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의 사랑 거장의 클래식 6
딩옌 지음, 오지영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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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을 포함해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작가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중국 소수민족 둥샹족 출신으로 각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무슬림이다. 그래서 중국소설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특히 티베트 고원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에서의 묘사는 무척 아름답다.  
 






사랑이라고 믿었으나 악연으로 얽힌 속세의 고리를 끊고 티베트 사원으로 향하는 샤오줘의 자유와 여유. (『속세의 괴로움』) 


서로 사랑하지만 그들의 사랑을 실현할 길이 없는 마전과 융춰의 시선. (『설산의 사랑』)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생존을 위해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뇌하는 퉈쥔의 고뇌는 우리의 모습과 다름하지 않다.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며 한편으로는 약자를 향한 따뜻한 온기와 배려를 잃지 않는 삶의 태도. (『아프리카봉선화』) 


우리는 정답도 없고 뚜렷한 해결책도 없는 삶을, 그럼에도 사랑하고 희망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인간이 대단한 존재일지도. 정말 UFO를 보게 되면 더 이상 기다릴 게 없어지는 것이 두렵다는 한페이의 말처럼 어쩌면 희망이란 단어는 완성형이 아닐 때 그 가치를 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UFO가 온다』)  


종교, 관습, 세대 등 낯선 곳에서 느끼는 이질감, 군중 속 이방인으로서 처한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무용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공허함. 끝없는 경쟁을 하고 때로는 상대에게 상처를 입혀가며 분투하는 누군가의 모습에서 삶의 충실함을 발견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그러한 삶에 뛰어들 용기는 없다. 외로움과 지루함에 질식해 죽든,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풍파를 헤쳐나가든, 결국 본인이 선택해야 한다. 상대를 잘 알지 못하지만 서로의 공허를 공유하고 경청한, 짧은 시간이 준 따뜻한 삶의 한 자락. (『잿물』) 


혈연과 관습을 뛰어넘는 가족애와 인간애. 우리가 의지해야하는 존재는 법과 서류가 인정하는 명목상의 가족 관계가 아닌 교감과 정서적 이해가 가능한 유대 관계일 것이다. (『늦둥이』)


기부가 돈이 아닌 사랑이라고, 그래서 자카트(종교세)는 하늘에 내는 세금이라고 말하는 아버지. 상대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할 줄 아는 지혜와 온정, 그리고 진정한 마음을 나누는 행위. (『자카트』) 


ㅡ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행복하기 위해 공부하고, 사랑하고, 취직하고, 창업을 하고, 많은 시간을 일에 할애한다. 한참 달리다보면 목적이 돈인지, 행복인지 아리송해지지만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는 결론에 이르기 일쑤다. 많은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에 살면서 돈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순 없다. 다만 자신의 피라미드 맨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대해, 살면서 사이사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소설들이었다. 


가보지 못한, 그래서 선뜻 그려지지 않는 고원의 도시에서 승려들과, 흰 색 모자와 히잡을 쓴 무슬림들이 어우러져 함께 걷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악의 없는 순수한 수행 사이에서 웃고 기도하고 교류하며 지내는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다울 테지.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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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의 광기 - 거주하는 삶의 연대기 1806~184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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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거주하는 삶의 연대기 1806-1843」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문학의 절정기에 이른 1800년 무렵부터 정신이 파괴됐다고 알려진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조명한다. 더불어 이 시기, 문화적 측면의 유럽사도 함께 들여다 볼 수 있다. 횔덜린의 삶은 반으로 나뉜다. 태어나고 1806년까지 36년, 목수 치머의 집에서 죽을 때까지 광인으로 보낸 36년. 전반기 삶에서, 시인은 평범하고 관습적인 세상 속에서 버텨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인생 후반기에는 이따금 찾아오는 사람은 만나지만 세상 밖으로 자신을 고립시켰다.  





 



1806년에서 1809년까지, 횔덜린이 어머니에 의해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한 경위와 입원 후 그의 상태와 처방 기록 및 재정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신병원에 고립된 채 극심한 고독과 우울감에 의해 파괴된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이 지인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횔덜린이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직후 자연 속 목수의 집에서 보낸 단조로운 일상과 출판 계획을 서술하고, 한편으로는 당시 서유럽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 및 괴테가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 및 일기 등을 담고 있어서 시대적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1810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는, 횔덜린 본인이 쓴 편지와 메모, 가족을 포함해 횔덜린의 지인들과 목수 치머의 집으로 시인을 찾아갔던 사람들이 쓴 편지 및 일기, 그리고 바이블링거를 비롯해 그를 방문했던 몇몇 사람들의 증언 들이 실려 있다. 주로 그의 병증과 건강 상태, 시적 정신에 대해 쓰고 있다. 


ㅡ 


아감벤은 일단 횔덜린이 정말 미쳤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에서 출발한다.
프롤로그에서 저자 본인이 직접 언급하지만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기록의 이면에 대한 저자의 유추다. 그가 정말 광인이었는지, 혹은 광인으로 살기를 작정한 것인지를 따라가는데, 저자는 다른 각도와 관점에서 기록들을 탐구한다. 그는 여러 사료와 그 사료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통해 겉으로 보여지는 횔덜린의 기이한 모습은 광기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취한 태도에 무게를 둔다. 왜냐하면 횔덜린의 외적인 모습과 말 표현 사이의 불일치가 모든 증언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을 둘러싼 광기의 의혹을 의도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을 짐작한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궁금증은, 아감벤이 횔덜린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러한 궁금증은 에필로그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철학자 아감벤은 횔덜린의 시에서 드러나는 칸트적 관점과 확장된 실러의 사유, 아리스토텔리스 철학을 통해 시인이 사유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거주하는 삶'을 도달하려 했음을 짚는다. 그는 시인이 말하는 '거주하는 삶'이란 습관과 관습에 따라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썼다. '거주하는 삶' 혹은 '습관적인 삶'은 자기 자신과 세계 전체와의 관계 안에서 고유한 방식의 연속성과 응집성을 지닌 삶일 것이며,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점은 바로 '삶의 연속성이 갖는 특별한 방식'이라는 것. 즉 아감벤이 횔덜린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삶은 모호한 경계에 자리잡고 있고 우리는 성공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대체로 실패에 가깝기에 삶을 실패와 성공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의 틀에 가둬놓을 것이 아니라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본질적인 성취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횔덜린이 본인의 삶 자체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1809년까지의 서술에서 괴테의 연대기를 함께 서술하는데, 성공가도를 달리는 괴테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밀어내는 횔덜린을 대립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나싶었는데, 이 부분도 에필로그에서 충분히 서술하고 있다.  


아감벤은 시적으로 거주하는 삶이란 우리가스스로 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지는 삶이라고 썼다. 아감벤도, 횔덜린도, 우리에게 묻는다.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번을 집중 반복해 읽으면서 내 삶에 대한 통찰의 시간이 저절로 주어졌다.  

 
완독 후 「프롤로그」를 다시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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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20주년 기념 개정판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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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약 서른여 명의 인물들을 다루는데, 그들이 '패배자'가 된 요인을, 그들 개인적 성향이나 환경,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들을 서술하며 하나하나 짚는다. 신화, 종교, 예술, 정치(혁명), 과학(기술), 문학 등 여러 분야의 인물들을 통해 본 패배와 실패. 경쟁자, 인민, 대중, 시대, 운명, 사랑 등에 패배한 사람도 있고, 겸손하지 못해 혹은 고집스럽거나 신념이 강해서 혹은 어리석음 때문에 스스로 제 발목을 잡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타깝게도 너무나 이른 나이에 절정을 맞고 젊은 나이에 요절함으로써 죽음에 패배한 이들도 있다. 그리고 반복되는 패배에도 굴하지 않는 자들과 죽은 뒤에야 비로소 인정받은 자들도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밀고 나가 승리를 원했지만 결국 자신의 꿈을 접거나 혹은 비극적으로 혹은 억울하게 무릎을 꿇어야했던 이들. 물론 책에서 언급하는 인물들의 패배는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있고, 그 원인도 저마다 다르다.  


20년만에 출간한 개정판을 읽으면서 지금, 2025년이기에 새삼 눈여겨 읽게 된 세 사람이 있다. 고르바초프와 앨 고어(보다는 조지 부시)와 크누트 함순. 고르바초프가 제국의 붕괴를 촉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 주민들을 포함해서 전 세계인들의 끔찍한 유혈 사태를 피할 수 있었던 당시와는 다른 현재 러시아 지도자.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현재 미국 대통령을 통해 본,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에 던지는 민주주의의 공정성에 대한 가치와 세계정신, 그리고 그에 대한 이해. 또한 종전 이후 히틀러와 나치를 예찬했던 스스로에 대해 말을 교묘하게 왜곡하며 자기합리화로 변명하는 함순과 현재 한국의 보수(라고 해야하나?) 세력들.  




 



승자와 패배자의 서사는 대단한 업적을 이룬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지구는 좌절의 별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종種'으로서 인간은 무수한 진화를 거친 승자이지만, 개인으로서 인간은 대체로 실패와 좌절에 가깝다. 승자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 인구는 점점 늘어나고, 학력이 높아지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도 높아지며, 이는 인간을 무한경쟁 시장으로 이끈다.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는 여전히 존재하건만 사회가, 정치가 입만 열만 나오는 말은 기회균등이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실패를 반복하는 데에 있어 이 책임이 마치 온전히 개인의 능력 부족이라는 듯 말하며 열등감, 자책감, 자괴감을 부추긴다. 그런가하면 본인도 알지 못하는 재능을 사장당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주변 환경이나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알아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저자가 말하는 좋은 패배자란 느긋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패배하고 느긋하기란 쉽지 않다. 누구나 돈 키호테가 되기도 어렵고. 이 책의 인물들 전부가 실패를 현명하게 극복한 건 아니다. 그들의 삶을 따라가면서 패배 이후의 삶은 결국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지나온 이들의 삶을 읽는 것이 때로는 어떤 지침서나 철학서보다 와닿는다. 그럼에도 때로는 소설보다 더 비극적인 현실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다. 


오랜만에 읽은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가는 세상 이야기, 즐거웠다. 




※ 도서지원_위대한 패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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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포 투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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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편의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소개글에는 중편이라고 쓰여 있으나 분량상 장편에 가깝다) 한 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일단 단편소설들은 모두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장편 『헐리우드의 이브』는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삼는다. 굳이 소소한 재미를 하나 꼽자면 후반부에 배치된 장편소설의 중심인물인 이브가 뉴욕 맨해튼에서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는 점이다. 
 






단편을 먼저 살펴보자면, 각각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딘가 어리숙하거나 순진한 구석이 있고, 허세만 가득할 뿐 그다지 영리하지 못하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사회 하층민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그린 「줄서기」, 소설가를 꿈꾸다 서명 위조범이 되어버린 청년의 이야기를 쓴  「티모시 투쳇의 발라드」 등 실린 소설들은 비관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유머러스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정서를 담아 서술하고 있다. 


 「티모시 투쳇의 발라드」의 티모시를 보면 애초에 왜 소설가가 되고 싶어했는지 의문이 든다. 내면을 성찰하는 인물도 아니고, 포크노, 헤밍웨이, 도스토옙스키를 우상처럼 섬기지만 그들의 책을 공들여 읽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자신의 삶에 그럴듯한 서사가 없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 못한다는 핑계만 댈 뿐이다. 엉뚱한 것 같지만 실은 티모시라는 캐릭터는 현재 청년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를 일정 부분 투영하고 있음이 잘 보여진다.


 「아스타 루에고」에서 가족을 위해 기꺼이 물불 가리지 않는 이를 이해하는 마음, 생면부지에 가까운, 다시 볼 일이 없는 남자를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애쓰는 남자의 배려. 누군가는 지나치게 무례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심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어리석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마냥 답답해하거나 그저 웃어넘기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현실의 우리에게도 살면서 몇 번쯤은 예고 없는 불행이 닥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을 알아야할 권리도 있지만, 알고 싶지 않은 진실에 대해 거부할 권리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상대를 위한다는 명분은 결국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말을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미행을 하지말라는 페기의 말을 어기고 기어이 미행을 한 것은 넬의 호기심에 불과하다. 그리고 차라리 불륜보다는 예상치 못한 취미 생활이 더 낫다는 판단은 넬의 생각일 뿐이고, 페기가 남편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는 지점도 넬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누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켜야할 선이 있다는 것일테고. 

 ( 나는 살아남으리라」)


죄책감의 근간은 무엇일까. 타인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고, 누군가로부터 찍혀지는 낙인 때문일지도 모른다(후자의 경우 진정한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주인공 토미가 카네기홀에서의 공연 관람이 자신의 계급을 드러내기 위한 허영이었다면, 정작 카네기홀에서 음악에 대한 새로운 기쁨을 느낀 사람은 클래식에 별 관심이 없었던 그의 아내 메리다. 음악을 느끼고 감정을 공유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수한 기쁨. 어쩌면 토미는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가 진짜로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아마 어려울 듯싶다. 
( 밀조업자」)


노년에 접어든다면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낸 잔꾀가 의도치 않게 선의의 결과를 가져왔다. 원하던 돈을 얻지는 못했지만 외로운 그에게 가까운 가족이 생겼다는 점에서 더 가치있는 대가였으리라 생각한다. 
( 디도메니코 조각」) 


ㅡ 


장편  『헐리우드의 이브』는 작가의 전작인  『우아한 연인』의 등장인물인 이브가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부분에서 뚝 떨어져나왔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이브 한 명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라고해도 무방할 것이고, 3인칭으로 서술하지만 이브는 주인공인 동시에 그들의 서사를 이끌어내고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서술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찰리, 프렌티스, 올리비아 등 그들이 이브와 만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는 과정이 이 소설의 묘미다. 이 소설 역시 이브의 캐릭터가 조금 과장되게 그려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덕분에 읽는 내내 통쾌한 맛이 있다.  


ㅡ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재미'다. 600쪽에 육박하는 두께감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한국어로 번역한 에이모 토울스의 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모스크바의 신사』 이후로 가장 흡족한 작품들이다. 특히 단편들에서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이 연상되는데, 시대적 배경 때문일 수도 있고, 세련된 문체 때문일 수도 있겠다. 에이모 토울스의 책들 중 추천할 책을 물어온다면 『모스크바의 신사』와 이 책을 추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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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세고 촛불 불기 바통 8
김화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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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날이 언제인가?
저마다 가장 가슴에 박힌 기념일 하나쯤은 있을 터다. 그날이 기쁜 날일 수도 있고, 고통이나 애도의 날일 수도 있고. 여덟 개의 이야기가 실린 소설집은 저마다 특별한 '그날'을 담고 있다.  







(축제의 친구들)
생각하는 게 귀찮고, 사는 건 지루하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모든 게 뚜렷하지 않은 청춘의 시절. 누군가 좋아해주는, 익숙하고 습관적이지 않은 삶을 살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과학기술로 안드로이드 보디를 갖게 된 인간은 노화와 질병에서 해방됐다. 단, 안드로이드 보디를 구매할 수 없는 사람은 죽는다. 죽는 사람은 두 부류다. 돈이 없거나 신념이 있거나. 시중에 나와 있는 수많은 죽음에 관한 책들과 그에 대한 철학적 견해. 나는 문득 궁금하다. 우리는 왜 이토록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걸까. 죽음이 두려워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는 김윤호의 모순. 그는 구차한 삶과 아무도 모르는 죽음 중 무엇을 선택할까. 


(월드 발레 데이)
형편이 넉넉넉하지 않은 집에서 무용에 재능 있는 아이는 엄마의 등골을 빼먹으며 성장했다. 아이가 더 높이 날아갈수록 엄마는 점점 가난해졌다. 이를 모르지 않는 아이는 아주 작은 틈이라도 생기면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그만두라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 긴장을 놓지 않았고 곤두서 있다. 자신을 잃어가면서,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성공을 향해 달린 삶. 정상에 섰음에도 밟을 땅이 없는 삶. 이게 소설 속 '나'가 죽은 이유고, 실재의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위드걸스)
실패로 인해 적당히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불행한 사람이 될까봐 원인을 찾아 문제해결을 하기보다는 견디는 것을 택하는 것. 견디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으려나. 구원에 기대지 않고 어제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살아남겠다는 인혜의 결의가 장하면서도 안타깝다. 유리 천장과 보이지 않는 경계에 또다시 좌절하는 일이 없기를, 인혜도, 선주도, 그 누구도. 


(껍질?)
분명 바빠서 무언가를 많이 했고, 하루가 끝나면 무척 고단한데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 기분은 어떘지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거의 비슷한 대답들. 사람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그날의 기분도 다 달랐을텐데... . 참 이상한 일이다. 언제부턴가 일기에 쓰는 나의 감정은 거기서 거기.  


(바다의 기분)
폐업한 가게 업주가 「맛없는 음식을 팔아서 죄송합니다, 실력을 키워서 되돌아오겠습니다」라고 쓴 폐업 안내 종이 위에 '저는 맛있게 먹었어요'라고 쓰는 마음씀이 좋다. "그냥 그런갑다"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좋네, 좋아. 역시, 나는 윤성희 작가의 글이 참 좋다. 


(비트와 모모)
박완서 선생의 「대범한 밥상」이 생각났다. 모모가 돌아와 주기를, 그래서 식탁에 마주앉아 비트와 식사하기를. 


(0302♡)
사랑받고 싶다면, 사랑받는 방법을 찾는다면, 먼저 사랑을 줍시다. 



각각의 소설 속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마음이 간다. 
로롯의 생체 인식이 아니면 아무도 생존을 알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고독과 단절,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는 출세지향주의 세태, 자존감은 고사하고 움츠러들대로 움츠러들어 자신에게 처해진 불의와 차별조차 당연하게 여기는 패배주의, 사랑과 관심에 굶주린 우리들.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슬픔이다. 소설 밖에서 그들을 따라가자니 그냥 슬펐다. 그러다 낙관적인 삼촌의 마음이 되고 싶었고, 그 마음으로 위로해주고 싶었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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