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주
실비 제르맹 지음, 류재화 옮김 / 1984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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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으로 나타나지 않고, 둘로도 나타나지 않는 그들은 각자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완강한 존재감을 갖고 있다.


우리의 꿈과 사상의 자양분을 먹고 조용히 잠들어 있는 자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어떤 반짝거리는 작은 깨달음의 부스러기들을 우리 안에 뿌려 놓고, 잠들었던 자들이 욕망의 별똥별 같은 몽상의 난입으로 돌연 깨어나는 것처럼, 우리 정신의 안개를 찢고 나온 욕망의 번개로부터 이들은 생겨난다.

상상계, 꿈, 추억, 상념으로부터 태어났기에 그들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언어로 태어나, 언어로 펼쳐지고, 언어로 호흡하기를 바라며 스스로 표현되기를 소망한다. 

실비 제르맹의 그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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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당한 몸 - 이라크에서 버마까지, 역사의 방관자이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이야기
크리스티나 램 지음, 강경이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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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은 전쟁 무기다."


 
이 책은 전시 강간에 대한 책으로서 성폭력을 전쟁 무기로 사용된 경우들에 집중해 서술했다. 독자는 역사책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 군대와 민병대 강간 뿐만 아니라 성노예제, 강제결혼, 강제 임신, 강제 불임, 아기 유괴 등의 범죄와 강간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들이 당하는 배척과 학대까지 수많은 여성의 참혹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목도 할 수 있다.  



나이지리아, 방글라데시, 르완다, 보스니아, 아르헨티나, 독일, 이라크, 콩고, 필리핀 등 전쟁과 내전이 벌어지는 거의 모든 곳에서 전시 강간은 이루어졌다. 생후 몇 달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층 구분없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성적 학대와 폭행을 당했고,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들까지 성노예로 내몰렸다. 존엄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공포에 떨게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경쟁 종족이나 이교도로 여기는 사람을 말살하기 위해 가해자들은 강간을 사용한다.  


강간 가해자들은 ISIS를 비롯해 보코하람, 버마 무슬림을 상대로 한 버마 정규군,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의 파키스탄군, 르완다의 종족 전쟁, 보스니아인을 상대로 한 세르비아인, 2차 대전 막바지의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 콩고 민병대, 아시아 곳곳의 여성을 이용한 일본군 위안부 시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음에도, 강간은 세계에서 가장 소홀히 다뤄지는 전쟁범죄다.  









철장에 갇혀 있는 여성들을 산 채로 불태우고, 제노사이드를 목적으로 학살당하고, 성노예로 팔리고, 여성들을 인터넷에서 거래한다. 집단으로 납치 강간하며, 강간 후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책에 언급된 내용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지경임에도 이들의 고통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체념으로 무시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다. 



​아웅 산 수 치의 사례를 읽으면서 우리가 갖는 양면성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2016년 수 치가 선출되고 1년 뒤 군 보안부대는 라카인 북부에서 로힝야족의 마을을 불태우고 수백 명을 학살했으며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고, 약 9만명이 폭력을 피해 달아나야 했다. 어린 아기를 죽이고, 그 장면을 아기의 어머니가 목격하게 하고, 그 어머니를 집단 강간하는 군대가 한 나라의 안위를 책임져야할 정상적인 군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가. 수 치 정권 하의 이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에 맞선 불교 가치의 수호자로 인기를 얻었다. 버무 군부는 페이스북을 이용해 이슬람을 불교에 대한 세계적인 위협으로,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버마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해 로힝야족을 향한 대중의 분노를 부추겼다. 그릇된 민족주의와 폭력적 국수주의. 아주 익숙한 흐름이다. 수 치의 이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여러 나라의 역사 속에서 흔히 자행되어 왔고, 경중의 차이일 뿐 대다수 사람에게서 보여지기 때문일 터다.  



위에서 일일이 열거하고 싶다고 쓰긴 했다만, 사실 피해 사례들은 너무 끔찍해 차마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피해자들은 스스로 살기를 거부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고, 살아남아 탈출해도 트라우마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희생된 여성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모든 면에서 유린당한 그들은 가족에게 외면 당하고, 공동체에서 따돌림 당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고향에서 쫓겨났고, 심지어 남편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강간 피해에 살아남은 여성들의 환경은 열악하다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비참한 환경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강간의 목적은 적에게 모멸감을 주고 사기를 꺾는 것만이 아니고 체계적인 전쟁 무기다. 이 무기는 개별적으로,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아니고 종교적으로 '정당화'한 고의적이며 이념에 근거한 정책이다. 강간은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 공동체 전체에 최대치의 굴욕을 가하기 위해 유별나게 가학적인 방식으로 자행되었다. 또한 침략 중에 부수적으로 일어난 행동으로 볼 수 없고 의도적인 패턴으로서 그 자체로 전략적인 용도로 쓰였으며 공동체의 사기를 꺾고 공포를 조장해 그들을 고향으로부터 몰아내고 침략 세력의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에 따라 의식적으로 자행되었다.  


보편적으로 비난받는 범죄인 강간이 어떻게 전시에는 문제시되지 않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까? 저자는 이 배경에 대해 고대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강간 위에 건설된 로마, 강간을 신화로 포장해 문제 삼지 않는 고대 그리스를 시작으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헌에서 나타나는 집단 강간의 역사는 분쟁의 역사만큼이나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전쟁 강간은 역사적 사건이 있는 모든 장소에서 어김없이 일어난다.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 <시녀 이야기>는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 시절 벌어졌던 사건들의 실제 사례를 가져와 썼다고, 작가는 밝힌 바 있다. 소설에서는 여성의 성노예가 체계적인 제도 하에서 이루지는데, 이는 우리 현실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전시 성폭력 가해자와 평상시에 성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에는 차이가 있다. 심리학자 잉에르 셸스베크에 따르면, "전쟁이라는 배경에서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이끄는 규볌과 가치로부터의 극단적 단절이 일어난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살인과 성폭력은 분명히 구분된다. 살인이 특정 상황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지만 성폭력은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전시 성폭력이 허용 가능한 행위처럼 여겨질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전시라는 상황이 평범하지 않은 데다 성폭력을 저질러도 군 지도부로부터 아무런 대응이나 처벌, 비난을 받지 않기 때문" 이다.  


그리고 앤터니 비버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다양한 군대 사이에서 성폭력의 정도가 다른 것을 두고 부분적으로 '군대 문화'를 든다. 또한 전시 강간이 모든 전쟁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서 성폭력 보고가 거의 없다는 점이 잉에르 셰스베크와 앤터니 비버의 주장을 뒷바침해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왜 생기는 걸까? 하버드대 교수 다라케이 코언은 '전투원 사회화'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납치나 강제징병 같은 강제적 수단으로 신병을 보충한 무장 집단은 이방인들의 집합으로부터 단결된 전투 세력을 창조해야 한다. (...) 강간, 특히 집단 강간은 강제로 징병된 대원들이 처음 경험하는 공포스럽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환경에서 충성심과 존경으로 결속될 수 있게 한다"고.  



강간은 여성에게만 자행되지 않는다. 남성 강간은 대다수 동성애와 연관되어 있어 드러나기가 더욱 어렵다. 2010년 콩고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에 따르면 분쟁 지역에서 남성의 23.6퍼센트 가량이 성폭력을 경험했다. 저자는 콩코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아프카니스탄, 차드, 리비아의 이주민 수용소에서 남성 성폭력 사례를 마주했다. 또한 시리아에 억류된 남성 수감자의 최대 90퍼센트가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본다. 


전쟁 강간범들은 여성을 죽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들이 마치 인도적 행동을 했다고 착각한다. 전범 가해자들 중에 전시 강간으로 기소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전무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참하다. 읽는 것조차 힘이 드는데, 이 모든 것을 겪고 살아낸, 혹은 더이상 삶을 지속시킬 수 없어 스스로 삶을 끝내거나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그들에게 어떤 연민도 감히 드러내기 조심스럽다. 판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었다는 그라시엘라의 말,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에게 최고의 치료제는 가해자의 처벌이라는 말이 깊게 와 박힌다.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 자신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모든 여성이 성폭력을 당하기 전에는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다. 역사책에서나 나올 것 같은 일방적인 침공이 버젓이 일어나고, 몇 년째 이어지는 역병으로 세상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무엇도 확실하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약자의 이야기를 듣고 침묵을 지키지 않으며 외면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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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여인에 관한 연구 레이디 셜록 시리즈 1
셰리 토머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리드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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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즈, 존 왓슨, 마이크로프트, 모리어티, 주홍색 연구.
이쯤되면 그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연상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이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선택할 수 없는 빅토리아 시대에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여성이 있다. 살럿 홈스, 그녀가 셜록 홈스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설은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샬럿 홈스가 사설 탐정이 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약물 오복용으로 인한 죽음으로 보이는 세 남녀의 살인 사건이다.  

일단 살인 사건은 완전 범죄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아주 작은 틈이 보이면서 하나한 단서를 맞춰가지만, 곧이어 장벽에 부딪친다. 이럴때마다 홈스의 추론이 빛을 발하면서 정통 추리소설을 충실히 따라간다. 시간적 배경을 빅토리아 시대로 설정함으로써 여성이 갖는 한계와 편견을 허물어버리는 여성 탐정 샬럿을 주인공으로 하는 '레이디 셜록 시리즈'의 첫번째 에피소드인 이 소설은 사건 자체보다 샬럿이 직업 탐정에 입문하는 과정이 사건 해결만큼이나 흥미롭다.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혼외 자식이 있는 사실이 들통나 약혼녀로부터 파혼당한 샬럿의 아버지 헨리는 결혼식날 다른 여자, 즉 샬럿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녀는 사랑없는 청혼이 누군가를 대신하는 자리임을 알면서도 경제적인 이유로 받아들였다. 홈즈 집안에서 레이디 홈즈는 대단한 권한을 가진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인조차도 안주인을 무시하는 등 그녀의 권력은 허상에 가까웠고, 더구나 남편 헨리의 업신여김은 그녀를 더욱 무력하게 한다.  

어머니를 통해 아무리 대단하다고 인정받는 남자와 결혼한다고 해도, 경제 상황이 나아진다고 해도, 여전히 불행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샬럿의 언니 리비아는 자부심이 강하지만 연약하고, 사람을 불신하면서도 정작 혼자가 될까 두려워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회의한다. 또한 가부장적이고 외도를 하며 집안 경제를 파탄시킨 아버지, 아버지의 권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면서 애꿎은 딸들에게 권력의 허영을 부리는 어머니, 영리하게 제 잇속을 챙겨며 제  마음대로 휘두를수 있는 부잣집 남자를 골라 결혼한 언니 헨리에타의 영향으로 남녀노소 구분없이 인간이란 존재에 혐오감을 갖고 있다. 

글을 잘 쓰는 리비아, 영리하고 관찰과 추론이 탁월한 샬럿. 그러나 좋은 결혼이 명예를 지키고 성공한 삶이라는 원칙을 지켜야하는 귀족 집안의 여성이 직업을 얻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평민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인 여유가 뒷바침이 되지 않는다면 직업 교육을 받을 수 없다. 좋은 일자리는 부족한데,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은 너무 많다. 이처럼 소설은 당시 여성이기 때문에 감내해야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장치가 앞으로 샬럿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보여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샬럿이 여학교 교장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자주권과 권위를 손에 넣을 수 있고, 권력이 미치는 범위가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자립을 원하는 샬럿이 제대로 된 직업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할 때 존 왓슨 부인의 호의는 고용자보다는 후견인에 가깝다는 사실과 무엇보다 그 배후에 남성의 도움이 있었다는 점에서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러한 설정이 당시 여성들에게 가해진 제약을 설명하는 방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여러 장르가 합쳐진 듯한 요즘의 미스터리보다는 정통 추리소설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무척 재미있는 읽기였다. 작가가 <셜록 홈즈>처럼 이 소설의 시리즈를 집필 중인 듯 하다. 제목이 보여주듯 <주홍색 연구>가 연상되는 이 작품 뒤에 나올 두번째 시리즈를 기대해 본다. 




사족.
1. 소설 마지막, 비혼주의자와 유부남의 썸은 무엇?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온 인연, 그리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사랑은 1도 없는 결혼 생활임을 감안해도 글쎄... 이 부분은 지켜볼 일이다. 
2. 해링턴 색빌의 사건은 직접 읽어야 제 맛. 색빌, 이 (                         )!!!
3. 트레들스 경사는 샬럿에게 더할나위 없이 정중했지만 이는 기사도 정신에 기인한 존중으로, 동등한 상대에게 가지는 배려가 아니라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친절이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오래 전 직장 선배가 생각났다. 참 젠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대화 중에 우연히 듣게 된 말 때문에 뜨악 했던 기억이 난다. 본인은 좋은 의도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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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계획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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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일본 최고의 스키점프 선수 니레이 아키라가 사망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사인은 독극물 중독. 부검 결과 독극물은 아코니틴, 맹독이다. 니레이가 평소 복용하는 비타민제 중 다섯개의 캡슐에서 독극물이 검출되면서 이 죽음은 사고가 아닌 살인사건으로 규정되어 수사가 시작된다.  


형사들이 탐문한 결과 니레이의 부탁으로 비타민제를 보관하고 있던 레스토랑은 오전 9시부터 9시 40분 동안 직원이 없는 상태이고, 문을 잠그지 않은 채로 두기 때문에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매끄럽지 않다. 독극물이 검출된 비타민 캡슐은 총 여섯 개. 니레이를 빨리 죽이고 싶었다면 어떤 캡슐을 먹을지 모르니 전부 독극물 섞어놓아야 하는 게 맞다. 그리고 독극물을 섞어놓은 시각을 확정하기 쉬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극물 캡슐을 이렇게 어정쩡한 갯수로 만들었을까? 뭔가 딱 떨어지지 않는다. 










소설은 중반이 되기도 전에 범인을 확정해 놓고 서술한다. 독자가 추론해야 할 것은 범인이 아닌 범인의 살해 동기와 범인의 트릭에 속아 넘어가지 않은 밀고자다. 소설 속 범인은 독자와 함께 그 밀고자를 찾고자 추리를 시작하는데, 소설은 형사의 수사, 범인의 추리, 그리고 소설 후반부에 새롭게 대두되는 제3의 밀고자 등 마지막까지 물음표를 놓지 않는다. 



결론을 놓고 본다면 1등 지상주의에 대한 작가의 일침이다. 특히 성적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운동 선수에게 도핑은 끊임없는 유혹이 될 것이다(이 소설은 절대 도핑에 관련한 소설이 아니다). 하필이면 얼마 전 폐막한 동계올림픽에서도 도핑 사건으로 올림픽 기간 내내 시끄러웠고, 도핑도 도핑이지만 그 선수를 지도한 코치의 지도 방식이 더 비난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운동선수 뿐인가.  


주변에서 입시생을 둔 지인들은 아이가 에너지음료를 과다섭취하는 것 같다고 걱정하면서도 그냥 걱정에서 끝난다. 에너지 음료 대신 고강도 비타민이나 영양제를 제공하며 이 시기만 잘 넘기라고 할 뿐 좀 쉬어가라고 말하는 부모를 본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부모들 말대로 그 고행이 예정된 기간 안에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딱히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입시, 재수, 반수를 거쳐 취업과 승진 전쟁까지. 이 기나긴 여정에서 늘 1등만 할 수도, 이기기만 할 수도 없어 더 딱한 노릇이다. 



소설에서는 스포츠계의 다양한  형태의 '킹메이커'들이 등장한다. 스키점프 선수로서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부모를 여읜 니레이를 훈련시키고 돌봤던 당숙 후지무라,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니레이에게 모두 쏟아부으며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절대 일인자로 만들고 싶어했던 미네기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인간성 따위는 서슴없이 버릴 수 있기에 아들 쇼의 개성은 무시해버리는 스기에 다이스케.  


그런데 이렇듯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허위의 욕망덩어리들 앞에, 도대체 판단이 서지 앉는 순수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 등장했으니 그가 니레이다. 그는 1등도, 명예도, 돈도 관심없다. 오로지 하늘을 나는 그 순간을, 더 멀리 더 높이 나는 것을 욕망할 뿐이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니레이의 욕망을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 다만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공동체 사회에서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다. 악의는 없으나 동료의 상실감을 공감할 줄 모르고, 상대의 성취에 축하해 줄지도 모르는 공감능력의 결여는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미숙한 차원을 넘어선다. 그가 자신이 실질적, 감정적 대용품이 되어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스포츠 과학을 표방하면서 선수들의 훈련과정을 면밀히 분석한다고(상식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음에도 한 번 던져본다. 과학을 이용한 승리와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패배 중 어느 것에 더 가치를 두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물음은 비단 스포츠 뿐만이 아니다. 진정한 삶의 질이 무엇인지를 화두로 삼는 요즘, 이와 유사한 질문은 분야와 소재만 바뀔 뿐 늘 우리에게 의문으로 남는다.  



"스포츠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오로지 승리뿐이에요. 관중들도 비인간적인 강함을 원한다는 뜻입니다. 서울 올림픽에서 벤 존슨은 도핑으로 금메달을 박탈 당하고 세상의 비난을 받았지요? 하지만 그 비난도 잘난 원칙주의에서 나온 것뿐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왜 검사에 걸리는 바보짓을 했느냐고 이를 갈고 있어요." (p369) 



2022년 현재, 1989년에 집필한 소설의 인물인 스기에 다이스케가 한 이 말에 무게를 실어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결과지향주의에서 온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가가 스키에 진심이라는 얘기를 어디에선가 읽었는데, 정말 그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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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을유세계문학전집 118
에우리피데스 지음, 김기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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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스티스> <메데이아> <힙폴뤼토스> 등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세 작품이 실려있다.









남편 아드메토스 대신 자진해서 죽음을 선택한 알케스티스. 아드메토스와 알케스티스, 그리고 아드메토스의 아버지 페레스가 삼각구도를 이뤄 갈등하는데, 사건의 배경이나 부부의 히스토리를 알 수 없어 아드메토스를 한 마디로 단정하기에 섣부른 면이 있지만, 어쨌든 가장 비겁한 사람은 아드메토스다.  


아내의 죽음에 통곡하고 정절을 다짐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심지어 젊은 아내 대신 죽지 않은 부모를 원망하는 모습은 이기적이고, 아내의 장례식을 감추며 손님을 환대하는 모습은 허위와 허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결국 그의 환대의 보답으로 헤라클레스가 알케스티스를 저승에서 다시 데려오긴 했다만. 


이 작품의 비극은 이기적인 남자를 남편으로 선택한 것, 무엇이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하는 길인지를 착각한 알케스티스의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한다.  

 


남편 이아손의 복수를 위해 계락을 짜고 그 결과로 일가족이 왕국에서 쫓겨나 코린토스로 망명했지만, 이아손은 메데이아를 배신하고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와 결혼한다.


이아손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기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고 희생시켜 복수하는 메데이아는, 아이들을 희생함에 있어 남편에게 주려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깨닫지만, 그녀에게 후회는 없다.  


이 작품 초반에 마지막을 예견하듯 코린토스의 여인들은 메데이아에게 배신자 이아손의 새로운 결혼을 존중하고 그에 대한 분노로 칼을 갈지 말라고 말한다. 신이 당신의 억울함을 알고 변호인이 될 터이니 괴로워하지도, 울지도 말라는 말과 함께. 아마도 메데이아의 성정을 감안했을 때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작가가 쓴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은 여성에 대한 성차별과 불평등한 위치를 노골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메데이아는 여성의 인생에 있어서 승패는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이혼이 명예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편을 거절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출산의 고통과 위험이 전장에 나가는 것 이상이라고 비판한다. 어쩌면 에우리피데스는 이러한 수동성을 강요받고 억압 당하는 여성이 부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극단적 선택 밖에 없음을 말하고자 했음이 아닐까.  


이아손은 메데이아와 아이들을 구하고 풍족한 삶과 명예를 누리게 해주기 위해 왕의 딸과 결혼한 것 뿐이라고 말한다. 글라우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새장가를 드는 것이라고. 이에 메데이아는 이런 결혼을 할 작정이었다면 가족에게 비밀로 할 게 아니라 설득을 했어야 했다고 일갈한다. 그런데 이아손의 말이 사실이라면 글라우케는 또다른 형태의 희생양인 셈이다. 


작품에서는 내내 이아손을 몰염치하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몰아붙이는데, 읽으면서 잠깐은 그의 변명이 사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만, 이아손이 정말 나쁜 사람임을 확인시키는 장면이 612행에 나온다. " 재물에서 뭔가 도움을 받고 싶다면 말해 주게."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두 아들을 살해하면서까지 이룬 복수. 이 사태에 대해 서로에게 원인을 전가하고 분노와 증오를 퍼붓는 이아손과 메데이아를 보면서 그들이 그동안 해왔던 모든 행위는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친족 살해로 끝난 이 작품이야말로 여러 면에서 가장 비극적이고도 비극적이다.  


뻘.
이아손이여, 그러게 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시나. 


ㅡ 


아프로디테는 자기를 가장 사악한 신이라고 경멸하면서 아르테미스를 숭배하고 신과 교제하는 힙폴뤼토스를 괘씸하게 여겨 제 아비 손에 죽게함으로써 응징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알 리 없는 힙폴뤼토스는 사냥을 마치고 아르테미스를 숭배하는 찬가를 부르며 돌아오고 있다.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파이드라는 아이들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올가미에 목을 매어 자결한다.  


파이드라의 모략으로 아버지 테세우스로부터 추방당한 힙폴뤼토스는 테세우스의 저주로 인해, 그리고 그 저주를 받아들인 신들에 의해 사고로 죽는다. 뒤늦게 아르테미스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 테세우스.


그런데 희생자가 된 힙폴뤼토스는 아무런 잘못이 없을까? 일단 그의 지나친 오만함이 불편하다. 영리한 여자를 증오하고, 자기의 집에는 필요 이상으로 생각이 많은 여자가 거주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여성을 폄훼하고, 여성 존채 자체와 여성의 사랑을 폄하하며 파이드라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그가 간과한 것은 본인이 그토록 숭배하는 아르테미스도 '여신'이라는 사실이다. 거기다 젊음을 무기로 삼은 과한 열정과 어긋난 정의감, 그리고 생각보다 지나치게 앞서가는 신중하지 못한 입놀림. 이러한 힙폴뤼토스를 향해 하인은 신 앞에서 오만하게 굴지 말 것을 충고하지만, 그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은 여신의 시기에 휘말려 의붓아들을 모략해 억울하게 죽음으로 이끈 파이드라가 아니다. 오만함으로 대변하는 힙폴뤼토스, 아들을 믿지 않은 채 분노에 휘둘려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하지 않고 성급하게 판단한 테세우스의 어리석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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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세 작품이 비극의 끝판왕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서로를 향한 칼날이 가족이라는 데에 있지 않을까싶다. 아내가 남편 대신 죽고, 아내가 아이들을 복수의 희생양으로 삼으며, 아비는 제 분노에 못이겨 섣부르게 아들을 저주한다.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신에 의해 농락당하는 인간들 앞에 또다른 신들은 왜 늘 한발씩 늦게 나타나는가? 삶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한다. 그 시험에 어떤 답을 내놓을지 혹은 시험을 거부할지는 인간의 선택이고.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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