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된 서유럽 - 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쏜살 문고
밀란 쿤데라 지음, 장진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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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대회의 연설문 [문학과 약소 민족들], 1983년에 지식인 잡지 <데바>에 실린 시론 [납치된 서유럽_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문학과 약소 민족들] 


작가는 민족의 개념에 대해 짚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19세기 초, 소수 지식인들에 의해 체코어, 체코 민족 부활 운동이 있었고 찬성쪽으로 기울긴 했으나 반론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반대측은 게르만화, 즉 강대국에 소속된다면 약소 민족으로서의 불이익을 뒤로하고 삶의 편리, 더 많은 기회와 권위가 부여되고 영향력이 확대될 것이라는 데에 이유를 두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두고 체코의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위엄과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들 민족을 세계적 인식 및 교육 수준으로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족이 생산해야 할 문화적 가치, 그리를 이를 통해 이뤄야할 민족의 생존을 연결 짓는다. 밀란 쿤데라는 이 지점에서 체코 문학의 특수성을 언급하며 문학에 있어서 주류가 아닌 번역가로서의 모델을 짚는다. 체코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유럽 문학의 토대를 세우고, 체코어를 읽는 유럽 독자들을 만들어 낸 것은 문학 번역을 통해서였음을 지적한다. 


약소 민족이었던 체코의 언어와 문화를 유럽의 방언으로 축소되게 하느냐, 혹은 그럼으로써 유럽 민족이 되느냐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상황에서 체코의 문화를 부활시킨 것은 번역으로 시작된 문학의 힘이라고 강조한다.  


밀란 쿤데라는 문화가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며, 약소 민족들은 그들의 언어가 지닌 문화적 역량과 언어의 독자적 특성을 통해 언어와 주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하여 체코 사회 전체가 체코의 문화와 문학이 갖는 본질적 역할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문화 예술을 파괴하는 것은 편협하고 역사적 인식이 결여된 무지이며, 이는 우리 사회를 사막으로 만들 수 있다. 또한 어떠한 형태와 입장이든 사상과 표현에 대한 간섭은 파렴치한 행위라고 간주하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본질적인 이익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보자면 35년의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문화가 민족 정신을 잃지 않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 한 삽화가 이슈가 됐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무지와 파렴치한으로 가는,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ㅡ 



[납치된 서유럽 _ 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이 글은 '유럽'에 대한 개념으로 시작한다. 밀란 쿤데라가 이 글을 썼을 당시 중앙 유럽은 러시아에 예속되어 있었음을 짚는다. 


'유럽'이라는 말은 지리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개념을 뜻하며, 이는 곧 '서유럽'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유럽 역사의 모든 국면에 관여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민족에게 그들이 '서유럽'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체성의 본질 자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서유럽, 동유럽, 중앙 유럽 등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는데, 지리적으로는 중부에 위치하고 문화적으로는 서유럽에 정치적으로는 동유럽에 속해 있는 중앙 유럽의 입장은 가장 복잡하다.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70년 폴란드 봉기 등 1950년 이후 유럽의 비극이 그곳에 집중 되었다는 사실은 이 다각적인 복잡성을 방증한다.  


중앙 유럽은 유럽 내에서 최소의 공간에 최대의 다양성으로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최대의 공간에 최소의 다양성 규칙을 세운 러시아와는 정반대다. 획일적, 균일화, 중앙집권적, 그리고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하려는 러시아는 중앙 유럽이 추구하는 민족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밀란 쿤데라가 강조하는 바는 서유럽의 동쪽 경계에서는 러시아가 반서유럽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중앙 유럽의 항쟁에 담긴 속뜻은 서유럽적 정체성을 지키자는 것이다.  


중앙 유럽에 대해 경계를 규정하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중앙 유럽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몇몇 강대국에게 영향력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는 현대 세계에서는, 유럽의 모든 민족들이 머지 않아 약소 민족이 되는 운명을 겪을 위험이 있다고 말하면서 중앙 유럽의 운명은 유럽 전반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중앙 유럽의 저항 운동들은 미디어가 아닌 문학을 비롯한 철학, 예술, 공연 등 문화에 의해 이행되었다. 러시아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가장 먼저 체코의 문화를 완전 파괴함으로써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켰다(이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유럽이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채 중앙 유럽에게서 정치 제체만을 보기 때문에 중앙 유럽에서 동유럽만을 볼 뿐이라고 말하면서 중앙 유럽은 이웃한 강대국의 힘과 문화를 상실한 줄도 모르는 '서유럽'의 무관심에도 저항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고 얘기한다. 따라서 중앙 유럽의 진정한 비극은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이라고 단언한다. 



ㅡ 



밀란 쿤데라가 두 글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중앙 유럽의 문화와 문학이 갖는 힘이다. 20세기 초 정치적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였으며, 문화적으로 고유한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던 중앙 유럽이 사라진다는 것은 유럽에서 문화 중심지가 사라지는 것임을, 더불어 유럽이 단일성을 만들어 낼 능력과 그 토대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이 책이 지나간 과거에 불과한 전후 및 냉전 시대의 이야기로만 읽혀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글에는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특히 러시아!). 글로벌시대를 지향하며 세계화를 부르짖는 추세에 약소 국가들이 겪는 딜레마를 볼 수 있는데, 당장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도 친러 세력의 입장을 들어보면 앞서 밀란 쿤데라가 지적했던 부분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언어와 문화가 갖는 절대적 가치와 힘 역시 많은 부분 동의 및 공감하게 된다. 우리에게 만약 한글이라는 고유한 문자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간혹 중국 내 소수 민족에 관련한 책들을 읽어보면 언어는 있으나 문자가 없어 세대를 이어갈수록 그들의 문화와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사라지는 경우를 많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중국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흔히 동유럽이라고 일컫는 국가들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들의 역사와 딜레마가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오기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밀란 쿤데라가 어떤 사람인지를 바로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아주 흡족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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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그곳에 : 세상 끝에 다녀오다
지미 친 지음, 권루시안 옮김, 이용대 감수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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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고난을 택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자는 드물다. 



 
 



사진 한 장으로 인생을 바꾼 사람 지미 친. 그는 어느 등반 잡지에서 차라쿠사 계곡 사진을 처음 보고 전문 등반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사진은 존경받는 등반가 콘래드 앵커와 전설적인 등반가이자 사진작가인 게일런 로웰의 사진이었다. 지미 친은 1999년 파키스탄 차라쿠사를 시작으로 20년 동안 경외 가득한 곳을 향해 전 세계를 누빈다.  


이 책에서는 지미 친 뿐만 아니라 릭 리지웨이, 콘래드 앵커, 게일런 로웰, 스티븐 코크, 딘 포터, 시더 라이트, 스테프 데이비스, 이본 쉬나드, 티미 오닐, 알렉스 호놀도, 토미 콜드웰 등 전설적인 등반가이자 모험가들을 만날 수 있다.  



6,934미터 높이로 산악 요새를 방불케 하는 K7, 세계에서 교전이 가장 자주 일어나는 카슈미르 인근의 카라코람, 파타고니아의 세로토레, 티벳 창당, 미국 티턴과 요세미티, 말리, 히말라야 메루 봉, 키나발루 산 거벽, 중국 미냐콩카 산맥의 샹그릴라, 차드의 사암질 타워, 남극까지 기후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은 30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배낭을 지고 때로는 자기 키의 수 배에 이르는 사다리를, 때로는 스노드보드와 스키까지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계곡이나 등성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포탈렛지 캠프 안에서 머물고, 날씨가 궂으면 이런 상황이 며칠이고 지속되기도 한다. 눈과 빙하 아래의 크레바스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하고, 바람에 의해 암벽에서 날려 패대기쳐지며, 떨어지는 눈폭탄에 몸이 연처럼 나부낀다. 로프 없이 암벽에 오르는가하면 고공 줄타기도 서슴치 않는다.  


오르는 것만으로 숨이 턱에 찰 지경인데, 그들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의뢰로 환경 보호 영상 및 영화를 촬영하고, 에베레스트에서 스노보드와 스키를 탄다. 또한 중앙 고원의 절벽집에서 사는 토착 민족인 도곤족과 며칠 간 생활하며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암벽과 사암질의 타워 등 모든 순간을 온몸으로 겪어낸다. 


이들의 모험이 순탄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다. 큰 위험에 직면하고, 심각한 부상과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지미 친 본인도 눈사태에 휩쓸려 파묻혀 죽을 위기를 겪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산 앞에 세우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등산 경험이야 대한민국 국토를 벗어난 적이 없으니 언감생심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알 것 같다. 아마 그들도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 않을까. 꽤 어린 시절부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산을 다녔지만, 누가 왜 산에 가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 그냥 간다.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좋으니까.  


책을 펼치고 글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입이 다물어질 틈이 없었다. 저절로 지리산 천왕봉을 허걱대고 올라간 내 모습이 떠오르게 된다(아... 부끄러...). 책장을 넘길 때마다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새어나올 수 밖에 없다. 나는 타고나기를 어깨가 약하다 보니 짐을 지는 걸 힘들어 하는 지경이라 아무리 등산을 좋아해도 대부분 만 하루를 넘기는 일정을 잡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산길에 백팩커를 만나면 존경스러울 따름인데, 하물며 지미 친과 동료들의 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책 후반부에는 지미 친이 감독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솔로>의 촬영 과정 일부가 소개되어 있는데, 책을 다 읽고 영화를 찾아서 시청했다. 오금이 저리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요세미티의 3천 피트 높이 엘캐피탄 암봉을 로프 없이 맨몸으로 올라가는 알렉스 호놀드를 보면서 호러 영화도 아닌데 두 손으로 눈을 막고 손가락 사이로 시청하면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너무 긴장해서 보다가 울 뻔했다.


경이로운 사람들, 경이로운 사진이다.  
나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모험이지만, 그래도 세상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어떤 기분을 들게 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69.
뒤돌아 집까지 살아서 간다면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목표는 거기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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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얻는 지혜 (국내 최초 스페인어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6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김유경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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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후 유럽 사상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일컬어지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저서다. 읽는 입장에 따라 잠언집이 될 수 있고, 처세술 혹은 자기계발서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손자병법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일단 소제목만 읽으면 낭패다. 한두가지 예를 들어 보면, 적절한 거절을 권유하는 부분에서 핵심은 거절이 아닌 거절까지 가는 과정이다. 여차하면 예전에 광고에서 봤던 것처럼 '남들이 Yes라고 할 때 No'라고 외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과하지 않게 간교를 이용하라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정당당하게 싸우라고 한다. 또한 앞에서는 자기만족은 금물이랬다가 뒤에서는 자신에게 만족하라고 한다. 본문과 행간을 읽지 않으면 제 입맛대로 해석할 수 있으니 꼼꼼하게 읽고 생각의 시간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  







 
'삐뚤어질테다!'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 딴지를 걸어본다.
결점을 남기지 말고, 결점을 멋진 장식으로 바꿀 줄 아는 것은 최고의 기술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해 카이사르를 예로 드는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천재다. 천재와 같아지기는 너무 어렵다. 그리고 어렵고 위험한 일은 해결할 생각을 말고 아예 처음부터 피하라고 한다. 어리석은 일에 관여하지 않는게 상책이라는 건데, 피하고 싶은 일을 피할 수 없는 게 우리의 딜레마 아니던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수단보다 결과가 훨씬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규칙을 어기는 것이 또다른 기술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거기다 칭찬받을 만한 일을 선택하란다. 중요도나 가치의 척도보다는 대중의 박수 갈채를 받을 수 있는 일을 선택하라는 것.  


이 정도만 써도 당황스러울 독자가 있겠지만, 저자가 살았던 17세기 스페인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가르침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ㅡ 


사제이고 수도자이자 설교자이며 인문학 교수였던 저자의 가르침인만큼 그의 지혜와 혜안은 눈과 가슴에 담아둘 가치가 있다.  



나의 입장에서 와닿았던 몇 가지들은,  


첫번째는 침묵의 중요성이다. 침묵을 통해 말의 힘을 축적하라는 조언은 경청과 같은 선상에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듣기의 중요함을 새록새록 느끼고 있다.  


두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일이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분리해낼 수 있어야 하고, 적당한 거리를 둔 관계가 더 오래 간다는 데에 공감한다.  


세번째는 감정에 휘둘리지 말기. 저자는 인간의 삶은 인간의 교활함과 맞서 싸우는 한 편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숱한 일상의 부침에서마다 감정을 소모한다면 얼마나 피폐해지겠나.  


네번째,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어라. 내가 제일 못하는 점이다. 누가 나한테 호의를 베푸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다보니 의식적으로 호의를 베풀려고 노력하지 않는 편이다. 이로 인해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나와는 다르게 선뜻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보면 예뻐보이고 부러웠더랬다. 호감은 행운으로 시작해서 노력으로 이어진다. 호의를 얻으려면 먼저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선한 행동과 말을 하고, 더 좋은 행동을 해야 한다. 옳은 말씀이다.  


다섯번째, 이 책에서 나에게 금과옥조는 너무 많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원하는 걸 얻으려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라는 것이었다. 워낙 생각이 많고 오래하다보니 부작용이 적지 않다. 


마지막으로 내면의 깊이를 채워라. 노력 중이다.  


ㅡ 


'모든 사람에게 맞출 줄 알라'는 문구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말은 적당히 눈치가 있어야한다기보다는 그야말로 지혜, 지식, 안목, 인내심, 언변, 절제, 현명함 등 이 책에서 언급했던 거의 대부분의 덕목을 갖춰야만 가능할 일이다. 사람을 얻는 것도, 타인과의 원만한 교류도 참 어려운 일이다. 



읽을수록 느껴지는 점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귀한 가치는 성실과 책임감, 그리고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 즉 양극단 사이에 있기에 둘 다 경험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을 하나로 단정지을 수 없고, 하나의 길로만 가기도 어렵다. 그저 삶을 적절히 분배할 줄 아는 현명함이 필요할 따름이다. 저자가 가장 우려하는 점은 '정념'인데,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과 분별력을 흐리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짚는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함은 신중한 자기 성찰을 통한 타인과의 조화로운 관계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리고 나의 머리를 울렸던 질문 하나, '불행을 함께 짊어질 사람이 있는가?'



인내심을 갖고 자부심을 잃지 않으며 시간을 들여 준비하고 신중함으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 마무리를 잘 하는 사람, 끝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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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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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 <문맹>을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을 펼치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하물며 재독인 나로서는 다시 읽기를 망설였으나 막상 이십 년 가까이 지나 다시 읽으려니 망설임보다는 애틋함이 더하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와 이후 읽는 이 소설을 읽는 감상은 사뭇 다르다.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들이 하나하나 콕콕 박혀 들어온다.   








아버지가 종군기자로 참전하자 어머니는 쌍둥이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를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에게 맡긴다. 쌍둥이의 시골 생활은 숲을 뛰어다니며 자유를 만끽하는 천진난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 나이 이상의 노동을 해야하며, 스스로를 보살펴야 했다. 


쌍둥이는 고통, 모욕, 수치심, 배고픔 등 모든 참기 어려운 것을 이겨내고 싶어 잔혹 연습을 한다. 그런데 폭행, 언어폭력, 굶주림, 학대가 연습한다고 익숙해질 수 있는 것들인가? 우리는 살면서 숱하게 정서적 폭력과 모욕을 당하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 없다. 


학교를 가지 못해 독학을 하는 쌍둥이의 글짓기를 보면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같다. '아름답다', '좋아한다', '친절하다' 처럼 주관적이기에 모호하다고 판단되는 단어는 모두 배제되고 있는 사실만을 나열한다. 언청이를 비롯해 타인에게 도움을 줄 때에도 상대의 상황과 감정에 이입하고 공감해서라기보다는 대상이 원하는 바를 실현해 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다. 그들과는 반대로 애정을 갈구하는 인물이 언청이다. 관심만 받을 수 있다면 강간도 받아들이는 아이를 보면서 가슴 한 켠이 저릿해 온다. 


전쟁 중에 가장 약자는 여자와 아이들이다. 외국 군대든 해방군이든 약자들에게는 그들이 누구인지 의미가 없다. 가진 것이 없고 노동할 힘도 없는 소도시 여성들은 매춘을 하고, 보호자가 부재한 아이들은 성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어쩌면 쌍둥이가 감정을 걷어낸 것은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폭행, 협박, 살인 등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형제에게 도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생존이 도덕이다.  


ㅡ  


서로를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 헤어진 루카스와 클라우스. 클라우스는 월경했고 루카스는 혼자 남았다. 혼자 남은 루카스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길을 잃었다. 루카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밭을 갈고, 술집들을 전전하며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술에 취해 우연히 알게된 여자의 집을 찾아가는 게 전부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국경지대 소도시는 떠나기만 할뿐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죽은 도시가 되어간다. 


공산주의 체제에서의 모든 책은 체제를 찬양하는 책 뿐이고, 이외의 책들은 모두 금서로 지정되었다. 정부는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기 위해 암살을 서슴치 않고, 눈에 거슬리는 자들은 반체제 인사로 몰아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한다. 전쟁터에서든 강제수용소에서든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극심한 외상 후 장애를 앓으며 정신 병원에 수용되기 일쑤다. 매춘이나 강간으로 태어나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아이들은 집단 탁아소에 맡겨진다. 


집회 금지, 주류 판매 금지, 식당 폐쇄, 여행 금지, 외출 및 야간 통행 금지. 공장은 다시 가동되고, 일터로 돌아가지 않은 노동자들은 해고 대상이며, 파업을 선동하는 자는 사형이다. 혁명이 성공했다는데, 저항운동과 투쟁과 동맹파업은 계속된다. 체포, 투옥, 실종, 처형도 계속된다. 침묵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 침묵 속에서 인민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복종하든가, 죽음을 불사하고 떠나든가.  



인상적인 장면은 먼저, 페테르가 루카스에게 클라라를 사랑하냐고 묻자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루카스는 당 서기관인 페테르에게 연설하면서 하는 말들을 진심으로 다 믿냐고 묻자 자신은 믿어야 하며 자신의 생각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치라고 대답한다. 사랑을 모르는 남자와 생각이 중요하지 않은 남자. 그러나 안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랴. 이 부분은 3부에서 클라우스의 단상과 이어지는데 성性이 아닌 사랑과 존재를 금지당한 세상에서의 절망이 아프게 다가온다.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과 살인을 불사했다. 마티아스가 학교에서 폭행을 당하고 돌아오자 루카스는 스스로를 지키라며 간석과 면도칼을 내놓지만 마티아스는 자신의 몸에 난 상처보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더 참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루카스가 다른 소년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자 곧바로 상해를 가한다. 또한 마티아스를 소유하기 위해 루카스가 저지른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폭력과 애정을 동류로써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할 밖에. 


2부에서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 아닐까싶은데, 글을 쓰고 싶어서 서점을 팔고 누나에게 간 빅토르가 남긴 글은 당시 시대를 여과없이 은유한다. 누나는 글을 쓰겠다고 찾아간 동생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하고 참견하면서 글씨기를 방해한다. 빅토르는 누나의 행동이 창의력, 생명력, 자유, 영감을 말살시킴으로써 모든 걸 파괴시킨다고 부르짖는다. 떠나겠다는 동생에게 먹여주고 재워준 대가를 지불하라면서 놓아주지 않는 누나. 결국 빅토르는 누나를 살해하는데, 그는 법정에서 자신은 그녀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것만이 책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호소하지만, 배심원들은 빅토르가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사회에 위험한 인물'이라고 결론짓는다. 작가는 빅토르와 페테르를 통해 하고자했던 말을 전하고 있다. 전체주의자들은 인민 개인의 죽음 따위는 괘념치 않는다. 현재의 우리가 다수자 중심 원칙을 당연한듯 아무렇지 않게 들이미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유독 남는 인물은 페테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사유와 부끄러움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ㅡ 


마침내 모든 진실이 드러난다. 
클라우스와 루카스 그들은 존재자인가 아니면 비존재자인가.
나이를 속이고 형제의 이름으로 살아온 남자, 다친 형제를 잃어버렸다는 무거운 죄책감과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으나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 비교당하며 인정받지 못한 채 자신의 인생이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무한한 고통임을 받아들였던 남자.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이도, 천둥벌거숭이로 살아야만 했던 이도, 지독하게 외로웠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독자의 가슴이 내려앉는 장면은 클라우스가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 루카스를 눈앞에서 놓친 짧은 순간일 것이다. 그들이 그때 재회했더라면. 



작가의 모든 작품에는 자전적 요소가 깔려있다. 특히 <문맹> 에서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기록에 대한 소리없는 처절함은 이 작품에서도 나타나있다. 루카스가 남긴 허구의 이야기가 과연 허구로만 읽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안에는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말하고자 했던 모든 실질적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성을 내다버리고 비도덕적인 협박과 폭력, 살인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세상임을, 허구의 힘을 빌어 말하고자함이 아니었을까.



소설은 전쟁과 혼돈의 시대에 정착하지 못하고 '개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부유해야만 했던 이들의 처절한 외로움과 우울, 그리고 존재가 갖는 허무에 대해 말한다. 작가는 루카스에게 일말의 희망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서로를 그토록 찾고자 했던 루카스와 클라우스. 네 식구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한 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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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러닝
이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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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우리가 타인에게 얻고 싶은 건 어쩌면 진심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 온정이 아닐까.  



여덟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오래 전에 집을 나간 아빠가 자기의 학창 시절 사진을 보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입사 원서 사진에 집착하는 여자, 죽은 약혼자가 너무 보고 싶어서 매일 팔을 잘라 골짜기 한쪽에 모아두는 잔느, 아버지가 죽자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십 년 전에 집을 떠난 언니를 찾아가는 여자, 애인에게 전화 한 통으로 이별을 통보받은 남자와 동생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기가 망가져 망연자실한 남자, 가족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년, 뉴욕에서 거지로 살망정 한국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데 서슴치 않는 준 리 등 이외에도 결핍과 상실을 안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류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 중 하나가 사랑이 아닐까 싶다.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사랑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각자의 입장에서 셀 수 없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우리가 무슨 재주로 사랑을 정의하고 결과를 내놓을 수 있겠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기대고 의지할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런지. 타인의 숨소리가 위안이 될 만큼(나는 이게 어떤 마음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 삶은 외롭고 고독하다. 세상살이는 어차피 누군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고, 그로인해 너나할 것 없이 서로서로 민폐를 끼치는 것.  


ㅡ 


이상과 현실.
상실과 자책.
결핍과 소멸.
반성과 속죄.  


여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언덕이 모두 무덤인 도시에서 밤마다 언덕을 뛰어다니는 드리(나이트 러닝)처럼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딛고 삶을 연명한다. 때로는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얼마 못있어 한계를 깨닫고, 때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쪼개진다. 어느 순간부터는 적응인지 체념인지 모호한 상태에 접어들곤 한다. 적응과 체념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을까.


보여지는 게 전부가 아닌 세상에서 속단은 금물. 무엇을 이뤘든 이루지 못했든 삶은 계속되고, 미래는 과거를 기준으로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각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안고 가야할 중력의 무게가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출간일이 10월 24일. 얼마 전 참사를 염두에 두고 썼을 리는 없건만, 작품 중 <우리가 소멸하는 법>은 이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반성과 속죄는 다르다는 유구의 말이 허투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건 애도와 기도 뿐만이 아니라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소설의 정황상 꽤 감정이 격해질 수 있음에도 담담하고 건조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사이사이의 유머가 오히려 씁쓸하게 전해진다. 마지막에 실린 <에덴 ㅡ 두 묶음 사람>의 화자가 옥상에 방수용 페인트로 도색하겠다는 다짐에 안심이 된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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