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눈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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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일레인을 1인칭 화자로 하는 소설은 화가로 성공한 일레인의 현재와 유년 시절의 과거를 오가며 서술한다. 


소설이 전개되면서 나는 일레인보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미쳤던 코딜리어에게 더 호기심이 쏠렸다. 일레인과 코딜리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코딜리어가 과거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기에 일레인은 그녀에 대한 나쁜 기억을 잊지 못하고 머릿속에 담아두고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곱씹는 것일까. 그런데 읽다보면 일레인의 트라우마를 납득하게 되고 궁금증의 방향이 바뀐다. 코딜리어의 빈정을 상하게 한 그날, 일레인이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무슨 말을 하면 이토록 악의적으로 사람을 괴롭힐 수 있을까? 그것도 겨우 열 살을 넘긴 아이가. 그리고 곧 깨닫는다. 일레인이 어떤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어떤 말도 그토록 잔인한 학대와 괴롭힘의 명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레인은 화가다. 그것도 첫 번째 회고전을 앞둔, 제법 성공한 화가다. 그녀는 대체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지만, 회고전을 앞둔 그녀의 감정은 복잡미묘하다. 자신이 회고전을 열만큼 확고한 입지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이 사실이 비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불길하게 느껴진다. 또한 일레인은 자신이 현재의 삶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고, 스스로를 겉으로만 어른인 척 가장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독자는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의심하는 데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1년 간의 학교 폭력 피해자의 트라우마라고 하기에는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하고 있다. 더구나 1권의 마지막에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괴롭힘 가해자들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왜 이토록 자신을 깎아내리며 스스로를 학대하는지.



일레인의 유년 시절을 살펴보면 여덟 살이 되도록 한곳에 정착하지 않은 유목민같은 생활을 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이기도 하고, 부모님의 삶의 방식이나 신념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족 간의 유대 관계가 좋은 가정이었다. 다만 여덟 살이 되도록 동성 친구가 한 명도 없고 형제는 오빠뿐이었으니 또래와의 관계 맺기에 어려움이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서 코딜리어를 비롯한 그레이스, 캐럴과 어울리게 된 것에 기뻐하고, 괴롭힘에도 선뜻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앞서 썼듯 코딜리어가 주도하는 또래 집단 내 학대와 괴롭힘은 나이를 감안할 때 상상 이상으로 악질적이다. 일레인과 그녀 가족에 대한 비하와 언어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괴롭힘이 마치 피해자의 성장을 위한 도움이자 훈육이라면서 가스라이팅을 한다. 기가 막히는 것은 장소를 불문할만큼 가해는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는데, 거기에는 피해자인 일레인의 집에서도 아주 교묘하게 벌어졌다. 일레인은 그들 무리에서 배척될 것이 두려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더 끔찍한 것은 일레인이 코딜리어가 적이 아닌 친구이며 코딜리어의 괴롭힘은 선의에 의한 것이라고 여긴다는 점, 그리고 괴롭힘을 당하는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있다는 것, 그래서 점점 더 자신의 행동과 말에 혹여 잘못된 것이 있을까봐 강박적으로 두려워하게 된다는 점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일레인이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러한 폭력적 갈등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똑똑치 못해서, 멍청해서, 나쁜 아이라서.


그런데 내가 1권에서 가장 어처구니가 없었던 지점은 가해 아이들보다 그레이스의 어머니인 스미스 부인의 태도다. 그녀는 일레인(아마 일레인의 가족을 포함한)이 교회를 제대로 다니지 않기 때문에, 진심으로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즉 그레이스의 어머니는 자기 딸을 비롯해 몰려다니는 세 아이가 일레인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용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레인의 어머니는 집단 괴롭힘을 눈치 채고 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조언은 원론적이며 고작 열 살 무렵 아이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냐는 두루뭉술한 질문이 안타까웠다. 하긴 이제 열 살을 넘긴 어린 아이가 그렇게 비열하고 계획적이며 악의적으로 누군가를 괴롭힐 수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ㅡ 


유년 시절의 집단 괴롭힘을 겪는 일레인의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업주부가 일반적이었던 시대를 지나오면서 여성 화가로서 겪는 성차별적 시각과 고정관념,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 유년 시절의 소녀들이 절대 권력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가부장제, 콧수염으로 상징하는 남성성, 스쳐지나간 인디언들에게 반사된 폭력의 굴레. 이러한 부분을 2권에서 더 많이 풀어내리라 생각한다.


눈에 띄는 점은, 소설은 과거 시점이든 현재 시점이든 모두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서술하는데, 이는 일레인이 유년 시절에 겪었던 경험들이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읽혔다.   


1권에서, 일레인은 마음을 다잡아야할 때 고양이 눈 구슬을 손에 쥐고 있다. 일레인은 구슬이 자신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1권 마지막에서는 일레인이 코딜리어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고양이 눈 구슬은 더 이상 수호자 역할을 할 필요가 없을터다. 그런데 1권보다 2권이 더 두껍다. 무슨 일일까.... . 


2권으로. 




※ 리딩투데이를 통한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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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최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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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길을 잃을 방법을 되뇌이며 무작정 걸었던 거지 소녀가 찾아다닌 '새들의 평원'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 아무도 '새들의 평원'으로 가는 정확힌 길을 모른다. 그녀는 아이를 놔누고 갈 철책 안 백인의 정원을 '새들의 평원'이라고 생각한다. 부영사는 몽포르 기숙학교 재학 당시 그곳에서의 행복은 더럽고 지저분한 몽포르를 파괴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광기는 부임지였던 라호르로 이어진다. '그녀'가 생각한 '새들의 평원'은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백인 구역이고, 부영사의 기쁨은 파괴에 있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단어는 '철책'이다. 철책은 백인 구역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철책 안쪽과 바깥쪽의 풍경은 극명하게 나뉜다. 그리고 백인은 철책 바깥쪽의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곳에 가지 않는다. 프랑스 대사 스트레테르의 저택에서 자정이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만찬회가 한창인 시각, 저택의 문 밖에는 심야 시간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얻기 위해 거지들이 모여 든다. 철책을 기준으로 안과 밖의 극명한 대조의 모습이다. 이러한 분리와 구분은 안-마리가 자주 가는 섬에서도 보여진다. 섬 반대편 끝에 있는 마을과 호텔 사이에는 큰 철책이 세워져 있어 두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공간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정서와 감정으로 이어진다. 소수 주류에 해당하는 백인들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해 부유하는 그들은 현지인들과도 가까워지지 못하고, 백인 사회에서도 아웃사이더다. 반면 걸인 여자 '그녀'는 문둥병환자들 사이에서 전혀 이질감없이 섞여 들어가 군중 속의 하나, 색깔없는 존재로 자신을 숨긴다. 


부영사가 저지른 끔찍한 일도 일이지만, 이에 대한 얘기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더 놀랍다. 누군가는 문둥병자들이나 개들을 죽이는 게 살해라고 할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반박하는 사람 역시 그들 가해 행위보다는 죽은 자들이 문둥병자인지 아닌지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즉 피해자들의 신분이 문제가 될뿐 그들 죽음 자체에 대해서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여기에는 그들이 살아온 시간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안-마리가 샤를 로세트에게 '긴 여정 중에 그들이 지나친 수많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일 수도 있다'라고 한 말에서 거지 소녀이자 걸인 여자인 무명의 '그녀'(의 10년)을 떠올리게 된다. 캄보디아에서 시작해 10년을 걸어 캘커타에 도착한 여정은 그녀가 거쳐온 지역들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서 그 시간과 삶, 고달픔이 뒤엉키고 켜켜이 쌓인, 무형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안-마리가 걸인들에게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그들이 불쌍해서라기보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들 삶에 대한 연민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쪽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느껴지는 감정적 동질감일지도 모르겠다. 







 
권태와 공허, 삶에 대한 무관심, 감정의 소멸, 존재의 상실.
평온이라고 포장하지만 무기력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들.
'그녀'와 부영사의 광기는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혹은 어떻게서든 살아보려는 몸무림이 아닐까. 


소설의 결말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안-마리, 샤를 로세트, 장 마르크 드 아슈.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한 그들의 삶은 그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거지 소녀'의 10년의 걸음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해석할지 무척 궁금해졌다. 


부영사는 어디에서 근무하든 인도에 남기를 바라고, 백인 사회 안에 존재하기를 갈구한다. 하지만 정작 인도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왜 남아야하는지 본인도 잘 모른다. 그저 프랑스 대사의 처분만을 기다린다. 샤를 로세트는 빌어먹을 캘커타를 간절하게 떠나고 싶다. 그런데 그러지도 못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들과 비슷한 일련의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제 인생임에도 마치 남의 일인 양 뒷짐진 채 수동적으로 끌려다니고 있는 건 아닌가. 그래서 안-마리의 작은 일탈에 공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고난의 결과에 '불임'이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전해졌다. 소설 속에서는 '그녀'의 처절함이 직접적으로 많이 드러나지 않는다. 제 몸을 다 내던져 살고자 했던 '그녀'와 겉으로는 선의를 베풀며 두 아이를 낳고 평안하게 살아가지만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철책 안에서 떠도는 안-마리는 자연스럽게 대비된다. 그들에게 '새들의 평원'은 어느 쪽일까.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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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동품 진열실 을유세계문학전집 13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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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전후로 하는 공화제 - 제정 - 왕정복고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상.하층 귀족 사이의 분열, 왕당파와 자유주의자들의 대립 등 한 지방 귀족 집안을 통해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과 두 계급 사이에서 필요에 따라 오락가락하며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사법 체계를 비판하고, 더하여 제정과 왕정복고 하에서의 지방 모습을 설명한다. 


변화하는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늙은 후작의 모습. 애지중지 떠받들여져 우물 안의 개구리로 양육되어 늙은 아버지와 크게 다를 바 없이 껍데기뿐인 귀족이라는 신분과 외모에 우월감을 갖고 자신의 위치를 확대 해석하며 방탕한 일상을 당연하게 여기는 젊은 백작. 


파리에 진출한 빅튀르니앵이 출세를 노리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은 상류층 여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 경제적 후원을 받거나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자들이다. 그들 중에는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인 라스티냐크와 동명의 인물도 있다(인물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말투를 봐서는 동명이인이지 싶다). <나귀 가죽>도 이와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이 소설에서도 라스티냐크가 출연한다), 생각해보면 몇 년 사이에 쓴 소설들에는 얼마든지 타락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모습들에서 독자는 발자크가  왕정복고 이후 프랑스 사회를 상당히 예민하게 관찰하며 비판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빅튀르니앵의 파멸은 소설의 전개 부분에서부터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여타 소설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갈등과 고민이 그에게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한 치의 동정심도 얻기 어려울 정도로, 주인공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빅튀르니앵은 빌런 아닌 빌런이다(누구를 괴롭히려는 의도는 없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고통일뿐). 철이 없다고 하기에는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머리가 좋아서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을 영악하게 이용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인생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나만 만족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인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이 소설에서 그림자처럼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악당은 뒤 크루아지에다. 귀족 여인과의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자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며 복수를 계획한 그는 비열하게도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백작을 먹잇감으로 삼는다. 결론을 놓고 봤을 때 그의 복수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해야하겠으나 어쩌면 그렇게 발버둥치지 않았어도 시대의 흐름에 의해서라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 


결국 범법자 신세가 되는 빅튀르니앵. 오로지 허세와 사치, 방탕한 생활을 위해 누군가 해결해줄 거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아무런 경각심없이 사기 행각까지 벌인(정말 천진하다고 해야하나... . 어쩌면 그렇게 대책없고 즉흥적인지!) 그의 모습은 지금도 언론 매체에서 잊을만하면 보도되는 많은 뉴스들을 떠올리게 한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절도와 강도를 일삼고, 여차하면 흉악 범죄로 이어지는 사건은 이루 헤어릴 수 없이 많다. 그에 비하면 철없는 젊은 자작은 새 발의 피다만... .


ㅡ 


흥미로운 점은 젊은 백작을 구명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데그리뇽 가문의 공증인이자 대대로 그 집안의 집사였던 쉐넬이다. 정작 젊은 백작의 늙은 아버지는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고모는 그저 쉐넬에게 의지할 뿐이다. 이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지는 결국 독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귀족 사회에 대해 호의적이었고, 스스로 '귀족' 호칭에 집착했던 발자크가 부르주아지 계급인 뒤 크루아지에를 악당으로 그리면서 무력해진 지방 귀족 계급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것인지,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본 것인지는 하나로 단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빅튀르니앵으로 대변하는 젊은 귀족 세대에 대해서만큼은 날선 비판을 하고 있음이 읽혀진다. 


소설에서 쉐넬의 죽음은 종복의 죽음, 즉 혈통만을 중요시하는 관습, 귀족 신분과 그에 따른 재산 세습, 그리고 무조건적인 충성의 종말을 의미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신분과 가문을 떠나 개인의 역량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빅튀르니앵은 변변한 일자리도, 혼처도 찾지 못하는 모습이 이를 뒷받침한다. 


골동품 진열실에서 모여 앉아 빅튀르니앵의 거짓 편지를 읽으며 기뻐하는 구세대 귀족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한 시대에 갇혀 정신승리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그들의 비감이었다. 노년에 홀로 골동품 진열실을 지키는 아르망드의 모습은 허망함마저 전해진다.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지방 귀족들을 향한 드 모프리뇌즈 공작 부인의 뼈때리는 충고가 이 소설의 백미이자 핵심이다. 이러함 점은 <골짜기의 백합>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하는데, 누구 눈치볼 것 없이 쿨내 진동하는 직설 화법도 발자크 소설의 매력이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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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브 뉴 휴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7
정지돈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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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 한국은 인구 절벽을 해결하기 방안으로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제공받아 인공 자궁에서 출생한, 소위 체외인을 통해 노동력 문제를 해결한다.  


소설에서는 각각의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출중한 능력으로 일반인보다 더 성공한 체외인 아미,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체외인 현지, 세속적인 아버지를 혐오하는 일반인 철멍, 체외인에서 승격해 일반인이 된 기업가 리젠쿠이, 아날로그 생활 방식을 지향하는 저널리스트 아날로그맨, 가족과 공동체를 거부하며 젠더 파괴를 주장하는 혁명가 체외인 가나코.  





 


체외인은 인공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을 일컫는다. 인간의 신체 없이도 출생이 가능해진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정부는 법으로 규정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건강한 성인 남녀에게 의무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기증받아 무작위로 수정한다. 출생률 감소와 인구 저하로 국가 소멸이라는 위기에 봉착하자 만든 대안이었다. 체외인에게 유전적 부모가 존재하지만 생부 생모를 찾는 건 엄격히 금지되었다. 체외인의 부모는 국가이자 시스템이다. 양육, 교육, 사회화는 정부가 전담한다. 대신 체외인은 생명 전반에 대한 채무를 갖는다. 체외인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면서 사람들은 생식의 압제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인공적으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인간의 본질과 가족의 필요성에 대한 고민이 싹트기 시작한다. 


체외인이 사회의 일부가 된 이후 일반 국민들은 전보다 더 자연분만은 신성시했고 상류층일수록 가족을 중시했다. 체외인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인공체인 체외인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혐오한다. 정부는 체외인을 구분하기 위해 성인이 된 체외인의 오른쪽 손목에 식별 가능한 생체 바코드를 새겼다. 바코드에 관련한 어떤 행위도 금지되며 적발시 체외인의 존재는 말소된다. 


이 즈음까지 읽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은 "왜?"였다(이 소설, 할 말 많겠다싶었다). 소설에서는 일반인들이 체외인을 두고 '제품' '노예' '가축'으로 표현한다. 체외인들이 지켜야할 조건과 환경, 그리고 철저하게 개인의 욕망을 억누른 법적 제한을 보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제외하면 '일반인'과 다를 게 하나 없는데 굳이 이토록 지독하게 제한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꿔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출생한 인간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가정을 책임지려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불행을 극복하거나 개척하지 않으려고 한다면(소설에서 체외인에 대한 설명이다), 그 인간은 일반인인가 체외인인가.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하려는 체외인을 '일인', 발전에 무관심하고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체외인을 '이인'이라고 부른다. 이 전제를 우리에게 적용해보자. 나는, 당신은 일인인가, 이인인가. 이 조건대로라면 이인조차 되지 못하는 일반인은 현실에서 수두룩하다.  



​소설에서는 체외인이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는, 뿌리와 역사도 없는 인간이기에 그들에게는 의무감도 책임감도 정체성도 없다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과연 일반인들은 의무감, 책임감, 정체성이 확고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어떤 인간도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제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어쩌다 운이 좋아(그 반대일 수도 있고) 수많은 정자 중에 하나가 살아남은,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부모가 될 사람들의 의지와는 별개로(부모들 역시 자식을 선택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우연으로 태어난 게 아닌가. 설령 체외인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존재의 필요성이 분명한 그들보다 살면서 끊임없이 혼란과 고민을 겪으며 삶의 방향을 수정해나가야 하는 일반인이야말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 증명해야하는 처지일지도 모른다. 


ㅡ 


정부는 체외인과 일반인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는 이유로 체외인의 출산을 금지했다. 임신과 출산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므로 아무 존재나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이에 따르면 체외인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인간을 어떻게 정의定義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자와 난자, 심지어 추후 발생할지 모를 질환을 대비해 제대혈까지 냉동 보관하는 시대다. 인공 수정뿐 아니라 합법적으로 정자를 기증받아 비혼모 출산이 가능한 나라도 있다. 심지어 소설에서 일반인 부부도 조건에 따라 인공 자궁을 사용할 수 있다. 사지 절단의 환자가 인공 팔다리를 착용하고 일상에 복귀하는가 하면,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는 연구도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다. 그동안 많은 소설들이 '복제 인간'을 소재로 인권의 범위에 대해 이야기해왔으며, 얼마 전부터는 AI의 지적 소유권까지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하물며 자궁이 몸 안에 있든 바깥에 있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이런 시각에서 봤을 때 이 소설의 설정은 오히려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체외인'이라고 쓰인 자리에 다른 단어를 대신했을 때 전혀 괴리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난민, 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 빈민, 독거노인, 보호자 없는 미성년자,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소설에서 일반인의 임신과 출산은 '도덕과 윤리의 마지막 보루'라고 썼다. 도덕은 시대에 따라 인간이 만든 기준이다. 독자는 개인의 선택이어야할 아주 사적인 임신과 출산조차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에 냉소를 보낼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내미는 카드가 출산 장려금이다.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은 절대적이다.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혹은 입양하고) 양육을 장려하는 데에 있어서 돈을 우선하는 발상, 그리고 다자녀 가정을 애국자라고 칭찬하는 모습이 소설에서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밀어 출산을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리고 가족을 본질적인 가치로 여기며, 체외인처럼 가족이 결여된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여기지만, 현재 가족의 형태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그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완벽한 자격'을 갖춘 인간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ㅡ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우월해야 안정감(혹은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애써 비교해 구분하고, 차별할 대상을 만든다. 소설에서 체외인과 일반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소설이 진행할수록 모호하고 경계도 애매해진다. 일반인으로 승격한 체외인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체외인을 비하하면서도 그들보다 더 구차한 삶을 사는 일반인은 기꺼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감수하려 들까.


​한 사람의 정자에 수백만 아이를 기계로 찍어내듯이 출생했다는 점, 즉 생물학적으로 거의 동일한 인간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획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읽혔다. 왜인지 우리네 삶이 소설 속 일반인보다 체외인의 삶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 같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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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등에서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호밀밭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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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으로 폐위된 오스만 제국의 황제 압둘하미드 2세가 테살로니키 알라티니 저택에 유폐된 3년을 다룬 소설이다. 하지만 소설 전체를 놓고 보면 오스만 제국이 한참 혼란스러웠을 때 즉위한 압둘하미드 2세의 삶 전반과 재위 당시 동안 행해졌던 일들, 그의 즉위 전부터 폐위 이후까지의 오스만 제국 내 상황과 그에 앞선 국제적.정치적 배경, 그리고 다민족.다종교.다인종으로 이루어진 오스만 제국의 특성을 압둘하미드 2세와 그의 주치의인 휴세인 대위의 대화를 큰 틀로 삼아 마치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서술한다. 


소설은 간접적으로 황제 압둘하미드 2세의 두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탁월한 경제적 감각과 예술을 즐기는 지적인 청년 압둘하미드와 '붉은 술탄' 혹은 '학살자 '늑대'라고 불리는 절대권력자. 타고난 정치적.외교적 수완을 갖춘 유능한 지도자였다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무도 믿지 않는 예민하고 피해망상에 허우적대는 늙은 독재자. 더없이 제국과 제국민을 아끼고 비극을 싫어해 예술 공연마다 희극으로 바꾸라고 명하는 술탄이 한편으로는 비열한 방식으로 제 손에는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가차없이 학살을 저지르는 살인자이기도 하다. 술탄 메흐멧 2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기념하는 행사가 그리스인들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고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교회의 타종은 금지한다. 자신의 폐위로 공주들의 결혼이 무산될 것을 걱정하면서 암살이 두려워 예방 접종은 가족들 중 맨 나중에 맞는다. 자유주의를 꿈꾸지만 비밀경찰과 검열을 통한 전제專制정치로 제국을 통치했다. 이토록 모순적인 인생이라니! 





 



압둘하미드 2세는 황제 계승 순위가 아홉 번째로서 황제가 될 확률이 낮았다. 아버지 압둘메지드 1세가 결핵으로 39세 사망, 작은아버지 압둘아지즈가 폐위 당한 직후 의문사, 형 무라드 5세는 재위 석 달만에 폐위 후 감금 생활 중 사망. 이러니 그의 불안증을 비웃을 일만도 아니다. 


젊은 군의관과 늙은 전 황제의 대화를 읽다보면 압둘하미드 2세가 자신의 국정 운영에 대해 마치 법정에 선 피고인처럼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으로 읽히는데 논리적으로 말하는 노련한 늙은 황제에게 은근히 설득당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순수한 군의관의 모습이나, 옛 황제와의 대화를 기록으로 남기는 군의관이 혹여 이 사실이 발각될까봐 긴장하고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은 늘 암살을 두려워하던 압둘하미드 2세와 겹쳐지는 등 소설 속에서 주로 등장하는 옛 황제와 군의관이 마주하는 장면은 마치 블랙코미디같다. 


소설 후반부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온 압둘하미드는 어린 시절을 보낸 베이레르베이 궁으로 보내진다. 그곳은 그의 어머니가 결핵으로 죽은 곳이고, 또한 그가 증오하는 장소다. 압둘하미드는 베이레르베이궁으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츠라안궁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츠라안궁이 화재로 재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황제는 세상이 바뀌었고, 바뀐 세상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장면은 압둘하미드가 다시 왕자 시절이었던 유년 시절의 장소로 되돌아온 셈인데, 그의 회한이 단 몇 줄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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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혁신적인 기술을 인정하고 오스만의 현 주소를 냉철하게 인지하며 문화와 예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제국의 분열을 막고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범이슬람주의를 주창해 이를 명분으로 전제 정치를 시행해 제국 내 갈등을 오히려 부채질한 셈이 되었다. 이미 제국의 땅을 상실하고 국가 재정이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에 재위에 오른 그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배신과 반란, 암살이 난무하는 황실에서 자란 압둘하미드 2세의 피행망상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이러한 황제의 불안증을 비롯해 혁명 전후 당시를 해학적으로 그려낸다. 



오스만 제국 말기의 역사 지식이 있으면 좀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으나, 소설에 나와있는 그대로의 압둘하미드를 탐색하는 과정도 흥미로울 것이다. 어쩌면 배경 지식 없이 읽는 것이 압둘하미드라는 사람을 선입견 없이 알아가는 데에는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33년 동안 대제국을 쥐락펴락했던 절대권력자. 그러나 한켠에서는 자신의 큰 코 때문에 외모에 자격지심을 가진 그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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