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인의 사랑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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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라이프를 추구하는 가와이 조지는 카페 여급 열다섯 살 나오미를 데려와 자기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역할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그녀를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근대적인 하이칼라 여성'으로 만드는 게 목표다.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조지와 보답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대답하는 나오미와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집에서 나가라고 협박하는 조지. 영어 공부를 두고 대립하며 관계가 틀어지는 모습은 마치 부모와 자식처럼 보인다. 그런데 점점 더 육체적으로 여성미가 더해지는 나오미의 아름다움에 유혹당해 끌려다니는 조지, 나오미는 이를 아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소설에서는 나오미를 시대의 악녀처럼 묘사한다. 버젓이 남편을 두고 문어발식 연애는 기본이요, 무위도식하면서 조지가 벌어온 돈으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회 생활을 하는 남편까지 자기의 방탕한 생활에 끌어들여 타락시킨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지가 이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점이다. 물론 순간 화를 내고 결별 선언을 하지만 언제나 항복하고 매달리는 사람은 가와이 조지다. 도대체 이 남자, 왜 이러는 걸까? 


조지가 애초에 나오미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는 그녀의 서양인같은 외모 때문이었다. 그의 서양인에 대한 동경은 소설 곳곳에서 여러 차례 보인다. 비록 단정하고 생김이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 보이지만, 자기의 마르고 160cm가 넘지 않는 왜소한 체격에 거무튀튀한 피부색에 대한 언급, 그리고 나오미조차 백인 옆에 서면 보잘 것 없는 동양인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또한 자기 처지에 나오미같은 아름다운 여자는 만날 수 없다고 단정한다. 한마디로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이 상당히 크다.  


그런데 이러한 자격지심은 나오미도 마찬가지다. 욕과 비방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난폭한 언행, 상대를 동물에 빗대어 대놓고 빈정거리는 천박함. 누군가에게 경멸을 받는다해도 반박하지 못할만한 처신을 하고 있는 그녀는, 겉으로는 자기 외에는 모든 여성을 우습게 여기고 낮잡아 말하지만 실은 내면에는 열등감과 자기방어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의 결합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된다. 그래서 나오미를 통해 허영심을 채우고 싶었던 가와이 조지는 그녀의 본색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인지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음에도 나오미에 대한 애증은 번함없이 반복된다.   


그들 부부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부재하며, 질투와 끊임없는 의심과 집착만 존재한다. 아내는 지속적으로 외도를 하며 거짓 눈물로 용서를 구하고, 남편은 외도를 빌미로 아내를 가둬두고 감시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으면서 "나가"와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한다. 이쯤되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결혼인지 알 수가 없다. 당신들은 지치지도 않습니까. 


가와이 조지가 나오미를 쫓아낸 후 후회하면서 그녀가 돌아오길 바라며 자신이 만든 나오미의 성장일기를 들춰보는 장면이 있는데, 성장일기에는 그녀의 신체 부위를 사진으로 찍어놓고, 그녀가 입은 옷부터 매순간을 찍어 일기에 붙여놓은 모습은 가히 변태적이다. 가와이 조지가 말한 나오미의 '성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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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관계가 다 있나... 싶은 생각을 하다가 퍼뜩 든 생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연인이든 부부든 많은 사람들이 상대를 자기에 맞추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우리는 맞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이별을 선택하는데, 맞지 않는 게 정상이다. 사람이 퍼즐도 아니고 어떻게 딱딱 맞춰지겠나. 서로의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기보다 원하는 상대로 만들어가는 것을 '맞춰간다'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물론 취향이나 성격이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이것 역시 하나의 단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와이 조지는 나오미와 헤어지면 그녀가 결국 게이샤 혹은 매춘부가 될 거라고 여겨 차마 떠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가와이 조지가 그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자신에게 있다. 동정심으로 자신이 그녀를 구원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지만, 나오미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오미가 스스로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면, 가와이 조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순진하고, 순진하지 않은 건 조지라고 말하는 나오미의 말에서 어쩌면 가식없이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그녀가 순진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더하여 여성의 정조와 도덕을 따지면서 정작 본인들의 행태는 사뭇 다른 남성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를 꼬집은 건 아닌지.  


내가 납득하든 말든 어쨌거나 그럼에도 서로를 원한다니 어쩌겠는가. 무엇보다 두 사람 방식의 사랑에 있어서 딱히 피해자가 없다. 그들 삶의 방식을 내가 무어라고 토를 달겠는가. 내내 성장을 말하지만 그야말로 성장하지 못한 미성숙한 두 남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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