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1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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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세상이 끝날 때, 내 마지막 숨결이 허공으로 흩어질 때, 그순간 당신과 함께 하기를,(...) 그러니 종말이 다가올 때 나를 기억해주길, 부디 잊지 말아주길, 단 한순간이라도 아프게 그리워해주길, 고운 그대, 낙원의이름을 가진 빛나는 내 사랑아"
('Nessun Sapra' 에서) 







일단, 책을 덮고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아... 잘 쓴다" 였다. 
한참 뜨거웠던 <저주 토끼>를 통해 대중에게 확실히 이름을 각인시킨 정보라 작가의 초기작 소설집이다.  


고대부터 미래까지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단편소설 열한 편이 실려있다. 작품들은 소설적 상상력에 때로는 음산하고 기괴하며 신비스러움까지 더해져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습하면서도 건조한 불가사의는 공포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전 작품이 고딕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싶다.  


ㅡ 


철없는 두 소년의 장난과 무자비했던 한 여행자로부터 비롯된 처절한 비극, 그리고 복수와 죄책감. 현대인의 극단적 외로움과 권태.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책임감과 회피 등. 


인간은 자극을 필요로 하고, 지루함과 권태를 견디지 못한다. 고통과 절망에 취약한 인간에게 평범하고 안락한 보통의 생활이 부숴질 수 있는 경우의 수에는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다.  


당장의 현실은 만족스럽지 않은 법이며, 적당한 경계와 거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감정이 됐든, 실재적인 그 무엇이든 간에 손에 닿을 수 없기에 더 그립고 아련한 것일테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가 서있는 곳이 마치 세상의 끝이라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인생에서 나의 심정을 알아주고 기댈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사람만 있다면 견딜만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네.   



실린 작품들의 특이점을 꼽자면 모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없다. 남자, 여자, 그, 그녀 등 3인칭으로 지칭되는데, 이들이 결국 대다수 보통의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기때문이 아닐런지.  


이 책에는 섣부른 용서나 구원, 뉘우침이나 정의 회복,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름다운 해후 따위는 없다. 신념과 명분을 내세운 구차한 변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타인의 죄책감을 악용하고,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던 독재자는 번성을 누리고, 고통 속에서 죽은 영혼은 여전히 그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탐욕과 쟁취를 위해서라면 어제의 연인에게 칼끝을 겨눌 수 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시민의 무력한 절망은 묻혀지며, 죽은 시신이라도 혹은 죽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갖겠다는 인간의 소유욕이 사랑으로 포장되는, 그래서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반복 지속되는,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어떤 하나를 꼽기 곤란한 정도로 실린 단편들 대부분이 인상적이다.
<나무>와 <완전한 행복>은 그 어떤 작품보다 참혹하다. 나는 어쩌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구현되는 결말이 아닌, <완전한 행복>에서의 결말에 더 후련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마음 한구석에 악의를 감추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고, 자비와 용서의 허울에 분개하는 미력한 인간일 뿐이니. 




사족.
한국문학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없는 스타일이다. 고딕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렇고 그런 교훈적인 이야기, 그럼에도 해피엔딩이 식상한 독자라면, 추천한다.   



418.
이제 그의 세상에는 선도 자비도 용서도 없다. 그의 존재는 비로소 의미를 찾았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아름답고 무자비한 세상에 홀로 서서 그는 완전한 행복을 느꼈다.
('완전한 행복' 에서)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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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디어리스
권오경 지음, 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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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윌, 피비 인, 존 릴, 세 사람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교차해 풀어나간다. 윌은 1인칭, 다른 두 사람은 3인칭 시점인데, 피비의 서술 방식이 독특하다. 3인칭 시점임에도 피비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둣 서술한다. 마치 고해성사 같은 말들을, 피비는 누구를 향해 얘기하는 것일까? 





 


 

 




윌이 기독교인이 된 때는 중학생, 어머니가 처음 아팠을 때였다. 소년 윌은 신앙으로 어머니를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다섯 달 뒤 어머니의 세례식에 증인으로 설 때만해도 어머니를 구원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윌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주빌리 신학대학에 다니던 중 신앙을 잃었다.


천재 피아니스트로서 유명인이 되고 싶었던 피비는 리비흐 음반을 듣고 자신애게는 그만한 재능이 없어서 위대한 연주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해 피아노를 그만두고자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물러서지 않았다. 어머니와 첼로 공연을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를 운전하던 피비는 반대쪽 차선으로 차를 몰았다. 


존 릴은 대학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중국 옌지에 이르렀다. 북한과 가까운 도시에서 탈북자들을 서울의 보호소로 밀항시키는 활동을 하는 단체에서 일하다가 북한 요원들에게 납치 당해 평양 외곽의 수용소에 처박혔다. 억류된 지 세 달이 지났을 때 교도관들이 존 릴을 강둑으로 데려가 중국으로 도로 넘어가라고 했다. 3월초, 살얼음이 낀 강을 건너기 전에 익사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ㅡ 


윌, 피비, 존 릴은 각자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ㅡ신앙, 영예, 신념ㅡ에 대해 실패와 상실감, 그리고 죄책감을 안고 도피하듯 녹스허스트로 들어온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으면서도 여전히 신앙이 그리운, 아무런 죄 없이 죽어가는 이들을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그들의 죄책감은 누군가는 파티걸로, 누군가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신념을 실현시킬 광신도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갖는 슬픔과 죄의식의 고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됐을까. 
피비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결혼해 시댁에 들어가 돈도 받지 못하는 하녀 노릇을 하듯이 살다가 첫아이를 출산 후 몇 달 뒤 아이를 데리고 그 집을 떠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L.A.까지 쫓아온 남편을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 어머니는 자신의 박탈당한 삶을 딸이 대신 살기를 바랐다. 피비의 어머니는 딸에게 피아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필요없는 것들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피비는 어쩌면 어머니가 살았을 수도 있는 위대한 삶을 자신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 대신 살아야할 의무가 있었다. 자식을 통한 대리 성취. 아마 어머니가 자신의 삐뚤어진 욕구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꼈던 딸의 인생에 독이 될 줄 알았더라면. 


피아노를 포기하고 방황하는 피비가 갈망한 건 어떤 대상이든 상대방이 들려주는 진실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상쇄시키고 싶었던, 아니 그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존재로 비하하며, 자신의 고통으로도 부족해 타인의 고통까지 꽉꽉 채워 스스로를 학대했던 그녀. 피비의 윌을 향한 사랑도, 피비에 대한 윌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도, 빠른 시간 안에 피비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든 것도, 모두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비가 윌에게 처음 끌려 의도적으로 접근한 이유 또한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방인의 고독이었다. 윌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고. 안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듯 떠있는 서로를 땅에 붙어있을 수 있게 해주었던 두 사람. 


피비가 제자 모임에서 사랑하는 윌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그녀가 갖고 있는 비밀들을 털어 놓았다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 안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얼마나 털어놓고 싶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윌은 그 모임에서 피비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스스로 내부자가 될 생각으로 모임에 가입하지만 윌마저 때로는 존 릴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차라리 옳기를 바란다. 피비, 그리고 자신을 위해.


ㅡ 


소설에서 묘사되는 '제자' 모임의 행위는 우리가 매체에서 접했던 소위 사이비 종교의 그것과 흡사하다. 과도하게 고해를 강요하고, 금전적 충성과 복종을 요구하며, 죄를 물어 신자들의 죄책감을 세뇌 및 강화한다. 신의 말씀 앞에서 사회적 규범이나 법은 무용하며, 신체적 자해와 폭행은 신에 대한 순종의 척도가 된다.  


단적으로 '제자' 모임이 낙태 반대 행진을 주도하는 장면에서 윌의 물음에 낙태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라고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피비의 모습에서 그들의 정당성은 임산부의 입장이나 태아의 생명권이 아닌 신의 말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의아한 인물은 존 릴이다. 그는 우리가 언론에서 보았던 교주와는 다른 한편으로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그는 교단을 위해 헌금을 걷고 신도들에게 재산을 헌납하라고 간접적으로 강요하지만 그 돈을 사취하지 않는다. 존 릴은 정말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믿는 미치광이 교주였을까, 아니면 집단 뒤에 숨은 아나키스트 혹은 테러리스트였을까. 아니면 둘 다 였나? 가장 아픈 곳을 찔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부숴가며 자신의 목적을 취했다는 점에서 존 릴은 여타 교주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오직 피비만이 알고 있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과 마지막에 아들의 전화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어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윌의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하면서, 불현듯 영화 <밀양>이 떠올랐다. 전도연 배우의 울부짖는 장면, 마당 한구석 웅덩이를 비추는 햇살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지나갔더랬다. 


저자가 윌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밀양>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바로 그 햇살과 같지 않을까.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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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 신과 인간이 만들어온 이야기
필리프 르셰르메이에르 지음, 레베카 도트르메르 그림, 전경훈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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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만든 목록이든 성경은 현대인 필독서로 늘 올려지는 문헌이다. '나, 이런 책도 읽었다'라는 허영심 가득한 독서를 하던 한참 어린 시절, 나의 자신감을 왕창 박살내놓았던 책이 성경이다. 집에 있는 성경과 개신교 성경까지 구해다 읽었지만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결국 포기, 꿩 대신 닭이라고 해제로 내놓거나 혹은 산문체로 출판한 성경으로 대체해 읽기를 마쳤으나 나에게는 많은 부분이 여전히 오리무중인 글들이다.  








이 책은 기독교 성경을 삽화와 함께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놓았다. 다양한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챕터별로 산문체, 서사시, 희곡 등 차별화하고 있어 읽는 맛이 색다르다. 성경 혹은 이와 관련한 책을 읽을 때마다 구약이 신화 및 설화 같다면, 신약은 그야말로 판타지, 마법 동화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은 그 느낌이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  


​필리프 르셰르메이에르는 성경은 오로지 종교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공동 자산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의 신화들은 우리 사회를 형성했고 일상의 삶에 개입해 우리 무의식 안에서 순환한다고 얘기한다. 이 책은 '성경'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이야기들이라는 그의 글이 무슨 의미인지 책의 말미에 알 수 있다. 


책의 내용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알만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구약의 창세기를 시작으로 카인과 아벨,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사무엘, 사울, 다윗, 솔로몬, 유딧, 욥, 그리고 신약까지, 이외에도 전혀 모르는 내용은 없지 않을까싶다. 혹시 모르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쉽게 쓰여 있어서 읽는 데 전혀 어려움은 없을 듯 하다.  


ㅡ 


이 책을 읽는 동안 학습자 모드가 아닌 독서가 모드였기에 사이사이에 들었던 몇 가지 생각들만 써본다.  


먼지와 물과 하느님의 숨으로 만들어진 아담. 인간은 죽음에 임박하면서 신의 숨이 사라지고 물이 사라지며 먼지로 남는다. 나는 별 내용도 없는 이 문장에서 눈이 한참 머물렀더랬다.


같은 환경에서 아담은 왜 권태를 느끼고, 이브는 호기심을 가졌을까. 연인 혹은 부부 사이에서의 비극도 이러한 차이에서 오는 건 아닌지. 권태보다 호기심이 더 큰 죄악인가? 하느님은 왜 여자를 우선해 단죄했을까. 산고의 고통과 복종과 방황을 주는 것보다 권태와 호기심을 두 인간에게서 거둬냈다면 좀더 본질적인 해결 방법이 됐을지도 모를 일일텐데. 그랬다면 인간의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려나. 혹시 이러한 딜레마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야할 이유를 찾아가라는 신의 빅 픽처? 


바벨탑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민족을 이루어 경쟁했다. 인간의 불화는 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려나. 그래서 질투와 탐욕은 신이 부여한 인간이 갖는 본성인 것인가. 신은 왜 인간을 시험하고 기회를 주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불란을 조장할 그릇된 약속을 주고, 인간 사이를 이간질했을까. 집단 학습능력이 뛰어난 인간이라는 존재. 하필이면 못된 짓에 더 발달을 보이는 집단 학습능력이라니.


애초에 축복을 두 아들 모두에게 내렸으면 불란도 없었을 것을. 이사악은 왜 상황을 굳이 이렇게 만드는지! 


나는 어느 판본에서든 야곱과 라헬의 이야기에서 늘 의아한 점은 라반의 속임수로 레아와 먼저 결혼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라헬과 결혼하기까지 7년의 기다림이 있었다하더라도, 야곱이 레아와의 사이에서 그렇게 많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랑없이 결혼한 야곱을 불안해 했을 레아를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 대부분의 '형제의 비극'이 부모로부터 비롯된 사실을 떠올려볼때, 신조차 형제의 감정을 배려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는 애초에 불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의 말씀은 너무나 모순적이야!)


어리석은 삼손이여, 두 번 속았으니 그 정도면 눈치 챌만도 한데, 들릴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어쩌면 우연의 일치라고 믿고 싶었던 게 더 컸겠지만. 그럼에도 들릴라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했던 영웅. 그럴거면 차라리 멋지게 보내주던가. 어우, 구차해. 


밧세바와 뱃속의 아이를 차지하기 위해 여인의 남편을 전장터에서 죽인 다윗. 이럴거면 '하느님의 궤'는 왜 모시고 있는건지. 여자를 포함한 그 어떤 것이라도 다른이에게 속한 것을 탐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가 숭배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정작 권력자 본인에게는 예외다. 


엘리사의 열두 기적은 예수가 행한 기적과 아주 흡사하다.   


욥의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봐도, 하느님의 자식이 되기 위한 일이 이렇게 고통스러워야할 일이야? 어쩐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단 하나가 희망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힘을 달라는 예수. 그 글의 끝에 써있는 문구는 '행복했다'이다. 어쩌면 우리가 행복한 순간은 여전히 희망이 있고, 나를 신뢰해주는 존재가 있을 때가 아닐까. '행복했다'라는 네 글자가 왜 이렇게 뭉클하게 와닿는지.   


유다의 배반,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될 지 이미 알고 있었던 예수가 '나의 하느님'을 읊조리며 흐느꼈을 때, 나는 왜 그가 울었을까 궁금하다. 한바탕 흐느낌 이후 두려움을 걷어낸 그의 모습에서 때로는 울음이 카타르시스가 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또한 엄마의 걱정을 걱정하는 아들의 눈빛까지, 아마도 예수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에 우리는 그에게 더 친근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니 숫자 7은 많은 부분에서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기간은 일곱 날, 히브리인들이 예리코를 함락한 것도 칠일 째,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계약의 궤'를 돌려준 시점도 일곱 달 뒤, 노아의 방주도 그렇고. 우리가 흔히 행운의 숫자로 7을 꼽는 것이 기독교 문화에서 파생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혹시 나만 몰랐나?).  


ㅡ 


반복해서 말하지만 와닿는 삽화가 많았다.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 마지막장의 요한,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를 그린 그림은 정말... . 만약 예수가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을 멈추고 곁을 지키겠다던 막달레나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라는 헛된 상상도 해봤다.  


책을 덮고 난 후에 든 생각은 신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 특히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읽었다는 생각이 크다. 성경이라는 선입견을 거두고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면 좋겠다. 



297.
나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지 말라고 금하는 율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신음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지 말라고 하는 율법도 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인간의 율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게는 오직 하나의 율법, 곧 하느님의 율법만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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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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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죽음이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다르며, 볼 수 없는 존재의 삶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뼈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로구나. 



역시, 아무렴... 간질간질 말랑말랑한 소설들이 아니었어... . 


책에 실린 네 편의 소설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랑, 욕망, 죄책감, 자아감, 인간성, 육체, 그리고 죽음.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본질과 본성에 대한 고뇌를 SF 요소로 무겁지 않게 다루고 있다. 









장기 이식처럼 감정 이식이 가능하다?!
감정의 쓰레기같기만 한 슬픔과 상실감은 무용한 것인가? 그리고 전이 받은 감정은 내것이 될 수 있을까? 그것까지야 알 수 없다만, 경험상 누군가와의 연대와 친밀감은 행복감에서 오는 것 이상으로 함께 버틴 고난 극복 이후에 더 단단해지더라. 


ㅡ 


검은 구체에서 나오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죄책감을 자극한다. 그들에게는 누나가 유학을 가지 못한 것도, 혼자만 살아남은 것도, 딸이 아픈 것도, 모두 당신들 탓이 아니라는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탓'이 아닌, 원망이 아닌, 괜찮은지를 먼저 물어야할 터다. 


ㅡ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 혹은 진짜 내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란 대체 뭘까? (p134)


자신의 정체성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존재가 갈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갖는 감정과 육체에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인간이 필멸의 존재이듯 기계도 마찬가지다. 한때 인간의 삶을 살았던 수안이 녹슨 금속 피부를 원했던 까닭은 두 자아를 놓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ㅡ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 2일 자정을 넘을 바깥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솜새끼에 의해 스르르 소리를 내며 기화하기 시작했다. 타노스가 손가락 튕김 한 번으로 인류의 절반을 날려버리듯이.  


순위 매기기와 극단적 경쟁.
이 두 가지 만큼은 한국을 따라올 나라가 있겠나. TV 예능을 비롯해 각종 콘텐츠에서는 관찰 예능과 서바이벌 방식(혹은 소재)이 실패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물론 불법도 아니고 몰래 보는 것도 아니지만 일정한 공간 안에 대상들을 모아놓고 특정 상황을 연출해 경쟁을 붙이며 이를 관찰하는 심리는 도대체 무엇이고, 공공연하게 불특정다수에게 노출되는 것을 감수하는 것은 또 무슨 심리일까. 


ㅡ 


유가족이 없는 독거노인의 수는 점점 많아진다. 화장 비용을 마련해 놓지 못한 노인의 재는 보관되거나 뿌려지지 않고 퇴비로 쓰이거나 모래에 뒤섞였다. 


안드로이드 장의사 로비스, 늙은 청소부 모미. 둘의 즐거움은 퇴근 시간에 갖는 아주 짧은 한담이다. 어느날, 휴게실에서 잠든 듯이 죽음을 맞아 영안실 스테인레스 침대에 누워 있는 모미는 자신의 사후 처리를 미처 선택하지 못했고, 유가족도 없었기에 원칙대로라면 시신은 방부 처리 없이 화장하게 된다. 뜨거운 것을 싫어했던, 그래서 차가운 우주를 좋아했던 모미를 차마 불구덩이에 넣을 수 없었던 로비스의 선택.  


이런 판단을 내린 이유가 뭐냐는 첼의 물음에 로비스는 마음이 시키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안드로이드에게 마음이라니. 이제 마음이란 것을 알게 된 로비스가 남아 있는 세월 동안 무영과 첼의 시신을 염했을 때, 이전과 같을 수 있을까.  


ㅡ 


감정 소모를 핑계삼아 이기주의를 합리화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행위를 경쟁력이 우수하다고 추켜 세우며, 누군가를 끊임없이 쳐내고 사다리를 오르는 세태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다정하다고 생각했던 영욱의 냉소적인 한 마디와 민낯이 섬찟했고, 미림과 J의 마지막 모습에서 마음이 내려 앉았다. 내색하지 않았던 현수도, 담담한 척 했던 세인도 안쓰럽긴 마찬가지다.  


사랑으로 시작한 소설은 죽음으로 끝난다.
쓰여진 과거를 통해 미래를 읽고, 미래 소설을 읽으면서 현재를 반추하는 것이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뼈의 기록>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게 참 좋았다. 
백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염을 해왔고, 인간의 소멸을 지켜봤던 로비스는 자신의 전원이 꺼지는 순간, 무엇을 생각했으려나.  



255.
살아 있던 모든 것들은 죽은 후 메마른다. 로비스를 거쳐간 시체들도 화장되지 않는다면 낙엽처럼 말라 어느 한순간 무너져 흙과 다름없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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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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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을 포함해 체호프의 열일곱 편의 중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우리가 손으로 꼽는 불굴의 현대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체호프의 소설은 냉철함과 유머, 그리고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소시민으로서 당시 러시아 시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더불어 체호프는 사회 구조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권력 앞에서 얼마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가면을 뒤집어쓴 비열한 관리, 외모 지상주의, 인간의 존엄마저 내려놓게 만드는 극단의 가난, 자식을 잃은 비통함 앞에서도 부재한 공감과 위로, 집에서만 왕으로 군림하는 비굴한 가장, 고된 노동이 불러온 비극적 참사, 어긋나는 사랑,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는 지성인의 위치와 무력함, 기대와는 다른 결혼 등 그들의 모습에서 현재의 우리를 반추해볼 수 있다.  


ㅡ 


이 소설집에서 놓치면 안 될 작품을 꼽자면 <6호 병동>과 <농부들>.
체호프는 <6호 병동>을 통해 진정한 지식인들의 소외와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의 허영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는 모순을 두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법정에서 판사에게 피의자에 대한 진실 규명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형식주의를 준수하고 정해진 시간에 판결을 내리고 봉급을 받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온갖 폭력이 정의 구현을 위한 정당한 필연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진정한 정의를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안드레이는 의사로서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지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방관자적 입장을 고수한다.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는 커녕 해로운 일을 하면서 봉급을 받고 있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지만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시대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그의 변명(이 도시가 큰 도시에 비해 낙후되고 지적 활동이 침체되어 있기 때문에 달라질 수 없다)이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명분이 되어준다.  


6호 병동에 수감된 이반의 광기 어린 연설의 내용은 인간의 비겁함, 정의를 유린하는 폭력, 폭력의 잔인함을 성토하면서 대다수 지성인과 권력자들이 더 미치광이라고 외친다. 이반의 말을 곱씹어 보면, 결국 진정한 지성인은 부재 혹은 소외된 상태고, 이 세상은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란 말이지. 안드레이는 인생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자유롭고 심오한 사유, 세상의 어리석은 소란을 아주 무시할 줄 아는 것이 지성인으로서의 최상의 축복이라고 얘기하지만, 세상의 어리석은 소란을 무시하는 것과 방관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안드레이는 이반에게 내적 사유를 얘기하지만 이반의 입장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힐 뿐이다. 무엇보다 안드레이 본인이 내적 사유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반은 안드레이에게 실질적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으면서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삶에 대해 말로만 떠들 뿐이라고 일갈한다. 


불명예스럽게 강제 퇴직을 당하고, 연금도 퇴직금도 받지 못한 채 가난해진 삶, 즉 이반이 말한 실질적인 삶의 터널에 들어선 안드레이는 6호 병동으로 강제 입원 조치되고, 환자복을 받아든 안드레이는 체념과 현실 부정을 오간다. 니끼따에게 얻어맞고는 다시 얻어맞을까봐 공포에 떨며 숨죽이고 누워있는 안드레이는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러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고, 고통도 몰랐고, 고통에 대한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6호 병동 안에서는 평등하다는 것이, 안드레이가 삶의 마지막에 마주한 실질적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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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은 참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 
돈이 없어서 체납금을 내지 못하는, 빈민에 가까운 농부들에게 왜 체납금을 내지 않냐고 독촉하는 지방감독관을 보면서 서로 귀를 막고 대화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와 유사한 몇몇 장면들과 농부를 정의하는 대목은 당시 빈농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땠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원인과 과정 없이 가난한 농부들은 무식하고, 탐욕스럽고, 천박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존재들이며, 그렇기에 지주의 하인조차 그들을 하대하고 모욕하고 강탈하고 혐오해도 되는 대상으로 낙인 찍혀있다. 



'죽음은 부농들만 걱정했다. (p284)'
우리는 소위 '잃을 게 없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현세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평온한 내세를 기대하지만,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운 자들은 증명되지 않은 내세는 두려운 차원일 것이다.  


도시에서 와 노동을 하지 않으며 성경만 읽고 있는 올가에게 시골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고된 노동에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고, 그저 술로써 고달픔을 달래는 남자들과 술에 취한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며 시달리면서도 달리 살아갈 방도가 없는 여자들에게 낙후된 시골은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장이다. 


남편이 죽고 다시 모스끄바로 돌아가 하녀로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올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자비 타령만 하고 있는데, 이는 '죽음은 부농들만 걱정했다'는 부분과 이어진다. 결국 현세에서는 더 이상 나아질 게 없는 가난한 자들이 기댈 곳은 하느님의 품뿐이다. 이러한 올가의 모습은 단편 소설 <새로운 별장>의 엘레나로 이어진다. 가난의 고통을 호소하는 늙은 대장장이 부부에게 위로랍시고 전하는 말이,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힘들게 살지만, 저세상에서는 행복할 거예요"이다. 한때 가난을 겪었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고작 이렇다. 그들이 바라는 건 '저세상'에서의 안식이 아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올가가 자신도 농부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이면서도 그들을 안타까워하고 애처롭게 여긴다는 것이다. 마치 농부들과 자신은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그리고 혼자 기도하듯 읊조리면서 '정교도'를 콕 짚어 지칭하는데, 평등하게 안식을 가질 하느님의 세상조차 주류와 비주류는 나뉜다. 그들 자신이 소외된 존재임에도 말이다. 


모두 사람이 다 자신의 자리가 있고, 피상적인 모습만 보고 타인을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리고 좋은 옷을 걸치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엘라나의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생계조차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녀의 말이 받아들여질까?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그녀의 진정성과 간절함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엘레나를 보면서 '가난의 정도'에 대해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로 이어진다. <새로운 별장>에서 보여지듯 가난한 주민들에게 필요했던 건 다리가 아니라 그들을 존엄하게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마지막에 위치한 표제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발랄한 느낌의 제목과는 다르게 제법 묵직한 치정소설(?)이다. 울고 있는 안나를 위로하기 위해 다가간 구로프는 거울 속에 비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여자들은 남자의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이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평생 간절히 원하던 그런 사람으로 상대를 사랑했고, 나중에 자신들의 실수를 알아차리고도 사랑을 이어간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관계에서는 행복도, 사랑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과연 여자만 그럴까? 어쩌면 사랑이라는 속성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콩깍지 씌였다는말이 딱 맞는거지.) 



<검은 수사> <문학 교사>를 비롯한 실린 소설들은 체호프의 희곡 <벚나무 동산> <갈매기> <세 자매> 등을 떠올리게 하는데, 앞선 소설들이 그가 인생 후반에 쓴 희곡의 바탕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몇 편은 읽었던, 또 몇 편은 처음 읽었다. 아무튼, 역시 체호프 읽기는 늘 뿌듯함을 남긴다. 


이 판본이 처음인 독자라면 앞에 실린 아주 짧은 단편들을 꼭 읽으시라. 러시아 문학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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