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1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65.
"세상이 끝날 때, 내 마지막 숨결이 허공으로 흩어질 때, 그순간 당신과 함께 하기를,(...) 그러니 종말이 다가올 때 나를 기억해주길, 부디 잊지 말아주길, 단 한순간이라도 아프게 그리워해주길, 고운 그대, 낙원의이름을 가진 빛나는 내 사랑아"
('Nessun Sapra' 에서) 







일단, 책을 덮고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아... 잘 쓴다" 였다. 
한참 뜨거웠던 <저주 토끼>를 통해 대중에게 확실히 이름을 각인시킨 정보라 작가의 초기작 소설집이다.  


고대부터 미래까지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단편소설 열한 편이 실려있다. 작품들은 소설적 상상력에 때로는 음산하고 기괴하며 신비스러움까지 더해져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습하면서도 건조한 불가사의는 공포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전 작품이 고딕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싶다.  


ㅡ 


철없는 두 소년의 장난과 무자비했던 한 여행자로부터 비롯된 처절한 비극, 그리고 복수와 죄책감. 현대인의 극단적 외로움과 권태.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책임감과 회피 등. 


인간은 자극을 필요로 하고, 지루함과 권태를 견디지 못한다. 고통과 절망에 취약한 인간에게 평범하고 안락한 보통의 생활이 부숴질 수 있는 경우의 수에는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다.  


당장의 현실은 만족스럽지 않은 법이며, 적당한 경계와 거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감정이 됐든, 실재적인 그 무엇이든 간에 손에 닿을 수 없기에 더 그립고 아련한 것일테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가 서있는 곳이 마치 세상의 끝이라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인생에서 나의 심정을 알아주고 기댈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사람만 있다면 견딜만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네.   



실린 작품들의 특이점을 꼽자면 모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없다. 남자, 여자, 그, 그녀 등 3인칭으로 지칭되는데, 이들이 결국 대다수 보통의 우리의 얼굴을 하고 있기때문이 아닐런지.  


이 책에는 섣부른 용서나 구원, 뉘우침이나 정의 회복,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름다운 해후 따위는 없다. 신념과 명분을 내세운 구차한 변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타인의 죄책감을 악용하고,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던 독재자는 번성을 누리고, 고통 속에서 죽은 영혼은 여전히 그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탐욕과 쟁취를 위해서라면 어제의 연인에게 칼끝을 겨눌 수 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시민의 무력한 절망은 묻혀지며, 죽은 시신이라도 혹은 죽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갖겠다는 인간의 소유욕이 사랑으로 포장되는, 그래서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반복 지속되는,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어떤 하나를 꼽기 곤란한 정도로 실린 단편들 대부분이 인상적이다.
<나무>와 <완전한 행복>은 그 어떤 작품보다 참혹하다. 나는 어쩌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구현되는 결말이 아닌, <완전한 행복>에서의 결말에 더 후련함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마음 한구석에 악의를 감추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고, 자비와 용서의 허울에 분개하는 미력한 인간일 뿐이니. 




사족.
한국문학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없는 스타일이다. 고딕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렇고 그런 교훈적인 이야기, 그럼에도 해피엔딩이 식상한 독자라면, 추천한다.   



418.
이제 그의 세상에는 선도 자비도 용서도 없다. 그의 존재는 비로소 의미를 찾았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아름답고 무자비한 세상에 홀로 서서 그는 완전한 행복을 느꼈다.
('완전한 행복' 에서)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