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에서 이기지 못하면 마슬로바를 따라 시베리아까지 따라 가기로 한 네흘류도프는 돈이 필요한 처지가 되자 토지 문제를 이전처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생각에 손해를 보더라도 그 문제를 개선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는 직접 토지를 경작하는 형태로 송금을 받는 대신 헐값으로 농민들에게 임대하여 지주로부터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한다. 자신의 영지를 둘러보기 위해 꾸즈민스꼬예 마을에 도착해 장부를 검토한 네흘류도프는 농민들이 심각하게 착취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는 이 사실을 예전에도 익히 알고 있었으나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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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마슬로바와 처음 만났던 빠노보 마을에 도착한 네흘류도프는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마주한다. 가난에 찌든 그들의 처참한 삶은 네흘류도프가 상상도 못할 만큼 참혹했다. 돈만 제 때 들어오면 영지가 어떻게 관리되는지 관심없는 지주와 농민들을 지주보다 더 잔인하게 약탈하는 관리인은 흡사 강도와 다르지 않다. 네흘류도프는 두 마을을 둘러보면서 농민이 가난하게 사는 근본적인 원인은 토지를 빼앗기는 데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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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흘류도프의 말에 간계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농민들은 귀족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동안 얼마나 혹사를 당하고 속아왔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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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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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그린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의 주인공 거트루드는 그림 안에서 언뜻 보기에 남성같다. 그 초상화를 본 거트루드의 지인들은 초상화가 모델을 닮지 않았다고 말하자 피카소는 '앞으로 닮을'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그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읽자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이 갔다.  
 
돈과 재능이 있었던 유대계 미국인 거트루드는 성소수자로서 가부장적인 남성 가장처럼 행동했고, 동반자를 순종적인 여성의 자리에 위치시켰다. 또한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이면서 나치에 적극 동참해 반유대주의에 앞장섰다. 여성과 유대인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차별적 시스템에 동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스템의 최상층에 자리하기를 원했다. 피카소가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도무지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는 말을 던진 것, 그리고 초상화를 모델없이 그렸다는 사실에서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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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입체주의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장. 입체주의에서 활성화는 것은 '보는 사람'이다. 즉 피사체가 아닌 보는 (그리는) 사람이 가만히 앉아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납득되는 말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자신이 바라본 시각의 움직임을 그린 것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시점을 복수화하는 것이 입체주의의 본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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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3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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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절도와 살인 혐의로 기소된 스물일곱 살 여인 마슬로바가 법정에 서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비정하게 버렸던 마슬로바와 재회하면서 각성하는 네흘류도프를 통해 당시 러시아 정부와 귀족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모순, 지식인의 이중성, 억업과 착취당하는 인민들,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해 진정한 신앙심과 인간성을 저버리는 사회를 향해 비판의 소리를 높인다.


한쪽에서는 연일 만찬을 벌이고 한쪽에서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이 굶어죽는다. 정부는 국민의 행복을 배려한다는 명분으로 매춘을 합법화한다. 배심원이 지식인이면 대부분 무죄로 판결, 농민들이면 유죄로 판결될 가능성이 높은 재판. 사회의 운명을 고작 매춘부 한 명에게 지우려는 마녀사냥, 재판장조차도 사건의 진실과 범인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는 소명의식의 결여, 교육받고 교양도 있지만 고아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싹이 지니고 있었다는 검사의 말로 대변되는 인민을 향한 사회적 편견 등 정부의 잘못된 관행과 사회 부조리를 다방면에서 이야기한다.  











먼저 마슬로바를 살펴본다.
검사는 법정에서 먹고 살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창가로 스며든 여성에게 욕정을 채우기 위해 매춘에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마슬로바가 건전한 노동으로 돈을 벌려고 해도 남자들에 의한 강간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그녀의 교양까지 악의적으로 평가한다.  


오래 전, 군대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지 않는 네흘류도프를 만나기 위해 새벽에 기차역으로 달려갔으나 창가에서 얼굴만 스치듯 보고, 그에게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안 바로 그날부터 정신적 변화가 일어나 마슬로바는 선(善)을 믿지 않았다. 임신한 몸으로 집안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그녀를 내쫓은 지주 자매, 육체적 욕망만 갈구하는 남자들, 그녀를 이용해 돈을 벌기에 급급한 사람들 등 그날 이후로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그녀의 믿음을 굳혀놓았다. 마슬로바가 보기에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살고 있을 뿐이다.  





이제 네흘류도프를 들여다본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한편 토지는 사유 재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자신이 대지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불쾌하는 양가적 감정에 갈등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지고 물려받은 자유재산을 단념할 것인지, 지난날의 자기 생각이 모두 잘못되고 가식에 찬 것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침묵을 지킬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러나 생계 수단이라고는 토지 뿐이고 화려한 생활 습관을 버릴 수 없고 그에게 있어 신념 따위는 어차피 얄팍했으니 유산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과거 대학생이었던 네흘류도프는 스펜서의 <사회 역학>을 통해 토지 사유 제도의 잔학성과 부당성을 깨달아 도덕적 요구라는 명분 아래 아버지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네흘류도프가 한계에 부딪친 까닭은 책에서 배운 학문적인 것에 그쳤고, 실질적으로 농민의 입장에서 갖는 부당함에 이입하거나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사치스러운 생활 습관을 고치지 못했으며 그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토지 사유에 대한 잔악성을 머리로는 인지하지만 막상 다시 실천에 옮길 엄두는 내지 못하는 것, 한마디로 지적 허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네흘류도프가 방탕해지는 변화를 집안에서는 더 반겼다는 것이다. 토지 사유화를 반대하고 철학자같은 말을 하는 아들보다는 적당히 사치를 즐기며 귀족적 타성을 버리지 않는 부르주아 아들이 더 반가워하는 어머니 역시 부조리의 한 단면이다.


결혼관은 어떤가. 본인은 방종한 연애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청혼할 여자의 나이(27세)와 과거는 용납하지 못하고, 결혼의 장점으로 도덕적인 생활을 할 가능성과 가정을 꾸리면 자신의 무의미한 생활에 의미를 부여할 것으로 꼽는다.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자유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여자의 본질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지적한 장점과 단점은 본질적으로 결혼과 무관한다.  



열아홉 살 네흘류도프는 군에 입대하고 3년이 지나서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방탕한 남자가 되었고 스스로 그 모습이 참된 자아라고 믿었다. 이 변화는 자신을 신뢰하기보다 타인을 맹종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는데, 이는 자신을 신뢰하며 사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 대목은 '부활(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원인의 주체를 깨달음으로써 네흘류도프의 내적 변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타인을 신뢰하면 책임 또한 타인에게 전가되므로 모든 일의 해결이 수월해진다. 왜냐하면 문제와 갈등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찾을 때에는 도덕적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배심원은 '절도할 의사도 없었고 사실 금품을 훔친 바도 없으나, 유죄임에는 틀림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소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사위를 던져서 죄의 유무를 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배심원도 누가 죄를 저질렀는지보다는 재판을 빨리 끝내는 평결에 동의할 뿐이다. 그리고 판사들은 마슬로바가 무죄라고 판단하지만 배심원단의 결정과 들끓는 여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유죄를 선고한다.  


톨스토이는 마슬로바가 창녀라는 처지는 수치스러워하지 않지만, 죄수라는 처지는 수치스러워한다는 것을 들어 자기합리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작가가 겨냥한 사람은 약탈로 재물을 얻은 부자나 폭력으로 권력를 구축한 군인과 집권자들이다. 세상은 이러한 왜곡된 관념을 가진 집단이 수적으로 많고 우리도 그런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 마슬로바가 네흘류도프의 속죄와 인도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십년동안 존재감을 인정받아왔던 삶의 방식을 부정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싶다.    


작가는 형식과 권위에 치중한 예배는 진실한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는 메세지를 던지면서 기도란 각자의 영혼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예수는 투옥되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행위와 타인에 대한 일체의 폭력을 금했는데, 감옥 안 예배당에서의 이루어지는 예매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사람들앞에서 이루어지는 예배 의식은 일종의 기만이라고 말한다. 이는 말년에 신앙에 깊이 침잠했던 톨스토이의 사유가 그대로 녹아있는 부분이라고 보여진다.  






이처럼 톨스토이는 정부와 계급 사회, 신앙의 부조리를 깊이있게 파헤친다.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를 면회하기 위해 감옥에 드나들면서 정치범부터 방화범, 무고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까지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사연을 듣게 되면서 내면의 변화가 시작된다. 특히 '상권'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무 죄도 없는 시민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죄책감도 없는 기득권층의 진심이 결여된 아첨과 이해득실에 의한 교제가 난무하는 마슬렌니꼬프 집의 저녁 초대 만찬 모습과, 소박하고 진실된 말에서 작은 만족감을 느끼며 동료를 생각하는 교도소 면회실의 모습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심경의 변화는 네흘류도프 뿐만 아니라 그의 진심을 느낀 마슬로바에게서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네흘류도프를 통해 인간은 하나의 특성으로만 분류될 수 없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톨스토이의 말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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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 다섯수레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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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 아쓰시의 소설 모음집이다. 책에 실린 네 편의 중단편 소설들은 중국 고전을 줄기 삼아 인간의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 그리고 인간의 자아와 실존에 대해 쓰고 있다. 

  


 





[산월기]에서는 야망이 컸으나 출세를 하지 못하는 것에 절망하고 대신 문인으로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 끝에 결국 짐승이 되어버린 한 남자가 맹수가 되어서야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게 된다. 야망만 컸을 뿐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했고 오만했으며 스승과 벗과의 교류를 무시했기에 급기야 인간의 성정을 잃고만 이징은 자존심의 늪에 빠져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던 자신을 맹수라고 자평한다. 
 


맹수가 된 이후에도 종종 인간의 마음으로 돌아오지만 그 시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그와중에도 이징은 가난으로 굶어죽어가는 처자보다 자신의 시가 후세에 남을 것인가를 더 신경쓴다. 이것이 이징이 맹수로 변하고 인간의 성정을 점점 잃어가는 까닭이다. 작가는 사유와 깨우침 없이 사는 것은 맹수와 다를 바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다음 작품인 [명인전]에서도 맥을 이어간다. 천하에 제일가는 궁시의 명인이 될 뜻을 세운 기창은 고금을 통해 아직 본 적이 없는 궁술의 대가라는 감승 노인을 찾아간다. 찾아간 노인은 활에 화살을 메기는 기창을 보고 불사지사를 언급한다. 그의 문하가 된 기창은 예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진인이 갖추어야할 것은 겸허와 초월의 자세임을 이야기하면서 이 작품 역시 내면의 깨우침을 강조하고 있다. 





​책에 실린 두 중편 중 하나인 [제자]는 공자의 제자 자로에 대한 이야기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 중 스승에게 가장 헌신적인 제자였다. 용감하고 솔직하지만 거친면이 있어 공자의 걱정이 컸던 제자이기도 했다. 순수한 몰이해성, 신기한 어리석음, 외곬성. 공자가 자로를 두고 한 말인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표현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전하는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제자들의 다른 생각이나 행동도 허투루 넘길 수 없다. 악기를 연주하는 데에도 깊은 생각이 필요하고, 진심이 동반하지 않은 행위는 선이 아니다. 자로가 문하에 들어오고 자신에 대한 구설수를 들을 수 없게 되자 더이상 자신의 비평을 들을 수 없는 것을 애석해하는 공자의 인품도 대단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스승이라도 아주 적은 양이긴 하지만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는 어린 제자 자공의 지적은 안회에 대한 질투심에 기인한다고 해도 흘려들을 수 없다. 
 


공자는 세상과 등진 은둔형 성인이 아니었고, 자신의 사상이 세상에 쓰임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상은 공자를 우러렀지만 그의 정책을 시행하는 나라는 없었다. 하루 아침에 나라가 생기고 멸하는, 먹고 먹히는 시대에 인仁은 군주에게 도박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위대한 사상을 두고 제자 자공과 재여는 선천적 비범함이냐 후천적 노력이냐를 두고 왈가왈부한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을 터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사람, 자로. 그래서 늘 위태롭게만 보였던 그의 죽음 앞에 스승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능]은 기병을 주력군으로 한 흉노를 상대로 보병 5천명을 이끌고 북쪽 변방에서 몇 차례의 전투 후 참패하고 적군의 포로가 된 한나라 장수 이능이 겪는 정체성 혼란과 딜레마를 통해 예의와 충忠에 논하면서 동시에 사마천의 이야기도 곁들여진다.  
 


이능이 군대 안에 숨어든 여인들을 죽인 이유가 단순히 군사들의 사기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왜 누가 죽어야만 각성하는가. 그러나 의도와 달리 이능이 여인들을 죽인 것은 악수惡手로 돌아왔다. 하지만 누가 미래를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믿는 선택을 할 뿐이다.  
 


이능은 흉노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생활 방식을 납득하고 선우가 주장하는 예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한다. 고국의 주군에게 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흉노에 동화되어 가정을 이뤄 살아가는 이능과는 달리 같은 상황에서 포로로 잡혀왔으나 추운 북쪽으로 유배보내진 후 누구하나 자신의 자취를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정한 길을 가는 소무가 있다. 누더기를 걸치고 아무런 말 없이 우교왕이 된 옛 벗을 바라보는 소무의 눈빛에 초라해짐을 느끼는 이능의 심정은 혼자만의 자격지심일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능과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앞에 두고도 결코 자신에게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는 소무. 그리고 조국에 대한 충성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무제의 죽음을 듣고 통곡하는 소무를 보면서 자신에 대한 회의에 쫓기는 이능을, 후세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그 회의에 대한 답은 아마도 이능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돌아오라는 권유를 받고도 갈 수 없는 이능이 19년만에 고국으로 돌아가는 소무를 보면서 어느 곳에서도 온전하지 못한 정체성에 괴로워하는 그의 회한이 안타깝다. 당시로서는 충의 정신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능 역시 가문에 속한 한 일원, 명장의 손자로서 존재했을 뿐 자신 스스로 구축한 자아성의 결핍을 말하고자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해서 한무제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에 귀를 닫고 제 목숨 연명하기에 바쁜 간신들이 내뱉는,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사리분별 없이 총명하지 못한 무제를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겠으나 주종관계의 시대에 한 나라의 수장의 역량은 절대적이다. 장부라는 이유만으로 이능을 존중해준 흉노의 선우와 달리 결국 이능의 가족까지 모두 사형시킨 무제는 대조를 이룬다. 유능한 장수를 적으로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무제는 끝까지 깨닫지 못했다.





신영복 선생은 이 책의 '추천의 글'에서 뿐만 아니라 당신의 저서에서도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가 인간 관계의 실상이며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말씀대로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작품은 인간 이해에 깊이 있는 시각을 제공하고 있으며, 보여지는 여백을 채우는 것은 독자의 공간이기에 선우가 제신한 예의에 대한 질문,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자아와 사유를 읽는 우리가 채워야 할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관계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야함을 짚어준다. 

 

개인적으로 논어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 또한 논어를 제대로 이해할 때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또 읽어야한다는 것이지...). 읽고 싶었던 책을 즐겁고 길게 읽었다.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이철수 화백의 담백하고 정갈한 수묵화가 쉼의 시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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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앙리 마티스



"내가 꿈꾸는 것은 사람을 괴롭히고 기분을 저하시키는 주제가 아닌 균형과 순수와 청아함의 예술, 사업가든 작가든 모든 정신노동자들을 위한 진정작용, 심적 위안물, 육체적인 피로를 풀 수 있는 편안한 안락의자 같은 예술이다." 

('예술가의 노트' / 앙리 마티스) 




야수파의 제왕, 앙리 마티스. 

춤과 음악을 색채 형식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느낌에 충실하게 표현했다. 기쁨, 관능, 음악, 춤 등을 자유와 조화, 가능성 등을 단순함과 경쾌함으로 담아낸 그의 작품은 현대인의 피로와 고단함을 위로한다. 

 
​마티스의 <예술가의 노트>를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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