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개자식에게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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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성폭력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미투운동, 성소수자, 외모지향주의, 현대인의 고독 등을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서술한다. 특히 그들의 소통 방식이 시종일관 이메일이라는 점, 그리고 팬데믹에 의한 거리두기와 봉쇄로 인해 서로 거의 대면하지 않는다는 설정은 개개인의 정서적.물리적 고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스카가 쓴 메일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린 말은, "가지가지한다"였다. 그는 한마디로 종합세트다. 직장 내 성추행, 알코올 및 마약 중독 등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데다가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들은 가관이다. 조에를 열렬히 좋아하고 그녀와 연인 관계가 되고 싶어 끈질기게 치근덕거린 건 사실이지만 무언가를 억지로 강요한 적은 없었다고 항변한다. 특히 그 기간은 고작(!) 3개월이었고, 조에가 불쾌해할만한 일이라면 가볍게(?!) 억지로 그녀의 입에 입맞춤한 정도가 전부라고 말하면서 그것도 술기운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오히려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백인 남성의 화신이 되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면서 덫에 걸린거라고 억울해 한다. 한마디로 자신은 여자나 후리는 난봉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오스카의 오랜 지인인 프랑수아즈는 모든 강간범이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고 대꾸한다. 즉 오스카가 아주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 대부분의 성범죄자들이 따르는 수순이자 핑계라는 것이다. 그가 유년 시절부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지만 거의 공감하기 어렵다. 



작가는 현실 속 성폭력 현장을 가상의 이십대 여성 조에를 통해 서술한다. 세상은 여성의 성적 욕구를 억압하며 족쇄를 채우고, 여성의 성욕을 부정하기 위해 성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한다. 작가는 소설에서 이 점에 대해 '투우장에 끌려온 황소나 다름 없다(p35)'고 쓰는데, 이 부분을 읽다보면 많은 독자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레베카의 말들 중에서 크게 동감하는 부분은 '교육'이다. 레베카는 근본적인 원인을 교육의 문제에 두고 있다. 당연시 여겨지는 모성애, 대등하지 못한 성적 관계, 여성의 정숙함, 희생자에게 씌어지는 가해자 프레임, 사회적 살인의 용인, 부지불식간의 남성우월주의, 강요된 행복 등 대부분 일상이나 학교에서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가스라이팅에 가깝게 학습되어진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모든 젠더에게. 페미니스트를 향한 비난을 쏟아내는 이들은 비단 남성뿐만이 아니다. 기성 세대 여성들은 조에가 겪은 일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고 다들 잘 넘겨왔으니 유난 떨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은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오스카가 자신의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상대가 레베카라는 사실은 의외다. 레베카 역시 전적으로 조에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입장이고, 오스카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따박따박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카는 레베카에게 지속적으로 이메일을 보낸다. 그 이유는 아마도 공감이 아닐까싶다. 레베카는 처음에는 굉장히 분노하지만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약 중독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오스카에게 공감의 메시지를 보내고, 진심어린 충고(와 경고도 함께)를 전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와 같은 '대화'가 아닐까. 사실을 인지하고, 제대로 알지 못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해법을 의논하고, 때때로 상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릴지라도 끊임없이 상호이해가 가능한 길을 모색하는 과정을 함께 얘기해야하는 것. 그래서 조에처럼 메아리만 울리는 일방적 외침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는 것. 자신 유약한 인간일뿐이라고 말하는 레베카가 오스카에게 건네는 진심어린 충고는 젠더와 계급을 넘어서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다.  


ㅡ 


21세기, 지금은 노출의 시대다. 그만큼 위험은 더 커진다. 더 자극적인 노출을 시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사생활 보호를 외치는 이 역설적이고 기괴한 사회 현상. 레베카와 오스카, 두 사람 다 중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한다. 폭력 중독, 권력 중독, 차별 중독, 분노 중독, 학벌 중독, 성공 중독, 외모 중독, 자극 중독, 혐오 중독.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수많은 중독에 노출되어 있고 의심없이 흡수하고 있는 중이다. 그야말로 이성을 잃어버린 중독의 시대. 



조에는 성범죄자의 이름이 공공연하게 알려질 때, 그를 법정에 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집단적으로 책임을 묻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방관하는 자, 침묵하는 자, 그들이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고 사과하고 개선될 수 있도록, 그래서 반성하지 않고 개선하지 않는 자들은 집단 내에서 몰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소설에서 정말 안타까운 점은, 오스카는 자신이 조에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끝까지 선명하게 이해하지 못한하는 것이다. 다만 레베카와의 대화를 통해 하나하나 복기하면서 서서히(너무 느리게) 자신이 개자식이었음을 깨달아가는데, 그마저도 반성하는 자신을 착한 남자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며 일상의 안정을 찾아간다. 정신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며 여전히 투쟁 중인 피해자 조에와 자신을 꽤 괜찮은 남자라고 자위하는 가해자 오스카. 이러한 대비에서 오는 씁쓸함은 소설이 아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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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먼 것이 좋아 보이는가 - 우리 본성의 빛과 그림자를 찾아서,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집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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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편의 글이 실린 에세이집이다. 
예술과 예술가, 자아, 삶의 가치, 패션을 통한 고상함과 상스러움의 간격, 성공의 조건, 보수와 진보의 권력 갈등 및 독재와 노예의 탄생, 사형제도의 찬반 여부 등 윌리엄 해즐릿의 솔직한 직설이 매력적이다.  




 
 
윌리엄 해즐릿이 자신과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우리가 선뜻 드러내기 꺼리는 부분들을 건드린다. 익명 뒤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한다든지, 왜 삶에 애착을 갖느냐는 본질적인 질문이라든지, 예술을 예술 그 자체보다는 다른 목적성을 두고 있는 부분이라든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어한다든지, 성공을 위해 비굴할 정도로 몸을 낮추는 행위 등 이렇듯 누구나 한 켠에 가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다. 
해즐릿은 삶의 가치가 영생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동조하겠지만 실상 우리는 더 오래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와 노력을 쏟아붓고 있는지 따져보면 "삶의 가치가 영생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수가 많지 않을 것이다. 해즐릿은 삶의 중요성과 삶에 애착하는 마음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행복이나 불행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어떤 원칙에 달려 있다고 판단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이유는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열정 때문이다. 열정은 행동으로 표출된다. 즉 삶의 애착은 '행동'에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쉽지 않았는데, 행동 자체(열정)가 삶의 이유가 되는 것이기에 삶을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어쩌면 이러한 점들 때문에 '먼 것이 더 좋아보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삶을 애착하는 마음은 우리가 삶을 얼마나 흥미로워하는가에 달려있다. 희망과 두려움에, 기쁨과 슬픔에 동요되는 다채로운 삶을 통해 스스로를 자각한다. 이로써 우리는 삶을 향한 열정을 담아간다.  



아무래도 18~19세기에 쓰여진 글이다보니 시대성을 감안해야하는 부분들이 있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패션에 관하여」 「사형에 관하여」는 괴리감이 느껴질 수 있는데 이 부분도 지금 우리 사회와 전혀 맥락이 없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또한 「아첨꾼과 독재자에 관하여」는 공교롭게도 현재 전全 지구적으로 해당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워낙 직설적이고, 에둘러 쓰는 에세이스트는 아니다보니 독자 입장에서는 그의 견해에 긍정하든 부정하든 시원시원하게 읽힌다.  


해즐릿은 자유에 대한 사랑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며, 권력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썼다. 그래서 오늘날 변절자들이 생겨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쳇말로 웃픈 인과관계다. 지금이라서 더욱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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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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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가을, 사크라 디 산미켈레 수도원에 40년 동안 머물렀던 여든두 살의 노인이 죽어가고 있다. 그가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닌 '그녀'이고,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숨을 다해 나직이 읊조리는 것은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살아야만 했던 '그녀'의 이름이다. 열세 살에 만난 첫사랑이 서로에 대한 영원한 사랑과 존중으로 빛나는 이야기다. 
 
 





도제, 마녀, 저주, 후작, 피에타상象, 수도원, 레오나르도 다빈치 날개, 미켈란젤로 등 단어나 소설의 분위기는 중세를 연상시키지만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00년대다. 미모 비탈리아니를 1인칭 화자로 하는 과거와 사크라 디 산미켈레 수도원의 수도원장 파드레 빈첸초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현재를 오가는 소설은 결국 시간의 간극을 좁혀가며 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석공을 아버지로 둔 가난한 가정에서 왜소증을 안고 태어난 천재 조각가 미모 비탈리오니, 지역의 유력한 명문 귀족 집안의 영재로 태어난 비올라 오르시니. 한 사람은 미천한 신분의 가난한 장애인으로서, 다른 한 사람은 '여성'으로서 세상과 맞서게 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을 둔 이 소설에는 이름을 바꾸고 살아야만 했던 유대인, 서커스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장애인, 관습이라는 벽에 주저앉아야했던 여성, 성실만으로는 삶의 무게를 지탱하기에 버거운 하급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그와는 다르게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거나 유력 가문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는 기회주의자들도 있다.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인물은 소설 전체를 이끌어가는 화자 미모보다는 비올라다. 귀족 집안에서 외동딸로, 그것도 영재로 태어났으나 성性은 그녀에게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한다. 비올라가 열여섯 살에 쓴 시는 무척 인상적이다. 「나는 우뚝 선 여자다...」로 시작하는 긴 시는 십대 소녀가 얼마나 자유를 갈구했는지,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어했는지, 그리고 서른일곱 살이 되도록 그 시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눌러놓은 욕구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오르시니 가문'이라는 이름은 비올라에게는 화려한 감옥이다. 그러나 그 감옥이 매 위기마다 비올라의 뒷배가 되어 준다는 점은 씁쓸한 아이러니다.    


이 소설의 통쾌하면서도 아픈 부분은 비올라의 '날개'다. 비록 날아오르지 못하고 추락할지라도, 때로는 지칠대로 지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숨을 고르며 날개를 펼친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 날개를 접으라고 하는 사람은, (비록 그를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라도) 비올라에게 입혀진 아름다운 드레스가 끔찍하다고 말했던, 비올라를 가장 사랑하고 이해하는 미모라는 점에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자신의 '정상성'에 대한 비올라의 말을 읽다보면 여성은 '정상적'일 수가 없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느님을 믿기는 믿냐는 미모의 물음에 비올라의 오빠 추기경 프란체스코의 말은 작가의 뼈있는 작심발언이라고 할만 하다. "나는 교회를 믿어, 그 말이 그 말이긴 하지만. 정권이나 독재자와는 반대로 교회는 사리지지 않아." 이는 작금의 현실을 그대로 대변한다.   


마지막 반전. 미모 비탈리아니의 「피에타」 마리아는 누구일까. 그게 누구든 미모 비탈리아니의 「피에타」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비올라를 향한, 그 시대의 여성들을 향한 헌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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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른 삶에서 배울 수 있다면
홍신자 외 지음 / 판미동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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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혀 다른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는 세 사람이 인도 오로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눈 대화를 김혜나 소설가 쓴 에세이다. 삶, 명상, 자연 등에 대한 그들 생각을 나눈 내용들이 담겨 있다. 참고로 한국학자 베르너 사세, 무용가 홍신자, 소설가 김혜나 그들이 함께한 때는 2013년이다. 


일단 두 분과 오로빌이라는 마을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홍신자 선생은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뉴욕으로가 무용 수업을 8년 간 받은 끝에 삼십 대 중반에 올린 작품 「제례」로 큰 명성을 얻었다. 이후 인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 7년의 결혼 생활 후 칠순에 베르너 사세와 재혼해 동반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독일인 베르너 사세 선생은 1966년 장인의 제안으로 기술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와 나주에서 4년을 보냈고, 그 인연으로 독일 최초 한국학 박사가 되었다. 그리고 세상 최대 공동체 마을, 오르빌. 인도의 동남부, 벵골만이 보이는 폰디체리시에서 북쪽으로 약 10킬리미터 쯤 지나면 나오는 이 작은 마을은 전 세계 남녀노소가 국적, 정치, 종교를 초월한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는 곳이다. 이야기는 김혜나 작가가 베르너 사세의 초대를 받고 인도로 출발하면서 시작한다.  






 


 
김혜나 작가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다르고, 그 다름과 차이가 부끄러워 그것을 숨기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는라 삶이 힘들고 버거웠다고 말했다. 이러한 힘듦이 그만의 일일까. 이 말이 무척 공감되는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사는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는 불안 때문일 것이다. 다들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 먼저 몇 자 적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오로빌 그 자체보다 삶을 관조하는 두 선생의 말씀이다.
우선 명상. 명상의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그 시간이 길어야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공간에서 10분 내외면 충분하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의 몸에 있는 에너지를 느끼며 집중하면 된다. '함께한다'는 것 즉 'together'의 정확한 의미의 이해, '비움'에도 철저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고, 미래의 일을 혼자 상상하면서 두려움을 만들어 내지 말라고 말씀한다. 또한 불교의 108배나 산에 오르는 길에 사람들이 하나씩 올리는 작은 돌탑, 사유를 동반한 한 걸음 한 걸음 등 기도하는 마음을 조금씩 올려가는 게 곧 요가가 아니겠냐며 미리 한 가지 계획만 세워 두고 그것을 따라가며 살고 싶지 않았다는 사세 선생의 말씀도 와닿는다. 그리고 정말 기억해야할 것은 외형적인 것들을 개의치 않고 그냥 사람으로 살아가고, 타인을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사람으로 인정하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오로빌은 운영 방식, 수입과 지출 구조, 자아실현과 수련의 도구가 되는 노동 등 그야말로 대다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공동체다. 사실 완독 후 오르빌을 방문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나의 삶, 그리고 내가 사는 이곳에서 '내 방식의 오로빌'을 어떻게 구현해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오로빌식 삶'에서 저마다 지향하는 바를 자신의 삶의 공간으로 들여온다면 우리의 벽은 조금씩 낮아질 수 있으려나... .  김혜나 소설가는 오로빌을 떠나면서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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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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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열한 편이 실려있다.
'어머니'라는 존재들에게 바치는 헌사, 독서에 대한 사유, 현재의 삶을 살라는 조언, 끝없이 폐기물(다의적으로)을 양산해 내는 산업화된 세계와 돈을 섬기는 세태에 대한 경계, 무용無用하지만 소중한 대상을 향한 애상愛想, 사랑을 대하는 태도와 질투, 그리고 돌이켜보면 마치 찰나와 같았던 삶에 대한 단상. 





 
 


여성이 결혼을 하는 것은 신이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보뱅. 여성이 결혼을 함으로써 포기하고 잃게 되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향한 갈망에 대해 말한다. 자식이 생기고 남편은 멀어진다. 더는 자신의 삶도, 누구의 삶도 아닌 삶을 살아가는 수수께끼 같은 여성의 삶. 「빈 자리」를 읽으면서 은섬 씨를 비롯해 내가 아는(직.간접적 모두) 여성들의 삶을 떠올려본다. 더불어 이 책을 읽기 직전 읽은 조앤 디디온의 『상실』 속 모성, 사이사이 보고 있는 최근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등장하는 어머니들, 과거부터 지금까지 현실 속 어머니들의 삶을 떠올려보면 그들이 이 사회의 한 축을 지탱한다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보뱅이 말하는 독서는 짙푸른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와 같다. 책을 읽음으로써 먼 세상, 더 깊은 곳으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 독서는 강요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스스로 읽고 오직 본인만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우고 발견한다. 글을 쓰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든, 일기장에 쓰는 게 전부인 나같은 사람이든.  


보뱅이 말하는 삶. 그는 어떤 것으로도 유년의 삶에 한계를 지우면 안되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지나간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에 지나치게 애면글면하지 말고 현존하는 지금의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무용無用하지만 소중한 것이야말로 오직 '나'만의 것이고, 그것이 곧 '나' 자신이 된다. 그러니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고 소중히 여기시라. 



인간은 일상에서 크고 작은 상실의 경험을 반복하고 있고, 누구나 결핍된 존재이며, 소멸하는 것으로부터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이 진실'이라고 쓴 보뱅의 글은, 아마도 책이나 교육을 통해서 배운 진리는 더 이상 회자되지 않으며 그 가치조차 자취를 잃어가는 세상에 대한 일침이 아닐런지.   


책의 마지막에 실린 「작가」는 3인칭 시점에서 서술하며 글 속에 등장하는 '작가'를 '당신'이라고 지칭한다. 읽다보니 '당신'은 보뱅 자신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그는 말함으로써 자신의 부재를 밝힌다. / p121').  


어지간한 자기계발서나 잠언집보다 더 와닿는다. 이토록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뼈때리는 말씀을 하시다니... . 그의 다정한 혜안이 더 와닿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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