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라이즌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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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60대의 저자가 남극을 비롯한 70여개 나라를 여행하고 탐사해온 자신의 삶을 돌아본 자전적 여행기이자 답사기이며 생애 전반의 회고록 역할을 하는, 생전 마지막으로 집필한 논픽션이다. 


북아메리카, 북태평양 연안, 캐나다, 적도 태평양 콜론 제도, 동부 적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남극해, 남태평양 해안, 남극대륙, 남미 및 마젤란 해안 외에도 세계 곳곳을 탐방하는데 고고학, 역사, 문화, 인류학, 자연과학, 생물학,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간이 건설한 문화적 환경과 그것이 미친 영향 등 여러 관점으로 접근한다. 










저자가 현장 노트들을 다시 읽으며 이 책을 쓰는 데에 있어서 의도했던 것은1948년부터 1994년까지의 긴 여정을 다시 짚어 걸어보는 것이었다. 그가 긴 시간을 되짚으면서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떠나고만 싶었던 유년기의 동경과 성찰의 시간 사이에서 그는 인간이 초래한 위험과 인간의 승리 및 실패를 통해 배운 것들, 그리고 자신의 실패들과 오류 가능성에 대해 곱씹었다. 그는 이 책을 계획하면서 인류의 문화적 생물학적 역사에서 삶의 유의미한 것이 무엇인지를 직조해내는 것이라고 썼다.  


주로 저자의 4,50대에 여행한 곳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해 그는 지금껏 이어져 오는 인류와 자연의 역사적 의의를 짚으며, 끊이지 않는 생태계 파괴, 무분별한 난개발과 오염, 중세 식민지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양 무역 산업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전쟁의 심각성을 우려한다. 저자가 가진 의문은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며, 인간에게 무관심한 자연의 세계가 인간 세상을 덮쳐오는 가운데 우리가 문화와 경계선을 넘어 조화를 이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문화와 소수문화의 붕괴, 그 한편에는 이를 막으려는 노력. 미국인과 유럽인의 우월감과 자만이 가져온 기만적 폭력과 도덕적 망각. 낙원을 동경하면서도 자연을 훼손하는 모순. 각자 개인이 속한 문화가 아닌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들을 만났을 때 각기 다른 문화의 특유점과 품고 있는 의미와 지혜를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간의 다양성을 두려워하고 자기가 속한 문화와 풍속만이 옳다는 주장을 고수한다면 우리는 위험을 스스로 자초하는 일이라고 충고한다. 이방인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려 노력해야 한다는 저자의 이와같은 메시지는 비단 인류 안에서만이 아닌 다른 종들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연 그 자체가 예술임을 강조한다. 비록 방문자일뿐이지만 일상적 삶의 괴로움에 시달릴 때마다 자연의 색채와 광활함에 위로를 받고 자연 탐사를 통해 살아가는 데 힘과 용기를 얻는다는 저자와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탐방지에서 가져(주워)온 기념품들ㅡ녹색편암, 카르디타 껍데기들, 유칼립투스 열매, 현무암 돌멩이, 황동 탄피ㅡ은 풍부한 생명의 다양성, 태곳적 지구의 흔적, 인간 행동의 폭력성, 무용한 현대의 전쟁 등 우리에게 침묵으로써 이야기를 전한다. 


ㅡ 


우리는 늘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 특히 전 세계가 자본주의 체제에 있는 이상 어느 것 하나 독자적인 것 없이 맞물려 있다. 특히 생태 및 환경 보존과 경제적 이득이 필요한 계층 간 충돌의 갈등 해결은  특정 국가를 떠나 대다수 나라가 해당하는 난제 중에 난제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저자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러 사례와 배경을 서술함으로써 어느 분야 예외 없이 함께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함을 촉구한다. 


그의 탐험은 지식을 수집하고 경험을 쌓는 일, 그 이상이다. 과거의 이해와 미래에 대한 예측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지구 생태와 인류의 유구한 역사,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수한 경이를 통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되짚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책에는 인간 외 생명체에 대한 '마음'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쩌면 인류의 현실적인 문제 해결 이전에 지구별에서 공존해야 하는 존재에 대한 측은지심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을 비롯한 대자연을 목도한 저자가 떠올린 것을 몇 개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경이와 기쁨과 감사, 그리고 이들을 지켜나가기 위해 당면한 수많은 문제점들이다. 너무 뻔하고 당연한 감상일지 모르겠으나 이것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앞서 썼듯 이 책은 여행기이자 답사기이며 동시에 인류와 자연을 다룬, 더할나위 없는 인문교양서다.  2025년, 첫 번째 나의 올해의 책이 될 듯하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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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편지교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최혜수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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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에 출간한 소설이다. (내가 알기로는.)
작가는 다섯 명의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사랑과 일상에 대해 얘기한다. 통속적인 사랑부터 동성 간의 호기심,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동경, 우정, 사랑과 우정 사이의 단정할 수 없는 감정, 변심한 연인에 대한 배반감과 증오와 복수심, 비루한 일상에 대한 고백, 중년의 외로움과 성적 욕구, 청춘의 불안과 방황, 결혼에 대한 진지함, 가정을 이룬다는 것의 의미,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 등이 담겨 있다.  
 
 






45세 기혼 남성 야마 도비오는 20대 젊은 여성과의 육체적 관계를 갈망하는데 자신이 유부남임을 공공연하게 밝히는 것은 물론 접근하는 이유가 단순한 성적 욕구 때문임을 숨기지 않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야말로 능구렁이같은 양반이다. 
젊은이들의 인생 상담에 기꺼이 응하는 고리 마마코의 대담한 반전.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딱 어울리는 발랄하고 천진한 가라 미쓰코는 남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진지함과 신중함을 갖추었다.
미래지향적이며 성실한 삶을 살고 있는 청년 호노오 다케루는 매사 지나치다 싶을 만큼 논리적이고 진지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입장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판단하는 경향이 있고, 현실과 동떨어진 엉뚱한 생각을 하는 공상가 청년 마루 도라이치는 사춘기 소년같다(이름이 하필이면!).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쓴 편지의 내용이 때로는 어처구니가 없거나 우습고 가벼워 보일지라도 발신자의 마음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건 사실이다. 다른 편지들에서는 철딱서니 없어보였던 가라 미쓰코가 호노오 다케루의 청혼 편지에 대한 답장에 결혼과 자신의 삶에 대해 신중한 답장을 보낸다. 만약 편지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그토록 진지하고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뻔뻔함과 찌질함을 오가는 그들의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1990년대의 정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사이가 좋든 나쁘든, 그 대상이 누군든, 당시에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편지만한 것이 없었다(고딩 대딩 때 참 많이 썼더랬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은 글이 대신했고, 혹여 오해가 있지 않을까 단어를 고르고 고르며 썼던 편지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2025년, 21세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이라면 이런 편지글이 가당키나 하겠냐만... . 편지글은 고사하고 이메일조차 쓰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메시지도 조사와 모음을 다 떼어놓고 자음만으로 대화하는 세상(물론 한국의 경우다)에서 이런 구구절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건 이제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참 아쉬운 일이다.  


​어긋난 사랑의 작대기와 (독자가 읽기에) 유쾌하고 소소한 반전들.
미시마 유키오가 이런 감성의 소설을 썼다는 것도 의외고, 이 유쾌함 뒤에 오는 씁쓸함과 스산함이 있는 건, 또 미시마 유키오답기도 하고.  


그동안 작가의 소설이 무겁게 느껴져 부담스러웠던 독자라면 적어도 그에 대한 부분은 내려놓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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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기적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33
장 주네 지음, 박형섭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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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장 주네는 자신을 소설의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1946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장 주네의 서른한 살, 즉 그가 실제로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1942년)을 현재로 두고 서술한다. 과거 소년 시절에 지냈던 감화원에서부터 중앙 형무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추억하며 얘기하는데 십오 년 전과 현재를 형식에 구애없이 넘나드는, 마치 회고록같은 소설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에는 메트레 감화원과 아르카몬, 뷜캉, 디베르가 있다.  






화자 '나'가 상테 형무소에서 퐁트브로 형무소로 이감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그가 열다섯 살 나이에 메트레 감화원에 있을 때 퐁트브로 형무소는 소년 시절의 꿈을 키워주는 성역과 다름없었다. 그가 꾸는 최후의 꿈은 퐁트브로 형무소, 그곳에 닿아있었다.


소설 도입부, '나'는 죄수들을 이송 및 수감하는 과정을 마치 종교 의식처럼 묘사한다. 사형수 아르카몬을 숭배하며 간수를 하인으로, 감옥 곳곳에 켜진 불빛을 축제로 그린다. 또한 자신이 호송되어 온 쇠창살이 달린 객차를 장엄한 공간으로 받아들인다. 독자는 소설을 읽어갈수록 그가 이러한 심경에 이른 이유와 원인을 알아간다. 특히 9쪽부터 10쪽에 걸친 서술은 독자가 볼 때 앞으로 서술하게 될 '나'를 포함한 '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대목이다. 


ㅡ 


소설의 역설이 주는 묘미는 상당하다. 많은 형무소들이 과거 수도원이었다는 점은 물론이고, 범죄자라고 일컫는 이들을 표현하는 문구도 그렇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열망하는 동시에 아름다움이 갖는 허망함과 회의懷疑를 토로하는 것 또한 그렇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탐미소설이자 자아의 존재를 확인해나가는 소설이다. 작가가 예찬하는 아름다움과 그가 추구하는 존재에 대한 증명의 과정 역시 조금 남다르다. 


화자 장 주네가 숭배하는 삶은 정의와 도덕, 사회적 규범과는 거리가 멀다. 소설의 배경인 퐁트브로 형무소는 바깥 세상과 단절된 '내부' 공간이지만,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법과 규범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외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을 규정하는 잣대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차이가 있다. 일례로 화자를 비롯해 그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어린 시절부터 감화원에서 형무소에 이르기까지 고립된 남성 집단에서만 생활해왔다. 따라서 그들에게 성(性)을 인식하고, 성에 대한 직.간접 경험치는 동성뿐이다. 


제목의 '기적'. 왜 '기적'일까? 세상은 감화원생들이 변화를 통해 신의 기적을 증명하는 존재들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의지할 데 없었던 그들에게 감화원은 그들 세계의 전부였고, 다른 삶을 경험해 보지 못한 소년과 감화원 밖 사람들이 바람하는 기적에 대한 성격은 매우 달랐으며, 기적이 실현할 아름다움 역시 상이했다. 그리고 외부자(감화원 밖 사람들)들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들은 그들이 살아온 환경을 놓고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수치스럽고 천하고 죄스럽고 혐오스러운 과거일 수 있겠으나 화자는 이 경험을 글로 알림으로써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장벽을 뛰어넘어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유를 찾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다리는 것은 자기 파괴와 죽음뿐일테니.  

 
ㅡ 


위에서 언급했듯 작가는 역설적 서술을 통해 인류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부정과 비리, 왜곡된 정의, 그리고 집단 이기와 폭력에 대해 비판하고, 인류가 과거의 숱한 오류를 거쳐오면서 이룩한 가치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되짚어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읽는 내내 내가 느꼈던 주네의 정서는 '연민'이었다. 사랑했던 청년은 탈주 중에 총살을 당했고, 숭배하던 또 다른 이는 스스로 죽음에 이르기 위해 간수를 죽여 사형 당했다. 온갖 수치와 성폭행을 당하고, 혹은 도망치다 붙잡혀 징벌을 당할 때 '나'가 기댄 것은 시詩였다. 가장 낮은 자들을 향해 그가 보내는 존엄과 연민, 이것이 장 주네가 이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사실 내가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의 해설보다는 장 주네, 그가 하는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 
작가의 말을 직접 듣고 싶어진 소설은 수년만이다. 
가능하지 않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지만.




※ 도서지원

그들은 암흑같은 광명 혹은 눈부신 밤이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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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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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가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진열대에 쌓아 올린 공책 더미가 눈에 들어와 사게 된 공책 한 권. 애써 사온 공책이건만 집에서도 공책을 숨길 만한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제서야 자신만을 위한 서랍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발레리아는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책을 산 후 2주가 지나도록 한 글자도 못쓰고 있는 발레리아는 가족들에게 공책의 용도를 밝히기가 꺼려져 감추어 두고 있다.  






 
1950년 11월 26일자에 시작하는 일기는 발레리아가 일기장을 사게 된 사연부터 서술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독자가 궁금해 지는 것은 마흔세 살의 발레리아는 왜 굳이 공책의 용도를 밝히는 것을 꺼려하고, 특히 가족들에게 일기쓰기를 숨겨야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납득이 안 되는 이 부분이 일기장이 채워질수록 독자는 그녀에게 공감하게 된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날 하루의 일을 복기하게 된 발레리아는 가족 몰래 일기를 쓰는 것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고 급기야 일기장이 발각될까봐 두려움까지 느낀다. 얼핏 공책 한 권을 소유하고 일기를 쓰는데 죄책감을 느끼냐고 하겠지만, 이 일기장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고 자아를 대변한다. 또한 일기장은 발레리아가 유일하게 감정을 토해내는 창구다. 그녀가 공책을 산 직후 첫 자각은 자신의 이름 '발레리아'였다. 가정을 이룬 여성이 아내, 엄마, 딸이라는 정체성보다 자아를 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 죄책감을 느껴야하는 일인 것처럼 되어 버렸음을 꼬집고 있다고 읽혔다.  


전업주부의 고단한 노고를 인정함으로써 다른 가족 구성원은 자기들의 모든 부담을 내려놓는다. 그들은 가정 내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것을 택하기보다는 주부인 발레리아를 위로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을 권하는 것으로써 제 할 일을 다했다고 여긴다. 친구들 중 유일하게 직장인이고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경제적인 필요를 자족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자신을 위한 비용 지출에는 스스로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수치심을 느낀다. 



생애 전반에 걸쳐 중년이라는 시기와 그 시기의 여성과 남성, 그리고 사회적으로 또는 가정 내에서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평생지기는 옛말이 되어 삶의 방향이나 경제적 지위에 따라 혹은 공통점 크기에 따라 인간 관계는 재편성되고, 세월이 갈수록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직장에서는 살아남아 더 많은 성취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가족임에도 편의를 위해 선의를 가장해 서로에게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한다. 부모를 부양(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해야 하고, 독립하지 못한 자식을 보듬으며 세대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이해받기보다는 수용해주어야 하는 입장이다. 이렇다보니 서로의 이익이 맞물려 있지 않은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에는 당장 내 일상이 팍팍하고, 위로와 조언의 경계선을 가늠하기에는 따져야할 것들이 많아져 감정소모를 이유로 가장 손쉬운 외면을 선택한다. 그래서 청년 시절과는 자신의 모습에 수치심이 들거나 또는 자기확신이 없어지기도 한다. 



195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을 감안하고 읽었다. 그럼에도 발레리아가 일기장에 써내려간 많은 부분들에 이입하고 공감했다. 여차하면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힐 수도 있겠으나 읽다보니 (물론 여성의 시각에서 쓴 글이지만) 중년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찾아보니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첫 번역서인 듯하다. 쿠바계 이탈리아인인데, 엘레나 페란테가 영감을 받았다고 한 작가. 이탈리아어를 모르니 원서를 읽지는 못하고, 작가의 작품이 몇 권 더 출간하기를 기대한다. 



※ 가제본 도서 지원 

솔직히 말하면, 내게는 저녁에 침대에 눕는 순간 밀려오는 피로감이 평안의 원천이다. 어쩌면 휴식을 거부하는 나의 굳은 의지는 피곤이라는 행복의 원천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P35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하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 P49

인간은 언제나 과거에 한 말이나 한 일을 잊는 경향이 있다. 그 말을 지켜야 하는 끔찍한 의무감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다 오점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겠다고 약속했던 일과 실제로 한 일, 되고 싶었던 존재와 현실과 타협한 실제 모습과의 간극이 큰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날 저녁 일기장을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숨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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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려고 겨울을 견뎠나 봐 - 봄을 맞이한 자립준비청년 8명의 이야기
몽실 지음 / 호밀밭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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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시설에서 생활하다 보호 종료로 자립한 여덟 명의 청.장년 젊은이들이 자신에 대해 직접 쓴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보육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사례는 다양하다. 신생아 때 맡겨진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가정폭력에 의해서 분리 조치된다. 원인과 사연이야 저마다 다르지만, 가정 경제 붕괴 - 부모의 알코올 중독 및 가정 폭력 - 부모의 이혼(혹은 부모 한쪽의 가출) 같은, 이와 비슷한 수순을 밟는다. 이 과정에서 가장 가슴 아픈 지점은, 아이들은 가족이 흩어지고 혼자가 된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점이다. 또한  피해자로서 상처를 치유받을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도 무척 안타까웠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어른의 역할이 중요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유아동 시기의 돌봄은 정말 중요하다. 관심과 애정을 쏟아주는 이가 반드시 부모여야하는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그들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관심을 보이는 어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된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쓰였던 부분은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앞선 경험을 나누어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정은 본인이 하더라도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수 년에서 수십 년을 먼저 살아본 인생 선배의 조언을 듣고 충분히 고민할 기회가 그들에게는 거의 없다. 모든 것들을 맨몸으로 부딪치고 경험해야만 하니 그 충격은 훨씬 클 수밖에 없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필자가 있다. 고비 때마다 스스로에게 "그래서?"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필자.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거다. 주어진 상황이 달라지지 않음이 분명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임을 어린 나이에 터득하고, '혼자 자립'이 아닌 '더불아 하는 자립'의 가치를 깨달은 그는 보육 시설에 있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없지만 울타리가 되어 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일테다.  


녹록치 않은 여건에서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성장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음을 칭찬하고 앞으로의 삶을 응원한다. 그런데 단지 격려의 메시지를 받기 위해 필자들이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육 시설의 어린 아이들이 좀더 양질의 보호받기를 바라고, 보호 종료를 앞두고 본격적으로 홀로 세상에 나가야 할 청년들을 위한 자립 지원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람하기 때문일 것이다.  


몽실은 같은 시설에서 자란 자립준비청년이 모인 공동체다. 자립 멘토링 활등을 시작으로 보육 시설에서 퇴소한 후 자립한 청년들이 후배를 돕기 위해 카페를 만들었다. 모임원들이 각자 빚을 내어 돈을 모았고, 자금이 턱없이 부족해 인테리어 공사부터 기자재 구입까지 직접 뛰어 들었다. 하지만 계약 기간인 2년을 끝으로 재연장하지 않고 종료 예정이다. 카페를 열면서 각자 얻은 빚을 갚을 정도의 매출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페가 문을 닫게 되면서 그 빚은 각자가 알아서 갚아야 했다. 이러한 내용을 읽으면서 제도적으로 지원이 가능한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실린 글의 필자들은 건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상처들을 모두 극복했는지, 이 책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과거에 혹독한 터널을 지나왔음에도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스스로 깨우친 이들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낸 가치를 잊지 않는다면, 그들은 또다시 이겨내고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들의 건강한 일상을 기원한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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