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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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한 배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구명보트에서 277일간 호랑이와 공존해 살아남은 이야기로 잘 알려진 <파이 이야기>를 십수 년 만에 다시 읽었다.  







 



1부에서는 주인공 파이(피신)가 이민을 가기 전 인도에서의 일상을, 2부에서는 태평양 조난을, 3부에서는 멕시코만에 닿은 이후를 그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대부분 2부에 해당한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번에 다시 책을 펼치면서 좀더 유심히 읽은 부분은 사실 1부다. 파이의 관점에서 바라본 동물원과 신神의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파이는 힌두교도다. 열네 살에 가족여행을 간 문나르에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처음으로 기독교 교회를 가보게 된 파이는 안전함을 전달하는 그 평온함에 뭉클함을 느끼며 강한 인상을 받는다. 신의 아들이면서 인간과 다름하지 않는 예수를 납득할 수 없지만 그 헌신이 사랑이라는 가르침에 파이는 기독교도가 된다. 기독교도가 되고 일 년 후, 무심코 들른 이슬람 사원에서 이슬람 신비주의자 수피인 사티시 쿠마르를 만난다. 의식보다는 기도, 그리고 형제애와 헌신에 무게를 두는 이슬람교에 깊이 이입하고,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대학에서 동물학과 종교학을 전공하고 코란을 읽는다. 파이는 세례도 받고 싶고, 기도 카펫도 갖고 싶다고 말하자 종교는 하나만 정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아버지에게 왜 양쪽 다 하면 안 되느냐고 되묻는다.  


파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다. 그는 종교를 믿지 않은 생물 선생이 황량해 보인다고 말한다. 조난 당시 위험이 닥칠 때마다 세 종교의 신을 모두 찾으며 기도하는 파이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도대체 이 소설에서 파이의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궁금해질 법하다. 소설의 도입부와 3부를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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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명보트에 실린 생명체는 인간, 벵골 호랑이,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이었다. 이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먹이사슬 순서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먹이사슬에 있어서 예외적 존재인 인간은 최상위층 포식자와 동급이다.  


하이에나가 얼룩말의 다리를 뜯어먹고 얼룩말은 속수무책 고통을 참아낸다. 이 광경을 본 파이는 얼룩말을 연민하고 하이에나를 증오하지만, 연민도 증오도 오래 가지 않는다.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은 동정심도 가려버린다.   


정말 두려운 것은 실체적 대상보다는 공포심과 절망임을 깨닫는 파이를 진정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였다. 리처드 파커가 파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바로 그 시선이었다. 동물원 우리에서 내다보는 그 시선. 리처드 파커는 파이를 관찰하고 있었고, 파이 역시 리처드 파커를 관찰한다. 소년은 호랑이가 내뱉는 소리, 프루스텐을 듣고 그를 길들일 필요성을 깨닫는다.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죽어갈 수 없기 때문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는 파이의 말은 태평양 망망대해가 아닌 경쟁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도 와닿는 말이다.  


먹거리를 구하면 리처드 파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닥치는대로 먹는 파이의 모습은 리처드 파커와 다르지 않았다. 문명인이 갖는 허위와 한계는 극한의 상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파이가 익히지 않은 고기를 먹고 거북의 피를 마시며 가마우지의 목을 비틀어 잡아먹은 것은 그가 미개인이라서가 아니다. 처한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2부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파이가 자신과 처지가 똑같은 눈먼 조난자를 만난 장면이다. 그 조난자는 굶주린 리처드 파커의 먹이가 되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리처드 파커의 먹이는 파이였을까? 파이는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의 생명을 구한 거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고, 이후 내면의 뭔가가 죽어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았다고 표현한다. 철학자 김동규 님은 '사랑에 빚지지 않은 생生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바꿔 말하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빚지고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렵게 멕시코만에 닿자 리처드 파커는 미련없이 떠났고,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다. 사람들에게 발견된 파이는 리처드 파커가 아무 인사도 없이 떠나버려 울음을 터뜨린다. 아쉬움이었을까, 안도감이었을까. 그 복잡한 심경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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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험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람들은 파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수 년이 지난 파이의 집에는 힌두교를 나타내는 성소가 차려져 있고, 침대 옆 테이블에는 '성경'이 놓여있다. 그에게 종교(신)은 어떤 의미일까? 종교적 신앙심을 떠나 파이는 힌두 사원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종교도 문화처럼 익숙함이 아닐런지.  


우주적 섭리 혹은 초월적 섭리에서 본다면 우리가 믿는 여러 신들은 하나에서 파생된 것일 터다. 종교 혹은 신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윤활유같은 역할을 한다. 퍽퍽한 인생에 어디 한 군데 기댈 곳이 있다면 이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비록 가정의 평화를 위한 효도용 신자 노릇을 하고 있지만, 여행지에서 꼬박꼬박 성당을 들르는 것은 종교적 차원이 아니다. 어린시절부터 익숙해진 평온함에 가깝다. 답사 때마다 일정에 사찰을 경유시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서 나는 파이가 더 잘 이해가 된다. 때론 의심도 괜찮으니 무엇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파이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두 번 읽을 책이 아니면 한 번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누군가의 말이 새삼 와닿는 재독이었다. 시간이 아깝지 않은 두 번째 읽기였다. 



433.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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