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브 뉴 휴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7
정지돈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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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 한국은 인구 절벽을 해결하기 방안으로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제공받아 인공 자궁에서 출생한, 소위 체외인을 통해 노동력 문제를 해결한다.  


소설에서는 각각의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출중한 능력으로 일반인보다 더 성공한 체외인 아미,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체외인 현지, 세속적인 아버지를 혐오하는 일반인 철멍, 체외인에서 승격해 일반인이 된 기업가 리젠쿠이, 아날로그 생활 방식을 지향하는 저널리스트 아날로그맨, 가족과 공동체를 거부하며 젠더 파괴를 주장하는 혁명가 체외인 가나코.  





 


체외인은 인공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을 일컫는다. 인간의 신체 없이도 출생이 가능해진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정부는 법으로 규정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건강한 성인 남녀에게 의무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기증받아 무작위로 수정한다. 출생률 감소와 인구 저하로 국가 소멸이라는 위기에 봉착하자 만든 대안이었다. 체외인에게 유전적 부모가 존재하지만 생부 생모를 찾는 건 엄격히 금지되었다. 체외인의 부모는 국가이자 시스템이다. 양육, 교육, 사회화는 정부가 전담한다. 대신 체외인은 생명 전반에 대한 채무를 갖는다. 체외인이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면서 사람들은 생식의 압제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인공적으로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인간의 본질과 가족의 필요성에 대한 고민이 싹트기 시작한다. 


체외인이 사회의 일부가 된 이후 일반 국민들은 전보다 더 자연분만은 신성시했고 상류층일수록 가족을 중시했다. 체외인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인공체인 체외인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혐오한다. 정부는 체외인을 구분하기 위해 성인이 된 체외인의 오른쪽 손목에 식별 가능한 생체 바코드를 새겼다. 바코드에 관련한 어떤 행위도 금지되며 적발시 체외인의 존재는 말소된다. 


이 즈음까지 읽고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은 "왜?"였다(이 소설, 할 말 많겠다싶었다). 소설에서는 일반인들이 체외인을 두고 '제품' '노예' '가축'으로 표현한다. 체외인들이 지켜야할 조건과 환경, 그리고 철저하게 개인의 욕망을 억누른 법적 제한을 보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제외하면 '일반인'과 다를 게 하나 없는데 굳이 이토록 지독하게 제한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꿔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출생한 인간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가정을 책임지려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불행을 극복하거나 개척하지 않으려고 한다면(소설에서 체외인에 대한 설명이다), 그 인간은 일반인인가 체외인인가. 주어진 조건을 극복하고 삶을 개척하려는 체외인을 '일인', 발전에 무관심하고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체외인을 '이인'이라고 부른다. 이 전제를 우리에게 적용해보자. 나는, 당신은 일인인가, 이인인가. 이 조건대로라면 이인조차 되지 못하는 일반인은 현실에서 수두룩하다.  



​소설에서는 체외인이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는, 뿌리와 역사도 없는 인간이기에 그들에게는 의무감도 책임감도 정체성도 없다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과연 일반인들은 의무감, 책임감, 정체성이 확고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어떤 인간도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제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어쩌다 운이 좋아(그 반대일 수도 있고) 수많은 정자 중에 하나가 살아남은,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부모가 될 사람들의 의지와는 별개로(부모들 역시 자식을 선택할 수 없으니) 그야말로 우연으로 태어난 게 아닌가. 설령 체외인이 현실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존재의 필요성이 분명한 그들보다 살면서 끊임없이 혼란과 고민을 겪으며 삶의 방향을 수정해나가야 하는 일반인이야말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 증명해야하는 처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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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체외인과 일반인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는 이유로 체외인의 출산을 금지했다. 임신과 출산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므로 아무 존재나 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이에 따르면 체외인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인간을 어떻게 정의定義해야 할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자와 난자, 심지어 추후 발생할지 모를 질환을 대비해 제대혈까지 냉동 보관하는 시대다. 인공 수정뿐 아니라 합법적으로 정자를 기증받아 비혼모 출산이 가능한 나라도 있다. 심지어 소설에서 일반인 부부도 조건에 따라 인공 자궁을 사용할 수 있다. 사지 절단의 환자가 인공 팔다리를 착용하고 일상에 복귀하는가 하면, 동물의 장기를 이식하는 연구도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다. 그동안 많은 소설들이 '복제 인간'을 소재로 인권의 범위에 대해 이야기해왔으며, 얼마 전부터는 AI의 지적 소유권까지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하물며 자궁이 몸 안에 있든 바깥에 있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이런 시각에서 봤을 때 이 소설의 설정은 오히려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체외인'이라고 쓰인 자리에 다른 단어를 대신했을 때 전혀 괴리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난민, 이주민, 장애인, 성소수자, 빈민, 독거노인, 보호자 없는 미성년자,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소설에서 일반인의 임신과 출산은 '도덕과 윤리의 마지막 보루'라고 썼다. 도덕은 시대에 따라 인간이 만든 기준이다. 독자는 개인의 선택이어야할 아주 사적인 임신과 출산조차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에 냉소를 보낼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내미는 카드가 출산 장려금이다.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은 절대적이다.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혹은 입양하고) 양육을 장려하는 데에 있어서 돈을 우선하는 발상, 그리고 다자녀 가정을 애국자라고 칭찬하는 모습이 소설에서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밀어 출산을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리고 가족을 본질적인 가치로 여기며, 체외인처럼 가족이 결여된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여기지만, 현재 가족의 형태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그들의 기준으로 본다면 '완벽한 자격'을 갖춘 인간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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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우월해야 안정감(혹은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애써 비교해 구분하고, 차별할 대상을 만든다. 소설에서 체외인과 일반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소설이 진행할수록 모호하고 경계도 애매해진다. 일반인으로 승격한 체외인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체외인을 비하하면서도 그들보다 더 구차한 삶을 사는 일반인은 기꺼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감수하려 들까.


​한 사람의 정자에 수백만 아이를 기계로 찍어내듯이 출생했다는 점, 즉 생물학적으로 거의 동일한 인간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획일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읽혔다. 왜인지 우리네 삶이 소설 속 일반인보다 체외인의 삶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 같다. 




※ 도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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