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시간이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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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평점 :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는 저녁무렵이었다. 고양이 한마리가 몸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내면서 우리집 계단을 어슬렁 어슬렁 걸어올라오는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소나기를 피해 처마밑으로 뛰어드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점퍼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아유, 갑자기 왠 비야." 하면서 혼잣말을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 고양이가 정말로 젊은 숫놈이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한창 때의 암컷일수도 있고, 다 늙어빠진 할아버지 고양이일수도 있겠지만, 평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고양이의 모습을 시간을 들여 관찰하면서, 나는 그때 항상 주위에 있으면서도 의외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세상을 새삼스레 발견할수 있었다. 발견이라기 보다는 상봉에 가깝다고나 할까. 거기에는 그리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나"가 아닌 내 주위의 것들에 눈을 돌리자 새로운 장면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원래는 아주 익숙한 것들이지만, 살아가면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많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것들이 없어진 지 이미 오래라는 것을 깨닫는다. 예를 들자면, 참새만큼이나 흔하게 볼 수 있던 제비가 그렇고 (그러고보니 참새도 전혀 안보인다.) 보호동물로 지정되었다는 고추잠자리가 그렇다. 이들이 자고 일어나니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닐것이다. 곰곰히 돌이켜보면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리씩 한마리씩. 새로운 건물이 하나 들어서고 도로가 하나 생길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왜 모르고 있었을까. 천천히 주위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을 만큼 바쁘게 살아온 까닭일까, 아니면 주위의 모든것들이 언제나 그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인걸까.
공들여 관찰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에게 가만히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물기를 털며 계단을 서서히 올라오는 고양이처럼. 정신없이 살아가고있는 듯한 우리가 사실은 기다림을 기다리고, 그 기다림을 기다리고, 다시 그 기다림을 기다리며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을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서서히 잃어가는 것들, 잊고 살아온 것들, 그리고 그리운 순간들을 스위스 작가인 페터 빅셀은 열차 플랫폼에 홀로 앉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냥 있기, 그냥 존재하기, 그냥 살아 있기. 그리고 주위의 주위가 되는 느림의 미학.