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인의 사랑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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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라이프를 추구하는 가와이 조지는 카페 여급 열다섯 살 나오미를 데려와 자기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역할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그녀를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근대적인 하이칼라 여성'으로 만드는 게 목표다.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조지와 보답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대답하는 나오미와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집에서 나가라고 협박하는 조지. 영어 공부를 두고 대립하며 관계가 틀어지는 모습은 마치 부모와 자식처럼 보인다. 그런데 점점 더 육체적으로 여성미가 더해지는 나오미의 아름다움에 유혹당해 끌려다니는 조지, 나오미는 이를 아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소설에서는 나오미를 시대의 악녀처럼 묘사한다. 버젓이 남편을 두고 문어발식 연애는 기본이요, 무위도식하면서 조지가 벌어온 돈으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회 생활을 하는 남편까지 자기의 방탕한 생활에 끌어들여 타락시킨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지가 이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점이다. 물론 순간 화를 내고 결별 선언을 하지만 언제나 항복하고 매달리는 사람은 가와이 조지다. 도대체 이 남자, 왜 이러는 걸까? 


조지가 애초에 나오미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는 그녀의 서양인같은 외모 때문이었다. 그의 서양인에 대한 동경은 소설 곳곳에서 여러 차례 보인다. 비록 단정하고 생김이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 보이지만, 자기의 마르고 160cm가 넘지 않는 왜소한 체격에 거무튀튀한 피부색에 대한 언급, 그리고 나오미조차 백인 옆에 서면 보잘 것 없는 동양인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또한 자기 처지에 나오미같은 아름다운 여자는 만날 수 없다고 단정한다. 한마디로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이 상당히 크다.  


그런데 이러한 자격지심은 나오미도 마찬가지다. 욕과 비방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난폭한 언행, 상대를 동물에 빗대어 대놓고 빈정거리는 천박함. 누군가에게 경멸을 받는다해도 반박하지 못할만한 처신을 하고 있는 그녀는, 겉으로는 자기 외에는 모든 여성을 우습게 여기고 낮잡아 말하지만 실은 내면에는 열등감과 자기방어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의 결합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된다. 그래서 나오미를 통해 허영심을 채우고 싶었던 가와이 조지는 그녀의 본색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인지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음에도 나오미에 대한 애증은 번함없이 반복된다.   


그들 부부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부재하며, 질투와 끊임없는 의심과 집착만 존재한다. 아내는 지속적으로 외도를 하며 거짓 눈물로 용서를 구하고, 남편은 외도를 빌미로 아내를 가둬두고 감시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으면서 "나가"와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한다. 이쯤되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결혼인지 알 수가 없다. 당신들은 지치지도 않습니까. 


가와이 조지가 나오미를 쫓아낸 후 후회하면서 그녀가 돌아오길 바라며 자신이 만든 나오미의 성장일기를 들춰보는 장면이 있는데, 성장일기에는 그녀의 신체 부위를 사진으로 찍어놓고, 그녀가 입은 옷부터 매순간을 찍어 일기에 붙여놓은 모습은 가히 변태적이다. 가와이 조지가 말한 나오미의 '성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ㅡ 


뭐 이런 관계가 다 있나... 싶은 생각을 하다가 퍼뜩 든 생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연인이든 부부든 많은 사람들이 상대를 자기에 맞추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우리는 맞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이별을 선택하는데, 맞지 않는 게 정상이다. 사람이 퍼즐도 아니고 어떻게 딱딱 맞춰지겠나. 서로의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기보다 원하는 상대로 만들어가는 것을 '맞춰간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물론 취향이나 성격이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이것 역시 하나의 단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와이 조지는 나오미와 헤어지면 그녀가 결국 게이샤 혹은 매춘부가 될 거라고 여겨 차마 떠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가와이 조지가 그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자신에게 있다. 동정심으로 자신이 그녀를 구원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지만, 나오미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오미가 스스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가와이 조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순진하고, 순진하지 않은 건 조지라고 말하는 나오미의 말에서 어쩌면 가식없이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그녀가 순진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더하여 여성의 정조와 도덕을 따지면서 정작 본인들의 행태는 사뭇 다른 남성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를 꼬집은 건 아닌지.  


내가 납득하든 말든 어쨌거나 그럼에도 서로를 원한다니 어쩌겠는가. 무엇보다 두 사람 방식의 사랑에 있어서 딱히 피해자가 없다. 그들 삶의 방식을 내가 무어라고 토를 달겠는가. 내내 성장을 말하지만 그야말로 성장하지 못한 미성숙한 두 남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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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사랑법 - 김동규 철학 산문
김동규 지음 / 사월의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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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시선에서 사랑을 탐사하는 철학 산문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사랑이 갖는 참된 의미, 사랑을 근본으로 한 한恨과 멜랑콜리, 현 시국을 사랑의 관점에서 짚어감을 프롤로그를 통해 밝힌다.  






 




사람이 엄마의 자궁을 집으로 삼고 세상에 나와 반응하는 존재는 사랑에 기초한다. 눈맞춤, 울음, 옹알이, 몸짓 등 그 모든 작용은 사랑하는 이와의 교감이다. 이렇게 인간은 태초의 언어(사랑)을 시작한다. 저자는 플라톤의 <향연>을 빌어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더 먼저 더 오래'된 가치라고 얘기한다.  


여기에서 나르시시즘과 에고이즘을 구분하는데, 나르시시즘이란 한갓 이기주의를 뜻하는 에고이즘과는 구분되는 자기애다. 타자를 자기처럼 사랑하는 이타적인 모습까지도 포함한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은 협소한 에고이즘과 구분된다. 자기사랑이 곧 타자사랑이라는 말은 못난 내 모습까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유의미하려면, 내 못난 모습, 사회로부터 업신여겨지는 모습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로 새겨야 한다. 자타의 강점이 아닌 약점마저 사랑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요체이고, 도달하기 힘든 사랑의 성숙함이라고 말씀하는데, 자존감이 곧 사랑의 다른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서조차 득실을 따지는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알아내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이가 풀어내야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간혹 삶의 의미를 묻는 것도 그 때문일 터다. 인간은 감사하는 과정에서 무한한 우주와 생명 탄생의 전 과정을 회고하며, 그 망망대해에 한 점으로 떠 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성찰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생각이 길어진다. 


ㅡ 


철학자는 한恨과 멜랑콜리는 엇비슷해 보이지만, 사뭇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恨이란 이름도 힘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공포와 당혹감을 기저에 깔고 있는 정서이고, 멜랑콜리는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낭패감에 가깝다. 恨이 슬픔을 추억으로 가공해 내는 슬기로운 체념이라면, 멜랑 콜리는 상실 대상을 단념하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존재의 근거를 박탈당하는 슬픔과 고통은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어렵다. 지독한 빈곤, 지독한 차별, 지독한 폭력, 지독한 혐오가 그렇다. 반면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낭패감은 좀 다르지싶다. 과도한 '자기애'의 벽에서 벗어난다면 방법이 보이지 않을까.


저자는 恨의 담론에 대해 서술하면서 '삭임'이라는 단어와 판소리의 시김새, 발효식품에 대해 얘기한다. 읽다보니 우리나라 전통 음식은 대체로 조리 시간에 많은 시간을 요한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고 된장, 떡, 식혜, 그리고 고기를 주재료로 하는 음식조차 빠른 시간 내에 조리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수제천' 전곡을 들었다. 현존하는 우리 음악 중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는 평을 받는 수제천의 끊어질듯 하면서도 절묘하게 이어지는 음색이 기억난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빠름 빠름 빠름' 이 최우선하고, 스스로에게 '냄비근성'이라는 자기비하를 하게 된 것일까...... .  


전반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슬픔은 恨과 멜랑콜리의 사이에 있다고 얘기하며 '한편으로는 제 마음을 죽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마음이 몸을 죽이는 것'이라는 문장에서 요즘 챙겨보고 있는 한 편의 드라마가 생각났다. 자유와 해방을 동경하지만, 정작 어디로부터 해방되어 어디로 향해야하는지를 모르는 우리. 모두들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는데, 산다는 게 왜 이렇게 족쇄를 매단 것만 같은지.  


필요(특히 경제적 필요성)를 증명하지 못하면, 필요의 노예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 슬픈 현실에서, 철학자는 이 척박한 환경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이야말로 인간 생존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덮고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었는데, 문득 이 내용이 떠올랐다. 삼천과 새비, 두 여성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을 우선하는 세태에서 신뢰와 선량함은 고루한 가치가 되어 뒤로 내쳐진지 오래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여 '착함'은 연민의 사랑이라는 철학자의 말이 참 많이 와닿는다. 인류 탄생 이후 가장 근본적이며 오래된 불멸의 가치는 사랑, 그것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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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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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한 배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구명보트에서 277일간 호랑이와 공존해 살아남은 이야기로 잘 알려진 <파이 이야기>를 십수 년 만에 다시 읽었다.  







 



1부에서는 주인공 파이(피신)가 이민을 가기 전 인도에서의 일상을, 2부에서는 태평양 조난을, 3부에서는 멕시코만에 닿은 이후를 그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대부분 2부에 해당한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번에 다시 책을 펼치면서 좀더 유심히 읽은 부분은 사실 1부다. 파이의 관점에서 바라본 동물원과 신神의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파이는 힌두교도다. 열네 살에 가족여행을 간 문나르에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처음으로 기독교 교회를 가보게 된 파이는 안전함을 전달하는 그 평온함에 뭉클함을 느끼며 강한 인상을 받는다. 신의 아들이면서 인간과 다름하지 않는 예수를 납득할 수 없지만 그 헌신이 사랑이라는 가르침에 파이는 기독교도가 된다. 기독교도가 되고 일 년 후, 무심코 들른 이슬람 사원에서 이슬람 신비주의자 수피인 사티시 쿠마르를 만난다. 의식보다는 기도, 그리고 형제애와 헌신에 무게를 두는 이슬람교에 깊이 이입하고,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대학에서 동물학과 종교학을 전공하고 코란을 읽는다. 파이는 세례도 받고 싶고, 기도 카펫도 갖고 싶다고 말하자 종교는 하나만 정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아버지에게 왜 양쪽 다 하면 안 되느냐고 되묻는다.  


파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다. 그는 종교를 믿지 않은 생물 선생이 황량해 보인다고 말한다. 조난 당시 위험이 닥칠 때마다 세 종교의 신을 모두 찾으며 기도하는 파이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도대체 이 소설에서 파이의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궁금해질 법하다. 소설의 도입부와 3부를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ㅡ 


구명보트에 실린 생명체는 인간, 벵골 호랑이,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이었다. 이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먹이사슬 순서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먹이사슬에 있어서 예외적 존재인 인간은 최상위층 포식자와 동급이다.  


하이에나가 얼룩말의 다리를 뜯어먹고 얼룩말은 속수무책 고통을 참아낸다. 이 광경을 본 파이는 얼룩말을 연민하고 하이에나를 증오하지만, 연민도 증오도 오래 가지 않는다.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은 동정심도 가려버린다.   


정말 두려운 것은 실체적 대상보다는 공포심과 절망임을 깨닫는 파이를 진정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였다. 리처드 파커가 파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바로 그 시선이었다. 동물원 우리에서 내다보는 그 시선. 리처드 파커는 파이를 관찰하고 있었고, 파이 역시 리처드 파커를 관찰한다. 소년은 호랑이가 내뱉는 소리, 프루스텐을 듣고 그를 길들일 필요성을 깨닫는다.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죽어갈 수 없기 때문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는 파이의 말은 태평양 망망대해가 아닌 경쟁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도 와닿는 말이다.  


먹거리를 구하면 리처드 파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닥치는대로 먹는 파이의 모습은 리처드 파커와 다르지 않았다. 문명인이 갖는 허위와 한계는 극한의 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파이가 익히지 않은 고기를 먹고 거북의 피를 마시며 가마우지의 목을 비틀어 잡아먹은 것은 그가 미개인이라서가 아니다. 처한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2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파이가 자신과 처지가 똑같은 눈먼 조난자를 만난 장면이다. 그 조난자는 굶주린 리처드 파커의 먹이가 되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리처드 파커의 먹이는 파이였을까? 파이는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생명을 구한 거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고, 이후 내면의 뭔가가 죽어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철학자 김동규 님은 '사랑에 빚지지 않은 생生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바꿔 말하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빚지고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렵게 멕시코만에 닿자 리처드 파커는 미련없이 떠났고,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다. 사람들에게 발견된 파이는 리처드 파커가 아무 인사도 없이 떠나버려 울음을 터뜨린다. 아쉬움이었을까, 안도감이었을까. 그 복잡한 심경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ㅡ 


자신의 경험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들은 파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수 년이 지난 파이의 집에는 힌두교를 나타내는 성소가 차려져 있고, 침대 옆 테이블에는 '성경'이 놓여있다. 그에게 종교(신)은 어떤 의미일까? 종교적 신앙심을 떠나 파이는 힌두 사원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종교도 문화처럼 익숙함이 아닐런지.  


우주적 섭리 혹은 초월적 섭리에서 본다면 우리가 믿는 여러 신들은 하나에서 파생된 것일 터다. 종교 혹은 신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윤활유같은 역할을 한다. 퍽퍽한 인생에 어디 한 군데 기댈 곳이 있다면 이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비록 가정의 평화를 위한 효도용 신자 노릇을 하고 있지만, 여행지에서 꼬박꼬박 성당을 들르는 것은 종교적 차원이 아니다. 어린시절부터 익숙해진 평온함에 가깝다. 답사 때마다 일정에 사찰을 경유시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서 나는 파이가 더 잘 이해가 된다. 때론 의심도 괜찮으니 무엇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파이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두 번 읽을 책이 아니면 한 번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누군가의 말이 새삼 와닿는 재독이었다. 시간이 아깝지 않은 두 번째 읽기였다. 



433.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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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전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서거 77주년, 탄생 105주년 기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뉴 에디션 전 시집
윤동주 지음, 윤동주 100년 포럼 엮음 / 스타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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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제대로 읽기 전, 표지 안쪽에 있는 시인의 사진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1917년생으로 1945년 해방을 불과 6개월 남겨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8세의 나이로 사망한 그. 1917년생이면 나의 할아버지와 나이 차가 10여년 정도에 불과하다. 할아버지에게도 시인처럼 학생모를 쓰고 찍은 사진이 있다. 시인이 천수를 살았다면 그는 어떤 모습이고, 어떤 시를 썼을까. 사진 속 그의 잔잔한 미소 때문에, 오늘의 맑은 날씨 때문에, 어쩐지 명치 끝이 더 뻐근하다.  










정본 윤동주 전집을 비롯해 시집, 평전까지 시인 윤동주와 관련한 책만 열 권 가까이 소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새로운 윤동주 시집을 또 읽는다. 책이란 것이, 특히 문학은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읽을 때 마다 달라지곤 하는데, 나에게 있어서 시詩가 그렇고, 윤동주의 시는 더 그렇다.  


​이 책의 매력은 시인의 산문과 미발표작, 그리고 윤동주 시집의 초판본에 실린 여러 시인들과 문학계 인사들의 서문 및 발문이다. 특히 1947년 12월에 쓴 시인 정지용의 서문은 무척 인상적이다. 광복을 맞이했으니 이러한 서문도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짠하고 저릿하다. 그리고 유영 선생이 윤동주와 송몽규를 목놓아 부르듯 쓴 시에서 '네 벗들이 여기 와 기다린 지 오래다'라는 문구에 절로 울컥해진다.  


시인 정지용과 친구 강처중, 후배 정병욱의 후기를 통해서 본 윤동주는 누가 달라면 책이나 셔츠까지 내어 줄 만큼 순하디 순한 사람이다.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키는데 오랜 숙고를 거쳤고, 지나치다 싶을 만큼 겸허 온순하였으나 자기의 시만은 양보하지 않았으며, 시인이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간 사람이었다. 불러도 대답 없을 그 이름, 동주와 몽규를 헛되이나마 부르고 싶다던 그들의 간절한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진다. 후배 정병욱이 "동주 형"이라고 부르는 말이 참으로 다정하고 아련하게 들린다. 문득 '그랬겠구나. 윤동주가 시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학우요, 동료요, 아들이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미처 그 생각을 못했던건지. 


윤동주의 시가 따뜻한 봄날에 이토록 어울린다는 사실을, 나는 그가 죽은 나이를 훌쩍 넘어선 지금의 나이에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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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27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양윤옥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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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으로 나뉘어진 이 소설은 화자 '나'와 선생의 관계 맺기를 시작으로 '나'와 가족, 마지막으로 선생의 유서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에 있어 1/3의 분량을 차지하는 유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우연찮게 교분을 트고 친분을 쌓아가는 과정과 화자의 가족간 관계를 통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던 선생을 이해함과 동시에 가족과 우리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소설 초반, 일반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울만큼 염세적이며 비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선생의 모습은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집안에 대학 출신 엘리트인 신체 건강한 남자가 무직으로 삶을 소비하는 듯 보이고, 사랑은 죄악이라는 둥 스스로 세상에 나가 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둥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만 한다. 그의 아내는 그가 대학 시절에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싫어서 세상까지 싫어진 것 같다고 낙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생의 비밀은 소설의 후반, 그가 화자에게 서신으로 보낸 고백과 같은 유서에서 모두 드러난다.  


부모 대신에 전적으로 의지했던 숙부의 배신으로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선생은 숙부를 가장 증오하고 혐오한다. 오죽했으면 선생은 젊은 화자에게 죽기 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남을 신뢰하면서 죽고싶다고 말했을까. 그에게 있어 타인에 대한 신뢰란 진정 갖고 싶지만 갖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결핍 때문에 갈등의 기로에서 늘 포기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선생이 K 사건으로 인해 평생을 죄의식에 살았던 이유는 K의 사랑을 가로채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보다, 선생의 행위가 사랑을 쟁취하기보다는 K에 대한 질투와 경쟁심에 기인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고 혐오의 인간상으로 여겼던 숙부의 모습과 자신이 K에게 저질렀던 행위가 겹쳐졌기 때문이다. 선생이 화자에게 '인간은 누구나 여차할 때 악인이 된다' 고 말했던 그 악인이 숙부가 아닌, 바로 선생 자신이었던 것.  


선생의 잘못은 자신의 감정을 K에게 진솔하게 고백하지 않은 점, 사랑보다는 질투와 경쟁심에 눈이 멀어 우정을 저버린 점, 무엇보다 비열하게 친구의 처지와 성정을 이용하고, 자존심 때문에 사과하지 않은 점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진실을 상실한 선생은 이조차도 용기를 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했지만 안정을 찾지 못한 선생은 평생을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신이 죽으면 불행해질 아내를 보며 삶을 연명했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화자를 만나 삶을 이어갈 희망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메이지 천황의 죽음이 마치 암시라는 듯, 한 시대가 끝난 것처럼 자기의 시대가 끝났다고 여긴다.  


나는 사실 선생의 죽음보다 K가 자살한 이유가 더 궁금했다. 이루지 못한 사랑? 친구의 배신에서 오는 절망? 현실과 동떨어진 부족한 처세에 대한 자괴감? 친구에 대한 복수? 선생은 K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오직 자기만이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과연 그럴까? 서술된 K의 성정으로 봐서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선생의 비열한 계략이 결정적이었다는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선생도 이를 몰랐을 것 같지는 않고.  


과정이야 어찌됐든 선생이 아내를 사랑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K가 그녀를 사랑했고 일정 부분이나마 그로인해 자살한 사실을 아내에게만큼은 끝까지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고, 아내의 기억을 가능한 한 순백의 상태로 보존해 주고 싶은 것이 유일한 바람이었으며 그녀가 살아 있는 한 자기의 고백을 부디 가슴 속에 묻어달라는 당부를 남긴 것을 보면 아내를 깊이 사랑했지싶다. 아내에게 모든 진실을 얘기하고 참회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그나마 마음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을텐데, K가 자살한 직접적인 계기를 모르는 아내에게 자기와 같은 고통을 안겨주기 싫었던 그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사랑하는 아내 때문에 K를 더 떨쳐내지 못하게 되어버리고, 그것 때문에 심리적으로 아내를 멀리하게 된 그의 운명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2장에 해당하는 화자 '나'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는 이 소설에 왜 등장했을까? 이 부분을 생각해보다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 '나'와 선생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 가족들의 관계를 들여다보게 됐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나'와 부모 형제의 관계는 현실 속 여느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장한 자식은 부모의 관심과 애정이 간섭과 부담으로 다가온다.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이유로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신뢰에 대한 기대치는 어느 대상보다 높다. 반면 이런 절대적인 지지 관계가 결핍된 선생은 늘 진실을 갈구하지만 스스로조차 진실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신뢰하지 못한다. 누군가를 신뢰하고, 어느 대상으로부터 신뢰받는 것은 본인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함을 선생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만약 선생이 아내가 보호하고 지켜줘야할 대상을 넘어서 신뢰하는 대상이었다면 그토록 참담한 삶과 죽음의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 같다.


20여년 전에 읽었을 당시와는 아주 다르게 다가온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젊은 시절에 본 선생은 참으로 어리석기만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선생 내외가, 선생의 죄의식이 가여웠다.  


미래의 모욕과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지금의 쓸쓸한 나를 견디는 중이라는 그의 말이, 자유를 찾기 위해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던, 그래서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외롭게 떠났을 그의 모습이,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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