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을 꿈꾸다 - 우리의 삶에서 상상력이 사라졌을 때
배리 로페즈 지음, 신해경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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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북극 포경사업을 시작으로 북극의 지리적 위치로서의 정의와 의의, 생태 환경과 기후, 지질학적 특성 등 북극에 대해 전반적으로 서술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세 가지 중심 주세를 밝힌다. 북극이라는 대지가 인간의 의식 세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대지를 이용하고자 하는 욕망은 대지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부유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향소, 북극곰, 일각고래 등 북극의 터줏대감뿐 아니라 이들과 삶과 공간을 공유하고 땅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누이트들과 북극을 경유해 대이동을 하는 동물들의 생태적 특이성과 북극 땅이 갖은 포용과 생명력, 그와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본질인 북극 생태계의 순환과 경이로운 자연 현상을 서술하면서 저자는 인류가 자제를 배우고, 땅에 대해 좀 더 현명한 행동 방식을 끌어내야 한다고 얘기한다. 우리가 생태계의 생물학적 요구를 귀담아 들어야 하는 이유는 수천 년간 인류가 이뤄놓은 지혜의 완성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니 제발 비판적 지성으로 생각하라고 당부한다. 


또한 우리가 멸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해야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생에 결실을 얻지 못할지도 모르는 작업을 실행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북극이 인류보다 어린, 즉 가장 어린 생태계라는데, 어쩌면 가장 어린 북극 생태계가 가장 먼저 사라질 수도 있다.  







약탈, 스포츠 사냥, 무리한 지질 탐사와 산업 개발, 이에 따른 환경 오염 등에 의한 폐해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쓰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부분이니 생략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이 책을 인문 에세이로 분류해 놓았는데, 문학과 비문학을 자연스럽게 오가며 생태학과 서구 개척에 대한 약사略史와 산문의 복합적인 모습을 보인다. 과학적 측면에서 북극의 사실적 면모와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북극의 땅과 생명에 가해지는 횡포와 폭력에 우려를 표하고, 땅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이해의 시각에서 북극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과 자연 현상을 관찰한다. 저자는 우리에게 자연은 정복과 극복의 대상이 아님을 누누이 강조한다.  


읽다보면 북극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種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혜안과 통찰을 존중해야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생태학에 가까운 책이라고 여기며 펼친 책에서 나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를 또 다시 생각하게 됐고, 더하여 북극, 자연, 생명, 그리고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사유의 시간에 행복했다.  



​내가 알기로 현지에서 초판이 출간된지 20년이 훌쩍 넘었다(우리나라 번역본은 10년 전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저자는 1980년대에도 북극 생태계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다. 이 책뿐만 아니라 해빙 연구가인 피터 와담스 역시 자신의 저작에서 무분별한 북극 개발과 기후 변화에 대해 경고했다. 많은 이들의 역설을 간과한 지금의 북극 상태와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은 '이상異常'인 아닌 우리가 뿌린 씨앗을 고스란히 거둬들이고 있는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동물들은 언제나 인간에게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조짐과 경고에 반응해서 움직인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이 조짐에 반응하는 동물들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 출판사 지원도서


#배리로페즈리뷰대회
  

아직까지 어떤 문화도 의식이 성장하면서 직면하게 된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 피, 모든 생명에 내재된 그 공포를 번연히 알면서, 자신이 속한 문화는 물론, 자기 안에 있는 어둠도 목도하면서, 어떻게 도덕적이고 자비로운 존재로 살 수 있는가?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 되는 단계가 있다면, 삶이 이어진다는 사실에 존재하는 역설을 파악하고 그런 모순 한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생명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때일 것이다. 사람은 모순의 한가운데를 살아내야 한다. 모든 모순이 일거에 제거되는 순간, 삶도 붕괴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중요한 질문 중 몇 가지는 그냥 답이 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빛에 다가가려 한 하나의 고귀한 표현이 되도록 애쓰면서. - P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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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담덕 8 - 말 타고 초원로를 달리다
엄광용 지음 / 새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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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소위 '원대한 꿈'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소설은 담덕 즉위 8년으로 접어든 398년에서 시작해 이듬해 399년 왜의 출병까지 서술한다. 소설의 후반부에 왜의 출병을 적은 분량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9권으로 이어질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정도로 보면 될 듯 하다. 8권은 그야말로 동북아를 아우르는 경제 대국으로서의 고구려를 설계하는 담덕의 원대한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북쪽 초원로 원정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숙신족을 정벌하고 조공관계를 맺음으로써 세력권 확장을 시작으로 고구려에서 북쪽 지역의 나라와 부족 들의 정치적 상황을 면밀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는 당시 동북아 정세를 이해함과 동시에 담덕의 초원로 원정의 당위성을 납득할 수 있다. 





 



담덕은 숙신 토벌을 앞두고 장고를 거듭 중이던 차에 숙신족에 대한 전반적인 보고를 들으면서 인간의 잔혹함에 대해 고민하던 끝에 교역을 통한 유통 질서의 회복에 대해 생각한다. 무력을 통한 지배력 확장보다는 물산거래를 통한 경제영토 확장과 상생이 장기적으로 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읽다보니 요즘 한국 사회에서 제일 큰 이슈로 등장한 문제가 생각난다. 마주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제 말만 떠들면서 서로에게 불통의 책임을 떠넘기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이 문제가 하루라도 빨리 해결되기를 바라는 수많은 이들을 떠올려 제발 상생의 의미를, 그리고 담덕의 '전쟁이 아닌 평화 지향 의지를 통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삶의 철학'을, 숙고하기를 바람한다. 


물론 소설적이고 감상적인 측면에서의 해석이지만, 담덕의 원대한 꿈이 애민정신과 부국강병에 있었다면, 왜국 대왕 오진이 품은 대륙의 꿈은 모후의 한풀이를 핑계삼은 개인의 욕심과 아집이다. 당장 8권에서 등장한 지도자들(탁발규, 사륜, 오진)의 면면만 보더라도 흥망성쇄의 길에 지도자의 역량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여실히 보여진다. 소설에서 담덕의 초원로 역참제도를 살펴보면 그야말로 이상적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원활한 교역과 서비스, 현지 주민의 자립과 안전, 그리고 지역 발전까지 염두해 둔 설계와 넓은 시야는 지구촌 세계화를 부르짖는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자질이 아닐까싶다. 



8권에서는 유독 놀이 문화와 설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강강수월래, 선녀와 나무꾼, 주몽 신화, 세오랑 세오녀, 태극과 오방색, 굿과 신물 등의 토속신앙, 호국불교 등 동북아를 아우르는 정서가 두드러진다. 근거가 뒷바침하는 사료와 허구적 상상이 어우러져 이런 부분에서의 읽는 재미도 적지 않다. 



위에서 언급했듯 아마도 9권은 고구려를 상대로 왜국과 백제가 연합해 일으킨 전쟁이 주요 내용이 될 듯 하다. 그 전쟁의 결말이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이미 알고 있지만, 담덕을 마주하게 될 해평의 심정과 그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도 꽤 재미있는 포인트가 될 것 같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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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더링 하이츠 (리커버) 을유세계문학전집 여성과 문학 리커버 에디션
에밀리 브론테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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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대로 가독성 하나는 탁월한 소설이다.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는 즈음에 처음 읽었을 당시, 번역이 매끄럽지 않았음에도 서점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반나절 만에 거의 다 읽다가 뒤로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샀었더랬다. 하물며 지금은 번역까지 부드러우니 그야말로 책장이 죽죽 넘어간다. 


먼저 이번에 읽으면서 사이사이 놀랐던 지점은 등장인물들의 나이가 너무 젊다는 것. 캐서린, 프란시스, 이사벨라, 힌들러까지 모두 이십대에 죽음을 맞았다. 출산 과정에서 죽은 두 여인이나 술독에 빠져 제 인생을 마구잡이로 던져버린 힌들리 등 그들이 고작 이십대 중반(혹은 그 이전)이었다니. 그들보다 조금 더 산 에드거가 죽은 나이는 서른아홉 살. 거기다 두 주인집을 오가며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상황을 대처해 온 엘렌조차 힌들리와 동갑이다. 두 번째 읽었을 때에도 그들의 나이를 크게 염두해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혀 기억이 없는 걸 보아서는. (에밀리 브론테가 이 소설을 집필한 나이가 스물여섯 살, 그리고 폐결핵으로 사망한 나이가 서른 살이다. 작가조차 너무 젊었다.)  





 
이제 소설 얘기를 해보자.
나는 그동안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을 사랑했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당장은 그들에게 질투와 애증은 있지만 '사랑'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물들 저마다 제 방식대로의 사랑을 주장하지만, 그 사랑의 실체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권위적이며 강압적이다. 


등장인물들 중에서 독보적인 존재는 단연코 히스클리프다.
히스클리프를 지금 기준으로 단정하면 그는 범죄자다. 스토킹, 납치, 감금, 가스라이팅, 사기, (성)폭행, 아동 학대 및 미성년 폭행 등 꼽자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오해에서 시작된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지독하고 잔인하다. 캐서린에 대한 집착 역시 사랑보다는 복수에 가깝다. 그 복수의 대상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경계가 없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학대했던 사람은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아이들까지 약점을 잡아 복속시켜 모멸감을 안기고, 아무 죄가 없는 어린 아이들의 인생까지 망가뜨렸다. 또한 변호사를 매수해 죽은 에드거를 캐서린 옆에 안치하지 못하도록 끝까지 악행을 저질렀다(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에드거가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복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기탱천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에드거가 무슨 잘못을 했나!). 소설 내내, 협박과 폭력과 거짓과 애원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히스클리프를 보고 있으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인데, 그야말로 악의 화신이라고 할만하다. 그의 이 크고 깊은 복수심의 원인은 무엇에 기인한 걸까. 


읽으면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인물은 캐서린이었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종잡을 수 없는 캐서린의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캐서린이 에드거의 청혼을 받아들인 이유를 읽어보면 그녀는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는 선택의 불안이 무엇에 기반한 것인지를 전혀 모른다. 에드거를 분명히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의심이 솟는다. 그리고 힌들리가 히스클리프를 비천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에드거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는 건 지체를 낮추는 일이 되고 말았다고 변명하면서 히스클리프와는 하나의 영혼이고, 에드거와는 아주 다르다고 말한다. 심지어 남편될 사람이 히스클리프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한다면서 남편을 통해 히스클리프의 입신을 돕겠다는 계획까지 세운다. 그녀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뿌리이자 근원이고 캐서린 자신과의 합치라면, 에드거 린턴에 대한 사랑은 계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잎사귀와 같다. 결국 두 남자를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얘기인데 그야말로 자기중심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을 고수한 캐서린에 의해 히스클리프의 그녀에 대한 집착과 분노, 그리고 에드거를 향한 증오가 더 고조된 건 아닐까싶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여러 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 
예민함은 물론이고 감정을 제어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며, 스스로 주체하지 못할 때에는 정신착란까지 일으킨다. 폭발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한 사람은 자해하고, 다른 한 사람은 폭력을 휘두른다. 두 사람은 거울처럼 서로에게 자신을 투영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혼을 공유한,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샴쌍둥이처럼. 그래서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의 죽음을 통보받았을 때 죽은 캐서린을 향해 애도가 아닌 "고통을 맛보며 눈을 뜨기를! (p268)"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이유 역시 자신의 죽음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에드거를 향한 히스클리프의 증오가 납득이 안 될 정도로 컸던 이유 역시 같은 연장선인 듯 하고. 한편으로는 아무도 사랑할 줄 모르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히스클리프가 이 소설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인 것 같고.  


히스클리프는 스스로 오직 캐서린의 사랑만을 원했다고 주장하겠지만, 어쩌면 그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끝없이 욕망만을 거듭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ㅡ 


이 소설에서 '어른'의 모습에 가까운 사람은 에드거 린턴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때로는 한 발 물러날 줄도 알며 기다릴 줄도 아는 사람. 자식과 조카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지난날의 원수 관계는 문제 삼지 않는 사람.   


에드거와 힌들리는 둘 다 아내가 출산 과정에서 죽음을 맞지만  두 사람은 다른 길을 선택한다. 힌들러가 자기 연민에 빠져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유기하고 자신을 포함해 아들까지 절망과 불행에 던져버렸다면, 에드거는 고독의 시간을 통과해 태어난 아이를 새로운 희망으로 삼았다. 그리고 에드거는 캐서린의 시신을 교회 안 린턴 가문 혹은 언쇼 가문의 묘지가 아니라 교회 공동묘지 한구석의 푸른 비탈에 묻었다. 그리고 에드거도 죽은 뒤 그곳에 묻혔다. 에드거는 아내와 자신의 묘지를 왜 가문의 묘지가 아닌 공동묘지의 한적한 곳을 택했을까? 어쩌면 죽어가는 와중에도 히스클리프를 걱정했던 아내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사족으로, 굳이 힌들리를 변명해보자면, 유년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 것도 모자라 더부살이 소년에게까지 치이고 굴욕감을 느끼며 성장한 그의 결핍을 채워주고 행복을 안겨준 아내는 힌들리에게 있어서 아버지이자 인생의 동반자이자 큰 의지처였을 것이다. 아마도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죽음으로 그치지 않았을듯하다.  


ㅡ 


친아들을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의 상속을 받기 위한 도구로만 여겼을 정도로 히스클리프는 언쇼와 린턴, 두 집안을 결딴내기 위해 인생을 다 바쳐 맹렬히 노력했으나 물거품이 됐다. 그가 캐서린을 제외하고 비록 한조각이나마 마음을 내준 사람이 그토록 증오했던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더구나 그가 무자비하게 쟁취한 두 집안의 재산 역시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간 셈이니 히스클리프의 인생은 허망하기 그지없다(더구나 두 아이 모두에게서 캐서린의 얼굴이 보인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그만 끝내고 싶다는 그의 마음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모를 수 없다.  



19세기 초, 20대 여성이 보여준 인생의 통찰이라니. 
다시 읽지 않으면 어쩔 뻔 했나. 
​이 소설을 사랑과 복수의 서사라고 단정할 수 없다. 아직도 그렇게 알고 있는 독자라면 다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또 사족.
발췌문은 아내를 잃고 광기에 흔들리는 힌들리의 울부짖음이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이 문구가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모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축배의 잔을 마시는 자와 내려놓는 자로 갈릴 뿐. 




※ 출판사 지원도서

"내 영혼의 온전한 파멸을 위해서 축배를!"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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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켜진 자들을 위한 노래
브라이언 에븐슨 지음, 이유림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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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환상, SF, 미스터리의 경계가 무색하게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공포와 그 이상으로 극단적인 현실을 풍자적으로 꼬집는 기괴하고 독창적인 소설집이다.  
 





​각각의 소설들은 독립적인 작품이지만 마치 연작처럼 공통된 소재를 통해 이어진듯한 구성상의 설정들이 자주 눈에 보인다. 빈 집과 구멍, 탑, 우주선 등 어둡거나 밀페된 장소, 특히 외부와의 단절과 고립, 동시에 인간의 간절함을 상징하는 문門은 독자의 공포감을 극대화한다. 또한 '새어 나오다', '세상의 매듭을 풀기 위한 노래', '두 번째 문', '빛나는 세계', '태어난 사산아' 등에서 등장하는 인간 가죽이나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은 인간이 갖는 자아존재감과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혹은 인간의 몸을 갖기 위해 인간을 삼켜버리는 존재들에 대한 잔혹 동화같은 이야기들은 허구에 그치지 않는다(따지고 보면 인간의 역사야말로 먹고 먹히는 아비규환이 아니던가).   


'룸 톤', '메노', '트리거 경고', '방랑의 시간' 외에도 여러 작품에서는 인간의 광기와 망상과 욕망, 불안감에 대해 쓴다. 편협한 고정관념과 집요한 가스라이팅, 잠재되어 있는 인간의 폭력성을 섬뜩하게 그리고 있는데 영화적 장치를 이용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의 폭력성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점이 인상적이다.  



불안의 기저에 근거가 있든 없든 현대인은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살고, 불행에 익숙해진 인간은 불행이 없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스스로 불행을 만들어 안심한다. 인생에 있어서 끊임없이 강요되는 선택에 대한 결과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늘 불안하다. 그 불안감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임을 알면서도 초연해질 수 없다. 이렇듯 작가는 우리의 본능과 딜레마를 몸서리쳐지도록 공포스럽게 그려냈다.  



1990년대 <블레이드 러너>같은 B급 영화같은 느낌도 있고, 오컬트 영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 소설집이 막연하게 느껴진다면, 우리나라 작가 중 정보라 작가와 비슷한 결이 아닐까싶은데, SF요소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단편소설 스물두 편이 모두 독특하다. 소설에 삼켜지지 않도록 주의하시길.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방랑의 시간>. 오랜 시간을 방랑한 후 주인공 라스크가 깨닫는 것. 그리고 새삼스러운 깨달음에서 오는 탄식.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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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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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인물인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삶을 모티브로 한 두 편의 연작 소설이다.  


후원을 받아 독일의 미술학교로 유학 온 라스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가라고 자화자찬하지만 스승 한스 구데의 평가를 받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다. 미술학교에서 평가가 있는 날, 하숙방에서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라스의 모습에서 출발하는 소설은 시종일관 갈등과 혼란의 연속이다. 이는 그림뿐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여인 헬레네를 대하는 태도 역시 비슷하다. 집착의 대상인 동시에 확신과 불안의 사이에서 고뇌와 혼란을 반복한다.  






 
소설에서는 상징성을 띠는 소재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 
희고 검은 천,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 종교, 말카스텐, 문門, 눈目, 빛, 그리고 헬레네. 라스와 그의 누이 올리네의 심리를 드러내는 이 장치들은 내용과 인물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많은 부분을 차치한다.  


문구 자체에 이미 모순을 띤 희고 검은 천은 불안과 혼란에 직면했을 때와 이를 피하고 싶을 때 라스의 눈앞에 나타나고, 코듀로이 양복은 라스의 삶이 바뀌는 전환점이자 벗어나고 싶어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족쇄같은 존재다. 자신이 가난한 이방인 즉 비주류이자 아웃사이더를 상징하는 퀘이커교인임을 끊임없이 되뇌이는 라스는 모든 문들이 두려움의 대상이다. 주류의 공간인 말카스텐의 문턱도, 헬레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하숙집 대문도,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 내딛어야하는 자신의 하숙방 방문도, 그에게는 그 어떤 산보다 높았을 것이다. 그래서 라스가 정신병원에서 행하는 자위 행위와 올리네가 마지막까지 참으려고 애썼던 배설은 그들이 억눌러야만했던 욕구를 대변한다.  



소설이  Ⅰ- Ⅱ 로 넘어가는 사이에 언뜻 보기에는 불필요해 보이는 비드메의 이야기가 짧게 서술된다. 
소설 속 작가 비드메는 욘 포세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로 읽힌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드메와 라스는 같은 연장선에 있다. 주류 종교 및 사회와 단절되었다가 다시 유대를 잇고 싶어하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헬레네와 마리아의 유사성이다. 마리아는 비드메에게 비스킷과 차를 대접하고 옷을 말려준 사람, 즉 곤경에 처하고 단절된 비드메에게 손을 내민 사람인데, 헬레네 역시 독일에서 라스에게 손을 내밀어준 유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마리아가 머무는 곳은 목사관으로서 그녀 자신의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는데, 헬레네가 어머니와 삼촌의 영향력 아래에서 억압받는다고 여기는 라스는, 어쩌면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병원에서 라스의 유일한 바람이 헬레네를 데리고 고향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고.   




그렇다면 작가는 라스의 삶에서 무엇을 보았고, 치매 노인 올리네의 삶 끝에서 그가 하고자했던 말은 무엇일까.
인간의 삶은 정도의 차이일뿐 늘 불안을 안고 살며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혼란을 반복한다. 삶은 평온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죽음으로써 인생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온전한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헬레네를 데리고 고향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바람을 말하는 라스가 너무나도 애처로와 나도 모르게 울컥했고, 수치스러움을 느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힘겹게 하루를 보내고 모든 것을 쏟아낸 올리네를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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