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된 서유럽 - 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쏜살 문고
밀란 쿤데라 지음, 장진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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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는 밀란 쿤데라의 신간이 반갑다. “중앙 유럽의 진정한 비극은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이다.” 라는 소개글은 본문을 읽어봐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쿤데라의 사상적 원점을 보여주는 에세이라고 하니 더욱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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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질문들 - 마거릿 애트우드 선집 2004~202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재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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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세 번째 에세이 및 조각글(강연, 서평, 논설, 추도사 등) 모음집으로 2004년 중반부터 2021년 중반까지 이어진다. 여러 작가들의 생애를 짚고, 작품들의 서평과 강연을 통해 평등주의, 가부장제 하의 남존여비, 여성 서사, 세대 연결, 문학과 글쓰기, 보편적이며 능동적인 자유, 종차별의 반대와 생명체 공존을 서술한다. 


또한 불평등한 부의 분배와 양극화,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 환경(기후 변화), 문학, 예술, 젠더, 인종, 종교, 민족, 이념, 반전, 난민, 그리고 혁명을 넘어서 폭동에 가까운 소셜미디어 등 지난 2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통해온 것들에 대한 애트우드의 자문과 답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애트우드는 장르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사실주의 소설이 기능하지 않는 부분을 장르소설에서 만날 수 있음을 환기한다. 그야말로 이야기는 무한대로 뻗어나갈수 있으며 출입하지 못하는 영역은 없고, 우리가 꿈과 판타지로만 등장할 수 있는 것들이 형태를 갖추어 구현된다.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고 질문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글쓰기의 궁극적인 목적인 아닐까.  


작가는 글을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지켜보고, 귀담아듣고, 많이 읽고, 많이 쓰며 노력하고 기다리라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는 게 가장 싫고, 무엇보다 자신의 방식을 본보기로 삼지 말라고 당부한다. 롤모델이 된다는 건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고서야 선뜻 반기기 어려운 일이지 싶다. 젊은이들이 연장자에게 바라는 것은 조언보다 호의와 축복이라는 말씀이 참 와닿는다. 


그리고 소설의 구조, 시간 배분, 인물 설정, 그외 구성 요소 등 소설 쓰기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언어를 진실하고 공정하게 사용하라는 당부에서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진심이 느껴진다.  


앨리스 먼로, 루이스 하이드, 레이첼 카슨, 도리스 레싱 추도사, 제발트 등 작가와 자신의 저작들을 포함한 여타 작가들의 여러 다양한 작품들에 대한 서평을 통해 언어와 상징적 사고를 통한 스토리텔링에 대한 견해, 이야기가 갖는 힘, 읽기와 쓰기와 기록의 중요성을 피력하면서 동시에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예술이 갖는 본성, 돈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과 불가분의 관계, 그리고 예술 활동에 대해 통찰한다.   


애트우드는 예술가들에게 그들만의 예술 정원을 가꾸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대안적 세계를 창조하는 일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예술의 역할은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서 최대한 강력하고 웅변적으로 인간됨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ㅡ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와 그 폐해, 그리고 경제 만능주의에 의한 숲의 사막화 등을 방치하고 외면하면서 유독 환경 문제에 대해서만 예산 부족을 들먹이며 거짓 프레임을 씌우는 정치인들을 위트있게 비판한다. 더불어 이미 충분히 늦었으나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때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노력을 하기를, 그래서 미다스왕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권고한다.   


레이 브레드버리, 레이첼 카슨, 어슐러 르 귄, 배리 로페즈,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등 지구 환경과 인류 종말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경고했던 이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작가 본인이 <오릭스와 크레이크>를 쓰게 된 계기와 이 소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여 증거 우선 원칙이 무시되는 '덕과 공포(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공포정치를 표현)' 시대, 언론 탄압과 전체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앤 셜리, 올리버 트위스트와는 다르게 허구 밖의 고아들은 기피, 멸시, 착취의 대상이다. 노예에 가까운 가혹한 아동노동의 실태, 빈곤의 대물림, 대책없이 강간과 매출에 노출된 길거리 생활, 이것이 현실의 앤이다. 애트우드는 <빨강 머리 앤>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앤이 삶의 진실이 아닌 소원 성취의 진실과 환각에 가까운 열정적인 에너지와 이상주의에 대한 설득 때문이라고 짐작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앤의 낭만을 바라봐주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ㅡ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시녀 이야기>의 집필 전부터 이후의 시대 상황과 집필 과정, 세계관, 그리고 1980년대가 아닌 21세기 현재에도 이 작품이 갖는 시대성에 적합한가에 대해 서술한 내용이 포함된 3부다. 3부에서는 애트우드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유독 많이 서술되는데, 1세대 및 2세대 페미니즘이 지나온 1950년대 이후의 얘기들은 언제들어도 흥미롭다(아마 내가 태어나기 이전으로써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이기 때문일 터다). 작가는 2016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184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자신의 작품 <그레이스>를 끌어와 여성의 자유가 위기에 봉착했음을 지적하는데, 이보다 앞서 서술한 <시녀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어쩌면 여성의 자유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신장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는 <내 생애의 아이들>로 유명한 가브리엘 루아의 삶과 그녀의 작품 <싸구려 행복>, 그리고 이 작품에 대한 애트우드의 면밀한 서평도 좋았다. 애트우드는 가브리엘 루아의 "예술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알 수 없다고 단정한다. 정치적으로 분열된 사회를 생각하면 더욱이 예술은 우리를 이해하는 데 유의미하다.  


애트우드는 1950년 이후부터의 자신의 개인사를 서술했는데, 당시 시대와 자전적 이야기를 내밀하게 써내려간다. 여기에 시몬 드 보부아르에 대한 얘기를 따라가면서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은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ㅡ 


애트우드는 코비드19 시국은 길을 잃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아득한 악몽의 시기였다고 말하면서 팬데믹 시대에 자기 보호를 가장 우선에 두고, 남들을 돕고 증인이 되어 기록하고 일상을 유지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혁신을 일으켰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생물학적 터전을 가차없이 파괴하고 있다. 또한 인류사에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민주주의는 대자본의 힘에 의해 붕괴되고 있으며, 세계 인구 1퍼센터가 전체 부의 80퍼센트를 장악한 극단적 위태로운 가분수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애트우트드는 자신의 작품 <미친 아담> 시리즈를 빌어 소설의 내용이 미래가 아닌 현실에 있음을 얘기한다.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발생하는 작금에 어떻게 세상을 바꿔야하냐는 질문에 대해 애트우드는 기술적, 교육적, 정치적 차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인류가 당장 실행해야 하는 것들은 일단 멈춤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새로운 질서와 균형이 형성될테니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 책은 레이첼 카슨의 바다 3부작으로 마무리 한다. 이것이 편집자의 구성인지, 애트우드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 인류 뿐만 아니라 지구 행성에 있어 가장 우선해야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전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작가는 인간이 무사히 22세기를 맞이한다면 그것은 일정 부분 카슨의 덕분이며 인류는 그녀에게 막대한 빚을 졌음을 얘기한다.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한편으로는 믿기 어려운 전쟁의 발발과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난민들을 떠올려보면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만 함을 애트우드는 이 책을 통틀어 독자를 설득하고 있다. 인간에게서 희망과 노력을 뺀다면 그것이 좀비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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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렐류드 - 찬란한 추억의 정원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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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에 비견할 만큼 단편에 탁월한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선집이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가든파티>와 미완의 <6년 뒤>를 포함한 열여섯 편이 실려 있다.









아버지를 두려워하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소녀, 부잣집 남자를 기대하며 고급 창부가 된 자신을 상상하는 바이올라, 잘생긴 용모를 가진 남자의 프러포즈를 꿈꾸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처한 현실에 파묻힌 기분으로 사는 베럴, 마차를 타고 집을 떠나는 상상을 하는 린다, 고령에도 주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딸의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는 페어필드 부인, 어머니를 여의고 낯선 할아버지 집으로 가기 위해 배에 몸을 싣는 어린 페넬레, 죽음을 통해 인생의 기적을 확인한 로라,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신데렐라가 되는 꿈을 꾸지만 눈을 뜨면 녹록치 않은 현실로 돌아오는 모자 가게 점원 로저벨, 일평생 아버지의 권위에 주눅들어 살았던 두 자매  등 각 소설들마다 가부장제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결혼을 통한 경제적 신분 상승 및 화려한 삶에 대한 욕구와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를 꿈꾸는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 그리고 새로운 삶 앞에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극복해야만) 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딜 피클>에서 6년 만에 우연히 재회한 (한때 연이이었던) 두 남녀가 추억하는 어느 오후의 기억은 전혀 다르다. 그들이 공유한 기억의 파편에 실려 있는 감정도 다르다. 마지막 그 한마디! 기억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남자, 나도 별로일세... . 당시의 부부 관계와 결혼 생활을 비둘기 암컷과 수컷으로 비유하면서 압축적으로 명쾌하게 보여 준 <비둘기 씨와 비둘기 부인>이 있다면, <레지널드 피콕 씨의 하루>는 권태에 빠진 기혼 남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락가락 하는 마음>에서는 궁핍한 생활과 자괴감에 넌더리가 나 엉뚱한 생각을 하지만, 작은 소동으로 자신감을 얻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잊지 마시라, 현실에서의 강간 위험은 그토록 쉽게 벗어날 수 없음을. 이외에도 일평생 아버지의 그늘에서 살다가 그의 죽음으로 마치 보호자를 잃은 어린애처럼 매사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매 등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사건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그동안 <가든파티>를 가장 좋아했던 이유는 읽을 때마다 여러 생각이 복합적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연코 표제작 <프렐류드>를 꼽는다. 이 소설에는 여성의 사회적 문제들을 다각적으로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제인 오스틴이나 버지니아 울프가 각각의 작품들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ㅡ가정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전무하고, 가사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임신을 강요 당하고 가정 내 결정권이 없는 등의 문제점들ㅡ를 한 작품에 여러 여성들을 통해 간결하게 녹여냈다. 남편의 실내 슬리퍼보다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딸들, 허약한 아내의 건강은 염두에 두지 않고 식탁에 미리 마련해둔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의 자리,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한 후 행복을 강요하는 가장.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귀결하는 바는 결국 여성에게 부재한 경제력이다. 오늘날 여성의 경제 활동 비율이 상승했다고는 하지만 전 연령대를 아울렀을 때 남성의 경제 활동에 비하면 현격히 낮은 수준이다. 하물며 19~20세기의 여성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다방면으로 재주가 뛰어남에도 허영과 독립의 욕구를 오가며 타인을 하찮게 여기고 낮잡아 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 드는 베럴의 낮은 자존감도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프렐류드>에서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페어필드 부인인데, 어쩌면 작가는 가장 나이어린 키지어부터 로티, 이저벨, 베럴, 린다까지 결국 이들이 도달하는 삶의 모습은 페어필드 부인이라고 말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물론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을 폄훼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삶이 여성 본인이 원했는지, 그전에 선택의 기회가 있었는지, 그러한 여건이 가능했는지를 따져봐야할 것이다. 어린 딸 키지어에게 알로에가 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운다는 말을 하면서 짓는 린다의 미소의 의미는 무엇이며, 곧 꽃을 피울 것 같은 알로에는 린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그들이 거울 안에서 발견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이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 소설에서 행복한 사람은 가장 스탠리 뿐이고, 퍽퍽한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유일한 사람은 페어필드 부인이다.



짧게나마 <가든파티>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내용은 각설하고) 다른 가족들과 달리 로라가 가든파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문 바구니를 남은 음식으로 채우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유는 사망한 가난한 젊은 마부와 그의 가족이 이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나마 셰리던 부인이 마지못해 조문 바구니를 만들자고 한 이유는 그저 불편한 감정을 씻어내기 위해서다. 조시는 조문을 갈 로라의 드레스가 망가질 것을 걱정하고, 셰리던 씨와 아들 로리는 그저 관망할 뿐이다. 하층민의 젊은 마부의 죽음은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죽은 젊은이의 시신을 본 로라에게 잠을 자듯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 평화롭게 느껴졌다. 그녀는 같은 시각에 한쪽에서 요란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사이, 다른 한쪽에서는 죽음을 관통해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기적이 일어났음에 대해 생각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죽음을 통해 삶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혹은 어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가. 후반부에 나타나는 로라의 각성은 읽을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사실 이번 단편선집에 실린 작품들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마음에 들어온다. 내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 글들은 19세기를 전후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갈수록 교묘해지는 성폭력의 위험을 비롯해 현재 사회의 모습과 대입해서 읽어도 큰 괴리가 없다. 결코 가벼이 다룰 수 없는 시대성을 간결하면서도 위트있게 담아낸 작가가 단편의 대가라 불릴만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사족
아주 짧지만 임팩있는 <독일인들과의 식사>. 그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피곤해.




257.
아무리 그렇더라도, 우울에 집착하거나 추억에 매달리려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삶이 더없이 슬프게 느껴진다는 것을 고백할게요.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어요. 질병이나 가난이나 죽음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슬픔을 뜻하는 게 아니에요. 아니, 이건 달라요. 이것은 우리가 내쉬는 숨결처럼 어딘가 깊은, 아주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몸을 피곤하게 해도 잠깐 움직임을 멈춘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것의 존재를 느껴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느끼는지 자주 궁금해요. 영영 알 수 없겠죠. 그렇지만 그 달콤하고 명랑한 노랫소리 아래 결국 이런 것이, 슬픔이 존재한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아,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들은 그것은.
('카나리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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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할 권리 - 우리는 어디쯤에 있는가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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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그들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시대는 어두웠다고.
하지만 당신들은 왜 침묵했습니까?
(베르톨트 브레히트)  



쿠오드리베트 웹사이트에 올라온 조르조 아감벤의 글들을 엮은 책으로 이탈리아에서도 출간되지 않은 글들이다. 전작인 <얼굴 없는 인간>을 먼저 읽었어야 하는데, 지금의 담론에 대한 비판을 읽고 싶어서 <저항할 권리>를 우선 펼쳤다.   


책의 시작에서 저자와 역자가 주고받은 서한과 편집자주는 서문을 대신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자가, '인류가 모두 레밍이 되어 절벽을 향하고 있'다는 표현은 지난 만 2년 동안 우리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에 관련한 내용은 본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저자는 팬데믹 사태를 전쟁에 비유하는 각국 정부가 국민의 자유를 강도 높게 제한하는 예외상태를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로써 권력과 전쟁 간의 유대 관계는 더욱 긴밀하고 실질적이 됐음을, 이는 과거 역사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정상 상태'에서 추구했던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단순히 이 제재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식이라고 믿게 될 것임을 짚는다.  


그는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잠정적 환자가 되고, 마치 종교가 세상을 지배했던 시대의 세례처럼 백신 접종자에게만 정체성이 부여되는 사태를 심각하게 우려한다. 왜냐하면 이 정체성조차 어떠한 결정권 없이, 결정을 강요받고 실행해야하는 의무만 남기 때문이다. 또한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사회적 활동에서 배제해 시민들 간 차별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졸지에 감시자 입장으로 만들어버린다.  


얼굴은 인간이 교류하는 모든 것의 바탕으로서 자신을 개방하고 타인을 인식하기에 정치적 요건이 된다. 그런데 모든 장소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국가는 자발적으로 모든 정치적 차원을 지워버렸다고 얘기하는 저자. 이는 정치적 동물인 인간의 생명 상실을 의미하고, 죽음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님을 짚는다(지난 2년 동안 코로나 사망자와 유가족들에게는 애도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음을 떠올려 보라). 얼굴을 지우고 죽은 자들을 흔적없이 제거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조장하는 것은 독재에 가까운 통치체제를 위한 필수 장치다. 모든 것을 지우고 접촉도 없는 사회는 그야말로 유령 사회일 뿐임을, 또한 민주주의 퇴보를 넘어 야만적 행위임을, 저자는 일갈한다.  


저자는 이탈리아에서 도입된 [그린 패스(우리나라의 접종 확인증과 같다)]가 시민들의 이동에 대한 세밀하고 무제한적 통제라고 비판하는데, 나는 우리나라의 접종 확인증보다 한때 확진자 동선을 공개했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은 개인 정보 노출과 인권에 반한다는 항의로 사라졌지만, 개인 사찰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시민의 자유를 크게 훼손한다는 점에서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정부가 작정하면 얼마든지 국민을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어서 씁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2021년 10월, 조르조 아감벤이 이탈리아 상원 헌법위원회에서 그린 패스와 관련해 연설한 내용을 보면 백신 미접종자에 대한 차별은 팬데믹 자체보다 더 비정상적임을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도 책임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정부를 비판한다(대부분 모든 국가들의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이 연설의 핵심은 백신의 '의학적' 문제가 아닌 그린 패스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언급이다. 접종자와 미접종자를 구분한 새로운 시민 계급의 형성 및 시민의 이동 제한과 동선 추적을 통해 통제 사회로의 진입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얘기한다. 


다양한 의견의 제시 및 수렴, 극단적 이견이 마주할 수 없는 사회야말로 전체주의에 근접한다. 정부 체제에 저항하는, 혹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배제함으로써 우리도 모르는 사이 유사 전체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건 아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반론을 제기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반론에 대한 명분 중 대부분은 아마도 공공의 이익과 다수자 보호에 있지 않을까 싶다(저자가 말한 보건 공포). 저자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 공감하는 나조차도 한두 가지 쯤은 고민이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권하고 싶은 이유는 종식에 가까운 팬데믹에 대한 반추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권력자들에 의해 언제든지, 얼마든지 정치적 프레임을 통해 법질서의 기본 원칙이 무너지고,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할 수 있음을 각성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탁월한 명령 수행자로 전락하게 될지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렸다. 이 책을 팬데믹 시대에 국한해서 읽지 않기를 바란다.    




사족. 
1. 저자가 발췌한, 시몬 베유가 1940년에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독재에 대해 쓴 글은 팬데믹 시대를 맞은 우리의 모습과 놀랍도록 아주 흡사하다.
2. 책의 마지막에 교사 알렉산드로 라 포르테차가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인상적이다. 그린 패스의 차별을 받아들인다면 종교, 민족, 피부색, 성적 취향 역시 차별의 도구가 될 것이기에, 그렇다면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는 그의 말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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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티샤 콜롱바니 저자, 임미경 역자 / 밝은세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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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다면 자신이 바로 피난처이자 쉼터가 되어야 한다. 



연인의 죽음으로 상실감과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레나는 즉흥적으로 인도로 향하고 그곳에서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한 그녀를 구해준 열 살 소녀 랄리타와 불가촉민 여성 자경단 '레드 브리게이드' 단원들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초목과 꽃에 손이 닿으면 식물이 시들어버린다는 불가촉민. 그들과 접촉한 행위만으로도 온갖 모욕과 배척과 폭력을 감수해야 하고, 신분 계급 사회에서 인간계에 속하지 않는 그들에게 있어(특히 여성) 운명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요 저주다. 불가촉민 여성 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행은 장소와 나이, 일가 친척부터 길거리의 행인까지 가해자의 신분을 불문한다. 오죽하면 레드 브리게이드 단장 프리티는 달리트 여성 강간을 국민스포츠와 다름 없다고 말할까. 


달리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종하고 이름을 바꾸기도 하지만 구습과 전통은 버리지 못하는 불가촉민 계급. 딸이 강간을 당해도 부모는 분노하기는 커녕 가해자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한다. 경찰, 정부, 가정, 그 어디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수천 명의 여자아이들은 집을 나와 매음 조직에 납치되어 평생 매를 맞으며 성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강요된 조혼으로 매매되는 물품 취급을 받으며 어느 집 가장의 소유물이 될 뿐이다. 달리트 마을의 여성은 나이와 관계없이 전투적인 삶을 살아간다. 


레나는 자나키의 조혼을 통해 달리트 마을에서 교육을 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은 빈곤이 아니라 오랜 관습과 전통임을 깨닫는다. 레나는 자신이 랄리타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줬다고 믿었지만, 랄리타의 자리를 대신한 다른 아이(소년 다부)의 삶을 희생시킨 꼴이었다. 사슬처럼 이어진 고통의 고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인류 문명과 불교의 발상지이자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에 대한 인권 말살과 폭력을 자행하는 인도의 두 얼굴. 과연 이 두 얼굴이 인도만의 얘기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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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가 랄리타에게 남다른 감정을 갖고 책임감을 느끼며 도움을 주려고 하는 이유가 오직 연민 때문일까. 랄리타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단순한 연민에서라기보다 레나 자신이 살아가야할 이유가 되어주었을 것이고, 나아가 교사로서의 열정을 다시 지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마하발리푸람 마을의 학교 설립은 레나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절박하고 유일한 길이었을 터다. 


무엇보다 레나, 랄리타, 프리티는 서로 공통된 아픔이 있다. 동일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평생을 함께 할 줄 알았던 연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레나, 엄마를 잃고 인도 북부에 있는 아빠에게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바람인 랄리타, 강요된 조혼 후 1년 뒤 출산 도중 언니가 사망한 충격과 슬픔을 안고 사는 프리티. 사실은 그들 뿐만 아니라 불가촉민 여성들, 더 나아가 인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상실감을 안고 산다. 강요된 자아 상실을. 


레나와 프리티와 랄리타가 이룬 새로운 가족의 형태. 우리는 혈연이 아니더라도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과 공감과 이해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적지 않다. 제도적인 부분을 비롯해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여전한 '낯선 시선'이 아닐런지. 


레나의 도전을 희망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까닭은 랄리타와 프리티를 비롯한 수많은 '그녀'들이 레나와 함께 걸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제 그들과 발맞춰 걸어 봅시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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