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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포 투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6월
평점 :
여섯 편의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소개글에는 중편이라고 쓰여 있으나 분량상 장편에 가깝다) 한 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일단 단편소설들은 모두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장편 『헐리우드의 이브』는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삼는다. 굳이 소소한 재미를 하나 꼽자면 후반부에 배치된 장편소설의 중심인물인 이브가 뉴욕 맨해튼에서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는 점이다.

단편을 먼저 살펴보자면, 각각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딘가 어리숙하거나 순진한 구석이 있고, 허세만 가득할 뿐 그다지 영리하지 못하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사회 하층민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그린 「줄서기」, 소설가를 꿈꾸다 서명 위조범이 되어버린 청년의 이야기를 쓴 「티모시 투쳇의 발라드」 등 실린 소설들은 비관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유머러스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정서를 담아 서술하고 있다.
「티모시 투쳇의 발라드」의 티모시를 보면 애초에 왜 소설가가 되고 싶어했는지 의문이 든다. 내면을 성찰하는 인물도 아니고, 포크노, 헤밍웨이, 도스토옙스키를 우상처럼 섬기지만 그들의 책을 공들여 읽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삶에 그럴듯한 서사가 없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핑계만 댈 뿐이다. 엉뚱한 것 같지만 실은 티모시라는 캐릭터는 현재 청년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를 일정 부분 투영하고 있음이 잘 보여진다.
「아스타 루에고」에서 가족을 위해 기꺼이 물불 가리지 않는 이를 이해하는 마음, 생면부지에 가까운, 다시 볼 일이 없는 남자를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애쓰는 남자의 배려. 누군가는 지나치게 무례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심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어리석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마냥 답답해하거나 그저 웃어넘기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현실의 우리에게도 살면서 몇 번쯤은 예고 없는 불행이 닥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을 알아야할 권리도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 진실에 대해 거부할 권리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상대를 위한다는 명분은 결국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말을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미행을 하지말라는 페기의 말을 어기고 기어이 미행을 한 것은 넬의 호기심에 불과하다. 그리고 차라리 불륜보다는 예상치 못한 취미 생활이 더 낫다는 판단은 넬의 생각일 뿐이고, 페기가 남편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는 지점도 넬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누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켜야할 선이 있다는 것일테고.
( 나는 살아남으리라」)
죄책감의 근간은 무엇일까. 타인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고, 누군가로부터 찍혀지는 낙인 때문일지도 모른다(후자의 경우 진정한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주인공 토미가 카네기홀에서의 공연 관람이 자신의 계급을 드러내기 위한 허영이었다면, 정작 카네기홀에서 음악에 대한 새로운 기쁨을 느낀 사람은 클래식에 별 관심이 없었던 그의 아내 메리다. 음악을 느끼고 감정을 공유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수한 기쁨. 어쩌면 토미는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가 진짜로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아마 어려울 듯싶다.
( 밀조업자」)
노년에 접어든다면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낸 잔꾀가 의도치 않게 선의의 결과를 가져왔다. 원하던 돈을 얻지는 못했지만 외로운 그에게 가까운 가족이 생겼다는 점에서 더 가치있는 대가였으리라 생각한다.
( 디도메니코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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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헐리우드의 이브』는 작가의 전작인 『우아한 연인』의 등장인물인 이브가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부분에서 뚝 떨어져나왔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이브 한 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라고해도 무방할 것이고, 3인칭으로 서술하지만 이브는 주인공인 동시에 그들의 서사를 이끌어내고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서술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찰리, 프렌티스, 올리비아 등 그들이 이브와 만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는 과정이 이 소설의 묘미다. 이 소설 역시 이브의 캐릭터가 조금 과장되게 그려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덕분에 읽는 내내 통쾌한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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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재미'다. 600쪽에 육박하는 두께감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한국어로 번역한 에이모 토울스의 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모스크바의 신사』 이후로 가장 흡족한 작품들이다. 특히 단편들에서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이 연상되는데, 시대적 배경 때문일 수도 있고, 세련된 문체 때문일 수도 있겠다. 에이모 토울스의 책들 중 추천할 책을 물어온다면 『모스크바의 신사』와 이 책을 추천하겠다.
※ 도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