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과거시제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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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형식으로 사랑, 언어, 고독, 입시, 현실의 모순, 인공 신체 등을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아홉 개의 중.단편이 실린 소설집인데, 각 작품마다 들었던 짧은 생각들이다. 







[수요곡선의 수호자]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가진 것도 모자라 해탈에 이르는 로봇 마사로. 수요곡선을 상승시키기 위한 로봇을 개발한다는 상상이 기발하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이미 과잉생산 및 공급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동화시스템으로 일자리는 현저히 줄어들어가고, 저가 소비가 늘면서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게 일상화 되어 세계 곳곳에 쓰레기산은 높아간다. 더하여 인공지능의 예술 창작까지 가능한 연구 개발을 서두르는데, 도대체 인간의 영역을 얼마나 좁히려 하는 건지. 앞으로 인간은 숨만 쉬고 살 작정인가. 



[치카타파의 열망으로]
소설은 22세기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읽다보면 코비드19 시국을 기점으로 급변한 사회상을 허구적으로 보여주면서 대감염병 시대에 폭발한 문제들이 과연 감염병만이 원인이었을지를 고찰한다. 


언어와 문자에서 격음이 사라지고 예사소리로만 이루어진 언어 체계로 바뀐 미래 시대. 거센소리가 사라진 언어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듯 하지만 시대의 정서를 발화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느껴진다. 문득 조만간 한글의 문자 체계에서 거센 소리, 된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넘어 모음이 아예 소멸하는 건 아닌지 갑자기 걱정이 된다. 



[미래과거시제]
작가의 우려(?)대로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다만 언어와 묶여 더 아름다운 사랑 소설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냥 나 혼자의 생각으로 이 소설 앞에 배치된 <치카타파의 열망으로>의 대학원생이 강은신은 아니었을까라는 재미진 상상을 해봤다. 



[접히는 신들]
종이접기 천재 은경의 말을 듣다보면 영화 <트랜스포머>가 생각난다. 따지고 보면 자동차에서 스탠드형 로봇으로 젼환하는 그들의 전환 방식이 종이접기와 뭣이 다른가 싶고. 그런데 이 소설에서 2,3차원의 물질을 접는 것뿐 아니라 공간을 접어 활용한다는 발상, 그리고 무기, 심지어 사람까지 접어서 수송할 수 있으며, 물건의 용도 자체가 새롭게 형성된다는 상상은 얼마나 기발한지. 물론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공간이 접어지는 시대에는 정말 영혼도 접어서 수송이 가능할까. 



[인류의 대변자]
하필 소설의 그 지점에서 카모마일차를 입에 물고 있었다니. 정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으로 입 안에 있던 물을 뿜어내고 사레가 들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한참을 웃었다는. 아무렴, 그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지. 외계인도 예외없이, 그날 하루 만큼은 우주와 지구의 평화도 일단 보류. 뒤에 실린 작가 노트를 보면 나는 <인류 대변자>를 작가가 의도했던 바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것 같다. 



[임시 조종사]
판소리 버전 SF소설. 판소리 장단에 맞춰진 서술 방식이나 근대 이전의 옛말을 사용한 것도 인상적이지만 배경 역시 옛 시대부터 미래까지 아우르고 있어 머릿속에서 소설이 영화 필름처럼 그려지며 읽는 맛이 있다.  


나는 생뚱맞게 영화 <대호>가 생각났다. 그곳에 로봇만 드문드문 보인다면, 하임의 출정 장면은 이와같지 않을까..., 더하여 내가 경험할 수 없었던 한 시대였구나, 라는 생각. 그리고 비장한 와중에 툭툭 튀어나오는 유머! 



[홈, 어웨이] 
일 년에 몇 번쯤 야구 직관을 하는 나는 가끔 3루 베이스 관중석에서 관람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라는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아직까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원정팀 응원. 올해는 꼭 한 번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다가도 어우... 생각만 해도 너무 외로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덧, 이 소설은 야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절반의 존재]
인간은 이미 실제로 크고 작게 인공물에 의지하고 있다. 작게는 보청기부터 골절, 인공 장기 등 치료와 미용을 위해 대체제를 사용한다. 심지어 동물 장기 이식까지 연구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점을 소재로 삼아 미래를 그린 여러 소설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기준 혹은 경계에 대한 얘기는 적지 않다. 이 단편소설 외에도 다른 책들을 읽다가 든 생각은 인종, 성, 성소수성 들을 대하는 우리의 사고 방식과 큰 차이가 없다는 데에 미쳤다. 지하임이 인간이냐 아니냐가 왜 중요할까. 누군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본인을 제외한 타인들에게 왜 중요한 잣대가 되어야 할까. 


다와도 요코의 소설들에서 보이는 인물들처럼 스스로 만들어가는 정체성이야말로 큰 힘을 발휘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알람이 울리면]
J 여사가 예전에 하신 말씀이 있다. 오래 사는 게 아무리 좋아도 한 시절을 함께 살아온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혼자 남아 살고 싶지는 않다고.  


시간이라는 영역에서 빠져나와 혼자서 '멈춤' 상태로 있다는 것, 과연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아픔도 박제될 수 있을까. 문득 예브게니 보돌라스킨의 소설 <비행사>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50년만에 냉동보존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살아있음에 행복했던가. 


ㅡ 


이 책을 읽다보면 참 묘해진다. 분명 실린 소설들이 독립적인 작품들인데,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차원을 옮겨가며 작품이 실린 순서대로 이어지면서 한편으로는 단정할 수 없는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나만 그런지도 모르겠다만). 개인적으로 연작 아닌 연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편 소설집이지만 실린 순서대로 읽기를 권하며, 완독을 하면 표지의 그림이 아주 잘 납득이 된다. 매 작품마다 <작가 노트>가 실려있는데, 미니 북토크같은 느낌이 있어 이런 부분도 소소한 재미로 다가온다. 무거울 수 있는 소재와 주제들인데, 읽는데 너무 무겁지 않아서 좋았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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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자 시리즈 세트 - 전3권 - 수확자 / 선더헤드 / 종소리 수확자 시리즈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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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800여쪽에 달하는 수확자 시리즈를 마무리한다. 
어지간한 단행본 다섯 권 분량에 해당하는 양이다. 그런데 이 시리즈를 읽은 시간을 따져보면 만 나흘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가독성이나 흥미면에서 탁월하다. 


1권이라고 할 수 있는 <수확자>를 끝내고 <선더헤드>를 펼칠 때만 해도 각종 영웅물처럼 새로운 악당이 탄생하고 여러 측면에서 로언과 시트라가 연대하며 악의 무리 도장깨기를 하겠거니 했는데, 이 얼마나 단순 무식한 추측이었는지! 본격적인 스토리는 두번째 이야기 <선더헤드>에서부터 시작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생각보다 주도면밀하다. 


보통 시리즈물이 대체로 처음부터 읽어야 재미있기는 하지만, 때때로 순서 없이 읽어도 무방한 경우가 있으나 이 시리즈는 절대로 처음부터 읽어야 한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정황과 사건을 이해하는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선더헤드의 세계관과 사망시대의 세계관을 다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확자>부터 읽어야함을 재차 강조하는 바이다.  


마법이라는 소재를 뺀 미래 버전의 <나니아 연대기> <호빗> <해리 포터>의 재미있는 점만 모아놨다고 하면 짐작이 되려나. 
아무튼 적당히 묵직하면서 심하게 재미있다. 


선더헤드의 세계관, 개인적으로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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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은 안전을 배달하지 않는다 - 배달 사고로 읽는 한국형 플랫폼노동
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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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사회비평서를 한 권 읽은 뒤 배달플랫폼에 관련한 책을 읽어보고 싶던 차에 이 책이 출간해 읽게 되었다. 일단 핸드폰에 쇼핑앱과 배달앱이 전혀 없다보니 우리나라 배달산업의 형태부터 이해해야 했다. 물론 앱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를 아는 사람도 많을 것 같지는 않지만(그나저나 저자분이 이해하기 쉽게 찰떡으로 써주셨다). 그리고 처음 알았다, 배달앱을 통해 소비자가 배달노동자의 실시간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책에서 언급한 자료들을 살펴보면 대한민국 산업재해 신청 1위, 2위, 7위, 9위가 모두 유통, 배달업이다. 재해가 중공업 현장에서 플랫폼, 즉 디지털 일자리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2022년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노동자는 77명, 그러나 이들 사고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재해조사통계에서 77명의 죽음은 해당하지 않았다. 도로는 배달노동자가 일하는 일터다. 그러나 사업장 외 교통사고는 경찰청이 조사하고 노동부는 관여하지 않으며 거기다 대다수의 배달노동자는 1인 사업자로서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는다. 노동부는 산재보험으로 보상은 하지만 사고 예방을 위한 원인 분석이나 대책을 내놓지는 않는다.  

라이더의 생계와 기업의 이윤, 소비자의 편리가 복잡하게 엮여있는 구조 속에서 사고가 발생한다. 배달라이더의 사고 피해는 배달노동자로 끝나지 않는다. 배달노동자 사고는 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교통사고이자 업무를 하다 발생한 산재사고다. 업체 사장뿐 아니라 도로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시민들이 살아가는 마을과 많은 사람이 공적으로 사용하는 도로 위에 배달플랫폼기업이 거대한 공장을 지어버렸다.' 라는 문장이 현재의 배달플랫폼 시장을 가장 적확하게 정의한 건 아닐까싶다. 

배달플랫폼기업은 산재를 무수히 유발하면서도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여러 책임에서 자유롭고, 주기적인 물리적 비용 없이도 고객 유치가 가능하며, 얼마든지 기본 시급 없는 대체 인력을 구할 수 있다. 심지어 영업과 사후 관리에 필요한 인프라 비용조차 전혀 지불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공공의 장소와 영역을 사유화하면서 기업 소득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사고 위험이 높은 배달산업을 창업하는 데에 규제가 전무해 배달앱사업자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이에 따른 그들 간의 무분별하고 과도한 경쟁은 라이더들의 생존과 직결된다. 규제 없는 자유업이다보니 국가도 배달대행사업에 대한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이에 따른 통계조차 신뢰성이 떨어진다. 

배달파트너 앱에 가입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허점 투성이다. 구멍 숭숭 뚫린 허점은 배달료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에 관련한 부분을 읽는 동안 머리가 지끈거렸다. 배달료 책정 및 분배 체계와 거리 측정, 배차 등이 배달노동자들에게 일방적 횡포를 부리는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지역별, 동네배달대행사별 등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핸드폰 화면 안에 예쁘고 단정하게 꾸며진 배달앱과는 다르게 현실 속 배달노동 현장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상태다. 

ㅡ 

도로를 장악한 배달 오토바이의 난폭한 주행을 손가락질 하면서, 집에서 배달을 기다릴 때에는 조금만 늦어도 불만을 쏟아낸다. 업주에게는 최고의 효율성을 장착한 라이더가 도로 위의 시민에게는 최악의 라이더이지만 한편으로 배달을 기다리는 시민에게는 신속한 라이더로 칭찬받는, 그리고 배달 라이더를 1인 사업체로 만들어놓고, 개인 고용인처럼 부리려드는, 이 복잡한 모순적 굴레를 쥐고 있는 헤게모니는 과연 무엇(누구)일까.  

저자는 배달노동자 산재사고 원인을 위험한 작업장, 위험한 작업도구, 과속을 유도하는 임금체계, 직업교육의 부재와 미숙련 노동, 불충분한 법체계 등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하면서, 수많은 실제 사례들과 근거를 통해 배달노동자들의 노동안전 문제, 배달산업의 가혹한 구조, 배달앱들의 알고리즘 등을 다루고, 가장 시급한 안전교육을 비롯해 노동조합과 그에 관련한 법 개정의 필요성 및 대안을 제시한다. 

읽다보니 플랫폼노동자의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 보였다. 무엇보다 이 산업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다가왔다. 노동 현장도, 책임 소재도 불분명한 이 유령같은 산업시스템에서 배달노동자뿐 아니라 가게 업주, 소비자까지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달대행앱 플랫폼기업들이 주장하는 혁신의 바탕에는 1차 산업에 가까운 육체 노동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기업은 교묘하게 원시적 축적 과정을 담고 있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저자는 노동조합, 시민, 전문가 등 대부분이 지지하는 제도 개선이 어려운 이유는 자동차 산업 중심으로 이뤄진 교통산업 발달에 의해 이륜차의 특성을 이해하는 문화나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다고 본다. 배달시장이 확대된 시점에 앞서 얘기했듯 사회의 공공 인프라를 사업장으로 활용하는 1인 사업자이자 노동자들의 주요 작업 도구인 이륜차에 대한 철처한 관리가 시급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마지막으로 저자 박정훈 님이 하신 말씀 중 하나를 짚으려 한다. 라이더를 향해 인신 공격과 비하 발언이 담긴 폭언을 한 손님에게, '손님은 공인이 아니며, 개인일 뿐입니다'라고 말씀했다(p201). 그러나 설령 공인이라고 해도, 그러한 발언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린다. 무엇보다 배달대행업에 종사하는 라이더가 노동자라는 인식부터 전제되어야 하고, 그들에 대한 편견도 같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사족.
사실 평소 책을 읽는 속도를 감안하면 이 책은 적잖이 오래 붙잡고 있는 셈이었다. 실제 사례들이 언급되다보니 오토바이 사고가 머릿속에 그려져서 책장을 계속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라이더에게 퍼붓는 폭언은 가히 재난 수준이다).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은 이유에는 사고 그 자체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죽을 수도 있는 사고 순간에 라이더가 걱정하는 건 제 목숨이 아니라 배달통 안의 손상된 음식과 배상해줘야 하는 여러 제반 비용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어느 한 사람이 아닌 대부분의 배달노동자들이 반복적으로 겪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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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수확자 시리즈 3
닐 셔스터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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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듀라가 가라앉았다. 대수확자들은 사라졌고, 선더헤드는 침묵했으며, 모든 사람들은 불미자로 전락했다. 대수확자들이 없으니 수확령끼리 사실상 전쟁 중이다.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져갔다. 인류는 어디를 향해 가게 될까. 


수확령의 설립자들이 수확자라는 개념 전체가 실패할 때에 대비하여 사회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수확령은 2백 년이 넘도록 완벽하게 존재해왔기에 누구도 이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 구전 설화 같았던 안전 장치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 그것이 제발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3권에 이르러 소설은 현대 사회의 구도에 더 가까워진다. 선과 악, 방관자 혹은 방임자, 그리고 저항자. 누군가는 학살에 가까운 수확 할당량 폐지를 반기고, 누군가는 반대하고 저항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숨죽여 지켜본다.  


스스로를 지배 수확자라고 칭하며 자신과 관계를 맺지 않는 지역의 모든 외교와 자원, 물류 수송 및 교류를 단절 고립시키는 고더드. 종교, 인종, 민족, 신체적 특징 등 특정 유형의 집단을 묶어 인류를 최선의 방향으로 이끈다는 명분으로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그의 모습은 지난 우리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현재에서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수확령의 원칙과 규칙 따위는 무시하고, 수확령의 계명을 바꿀 수 없다면 계명에 쓰인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바꾸면 그만이라는 고더드의 사고방식은 현대 정치 사회에서 아주 익숙하게 보아온 모습이다.  



독재 권력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고더드는 '공포'가 대중을 장악하는데 가장 큰 무기라고 믿는 부류다. 대중의 공포심을 이용해 스로를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격상시킨다고 믿지만, 실상은 자기 안의 아집에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이다.  


권력을 향한 욕망이 어디 수확자뿐이랴. 청장의 죽음이 확실해지자 그 한정된 공간에서조차 일인자가 되고 싶은 시코라. 치찰음파 사제, 멘도사 역시 마찬가지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지향하고, 언어를 거부하며 묵언을 통한 신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지만 음파교의 집단 행위를 수단 삼아 고위 사제가 될 욕망의 광기에 사로잡혀 날뛰는 종교인들도 자신들의 특권을 지속시키기 위해 학살과 만행을 자행한 이들처럼 권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고더드가 로언을 공개 처형하기 위해 스타디움까지 호송하는 장면은 고대 시대를 연상케 한다. 이처럼 이 시리즈는 곳곳에서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인류는 어느 부분에서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으며 동시에 발전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과연 발전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면서, 동시에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워야할 것이 무언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ㅡ 


인간의 수명이 영생에 가까워지고, 육체적 고통을 저감할 수 있고, 경제적 고난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고독과 욕망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존재다.  


효율과 연민, 이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쪽에 추의 무게를 더할까. 이분법적 성性에 대한 사회 편견에 의한 장벽, 문제 해결에 있어 가장 이롭다고 여기는 '합리'의 기준. 언제나 양면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자질이야말로 균형감이 아닐런지.  


선더헤드는 침묵을 선택하고 세상 사람들을 불미자로 만들어 소통을 거부하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모습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자신이 만약 수확자 시험에서 탈락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패러데이와 함께 벙커 문을 열었을 거라고 말하는 무니라에게 패러데이는 그녀의 역할은 수확자가 아니라 수확령을 구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족 구성원으로서 개개인이 갖는 역할에 대해 생각해본다.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그런 역할 말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콕 짚어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수많은 역할들에 대해.


이 길고 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던 부분은, 수확령 설립 당시의 수확자들은 이 죽음의 결정권자로서의 재임 기간이 짧기를, 구시대적 유물로 남기를, 바랐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추구하고 열망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것이 수단인지, 목적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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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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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난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는 말아요, 절대로, 절대로. 



느닷없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다섯 명의 남자가 각자 있던 장소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사방에서 달려왔다. 기구의 바구니에 타고 있던 소년의 할아버지를 포함해 여섯 명의 남자들이 기구에 달린 밧줄에 매달렸다. 줄을 끝까지 잡고 있다가 100미터 상공까지 떠오른 존 로건이 추락했다. 그가 추락한 시간은 불과 30초.  





 


서로 처음 본 그들에게 소환된 덕목은 협력. 모두 함께 줄을 잡은 채 버티고 있었다면, 누군가 처음으로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나머지 사람들도 계속 붙들고 있었을지 모른다.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사람은 누구인가?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것이 도덕적 책임을 물을 만한 요인이 될 수 있을까? 밧줄을 잡았다가 놓았던 그들 모두는 로건의 죽음에 간접적 가해자일까, 혹은 로건과 함께 죽기를 거부한 것이 잘못인가? 어쨌든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텐데, 어차피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 맹점이다. 


기구의 줄을 잡는 것도, 놓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이타심과 이기심은 늘 공존한다. 남들에게 무엇을 주고 자신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 어디까지가 선의를 지키는 경계선일까.  


ㅡ 


조는 제일 먼저 밧줄을 놓은 사람이 자신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구니에 타고 있던 소년은 기구가 20킬로미터를 날아가 무사히 착륙했기 때문에 전혀 다친 곳이 없었다. 모두가 밧줄을 잡지 않았아도 소년은 살았다는 것이다. 결국 로건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됐고, 30분간 밧줄을 잡고 있다가 결국에 놓아버려 로건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생각하는 조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밧줄을 놓지 않았다면 로건과 함께 추락했을 수도 있다. 조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앞서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정작 이 소설에서 집중하는 것은 인간의 윤리가 아니다. 문제의 시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단한다. 드클레랑보 증후군, 망상에 따른 믿음으로 신에 의한 운명적 사랑을 믿는 패리의 등장.   



소설이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나는 패리를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워졌다. 아무리 되짚어봐도 패리가 이렇게까지 집착하고 의미를 부여할 만한 빌미를 조가 제공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거의 매일 조의 집 앞에 찾아와 길 건너편에서 두어 시간 자리를 지키고, 일주일에 서너통씩 편지를 보낸다. 그럼에도 클래리사는 패리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이쯤되면 독자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사이사이 클래리사의 지적은 독자로 하여금 어떤 짐작을 불러낸다. 더하여 경찰조차 조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조에게만 보이고, 조에게만 들리는 패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일상의 작은 균열은 평소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적, 혹은 관계가 불안해지면 별 거 아니던 작은 균열은 어느새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슬그머니 커지게 된다. 클래리사가 조의 불만과 두려움에 찬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그가 혹시 미친 건 아닌지 의심하고,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웠던 조가 느닷없이 학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 역시 이와 같은 원인에 있을 터다.   


패리가 종교와 신을 통해 조에게 집착한다면, 조는 2년 전 한계를 느껴 중단한 박사 과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학계에 집착한다. 클래리사는 기구 사건에서 밧줄을 놓았다는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조가 패리를 이용한 것 이라고 짐작한다. 이 모든 과정은 패리가 유도한 것이 아닌 조가 의도한 바대로 이끌려 왔다는 것이다. 클래리사의 지적이 흥미로운 이유는 작가 이언 매큐언 역시 '피리 부는 아저씨'가 되어 스토리와 독자를 이끌고, 독자는 홀리듯 그의 뒤를 따른다는 점이다. 소설의 결말이 반전인지 아닌지는 독자 각각의 판단에 맡긴다.  


소설에서는 종교와 과학, 사랑과 집착, 오해와 사실, 망상과 진실, 관계와 고립 등 우리 주변에서 이분법적으로 맞닥뜨리는 갈등에 대해 등장 인물들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클래리사가 조를 신뢰했다면, 조가 패리에게 조금만 호의를 베풀었다면, 조가 이성적으로 행동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원제는 ENDURING LOVE. 
책의 마지막에 실린 <부록>을 읽으면, 원제가 무서워진다.
반전 아닌 반전이 던진 이언 매큐언의 묵직한 메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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