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된 서유럽 - 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쏜살 문고
밀란 쿤데라 지음, 장진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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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대회의 연설문 [문학과 약소 민족들], 1983년에 지식인 잡지 <데바>에 실린 시론 [납치된 서유럽_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문학과 약소 민족들] 


작가는 민족의 개념에 대해 짚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19세기 초, 소수 지식인들에 의해 체코어, 체코 민족 부활 운동이 있었고 찬성쪽으로 기울긴 했으나 반론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반대측은 게르만화, 즉 강대국에 소속된다면 약소 민족으로서의 불이익을 뒤로하고 삶의 편리, 더 많은 기회와 권위가 부여되고 영향력이 확대될 것이라는 데에 이유를 두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두고 체코의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위엄과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들 민족을 세계적 인식 및 교육 수준으로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족이 생산해야 할 문화적 가치, 그리를 이를 통해 이뤄야할 민족의 생존을 연결 짓는다. 밀란 쿤데라는 이 지점에서 체코 문학의 특수성을 언급하며 문학에 있어서 주류가 아닌 번역가로서의 모델을 짚는다. 체코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유럽 문학의 토대를 세우고, 체코어를 읽는 유럽 독자들을 만들어 낸 것은 문학 번역을 통해서였음을 지적한다. 


약소 민족이었던 체코의 언어와 문화를 유럽의 방언으로 축소되게 하느냐, 혹은 그럼으로써 유럽 민족이 되느냐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상황에서 체코의 문화를 부활시킨 것은 번역으로 시작된 문학의 힘이라고 강조한다.  


밀란 쿤데라는 문화가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며, 약소 민족들은 그들의 언어가 지닌 문화적 역량과 언어의 독자적 특성을 통해 언어와 주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하여 체코 사회 전체가 체코의 문화와 문학이 갖는 본질적 역할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문화 예술을 파괴하는 것은 편협하고 역사적 인식이 결여된 무지이며, 이는 우리 사회를 사막으로 만들 수 있다. 또한 어떠한 형태와 입장이든 사상과 표현에 대한 간섭은 파렴치한 행위라고 간주하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본질적인 이익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보자면 35년의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문화가 민족 정신을 잃지 않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 한 삽화가 이슈가 됐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무지와 파렴치한으로 가는,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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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된 서유럽 _ 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 


이 글은 '유럽'에 대한 개념으로 시작한다. 밀란 쿤데라가 이 글을 썼을 당시 중앙 유럽은 러시아에 예속되어 있었음을 짚는다. 


'유럽'이라는 말은 지리적 현상이 아니라 정신적 개념을 뜻하며, 이는 곧 '서유럽'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유럽 역사의 모든 국면에 관여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민족에게 그들이 '서유럽'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체성의 본질 자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서유럽, 동유럽, 중앙 유럽 등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는데, 지리적으로는 중부에 위치하고 문화적으로는 서유럽에 정치적으로는 동유럽에 속해 있는 중앙 유럽의 입장은 가장 복잡하다. 1956년 헝가리 혁명, 1968년 '프라하의 봄'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1970년 폴란드 봉기 등 1950년 이후 유럽의 비극이 그곳에 집중 되었다는 사실은 이 다각적인 복잡성을 방증한다.  


중앙 유럽은 유럽 내에서 최소의 공간에 최대의 다양성으로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최대의 공간에 최소의 다양성 규칙을 세운 러시아와는 정반대다. 획일적, 균일화, 중앙집권적, 그리고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하려는 러시아는 중앙 유럽이 추구하는 민족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밀란 쿤데라가 강조하는 바는 서유럽의 동쪽 경계에서는 러시아가 반서유럽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중앙 유럽의 항쟁에 담긴 속뜻은 서유럽적 정체성을 지키자는 것이다.  


중앙 유럽에 대해 경계를 규정하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중앙 유럽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몇몇 강대국에게 영향력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는 현대 세계에서는, 유럽의 모든 민족들이 머지 않아 약소 민족이 되는 운명을 겪을 위험이 있다고 말하면서 중앙 유럽의 운명은 유럽 전반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중앙 유럽의 저항 운동들은 미디어가 아닌 문학을 비롯한 철학, 예술, 공연 등 문화에 의해 이행되었다. 러시아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가장 먼저 체코의 문화를 완전 파괴함으로써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켰다(이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는 유럽이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채 중앙 유럽에게서 정치 제체만을 보기 때문에 중앙 유럽에서 동유럽만을 볼 뿐이라고 말하면서 중앙 유럽은 이웃한 강대국의 힘과 문화를 상실한 줄도 모르는 '서유럽'의 무관심에도 저항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고 얘기한다. 따라서 중앙 유럽의 진정한 비극은 러시아가 아니라 유럽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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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가 두 글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중앙 유럽의 문화와 문학이 갖는 힘이다. 20세기 초 정치적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였으며, 문화적으로 고유한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던 중앙 유럽이 사라진다는 것은 유럽에서 문화 중심지가 사라지는 것임을, 더불어 유럽이 단일성을 만들어 낼 능력과 그 토대를 상실했음을 의미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이 책이 지나간 과거에 불과한 전후 및 냉전 시대의 이야기로만 읽혀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글에는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특히 러시아!). 글로벌시대를 지향하며 세계화를 부르짖는 추세에 약소 국가들이 겪는 딜레마를 볼 수 있는데, 당장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도 친러 세력의 입장을 들어보면 앞서 밀란 쿤데라가 지적했던 부분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언어와 문화가 갖는 절대적 가치와 힘 역시 많은 부분 동의 및 공감하게 된다. 우리에게 만약 한글이라는 고유한 문자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간혹 중국 내 소수 민족에 관련한 책들을 읽어보면 언어는 있으나 문자가 없어 세대를 이어갈수록 그들의 문화와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사라지는 경우를 많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중국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흔히 동유럽이라고 일컫는 국가들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들의 역사와 딜레마가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오기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밀란 쿤데라가 어떤 사람인지를 바로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아주 흡족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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