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의 노래·아이와 전쟁 책세상 세계문학 7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 / 책세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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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두 편이 실려있다. 그의 유년 시절을 있는 그대로 담았기에 에세이 혹은 회고록이라고 할 수 있겠고, 서술 형식은 소설처럼 쓰여져 있어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아이와 전쟁] 


1940년에 태어난 직후부터 5년간 전쟁을 겪은 아이였던 이가 전하는 이야기다.  


그가 기억하는 전쟁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폭력(폭격)'이다. 그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민간인을 향해 폭탄을 투여하는 영샹을 보면서 비오듯 쏟아지는 폭탄 아래에 있을 아이들을 생각한다. 


작가는 사람들이 보통 전쟁에 대해 언급할 때 대체로 희생, 승리, 용기, 지휘관의 능력, 전쟁을 통해 얻은 가치 등을 찬양하지만, 여자나 아이들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음을 짚는다. 그들에 대해 말할 때는 인명 피해 혹은 민간인 학살 등의 참화를 이야기할 때뿐이다. 최근들어 군사작전에서 발생하는 무고한 민간 피해를 의미하는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쓰면서 여성과 아이들은 피해자라기보다는 부수적인 요소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문득 든 생각,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해결되지 않은 여타 많은 사건 사고와 과거사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피해자'라기 보다 '부수적 요소'로 인지되어서일까(생각해보면 피해자가 거의 다 여성과 미성년자다)?  


작가가 어린 시절 전쟁 중에 경험한 허기. 이는 해결이 가능한 배고픔이 아닌 채울 수도, 충족시킬 수도 없는 공허함에서 오는 허기다. 그런데 오늘날 과잉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 공허라는 허기가 해결됐을까. 전쟁과 결핍의 시대에 몰아닥쳤던 공허감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건지... . 


유년 시절에 겪은 전쟁의 폭력적인 경험을 통해 전쟁으로 인해 생긴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한다는 것을 사실적이고 절박하게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 곳곳의 전쟁 피해 아동 역시 이 공허와 단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전쟁 중에 태어난 아이는 결코 아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어른의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 아이들은 얼마나 긴 시간 동안을 공허와 허기와 상실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며, 그것들을 지우는 데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야할까. 



ㅡ 
 


[브르타뉴의 노래] 


작가는 유년기를 보냈던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마을 생트마린을 추억하고, 독자는 화자의 안내에 따라 그의 경험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 글은 단순한 회고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추억담에 그치지 않는다. 그 이면에 있는 생트마린의 변화를 반추하며 현대인들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오래 전 마술과도 같았던 힘과 용기, 연민과 유대감, 그로인해 때때로 찾아오는 환희의 순간이 지금을 사는 우리들의 삶에 스며들어 살아나기를 바람한다.  


브르타뉴는 두 개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통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져 사람들에게 잊힌 브르타뉴, 향락과 쾌락이 들끓는 현대적 브르타뉴. 그리고 몇 년 후 건설된, 그 둘을 잇는 코르누아유 다리. 이후 생트마린의 모습은 차츰 변화한다. 아마존처럼 거대하고 야생적이었던 강은 사람들의 뱃놀이와 주차장 시설 때문에 리아스식 해안으로 변했고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도시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작가는 프랑스 내에서 브르타뉴의 지리적 위치와 민족성, 그리고 역사에 대해 문학적으로 이야기한다. ​
언어의 소멸과 문화적 동화. 이제는 사라진 브르타뉴의 말言. 르 클레지오는 그들에게(아니면 스스로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묻는다. 국가 통일을 기조로 국가적 교육 강령으로 브르타뉴어 사용을 금지하자, 브르타뉴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이 사라지는 것을 (대부분) 수용했다. 그 언어를 사용하면 지긋지긋한 가난과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복장과 헤어, 생활 양식, 축제 및 문화 등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든 표시들이 사라져갔다. 브르타뉴 지방에서 다수자였던 그들은 스스로를 문화적 소수 집단으로 전락시켰다. 



그는 과거 브르타뉴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기억해 서술하며 독립적인 시대, 그리고 용기와 기개가 있던 시절이 사라져가고 모든 것이 획일화 되어 삶의 생기를 잃어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고향을 떠나 공장 노동자가 되기 위해 도시로 떠나는 젊은이들. 더 이상 가업을 잇는 이도, 고향을 지키고자하는 이도 없는 생트마린. 살충제에 의한 생태계 파괴, 전쟁의 상흔, 상실된 연민과 인간성, 오래된 것과 낡은 것에 깃든 시대정신과 유산의 가치를 폄하하며 물리적 효용성과 손익비용에만 기준을 두는 세태, 나약함과 무력함으로 치부되는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 



작가는 브르타뉴의 역사와 현재를 통해 극단주의 정당들의 포퓰리즘과 이민자 혐오 등을 꼬집으며 브르타뉴 지역의 자치권을 언급하면서, 이는 민족주의가 아닌 자유를 의미함을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 점차 복구되는 땅, 자연, 문화, 정체성에서 희망을 본다. 그의 희망이 브르타뉴에 한정된 것은 아닐테다.  


한때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음의 장소가 사라져가고 변해가는 것을 보며 마치 보물을 도둑맞은 느낌처럼 마음이 흔들렸다는 작가의 말이 깊게 공감된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가슴 속에 간직할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사진 한 장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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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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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918년 아일랜드 독립전쟁과 내전을 배경으로 시작하면서 가슴 아픈 역사를 통해 두 가문의 운명적인 인연과 한 집안의 비극사를 그리고 있다.  


1919년, 아름다운 페르모이의 킬네이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던 어린 소년 윌리 퀸턴은  블랙 앤드 탠즈 군인들의 광기어린 무장폭력과 학살로 인해 아버지와 두 여동생을 잃고, 어머니와 단 둘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때마침 휴가 중이었던 두 고모들은 무사했으나 어머니는 그때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채 살아간다. 우울한 유년 시절 끝에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이모와 사촌 메리앤. 메리앤은 그에게 킬네이 시절의 행복감을 상기시켜주는데, 이 만남은 또다른 비극의 시발점이 되고 만다.  








윌리, 메리앤, 이멜다 각각의 관점에서 시간의 순서대로 서술한다. 
18세기 후반, 아일랜드의 퀸턴가家 남자와 결혼한 영국 여성 애니 우드컴으로부터 서사가 시작된다. 1916년 아일랜드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 여전히 진행 중인 혁명에 대한 논쟁들은 남지만, 격동의 시기에 피를 흘리며 살아간 사람들은 서서히 잊혀진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립, 가톨릭교도와 신교도의 대립, 약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여성의 위치 등 작가는 역사적 사실과 세 등장인물의 개인적 삶을 엮어 시대의 역사와 개인이 별개일 수 없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고통스럽고 가혹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는 이들이 건네는 용기가 독자의 가슴을 묵직하게 울린다.  


선의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칼이 되어 돌아와 한 가정을 파괴하고, 예측이 가능한 평안한 미래를 냉기 서린 잔혹한 운명으로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킬네이로 돌아가고자 무던히도 애썼던 노력은 허망한 물거품처럼 무의미해졌다. 온 몸, 온 마음을 다한 사랑조차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랑으로 견디고 버텨진 하루하루 역시 삶이 되고 역사가 된다. 


혹독하게 추운 2월의 겨울날에 임신한 몸으로 아무도 없이, 불편한 존재가 되어 페르모이에 내던져진 메리앤의 감정은 상상만으로도 막막하고 아득하다. 사라지고 싶어도 사라질 곳이 없고, 에비와 같은 용기조차 낼 수 없으니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겠나.   


불쾌할 정도로 한편이 되어 메리앤에게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압박하는 페르모이의 사람들의 권유가 무엇이었는지 책을 덮고 난 후, 내 나름으로 짐작해본다. 보호. 혼란의 시기에 윌리를, 나아가 윌리가 사랑한 여인을,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주고 싶었던 그들의 한결같은 마음. 조국을 지켜내려했던 아일랜드인들의 마음도 이와 같은 건 아니었을까. 



진실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과연 상처가 될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우리에게, 혹은 나에게 있는지 자문한다. 한평생 짐이 될지도 모르는 그 진실이 가져다줄 파장과 모순을 납득하고 이해할 용기. 윌리와 메리앤의 선택은 불가항력이었나 무모한 치기였나. 


메리앤에게서 <펠리시아의 여정>의 펠리시아가, 윌리에게서 <루시 골트 이야기>의 루시가 떠올려 진 이 소설은 내가 읽은 윌리엄 트레버의 모든 작품 중에 가장 비극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십 년의 긴 세월을 통과하고 얼굴을 마주한 그들은 아마, 나와는 다른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사족 
기브바첼러가 눈앞에 있었다면 주먹이 먼저 나갔을 것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내 존재의 모든 세부, 내 몸의 모든 혈관, 모든 흔적, 내 모든 친밀한 부분이 눈을 감고 쓰러지고 싶게 만든 그 부드러움으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킬네이에서 난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당신이 이 세계를 떠도는 동안 난 어떤 가혹한 운명에도 살아남을 겁니다. 외로움이 당신을 사로잡았다는 걸 난 이해합니다. - P264

난도질당한 삶들, 그림자의 피조물들, 그의 아버지의 말처럼 운명의 꼭두각시들. 우리는 유령이 되었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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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
신다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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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산재 중에서도 '사고 산재'에 집중한 이 책은 그나마 알려진 산재 사망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파악해 그 기저에 기업 조직의 어떤 관습과 인식이 있는지 탐구하고, 연간 수백 명에 달하는 산재 사고 사망자의 조사자료가 공개되지 않는 이유와 이를 드러내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 알아보는 것에 목적을 둔다.  


책에는 실제 산재 사례들을 통해 그 사고들의 원인과 처리 과정, 이에 따라 드러난 여러 문제점들과 앞으로 해결해야할 사회적·제도적 숙제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안전한 일터를 구축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야하지만 노동 안전 문제에 깊이 개입하기 어려운 노조의 구조적 문제와 추적보도에 소홀한 채 단신 보도로 끝내고마는 언론의 무관심, 산재 사고 발생시 사고 원인 및 진상 규명의 부재와 기업에 대한 솜방방이 처벌 등을 짚는다. 







 
평택항 산업 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이선호 씨의 아버지는 산업안전보건법이 아주 디테일하게 잘 만들어놨다고 했다. 그런데 사업주들이 법대로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은 '누구든지 중대재해 발생 현장을 훼손하거나 노동부의 원인조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실상은 안전상의 잘못을 슬쩍 바로잡거나 현장 주변을 치워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이선호 씨의 사고 원인을 되짚어가다보면 현장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작업 수칙이나 안전교육 및 관리 부실, 관리 및 책임자의 부재, 일관되지 않은 인력 관리, 실제와 다른 형식적인 작업계획, 마구잡이 지시 관행, 시설의 노후화와 이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은 '안전전검사업자'의 부실 점검, 행정 관료들의 안이한 대응 문제 등 구조적 원인을 비롯해 여러 문제점들이 줄줄이 엮여져 드러난다. 



공장, 지하철 스크린 도어, 에어컨 실외기, 전봇대 전기선, 물류창고, 도로 위 등 노동 현장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산업재해는 현장만 다를뿐 근본적인 문제점은 평택항 산재사고와 유사하다. 구조적인 문제와 원청의 횡포, 안전 수칙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인 작업량과 노동 환경, 위험에 대한 정보 공유 부재는 노동자(특히 하청 및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사지로 내몰고 있다. 


산재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 어떤 실수를 했는가'가 아닌 '사고를 촉발한 구조가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즉 몇몇 사람의 과실이 아니라 사고를 유발한 시스템에서 문제를 찾아야한다. 



덴마크의 안전 공학자 에릭 홀나겔에 따르면 안전관리를 비용으로 인식하는 구조에서는 사고가 났을 때야 비로소 안전 예산의 쓸모를 인정받는다. 그래서 예산의 쓸모를 판단하는 기준이 재해 건수가 아니라 평균적 안전 수준에 기반해야하고, 무엇보다 위의 두 관점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국내 기업은 전자조차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지만. 시간이 곧 돈이 되는 국내 수주산업의 구조 하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안전 수칙 불이행과 '작업자 과실'이라는 방패막은 산재 사고가 날 때마다 언급되는 단골 레퍼토리다. 저자의 말처럼 산재는 누군가의 '실수'가 아니다. 



정리해보면, 산재 예방을 위해서는 위험 요소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 안전 장비와 보호구 제공,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눈높이 안전 교육, '설마'라는 인식의 전환, 중소(영세)기업의 안전 관리 역량을 키우기 위한 현실적인 제도적 지원, 산재사고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사회적 소통의 강화, 정부의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역할 등이다. 써내려가면서 이  당연한 것들이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 씁쓸함과 답답함이 내내 가슴 한구석에 자리했다. 


ㅡ 


안전 공학자 제임스 리즌은 아무런 노력 없이 생산과 안전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통상 이윤이 안전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생산과 안전은 본질적으로 서로 충돌한다. 생산 활동의 규모가 커질수록 안전 조치도 그에 상응해야하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안전수칙과 이와 관련한 자원은 주기적으로 검토하고 노동 환경에 맞게 개선해야한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많은 기업들이 산재를 은페 및 누락한다. 깊게 뿌리 내린 잘못된 관행은 여전하고, 이에 있어서 안전관리를 실무자에게만 맡겨놓는 노조도 예외는 아니다. 현장의 업무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아는 노조의 역할은 안전한 일터를 구축하는 데 상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평택항 사고에 관련한 책임자들은 법정에서 모두 집행유예를 받았다. 노동자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집행유예에 그친 이유는 산재가 고의로 한 살인이 아니라 과실이라는 사회적 시선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대부분의 법정에서 산재사고가 과실치사의 범주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무거운 형량을 내리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읽다보면 의문이 든다. 물론 기업이나 인력 책임자들이 의도적이고 '고의적' 인 살인을 저질렀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충분히 사고발생 확률이 높고, 그 사고가 노동자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방치했다면 살인과 다를 게 무언가.  


현재 우리는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건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전자와 후자의 관점을 누가 어디에 두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안전을 경영의 중심에 놓아본 적 없는 기업이 생산효율을 최우선으로 추구할 때, 노동자가 죽는다. 



어떤 형태로든 국민 대부분이 사실상 노동자다.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의 위협을 받는다. 무한 경쟁 속에서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세태에 적어도 일하는 현장에서 보호받지 못한 채 언제든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은 없어야하지 않을까. 산업재해 피해자의 서사는 누구에게도 쓰여질 수 있음을, 그러니 무엇이 우선해야하는지를 우리 모두 인지해야할 것이다. 




사족
1. 3장에 보면 비슷한 사고 사례를 둔 두 개의 <재해의견조사서>를 볼 수 있다. 하나는 미국 재해조사기관인 NIOSH의 2023년 2월에 작성해 배포한 사고 보고서의 일부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안전보건공단이 작성한 재해조사의견서다. 읽어보면 명확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접근하는 시각 자체가 다르다.


2. 영국 행정기관인 안전보건청(HSE)의 산재 유가족을 위한 안내서 일부를 보면 현재 한국 사회가 산재 유가족을 대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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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루스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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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약제사이자 치료사에서 시작해 순례자였다가 성자가 된 아르세니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인생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평생을 속죄하며 구원을 갈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환상적이면서도 때로는 처절하게, 때로는 아름답게 서술하면서 언어, 역사, 신앙과 종교, 시간의 영원성, 존재의 가치, 우주의 질서 등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한다 







순전했던 아르세니가 처절한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은 우스티나의 죽음이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환자를 치료하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 이후 그가 고단한 여정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일평생 감내하며 삶을 이어가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우스티나와 죽은 아기의 구원이다. 


소설에서 아르세니는 마치 예수가 다시 현현한 것처럼 읽힌다. 그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기적을 일으킨다.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빵을 나누어 주고 몸에 걸친 옷 한 장부터 그의 사랑과 헌신, 동정과 연민, 심지어 신체의 손상을 무릅쓰면서까지 바닥까지 긁어내어 전부를 준다. 아픈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모든 헌신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고, 죽음에 이른 사람의 영혼은 안식처로 인도한다. 그가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구원의 길이 된다. 그것이 비록 삶의 길이 아닐지라도. 아르세니의 헌신은 우스티나와 죽은 아기를 향한 사랑과 동일 선상에 있다. 아내와 자식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지우고, 영혼의 안녕과 구원을 위해 방랑을 하는 아르세니의 어깨에 얹혀진 짐은 너무나 무겁다.  


ㅡ 


소설이 중반에 접어들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재미있는 가정이 나오는데, 콜롬보와 아메리고 베푸스치의 신대륙의 발견과 루시에서 예견되는 세상 종말론의 연관성이다. 만약 신대륙 발견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진행될 세상 종말의 시작인지를 묻는 것, 그리고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렇게 발견한 대륙에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냐는 물음은 무엇을 겨냥했는지 생각해볼만하다.  


또다른 부분은 아르세니와 예지몽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예언자 역할을 하는 암브로조가 함께 여정에 오르면서 소설은 중세와 근현대를 넘나든다. 더하여 이 두 인물의 배치 역시 인상적인데 아르세니가 예수에 가까운 성자라면, 암브로조는 보통의 인간이 갖고 있는 모습을 대변한다. 세상의 종말보다는 나 자신의 죽음이 더 두렵다는, 그리고 이 생이 아니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살고 싶다는 암브로조의 고백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작가가 소설에서 외로움을 다루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타인과 교감이 가능할 때의 고독은 그 자체로 충만할 수 있지만 신뢰와 교감이 사라져 정서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에서의 외로움은 두려움을 불러온다. 소설은 내내 아르세니가 인간 세상을 초월한 성자로 그려지지만 세상이 그를 외면하고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데에서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드러낸다.  


아르세니가 베네치아 도착해 산마르코 광장에서 성당 기둥 사이에 지쳐서 앉아 있는 라우라라는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화하듯 말하지만, 사실 서로의 언어가 달라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데 마치 두 사람은 알아듣는다는 듯이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간다. 이 대화의 본질이 언어를 넘어선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사랑임을 말하는, 그래서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한 부분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의미 있는 숫자 '7'. 아르세니와 관련한 대부분의 날들은 7일이라는 기간을 거친다. 소설이 러시아 정교회를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싶다.  


ㅡ 


처음 길을 떠난 순간부터 아르세니는 수시로 죽은 우스티나에게 말을 한다. 두 사람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기에 자신의 내면에 우스티나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이 곧 두 사람의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아르세니의 진정한 대화 상대는 죽은 아내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라우루스가 명예를 훼손 당하고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내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희생이 전부였을까. 나는 그가 아나스타시야에게서 우스티나를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저어해 아내와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한평생 그의 족쇄가 되었던 죄책감.  


치료사이자 순례자요 성자였던 라우루스의 울음은 슬픔, 기쁨, 안타까움, 후회, 연민, 그리고 감사를 나타내는데,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고 있다. 행복뿐 아니라 시련과 고통까지 감사와 희망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평안해지려나. 
(그렇게 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욕망덩어리들이지.) 



아르세니는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더럽고 지저분한 옷을 입고서야 자신이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들의 통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통증이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다. 누구도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라우루스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도래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아닐까. 




※ 출판사 지원도서
 

"움직임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라 옳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어렵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알 수는 없을 테니까요. 내 생각에 시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우리가 혼돈에 빠지지 않기 위함인데, 인간의 의식은 모든 사건을 동시에 기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나약함으로 인해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 P345

저는 아르세니였고, 우스틴이었고, 암브로시우스였으며, 이제는 라우루스가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제 기억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저는 서로 다른 시대에 저였던 사람들과 저를 더 이상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삶은 모자이크와 유사해서 여러 조각으로 흩어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P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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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애덤스의 비밀스러운 삶
부스 타킹턴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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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이자 세계대공황이 일어나기 전, 경기 호황과 풍요가 절정에 이르고 있는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물질만능의 세태를 애덤스 집안 사람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버질 애덤스는 애사심으로 똘똘 뭉쳐진 스스로 잉여 인력이 아니라는 자부심으로 회사와 사주에 충성하고, 애덤스 부인은 집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모든 원인을 가난으로 돌리고 자식들만큼은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며 남편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를 닥달한다. 애덤스 부부는 계급 사다리를 타고 상류층으로 진입하고자 발버둥치는 당시 서민층 중년 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들의 아들 월터는 가식적인 상류층 사교계를 혐오하고, 어머니나 누나와 달리 아버지를 고용한 사람(과 그의 가족들 및 주변 인물들)을 단 한 번도 친구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그들을 '냉동 인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적대시한다. 하지만 월터 역시 돈 문제에 있어서 다른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혐오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와 욕망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인물은 주인공 앨리스 애덤스다. 소설 초반, 스물두 살 앨리스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는 무례하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만나는 사람을 다 제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으며, 자신이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머니와 동생을 폄하하고 모욕을 주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또한 아버지는 그저 잘 달래야하는 병자 정도로 치부한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책장을 넘길수록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앨리스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난다.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족함 없는 집안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린 여자'라는 가면을 쓰고, 뭇남성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연기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을 자책하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위로하고, 아버지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제 인생을 우선하는 월터의 이기적인(사실 정당한 거지만) 태도에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 밑바탕에는 자신이 우월한 사람으로 베푸는 아량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또한 서슴없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행위에 자괴감을 느끼고, 순간순간 스스로 자아감에 대해 고민한다. 앨리스는 당시 상류층 진입을 욕망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기를 갈망하는 여성의 여러 측면을 보여주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소설에서 한 축을 이루는 요소는 '윤리'다. 가난으로 인해 비참한 처지에 내몰린 가족과 회사 기밀 사이에서 버질 애덤스는 갈등한다. 거짓말로 시작된 러셀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갈수록 정교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에 대한 앨리스의 때늦은 후회. 자식의 삶을 명분으로 삼으며 돈 앞에서는 도덕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듯 남편을 닥달한 애덤스 부인. 자유로운 삶을 주장하고 상류층 사람들을 혐오하지만 결국 돈이 갖는 허영과 욕망의 덫에 무릎을 꿇고 마는 월터. 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다른 형태로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코미디같으면서도 한없이 서글픈 것은 앨리스와 버질 애덤스의 불안이다. 버질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벌이는 것에 대해 램브 사장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집착하면서 늙고 위엄있는 사장과 마주치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한다. 앨리스는 러셀이 사교계에서 험담이든 칭찬이든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들었는지 묻지만 사실 그녀를 언급한 사람은 없었고, 따라서 앨리스와 애덤스가에 대해 들은 얘기도 전혀 없다. 앨리스는 사람들이 러셀에게 자신과 자신의 집안에 대해 이런저런 험담을 할까봐 전전긍긍하지만 정작 그녀가 동경하는 그들의 세계에서 앨리스는 안중에도 없다. 더구나 앨리스가 아서에게 자기의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 관해 하는 말은 듣지도 말라고 했던 당부가 오히려 앨리스의 발목을 잡은 꼴이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것은 애덤스 집안의 식구들은 타인뿐 아니라 가족에게조차 어떻게 보일까를 우선하고, 상대에 대한 자신의 짐작과 생각을 사실로 단정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진솔하게 나누거나 이해하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원망을, 누군가는 의미없는 동정을 토해낸다.   



많은 일들을 겪고난 앨리스는 비로소 자신을 진솔하게 들여보고, 보여주기식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용한 일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이 부분도 서글프게 느껴졌는데, 결국 돈으로 결정지어져 고착된 '계급'에서 개인의 노력은 허망할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앨리스의 그동안 '노력'을 더 나은 삶을 향한 노력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애덤스 남매가 기실 지금의 많은 젊은 세대와 다르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소설은 불행한 인생을 대변하는 곳으로 여기며 그토록 끔찍하게 여겼던 곳의 계단을 오르는 앨리스가 삶을 긍정하는 전환점이 될지, 불행의 나락으로 스스로를 내몰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더 이상 누군가의 눈에 비춰지는 삶에는 생명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적어도 그녀는 더 이상 인형으로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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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의 두 작품('앨리스 애덤스의 비밀스러운 삶', '위대한 앰버슨가')을 읽어보면 1920년대의 미국 사회의 전반을 그려내는 데에 있어서 그야말로 탁월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의 경제적 파탄이 일어나기 전의 풍요로운 사회에서 일어나는 폐해와 부작용을 지독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는 무엇인지를 짚어보게 한다.  


그의 소설이 매력적인 것은 어쩌면 원론적이고 뻔한 스토리가 돌 수 있음에도 무척 재밌다는 것이다. 소설의 중반으로 넘어가면 주인공이 맞이할 결말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부스 타킹턴은 당연한 결말을 닫아놓지 않는다. 반성하고 다른 삶을 살겠다는 그들의 다짐과 변화된 행동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장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자는 씁쓸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는 묘한 감정에 이른다. 1920년대 당시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납득이 되는 작품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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