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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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가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진열대에 쌓아 올린 공책 더미가 눈에 들어와 사게 된 공책 한 권. 애써 사온 공책이건만 집에서도 공책을 숨길 만한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제서야 자신만을 위한 서랍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발레리아는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책을 산 후 2주가 지나도록 한 글자도 못쓰고 있는 발레리아는 가족들에게 공책의 용도를 밝히기가 꺼려져 감추어 두고 있다.  






 
1950년 11월 26일자에 시작하는 일기는 발레리아가 일기장을 사게 된 사연부터 서술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독자가 궁금해 지는 것은 마흔세 살의 발레리아는 왜 굳이 공책의 용도를 밝히는 것을 꺼려하고, 특히 가족들에게 일기쓰기를 숨겨야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납득이 안 되는 이 부분이 일기장이 채워질수록 독자는 그녀에게 공감하게 된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날 하루의 일을 복기하게 된 발레리아는 가족 몰래 일기를 쓰는 것에 대해 죄책감에 시달리고 급기야 일기장이 발각될까봐 두려움까지 느낀다. 얼핏 공책 한 권을 소유하고 일기를 쓰는데 죄책감을 느끼냐고 하겠지만, 이 일기장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고 자아를 대변한다. 또한 일기장은 발레리아가 유일하게 감정을 토해내는 창구다. 그녀가 공책을 산 직후 첫 자각은 자신의 이름 '발레리아'였다. 가정을 이룬 여성이 아내, 엄마, 딸이라는 정체성보다 자아를 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 죄책감을 느껴야하는 일인 것처럼 되어 버렸음을 꼬집고 있다고 읽혔다.  


전업주부의 고단한 노고를 인정함으로써 다른 가족 구성원은 자기들의 모든 부담을 내려놓는다. 그들은 가정 내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것을 택하기보다는 주부인 발레리아를 위로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을 권하는 것으로써 제 할 일을 다했다고 여긴다. 친구들 중 유일하게 직장인이고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경제적인 필요를 자족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자신을 위한 비용 지출에는 스스로를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수치심을 느낀다. 



생애 전반에 걸쳐 중년이라는 시기와 그 시기의 여성과 남성, 그리고 사회적으로 또는 가정 내에서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평생지기는 옛말이 되어 삶의 방향이나 경제적 지위에 따라 혹은 공통점 크기에 따라 인간 관계는 재편성되고, 세월이 갈수록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직장에서는 살아남아 더 많은 성취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가족임에도 편의를 위해 선의를 가장해 서로에게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한다. 부모를 부양(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해야 하고, 독립하지 못한 자식을 보듬으며 세대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이해받기보다는 수용해주어야 하는 입장이다. 이렇다보니 서로의 이익이 맞물려 있지 않은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에는 당장 내 일상이 팍팍하고, 위로와 조언의 경계선을 가늠하기에는 따져야할 것들이 많아져 감정소모를 이유로 가장 손쉬운 외면을 선택한다. 그래서 청년 시절과는 자신의 모습에 수치심이 들거나 또는 자기확신이 없어지기도 한다. 



1950년대라는 시간적 배경을 감안하고 읽었다. 그럼에도 발레리아가 일기장에 써내려간 많은 부분들에 이입하고 공감했다. 여차하면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힐 수도 있겠으나 읽다보니 (물론 여성의 시각에서 쓴 글이지만) 중년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찾아보니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첫 번역서인 듯하다. 쿠바계 이탈리아인인데, 엘레나 페란테가 영감을 받았다고 한 작가. 이탈리아어를 모르니 원서를 읽지는 못하고, 작가의 작품이 몇 권 더 출간하기를 기대한다. 



※ 가제본 도서 지원 

솔직히 말하면, 내게는 저녁에 침대에 눕는 순간 밀려오는 피로감이 평안의 원천이다. 어쩌면 휴식을 거부하는 나의 굳은 의지는 피곤이라는 행복의 원천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P35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일기장의 존재가 느껴진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하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 P49

인간은 언제나 과거에 한 말이나 한 일을 잊는 경향이 있다. 그 말을 지켜야 하는 끔찍한 의무감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다 오점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겠다고 약속했던 일과 실제로 한 일, 되고 싶었던 존재와 현실과 타협한 실제 모습과의 간극이 큰 모순덩어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날 저녁 일기장을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숨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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