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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줄리아 보이드 지음, 이종인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9월
평점 :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191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유럽에서는 실질적으로 끝난)인 1944년까지 재3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진술과 기록을 토대로 당시 독일의 모습을 복원하듯 서술했다. 정치인과 학자를 비롯해 문화 예술 등 각계의 저명인사와 평범한 여행자들과 유학생까지 다양한 시선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찰과 견해들이 담겨있다. 
먼저 독일이 적극적으로 관광 산업에 나선 배경을 살펴보자면, 1차대전 당시 전투가 대체로 독일 국경 밖에서 치러진 덕분에 종전 이후에도 독일의 자연은 크게 훼손된 곳 없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몇 달 되지 않아 미국 관광객을 겨냥한 관광 홍보책을 발간하고 대대적으로 관광객 유치에 나선다. 이 홍보 책자는 전쟁 전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미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며 잠시 잊혀졌던 독일의 예술.문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쾌활한 프로파간다가 전쟁을 직접 겪어 가난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인 사람들에게는 기가 찰 노릇이었겠지만, 무엇도 본 적이 없는 미국 젊은이들에게는 오히려 전쟁 직후의 유럽 여행이라는 흥분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실상은 홍보 책자와 판이하게 달랐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지만.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직후 독일은 충격과 절망을 고스란히 껴안았다. 식량과 석탄이 부족해 곤궁했고, 모든 식민지들을 포기해야 했으며, 독일 내 생산적인 산업 지역들은 적어도 향후 19년간 외국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또한 감당할 수 없는 전쟁 배상 지불 및 병력을 현저하게 감축해야 했고, 단치히 항구 관할권을 폴란드로 이관해주는 바람에 동프로이센 주와 절연되었으며 무엇보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인정하는 "유죄 조항"에 서명함과 동시에 카이저와 약 1천 명의 저명인사는 협상국 사령부로 넘겨져 전범 재판을 받야야만 했다. 독일에게는 마지막 사항이 모욕적이었고, 자존심을 상실하게 했다. 독일인들은 배고픔보다 일방적으로 교류를 끊고 추방자 대우에 더 분노를 느꼈다. 독일의 경제 붕괴와 더불어 중산층이 몰락했고, 정치적으로도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이는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강력한 독재를 수긍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했을 터다.
1932년 연방 총선에서 나치당은 230석을 획득하여 제국의회 내에서 제1당이 되었다. 스물두 살 제프리 콕스가 느낀 당시 분위기는 6개월 이내에 독일은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거나 전력을 강화해 폴란드와 전쟁을 할 거라고 예상할만큼 위험했다. 그 정도로 독일인들, 특히 젊은이들의 절망감은 컸다. 1932년, 독일에서는 이미 유대인을 노골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33년 1월 10일, 새로운 독일 총리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내각은 대통령 집무실에 집결했고, 52일 뒤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식을 선언했다. 수권법으로 인해 히틀러는 사실상 절대 권력을 갖게 됐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죽음의 비명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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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국을 방문한 여행자들은 모두 끊임없는 프로파간다에 노출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불공정하다, 히틀러는 평화를 신봉한다, 독일은 국방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등 나치가 강력하게 내세우는 프로파간다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 독일에서는 양가적인 모습이 존재했다. 한쪽에서는 스포츠와 피크닉을 즐기며 여유롭고 한가로운 모습으로 일상을 보내는 반면, 한쪽에사는 파시즘, 볼셰비즘, 절망, 전쟁, 혁명 등 폭발 직전의 위기가 존재했다. 이 애매하고 모호한 경계가 방문객들로 하여금 나치의 프로파간다를 거부감없이 느끼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일인 내부에서도 대학생 및 친 나치 평론가들은 유대인 문제를 비롯해 나치의 폭력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언론이 사태를 과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많은 독일인들은 독일 정부의 반유대주의가 일시적 현상으로서 곧 지나갈 것이라고 봤다. 무엇보다 "유대인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맹렬하게 외쳐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은 독일의 유대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독일을 향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독일의 열망을 잘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독일인들의 활기는 공산주의에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편한대로 판단했으며 여행자들은 독일 국민의 전반적인 환대, 집중적인 토지 경작, 아름다운 자연, 독일인의 호율성과 질서 의식, 깨끗한 숙소, 거픔 가득한 맥주잔에 더 압도됐다. 히틀러가 집권한지 100일째 되는 날, 괴벨스는 보란듯이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과 베를린에서 책 화형식을 벌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베를린 분서 사건이다.
이때(1933년) 또다른 앵글로색슨족인 영국인과 미국인은 독일인 형제들과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를 상대로 싸울 준비를 해야했다(영국이 독일 나치당을 지켜보기만 한 근본적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가난한 독일인들이 부자 유대인들에게 갖는 상대적 박탈감이 유대인 박해를 방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히틀러의 독일 정체성은 모호했다. 이러한 점들이 복합적으로 엮여 독일은 공사주의에 맞서는 유럽의 버팀목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이 명분이 유대인 박해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나치당으로 사람들을 집결시킨 중요한 부분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 혹은 낮은 신분으로 모멸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나치당 입당은 벼락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패전 후 지지부진한 현실을 히틀러가 타개해 주기를 희망했고, 독일의 방문객들 역시 같은 차원의 바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폭압으로 얼룩진 잔혹한 독재를 묵인했던 것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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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측면에서는 교묘했지만, 교육과 학계에서의 프로파간다는 노골적이었다. 이러한 차별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교육자 및 인사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정치와 여행은 별개라고 여겼던 지성인들은 대부분 의도적으로 나치당이 자행하는 독재를 외면했다. 정작 독일에서는 분서를 비롯해 대학을 나치의 프로파간다의 용도로 전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녀를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독일은 여행지로서의 높은 수준의 아름다움과 청결함, 문화와 예술, 국가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온갖 장식물이 공존하고 있었다. 여하튼 이 시기에 독일을 거쳐간 여행객들의 나치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이었으나 1차 대전 같은 참호전은 막아야 한다는 데에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간혹 히틀러의 독재체제에 매혹되어 그릇된 판단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억압과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문제 의식을 깊고 구체적으로 파헤지지 못하고 독일을 떠나면서 모두 외면한 게 화를 키웠다.
1936년 말이 되자 유대인 난민, 신문 기사,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의 증언 등으로 누구든 나치의 악랄한 소행을 모른다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낙관론자(기득권층)들은 히틀러에 대한 믿음을 계속 유지했고, 합리적인 요구들이 충족되면 점차 괜찮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전히 정치를 무시한 많은 여행객들은 독일을 다녀갔고 독일인들의 획일적인 기이한 모습을 의식했지만 본국에 전하는 인상은 대부분 친독일적이었다. 그들에게는 굳이 유대인을 신경쓰며 휴가를 망칠 이유가 없었고, 히틀러 정권의 경멸과 여행은 별개로 놓았다.
나치의 프로파간다는 음흉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묘하고 친근하게, 드러내놓고 그들의 정치적 사상과 호전성을 과시했다. 1938년이 될 때까지도 평범한 관광객들이 꾸준히 독일로 휴가 여행을 가기로 선택 한 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곳에 가서 직접 나치 정권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그 체제를 크게 비난하지 않으면서 귀국했던 것이까? 무엇이 여행자들을 매료시켰을까? 생각해보면 지금도 관광객을 유치하는 여행지는 대체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관광 명소, 레스토랑, 잘 관리된 자연 환경 등 관광객을 유치할 목적을 갖고 있는 공간은 여행이라는 환상을 품게 해주지 않는가. 그리고 여행자는 말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이며 이방인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거주자가 아닌 다음에야 민간 여행객들이 굳이 외국의 정치에 왜 관심을 쏟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아무도 히틀러의 나치가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보고싶은대로 보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나치 당원이 아닌 사람들이 신속하게 나치 당원에 가입하며 나치 정권을 지지한 까닭은 히틀러가 독일이 동유럽에서의 생활권을 제공하고 빼앗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되돌려 받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 독재는 감수할만 하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독일인 비율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를 합병하면서 뭰헨에 나부끼는 깃발은 유니언잭과 트리콜로르, 스와스티카였다는 것, 그리고 남의 땅 가지고 생색내며 유럽의 평화를 운운한 체임벌린의 연설은 쓰디 쓰다. 겉으로는, 전쟁없이 베르사유 평화 조약을 극복했고 실직을 없앴고 과거의 적을 친구로 돌려놓은 히틀러에게, 독일 국민이 열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치의 프로파간다는 1938년 즈음부터 독일 내에서 확실하게 성공을 거둔것으로 보여진다. 열광적으로 동참한 사람들도 있지만 출세나 부의 기회로 삼거나 혹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지지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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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많은 외국 방문객들은 혼란한 감정을 느꼈다. 그들은 독일 곳곳에 침투되어 있는 프로파간다에 의해 진실과 왜곡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나치 초창기,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독일을 혁명적으로 재건해줄 희망으로 삼았고, 외국인 방문객들은 반유대주의나 독재 등의 문제들을 독일의 국내 문제로써 자기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여겨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나치를 경멸하는 방문객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독일 문학, 예술, 철학에 대한 존경심으로 수많은 부모가 자식들을 나치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그들은 나치의 만행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고, 정치와 문화와 학문을 별개로 보았다. 더불어 숙소 등 비용도 저렴해 비싼 비용을 들이지 않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데에 매력을 느꼈다. 무엇보다 방문객을 사로잡은 것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 평범한 독일인들의 청결함과 효율성, 독일 젊은이들의 활기찬 이상주의와 뚜렷한 목적 의식, 애국심이었다. 그 당시 독일은 양면성이 넘쳐났다. 국가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방법상의 유사함, 반유대주의자인 유대인, 친절함과 잔혹함, 가정의 안그함과 거리의 폭력, 귀에 거슬리는 노래와 베토벤을 향한 존경 등 한가지로 단정할 수 없는 모순들이 존재했다.
저자는 '보이지 않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고 말한다. 다수의 여행자들은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 히틀러의 독일에 찬사를 보냈다. 나치의 악랄한 프로파간다는 교묘하게 독일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방문객이 알아챌 수 없거나 혹은 그 폭력성을 아예 드러내놓아 외면하도록 만들었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1936년 이후부터는 나치의 민낯을 모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책을 통해 독자가 알게 된 것은 양차 대전 당시 독일의 모습을 넘어서 비극적인 시대로 이끌고 간 것에, 외면과 방관과 무관심이 한 몫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독일을 방문했던 여행자들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역시 외면과 방관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들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전하는 것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