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티샤 콜롱바니 저자, 임미경 역자 / 밝은세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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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다면 자신이 바로 피난처이자 쉼터가 되어야 한다. 



연인의 죽음으로 상실감과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레나는 즉흥적으로 인도로 향하고 그곳에서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한 그녀를 구해준 열 살 소녀 랄리타와 불가촉민 여성 자경단 '레드 브리게이드' 단원들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초목과 꽃에 손이 닿으면 식물이 시들어버린다는 불가촉민. 그들과 접촉한 행위만으로도 온갖 모욕과 배척과 폭력을 감수해야 하고, 신분 계급 사회에서 인간계에 속하지 않는 그들에게 있어(특히 여성) 운명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요 저주다. 불가촉민 여성 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행은 장소와 나이, 일가 친척부터 길거리의 행인까지 가해자의 신분을 불문한다. 오죽하면 레드 브리게이드 단장 프리티는 달리트 여성 강간을 국민스포츠와 다름 없다고 말할까. 


달리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종하고 이름을 바꾸기도 하지만 구습과 전통은 버리지 못하는 불가촉민 계급. 딸이 강간을 당해도 부모는 분노하기는 커녕 가해자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한다. 경찰, 정부, 가정, 그 어디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수천 명의 여자아이들은 집을 나와 매음 조직에 납치되어 평생 매를 맞으며 성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강요된 조혼으로 매매되는 물품 취급을 받으며 어느 집 가장의 소유물이 될 뿐이다. 달리트 마을의 여성은 나이와 관계없이 전투적인 삶을 살아간다. 


레나는 자나키의 조혼을 통해 달리트 마을에서 교육을 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은 빈곤이 아니라 오랜 관습과 전통임을 깨닫는다. 레나는 자신이 랄리타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줬다고 믿었지만, 랄리타의 자리를 대신한 다른 아이(소년 다부)의 삶을 희생시킨 꼴이었다. 사슬처럼 이어진 고통의 고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인류 문명과 불교의 발상지이자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에 대한 인권 말살과 폭력을 자행하는 인도의 두 얼굴. 과연 이 두 얼굴이 인도만의 얘기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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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가 랄리타에게 남다른 감정을 갖고 책임감을 느끼며 도움을 주려고 하는 이유가 오직 연민 때문일까. 랄리타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단순한 연민에서라기보다 레나 자신이 살아가야할 이유가 되어주었을 것이고, 나아가 교사로서의 열정을 다시 지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마하발리푸람 마을의 학교 설립은 레나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절박하고 유일한 길이었을 터다. 


무엇보다 레나, 랄리타, 프리티는 서로 공통된 아픔이 있다. 동일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평생을 함께 할 줄 알았던 연인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레나, 엄마를 잃고 인도 북부에 있는 아빠에게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바람인 랄리타, 강요된 조혼 후 1년 뒤 출산 도중 언니가 사망한 충격과 슬픔을 안고 사는 프리티. 사실은 그들 뿐만 아니라 불가촉민 여성들, 더 나아가 인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상실감을 안고 산다. 강요된 자아 상실을. 


레나와 프리티와 랄리타가 이룬 새로운 가족의 형태. 우리는 혈연이 아니더라도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과 공감과 이해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적지 않다. 제도적인 부분을 비롯해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여전한 '낯선 시선'이 아닐런지. 


레나의 도전을 희망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까닭은 랄리타와 프리티를 비롯한 수많은 '그녀'들이 레나와 함께 걸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제 그들과 발맞춰 걸어 봅시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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