무지게 결혼자금 공동 통장의 돈까지 삼켜버린 그로부터 맥없이 당해버린 지윤, 큰 욕심 없이 지금만큼만 딱 지금만큼만 행복하면 더는 바랄 게 없었건만 하필 그 시간에 공용 화장실에 들어간 죄로 살해를 당한 수연.

소설을 읽다보면 처신 똑바로 하지 못한, 영악하게 굴지 못한, 좀 인내심을 갖고 참지 못한 그녀들의 잘못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이런 사람들 꼭 있다). 각 소설의 내용은 사실 특별할 것이 없다. 십수 년 전부터 꾸준히 회자되었던 사회 문제이자 많은 이야기의 소재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들이 특별하지 않다는 게 문제라는 걸 직시하지 않는다. '아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이런 일이 있어?' '예전에는 이랬단 말이야?' 라는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전하지 않은 밤길이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 밤길을 다니는 걸 문제 삼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을 대상으로 칼을 휘두르는 묻지마 범죄자보다 해 떨어진 시간에 술집 화장실을 드나드는 것이 원인이라고 여긴다.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화하고 비하하며 상품화하는 건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차고, 여성의 성욕구는 정숙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한다. 직장 내 성추행은 입 아픈 얘기이고 회식 자리에 여성 직원이 일찍 자리를 비우는 건 소속감이 부족해서라고 혀를 차면서 자기의 아내가 회식으로 늦게 오는 건 탐탁해 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런 이중적인 잣대는 어디에서 근거한 것일까?

이 소설집의 결정타는 고작 다섯 쪽에 불과한, 에필로그다.
만약 여덟 사례를 보여주고 앞으로 태어날 성별을 선택하라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성별을 선택할까?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어느 설문 조사의 결과를 읽은 내용을 썼다. 시간여행을 하여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가장 해주고 싶으냐는 것. 압도적 1위가 "결혼하지 마"였다고 한다. 엄마가 결혼하지 않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만큼 인간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특히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 녹록치 않다.
요즘에는 여성의 높은 교육 수준과 정.재계 진출, 대기업 임원, 공무원과 교사 비중이 높아진 것을 들어 더이상 차별은 없다고,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지난 대비 상승률이 아닌 현재의 평균 비율과 표면적인 수치가 아닌 오랜 관습도 함께 짚어봐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쪽이 권력을 잡고 우위에 서는 관계가 아닌 진정한 '공존'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136.
시위장에서 본 '함께 살자'라는 깃발이 떠올랐지만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걸까. 사각사각, 김은정의 마음속 빈자리에서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공동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